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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가까이 되어 보이는 금강송이 참나무류와 생존 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참나무류를 솎아내고, 과밀한 금강송도 듬성듬성 배어내는 간벌작업이 한창이었다. 그로인해 길이 엉망진창이었다. 5년전 여름에 자동차를 타고 이 길을 넘었었는데 차량통제후 신작로가 많이 패이고 비로 인해 구렁텅이로 변한 곳도 많았다. 옆으로 계곡물이 큰 포말을 일으키며 넘쳐흘렀다. 질척이는 길을 따라 떼지어 오르다가, 어느 때는 혼자되기도 하는 걷기가 계속되었다. 오늘같은 날씨에 이 길을 넘는 사람들은 오직 우리팀뿐이였다.
구름은 더욱 짙어지고, 비는 더욱 거세졌다. 길이 어둑어둑했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빗소리에 젖어들었다. 좌우의 산등성이도 비와 안개로 도통 분간할 수 없고, 단지 산줄기만이 희미하게 보일뿐이었다.
나는 그해 장마지던 여름을 생각하고 있었다.
1986년 9월 나는 지쳐있었다. 하루에도 여러번씩 시위가 계속되었다. 밤에도 서울시내 각지를 돌며 기습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정권의 탄압의 수위는 높아지고 구속자는 넘쳐났다. 탄압이 강하면 반대편은 당연히 움츠려 드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러나 이미 조직화된 학생운동은 그렇지 않았다. 나라는 온통 아시안게임으로 축제의 도가니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시위를 범추지 않았다. 사당동 강제철거반대시위를 나갔다가 나는 잡혔다. 단순가담자였지만 방어를 포기했다. 이미 수많은 구류와 훈방의 반복으로 보아 이번에는 결코 빠져나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길음동 자취집에서는 당시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막스, 엥겔스, 레닌의 저서를 번역한 복사용지가 큰 가방 하나 가득 압수되었다. 목록만 30여가지에 이르렀는데 제목이 영어로 되어 있는 것도 있고, 당시에는 생소한 단어이다 보니 검사는 별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레닌의 논문중 ‘좌익 소아병’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을 나는 천연덕스럽게 좌익을 하는 사람들이 걸린 어린아이병 같은 것입니다 했더니 검사를 고개를 끄덕끄덕거렸고 다른 것도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당시 젊던 그 검사가 이명박 정부에서 검찰총장 물망에 올랐고 검찰총장이 문제로 물러났을 때, 대행을 잠깐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총장에 임명되지 못했다. 그는 호남출신이었다. 아시안게임이 끝나는 날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10월 4일이었다. 1주일 넘는 조사과정이 끝난후 감옥으로 가는 길에 경찰관에게 물은 첫마디는 아시안게임에서 몇등을 했냐는 것이었다. 금메달을 93개인가 땄지만 한 개차이로 2등을 했다고 했다. 그 와중에도 안타까움에 속이 상했다.
영등포 구치소는 양심수로 넘쳐나 독방도 없었다. 구로공단과 가까워 노동운동을 하다 들어온 사람도 많았다. 온몸이 발가벗겨지고 가장 은밀한 곳까지 수색을 받은 후에 수의가 주어지고 밤 12쯤 14명이 정원인 다범전과자를 수용한 방에 던져졌다. 배속된 방의 철문이 열리고 ‘꽝’ 하고 닫혔다. 교도관이 철문 열쇠구멍에 차고 다니는 T자형 손잡이가 달린 열쇠를 집어 넣에 돌리자 ‘덜컥’ 소리가 나며 잠겼다.
30촉 전등이 희미하게 비치는 방에 주로 절도, 강도 전과인 사람들 16명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정원초과로 몇 명은 어깨를 세우고 칼잠을 자고 있었다. 내 공간은 없었다. 잠깐 사이,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난감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거리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느 한 사람이 공간을 확보하더니 자신의 옆으로 오라고 나에게 손짓했다. 순간 두려웠다. 감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들었고 오해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오랜기간의 조사로 인해 심신이 지쳐있었다. 모포가 깔린 마루바닥에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잠깐동안의 행복한 감옥생활이 이어졌다. 수번씩의 전과를 가진 사람들중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공사장의 쇠떵이를 훔치다 들어온 사람, 남의 집 담을 넘다 들어온 사람, 싸우다 들어온 사람, 어느 폭력조직의 꼬붕쯤 하는 사람, 사기범으로 들어온 일본어에 능통했던 지식인 할아버지 등 별의별 사람들이 한방에 모여 방장부터 완벽한 서열이 형성되어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오직 양심수라고 이름붙여진 나만 예외 추급을 받았다. 물론 그들이 만들어낸 위계질서에 나를 강제로 편입시키고자 했다면 인정할 나도 아니였다. 잡범들은 양심수에 대체로 관대했다. 양심수들은 나름대로 징역에서의 수감자들의 권리와 인권을 지키기 위해 싸우며 때로는 변호사도 없이 재판하는 사람들을 위해 여러 가지 법적 도움을 주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런 이유로 양심수들을 건드리면 안되는 불문율이 여전히 지켜지고 있었고 외경심도 있었다.
감옥에서 양심수는 다 별도였다. 양심수임을 알 수 있도록 명찰 색깔부터 달랐다. 30분씩 주어지는 운동시간, 1주일에 한번씩 주어지는 목욕시간도 홀로 주어졌다. 일종의 특권이었다. 통방이란 남의 방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말하는데, 감옥에서는 절대 금기시 되었지만 양심수들은 제멋대로 운동시간을 늘리고 이방 저방 다른 사건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찾아 다녔다. 교도관들은 제지를 하되 말릴 수 없어 쩔쩔매기만 했다. 건드리면 어떤 방식으로 보복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문제를 더 크게 일으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였다. 밥은 4시 30분에 먹고 5시부터는 모든 방문이 잠겨지고 취침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6시부터 감방안의 집회를 시작하였다. 여러 사동과 방에 흩어져 있던 양심수들이 한사람의 사회로 돌아가면서 큰 소리로 연설도 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구호도 외쳤다. 감옥이 오히려 해방구였다. 잡범들은 그 소리를 시끄럽다고 소리치는 사람도 간혹 있었지만, 지겨운 시간을 깨야 하는 사람들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귀구경은 없었을 것이다. 징역안 사람들의 싸움의 대상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시간을 깬다라고 표현했는데 시간을 깨기 위해 별 짓을 다 했다. 일부러 싸우기도 했고, 자해를 하기도 했다.
재판을 받으러 가는 행위를 출정이라고 했다. 법정에 간다는 뜻을 줄여서 한 말인데 재판을 받으러 가는 사람들은 출전이나 어디를 정벌하는 사람처럼 비장했다. 교도관은 수인번호를 외치며 출정을 외친다. 재판에 참여할 사람들을 포승줄로 묶어 버스에 태워 검찰청에 있는 간이 감방에서 재판을 기다린다. 재판을 받고 돌아오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희비가 엇갈린다. 무죄가 없던 시절 집행유예가 최고의 선물이었다. 집행유예를 받은 사람은 밤 11시가 넘어 방을 나서는데 남겨진 사람들은 그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일부는 눈물을 글썽였다. 가장 두려운 징벌은 생각보다 더 많은 형량을 선고 받는 것이 아니라 누범자들중 보호감호처분이 내려지는 것이였다. 보호감호소는 청송에 있었다. 보호감호는 7년과 10년으로 되어 있고 연장도 가능한 조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보호감호처분이 내려지면 형기를 마치고 보호감호처분만큼 징역을 더 살아야했다. 동일전화 3범이상, 2범 전과자중 2개월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범죄를 저지를 자 등 기준이 있었지만 중범죄의 경우는 기준도 없었다. 판사의 입이 곧 법이였다. 보호감호소로 가는 사람들은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도 눈물을 뚝뚝 흘렸다. 최소 10년은 징역에서 썩어야 했기 때문이다. 수감자들은 청송으로 이감가는 열차에서 ‘여기는 물 맑고 아름다운 청송, 여기는 청송!’ 이렇게 방송한다고 흉내내며 웃기도 했다.
교도관들은 수시로 순찰하며 방안을 기웃거렸다. 원래 미결수 방은 하루종일 통제가 가해졌다. 몇 줄로 정자세를 하고 앉아 있게 하거나 해서 수감자들을 힘들게 했다. 그러나 그런 통제를 따를 나가 아니였다. 그들과 상관없이 방장과 장기를 두거나 비스듬히 누워 책을 보며 하루를 보냈다. 수세식 변소가 없던 시절 방 한쪽켠에 어떠한 막이도 없이 설치된 재래식 화장실 냄새만이 나를 괴롭힐 뿐이였다.
꿈같은 시절은 건대사건으로 끝이났다. 건대에서 수천명의 시위대가 연행되었다는 소식이 감방으로 전해졌다. 구치소에서는 이들을 분리수용할 특별 사동이 지어졌다. 그들이 들어오기전 해방구가 된 감방안의 양심수부터 조치를 취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날, 수십명이 교도관과 교도대들이 내 방으로 들이 닥쳤다. 그러나 서슬퍼런 저항에 감히 문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때, 미리 이야기 되었는 지 수감자들이 나를 덮쳤다. 교도관들에 의해 묶이고 짓이겨져 보안과 지하실 먹방에 짐짝 쌓이듯이 던져졌다. 보안과 고문실에서는 먼저 잡혀온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새우꺾기로 거꾸로 활처럼 휜 몸을 자근자근 밟고 구둣발로 물질렀다. 죽을 듯이 숨을 헐떡거리면 포승줄을 조금 느슨하게 해, 극단적인 상황을 피해갔다. 옆방에는 팔과 다리를 묶어 매달고 돌리는 소위, ‘비행기 태우기’ 고문으로 혼절자가 속출했다.
지하 먹방은 캄캄하고 어디에서도 빛이 들지 않아 붙여진 이름이다. 너무 괴로워 두려워 할 틈이 없었다. 저녁이 되었다. 온몸을 묶어 새우처럼 휜 몸을 앞으로 엎드리게 하더니 코 밑에 밥그릇을 놓고 먹으라고 강요했다. 소위 개밥이었다. 어떻게 먹을 수 있겠는가? 몸이 비틀어져 죽을지경인데 말이다. 몇 번의 조롱후에 혓바닥으로 밥통을 핥는 흉내라도 내지 않으면 또 무자비한 폭력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날 묶인 몸을 조금 풀어주면서 주어진 것이 볼펜과 종이장이었다. 반성문을 쓰라는 것이었다. 쓰면 독방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고문소리로 요란한 먹방에서 며칠을 견디어 냈다. 자신들이 무언가 써 온 것에 거의 강제로 지장을 찍게 했다. 너무 힘겨워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그리고 0.7평 독방으로 올라왔다. 포승을 여전히 풀어주지 않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또 며칠이 지나갔다. 가래에 핏기가 비치기 시작했다. 양볼에는 구둣자국이 선명했고, 가슴도 여러번 맞아 통증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시간이 갈수록 핏기가 짙어지더니 선명한 객혈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묶인 몸을 풀어주지 않았다. 오류동에 있는 의사는 대충 진찰을 하더니 돌아갔다. 다음날 결핵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전염성이 있는 결핵환자는 격리수용된다. 조금 환경이 나은 독방으로 옮겨진 후, 객혈이 더 심해 어느 날은 거의 한탕기씩 받아냈다. 약이 투여되었다. 보름만에 객혈이 잡혔다. 그리고 다시 환자수용용 독방에서 겨우 일상을 되찾았다. 겨울은 추웠다. 다른 사람들의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김용이 쓴 무협지가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1987년 1월이 지나 재판이 시작될 무렵 박종철 죽음이 풍문으로 알려졌고, 담당교도관이 확인해 주었다. 나는 모포에 얼굴을 처박고 울었다. 그리고 나도 병으로 죽든, 싸우다 죽든 죽을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 때 나는 겨우 막 23살이 되어 있었지만 만 21세에 불과했다.
재판장은 구호를 외치며 소란을 피우는 우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2월 4일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2.7일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대회가 열렸다. 4. 13일 전두환씨는 호헌을 발표하고 그해 6월 10 호헌반대, 직선제 개헌, 독재타도의 범국민운동 시위가 시작되었다.
그 뜨거웠던 여름과 겨울, 운동과 조직이란 이름으로 집도 절도 없이 동가식 서가숙 하며 부천 인천지역을 맴돌았다. 88년, 올림픽이 열리던 해 6월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낙향했지만 나는 다시 쓰러졌다. 가슴앓이의 재발이었다. 몸무게가 53kg까지 줄었고 모든 기력을 상실했다. 수주동안 입원치료를 받고 퇴원하여 고향 사랑방에서 죽음과 같은 여름 장마를 보냈다.
그 추억을 쓴 것이 위의 내 시이다.
첫댓글 그동안 눈으로만 읽다가 댓글을 쓰기 위해 카페 가입을 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나가는 건 죄를 짓는 것 같아서...
죽음과 같은 고통 잘 견뎌내고 오늘 이렇게 귀한 이야기 들려주어 참 고맙습니다.
불의 시대를 온몸으로 견뎌낸 그대가 있어 그나마 지금의 한국도 있겠죠.
고맙습니다
살아남았음을 축하하며....대단한 기억력과 자료보존입니다. 그때 그당시 난 뭘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