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날씨가 무덥다.
컴퓨터에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다가 인터넷에 들르니, 여러가지 문제연구소 소장 김정운 교수가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글를 썻다. 상담에서도 교육분석을 하면 질투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흥미를 가지고 읽어보았다. 그의 말대로 질투는 카인시절부터 인간에게 뗄레야 뗄수 없는 감정이다. 하수를 보면서 우월감을, 상수를 보면서 배아픔을 느끼는 심정 말이다.
질투는 원래 에덴동산에서 이브가 하나님의 지위를 부러워하면서 선악과를 따먹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린 아들이 아버지를 제치고 집안의 왕이 되고픈 욕망에서 대대손손 되풀이된다. 오죽했으면 십계명중 제 9 계명에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했을까? 선악과의 독은 깊고 끈질기다.
질투가 죽을 때까지 가는 사람은 어릴 때 시작된 홍역을 죽을 때까지 앓는 사람과 비슷하다.
졸업해야 할 것을 졸업못하고 있는데, 문제는 상담해보면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외로 질투는 통증과 기분 불안정, 그리고 삶을 얼룩지게하는 문제점을 내뿜는다. 아무리 탈취제(예의와 고운 말씨)로 숨겨도 그 특유의 노린내는 숨길 수 없다. 성경에 의하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질투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지체론적 사고로 극복될 수 있다.
사람을 볼 때 내 아래냐 내 위냐 하는 잣대가 아니라 우리는 어떤 접점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유기체론적 사고방식을 가질 때 감소되거나 사라진다. 우리 모두 자동차 엔진 박스속에 있다면 엔진을 가동시키는 부품이 아닐까? 그가 아무리 작아도 없으면 엔진이 멈추고, 그가 아무리 커도 다른 부품이 없으면 고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고 서로 존중하고 필요하게 여기고 으스대거나 초라해하지 않을 때 질투는 극복된다.
따라서 서열구조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질투는 불처럼 촉진될 수 있고, 지체론적 구조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질투는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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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나의 힘
김정운 명지대 교수,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남자의 질투가 더 무섭다고들 한다. 그렇다. 질투는 유치하고 비겁한 인간의 특징이 아니다. 인간문명의 동력이다. 성서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질투와 문명의 상관관계에 관한 심리학적 알레고리다. 최초의 인간 아담의 맏아들인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다. 신이 동생의 제사만 받자, 카인은 질투한 나머지 동생을 뒤에서 때려 죽인 것이다. 흥미롭게도 신은 카인을 벌하지 않는다. 오히려 특별한 상징을 부여하여, 다른 사람들이 카인을 죽일 수 없게 만든다. ‘카인의 표지’이다. 카인은 신이 만든 에덴동산을 떠나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다. 인간문명은 질투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결국 질투를 뜻하는 카인의
표지는 인류가 지속되는 한 영원히 떼어낼 수 없는 인간심리의 본질인 것이다.
현대 심리학은 카인의 표지가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1만2000명을 대상으로 돈과 행복의 관계를 연구한 영국의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보이스는 <심리과학>(Psychological Science)에 실린 최근 논문에서 수입이 많다고 무조건 행복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보이스가 밝혀낸 재미난 사실은 사람들이 타인의 수입과 자신의 수입을 비교하면서 행복해한다는 사실이다. 쉽게 설명하면 이런 이야기다.
숙련된 기술자인 ㄱ은 한달에 200만원을 번다. 자신이 일하는 공장에서 수입이 가장 좋다. 한편 은행에서 일하는 ㄴ은 한달에 300만원을 번다. 그러나 그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수입이 중간 이하에 속한다. 누가 더 행복하다고 느낄까? 보이스의 연구결과는 ㄱ이 훨씬 행복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우리의 행복이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얻어진다는 이야기다. 객관적인 수입이 아무리 많아도 질투를 느끼는 대상이 있는 한 행복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질투는 자신의 불행한 상황을 벗어나려는 심리적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교집단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수입이 모두 늘어나 봐야 별로 행복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의 수입은 그대로 있고 내 수입만 늘어나야 행복해한다는 것이다. 아주 못됐지만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요즘의 내 작은 사회적 성취를 가능케 한 심리적 동기의 대부분도 질투에서 시작되었다.
독일에서 막 귀국해 한달에 80만원도 못 벌던 보따리강사 시절, 엄청 잘나가던 황상민 연세대 교수에 대한 내 질투는 말도 못했다. 그러나 황 교수는 목소리도 참 특이하고, 짧은 다리에 바지도 짧게 입고 다녀, 나름 위안이 되었다. 머리카락도 내가 훨씬 더 많다. 반면 서울대의 최인철 교수는 키도 크고 생긴 것도 멀쩡하다. 강의도 잘한다. 황 교수와는 달리, 도무지 나와 비교해 위안이 될 만한 것이 전혀 없다. 요즘 한창 뜨고 있는 김난도 교수는 사람까지 착하고 순수하다. 그가 쓴 책은 나름 베스트셀러인 내 책의 몇 배나 팔렸다. 환장한다. 이런 인간들과는 안 만나는 게 최고다. 내 비교집단에서 아예 제외해버리는 것도 행복의 한 방법이라는 이야기다.
비교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사람들과 노는 것도 괜찮은 대안이 된다. 그래서 하루종일 지하실에서 천장을 올려다보며 음악만 듣는 갑수형이나 사진기 걸쳐 메고 천하를 유람하는 광준이형과 자주 어울린다. 삶의 영역이 전혀 다르니 비교할 것도 없어 아주 마음 편하다. 그러나 매력적인 여인들이 있는 곳에는 웬만하면 함께 모이지 않는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는 다 같은 수컷이기 때문이다. 아는가? 세상에 무서운 게 늙은 수컷들의 질투라는 사실을.
첫댓글 질투하면, 부정적이미지와 더불어 삼각관계이런게 떠올라 밀쳐두어야 하는 감정내지는 입에 올리면 안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건강한 감정임을 알게 된건 최근이었습니다.
질투는 정당한 요구이며 관리를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단걸 알았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