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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진리는 말에 있지 않고 침묵 속에 있으며, 오랜 세월 고통을 견디어낸 마음에 머문다.
기도 중의 침묵
-헤시키아의 의미-
칼리스토스 웨어, 디오크레이아의 주교 / 박태원 신부 번역
거룩한 진리는 말에 있지 않고 침묵 속에 있으며,
오랜 세월 고통을 견디어낸 마음에 머문다.
-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책 -
“…예수 그리스도, 침묵으로부터 나온 말씀” - 안디옥의 성.이냐시오
사막교부들의 말씀 중 한 이야기는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테오필루스가 쉐티스에 있는 수도승들을 방문한 일에 대해 기술 하고 있다. 귀빈을 모시게 된 수도승들은 대주교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자 아바 팜보에게 요구했다; “대주교에게 뭔가 그를 교화 시킬만한 말씀을 해주시지요.” 아바께서 대답하셨다, “그가 나의 침묵에 교화되지 않는다면, 말로서는 더욱 안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사막의 전통에서 헤시키아(hesychia), 침묵 혹은 고요한 품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가리킨다. 사막교부들의 말씀 중에는 “하느님은 다른 모든 덕위에 헤시키아를 두셨다.” 는 말씀도 있다. 안치라의 성. 니루스는 “흙탕물을 끊임없이 저어댄다면 어떻게 맑아질 수 있겠는가; 그렇듯 헤시키아 없이 수도승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헤시키아는 단지 겉으로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여러 다른 수준으로 이해될 수 있다. 헤시키아란 말이 갖는 주요한 의미를 외부적인 것으로 부터 안으로 들어가며 구분해보자.
1) 헤시키아와 고독.
가장 오래된 자료에선, “헤시카스트” 란 말과 이와 연관된 동사는 주로 고독 속에 사는 수도승, 수도원에 사는 수도승과 구별되는 ‘은수자’를 가리켜 사용되었다. 이미 4세기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4세기), 5세기 초 사람인 니루스와 팔라디우스도 헤시카스트를 이런 의미로 썼다. 또한 사막교부들의 말씀 에서도 시토폴리스의 치릴, 요한 모슈우스, 바르사누피우스를 통해서 볼 수 있고, 유스티노가 제정한 법에도 나타난다. 헤시키아는 시나이의 성 그레고리(1346) 와 같은 후기 저자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같은 뜻으로 쓰여 졌다. 이 차원에서 헤시키아란 말은 우선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간’을 가리켰다.
2) 헤시키아, 독방의 영성.
아바 루푸스는 사막교부들의 말씀에서 “헤시키아는 모든 허영과 증오를 끊어버리고 하느님에 대한 앎과 두려움 속(‘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초이다’라는 뜻에서)에 네 독방에 앉아있는 것이다. 이러한 헤시키아는 도든 덕의 어머니이며 적의 맹렬한 화살로부터 수도승을 보호 한다” 고 했다. 루푸스는 이어서 헤시키아를 죽음을 기억하는 것과 연결시킨 후 결론적으로 말했다: “네 자신의 영혼에 깨어있으라.” 그러므로 헤시키아는 사막의 전통에서 또 다른 주요한 용어인 넵시스, 영적인 맑음 또는 깨어있음이란 말과 관련된다.
헤시키아가 이런 식으로 독방과 연관된다면, 아직도 이 말은 헤시카스트가 처해있는 공간적, 외적인 상황을 언급하긴 하나 동시에 좀 더 내적이고 영적인 의미도 띄게 된다. 자신의 독방에서 투철히 깨어있는 의미로서, 헤시카스트는 항상 홀로 사는 독수자일 필요는 없고 공동체로 사는 수도승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헤시카스트는 아바 모세의 훈계, “가서 네 독방에 머물라. 그러면 네 독방이 너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 이라는 말씀을 지키는 자이다. 헤시카스트는 아르세니우스가 자선을 하고자 하는 수도승에게 했던 조언을 소중히 지키는 자이다. “어떤 이가 아르세니우스에게 말했다, ‘나의 이런 생각이 저를 괴롭힙니다, 너는 단식도 하지 않고 노동도 하지 않는다; 최소한 나가서 환자를 방문해라, 그것 또한 사랑의 한 형태지 않는가.’ 아르세니우스는 악마가 뿌린 씨앗을 알아보고서는 그에게 말했다: ‘가서 어떤 일도 하지 말고 먹고 마시고 자라; 오로지 네 독방만 떠나지 말라.’ 아르세니우스는 참을성 있게 독방에 머무는 것이 수도승이 그가 불리운 성소를 완성하는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성. 안쏘니의 유명한 말씀에서도 헤시키아와 독방의 연관성은 뚜렷하다: “물고기가 마른땅 위에 있다면 죽듯이, 수도승들도 그들의 독방 바깥에서 오래 지체한다면 혹은 세상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다면 헤시키아의 품성을 잃게 될 것이다.” 자신의 독방에 머무는 수도승은 잘 조율된 악기와 같다. 헤시키아는 그를 깨어있게 한다; 만일 그가 독방 바깥에서 지체한다면, 그의 영혼은 비틀거리고 무기력 하게 된다.
헤시키아의 외적인 틀로 이해된 독방은 무엇보다도 먼저 ‘끊임없는 기도’가 이루어지는 작업장(공방)이다. 수도승이 자신의 독방에서 고요하게 침묵 중에 머무는 동안 해야 하는 주요한 일은 ‘하느님을 계속 기억’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회한과 슬픔이 따르게 된다. 아바 암모나스는 어느 정도 과시하는 형태의 수행을 제안하는 노인에게 말하기를 “ 당신의 독방에 앉으시오, 그리고 매일 조금 먹고 세리의 말을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하도록 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구원받을 것이오.” 했다. 세리의 말인 “하느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까 18:13)는 6세기 이후로 바르사누피우스가 쓴 아바 필레몬의 생애와 다른 저작에서 발견되는 ‘예수기도’의 형태와 매우 유사하다. 앞으로 적당한때에 다시 헤시키아란 주제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를 다루도록 하겠다. 가자의 요한이 그의 동료 은수자 바르사누피우스에 대해 한 말을 보면 수도원 독방의 봉쇄와 예수의 이름 사이에는 뚜렷한 관련이 있다: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무덤에 갇히듯 산채로 자신을 가둔 독방은 수도승이 쉬는 장소이다; 어떤 악마도 그곳에 들어오지 못하며 심지어는 악마들의 왕도 들어오지 못한다. 그곳은 하느님이 거하시는 장소이기에 성지이다.”
그러므로 헤시카스트들에게 독방은 기도의 집이며 하느님과 사람사이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며 성지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말에 인상적으로 표현된다. “수도승의 독방은 세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을 발견한 바빌론의 화덕이다; 또한 독방은 하느님이 모세에게 말씀을 건네셨던 구름 기둥이다.” 하느님이 현현하시는 장소로서 독방의 개념은 현대 곱틱 은수자인 아부나 마타 알-마스킨의 말씀에 잘 나타난다. 성지로 순례 갈 생각이 없는지 질문을 받은 그는 대답하기를: “바로 여기 이 동굴과 그 주변이 거룩한 예루살렘이다; 나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장소인 나의 동굴이 그곳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가 성지란 말인가; 나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서 휴식을 취하신 장소, 죽은 이들로부터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장소가 바로 나의 동굴이다. 예수살렘은 바로 여기이며 거룩한 도시의 모든 영적 부유함은 이 와디에서 발견된다.”
이렇게 헤시키아의 의미는 점차 외적인 것에서부터 내적으로 옮겨간다. 독방의 영성이란 말로 이해된 말은 단지 외적이고 물리적인 상태만이 아니라 영혼의 상태도 나타낸다. 이 말은 하느님 앞에 그의 마음을 드러낸 사람의 태도를 의미한다. 은둔자 테오판 주교는 “중요한 일은 하느님 앞에 진정한 마음으로 서는 것이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삶이 다하는 날까지 그분 앞에 서서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여기)고 했다. 이것은 정확하게 헤시카스트에게 독방의 고요와 침묵이 의미했던 바이다.
3) 헤시키아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감.”
성. 요한 클리마쿠스(649년 경 사망)가 생각하는 고전적인 헤시키아는 좀 더 내면적인 이해를 강조 한다: “헤시카스트란 자신의 영적인 실체를 몸이라는 신체적인 집 속에 한정코자 애쓰는 사람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것은 사실 매우 타당한 것이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헤시카스트란 사막으로 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여행을 떠난 사람이란 뜻이다; 독방의 문을 닫고 물리적으로 타인들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 사람이 아니라, 마음의 문을 닫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 사람이다. 방탕한 아들의 경우 “그는 제정신이 들었다”(루카 15:17) 고 한다; 바로 이것이 헤시카스트가 하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는 말씀에 응답하며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키고자”(잠언 4:23) 한다. 사막에서 홀로 사는 자로서의 헤시카스트란 처음의 정의를 다시 이해하자면, 고독이란 지리적인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상태에 달린 것이고, 진정한 사막이란 마음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다” 는 말의 뜻은 시리아의 성 이사악(7세기)과 그레이트 성. 바실이 잘 표현하였다. 바실은 “의식(Mind)이 더 이상 외부의 사물들에 빠져 있지 않거나, 감각을 통해 사방천지로 흩어져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 결과 의식은 하느님 생각으로 올라간다.” 이사악은 “네 자신과 평화롭게 지내라, 그러면 하늘과 땅이 너와 평화로울 것이다. 네 안에 있는 보물창고로 들어가려고 애써라, 거기서 하늘에 있는 사물을 보게 될 것이다; 거기로 들어가는 입구는 오로지 하나이다. 하느님의 왕국으로 인도하는 사다리는 네 안에 네 영혼 안에 감추어져 있다. 죄로부터 달아나 네 자신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네 영혼 속에서 위로 오르는 계단을 발견할 것이다” 고 한다.
여기서 잠깐 쉬면서 헤시키아란 말의 외적인 의미와 내적인 의미 사이의 차이점을 분명히 하도록 하자. 아바 아르세니우스의 유명한 ‘아포프테그마’에는 세 단계가 나타난다. 아직 황실 자제들의 가정교사였을 무렵, 아르세니우스는 하느님께 기도하며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을지 보여 달라.” 고 했다. 그에게 들려온 목소리는 “아르세니우스, 사람들을 피하여라. 그러면 구원되리라”였다. 그는 사막으로 들어가 고독한 은수자가 되었다; 그리고는 다시 똑같은 말로 기도하였다. 이번에 그가 들은 목소리는: “아르세니우스, 피하여 침묵을 지키고(ϭιώπα), 고요해져라(ήούχάξε), 이것이 ‘죄 없음’의 근간이다.”
사람들로부터 피하여, 침묵을 지키고 고요히 머물라: 헤시키아의 세 단계가 이것이다. 첫 번째인 “사람들을 피하라” 는 물리적이고 외적, 공간적이다. 바깥으로 말을 하지 말고 “침묵을 지키라”는 둘째까지도 아직 외적이다. 이 둘은 그 자체로 사람을 진정한 헤시카스트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외부적으로 홀로 고독하게 살고 입을 닫고 있다 해도 내적으로 들떠있으며 흥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고요하려면 둘째 단계에서 셋째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외적인 헤시키아로부터 내적인 헤시키아로, 단순히 말이 없는 상태에서 밀란의 성 암브로스가 말한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침묵인 네고찌오숨 실렌찌움(negotiousum silentium) 이란 상태로 옮겨가야 한다. 이 세 단계를 성 요한 클리마쿠스는 이렇게 구별한다: “네 방의 문을 닫으라, 네 혀의 문을 닫으라, 악령에 대해 내적인 문을 닫으라.”
이러한 헤시키아의 여러 단계사이의 차이점은 헤시카스트와 사회의 관계에서 중요하고도 함축적인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실제 공간이동을 하여 사막으로 떠났어도, 마음속에서는 도시 한가운데 아직 머물 수도 있다; 반대로 도시에 남아있으면서도 마음으로는 진정한 헤시카스트일 수 있다. 관건이 되는 것은 크리스챤의 공간적인 위치가 아니라 그의 영적인 상태이다.
동방정교회에서도 일단의 저작가들 특히 시리아의 성 이사악이 가장 유명한데, 그들은 외적인 고독 없이는 내적인 헤시키아가 있을 수 없다는 견해를 고수한다. 그러나 이것이 보편적인 견해는 아니다. 사막교부들의 말씀 중에는 온전히 세상에 투신하여 봉사하며 살던 한 평신도를 은수자나 수도승과 비교하는 이야기가 있다: 예를 들면 알렉산드리아의 한 의사는 그레이트 성 안소니 자신과 영적으로 동등한 깊이에 도달한 것으로 여겨졌다. 시나이의 성 그레고리는 이시도르라는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에게 삭발식을 거절하고 그를 아토스산에서 데살로니카로 돌려보내, 거기서 평신도 그룹을 위한 표양이 되고 지도자가 되게 하였다. 그레고리가 만일 도시에 살면서는 헤시카스트가 될 수 없다고 믿었다면, 제자를 떠나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팔라마스의 성 그레고리는 명료한 형태로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어떤 예외도 없이 모든 크리스챤에게 적용한다, “끊임없이 기도하라”(1데살로니카 5:17).
이것과 연관하여 에바그리우스나 고해신부 성 막시무스 같은 그리스 수도신학자들은 “활동적인 생활”과 “관상적인 생활”이란 용어를 사용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에게 “활동적인 생활”이란 직접 세상에 봉사하는- 설교, 가르침, 사회적인 일등-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격정을 종속시키고 덕을 얻기 위한 내적인 투쟁을 의미하였다. 이런 의미로 활동적인 생활이란 말을 사용한다면, 많은 은수자들과 엄격한 봉쇄 속에 사는 많은 수도자들이 아직도 현저히 “활동적인 생활” 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이치로 온전히 자신의 삶을 세상에의 봉사에 바쳤지만 그중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마음의 기도를 하고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연유로 그들은 “관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옳게 말할 수 있다. 신 신학자 성. 시메온(1022년 작고) 은 “산속이나 수도원 독방” 에서뿐만 아니라 “도시 한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온전히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는 직업을 갖고 아이를 기르며 대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짐을 진 결혼한 사람들도 관상의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믿었다: 성 베드로는 장모님이 있었지만 주님은 그를 불러 타볼산에 오르게 하고 변용의 영광을 보게 했다. 기준은 외적인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실재에 있다.
도시에 살면서 아직도 헤시카스트가 될 수 있듯이, 의무로 인해 끊임없이 말을 해야 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침묵하는 사람이 있다. 아바 포에멘의 말에 의하면 “겉보기에 침묵을 지키는 것 같아 보이지만 마음속으로는 타인을 나무라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온종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침부터 밤까지 말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침묵을 지키는 사람도 있다: 그는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말 외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확히 19세기 러시아에 살았던 사로프의 성 세라핌 같은 스타레츠(영적지도자) 나 옵티노의 영적 사제들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자신들의 성소로 인해 하루에도 수백 명씩 끊임없이 밀려드는 방문객들을 맞아야 했던 그들은 그렇다고 해서 내적인 헤시키아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이 내적인 헤시키아로 말미암아 그들은 타인들을 인도할 수 있었다. 각 방문자들에게 했던 그들의 말은 침묵으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힘이 있었다.
가자의 요한의 대답 중에 내적인 침묵과 외적인 침묵을 명확히 구별 짓는 말씀이 있다. 공동체에 사는 형제 한사람이 수도원에서 하는 목수일이 마음을 동요케 하고 산만하게 한다면서 은수자가 되어 “교부들이 말씀하신 침묵을 실천”하는 것이 어떨까 하고 물어왔다. 요한은 그에게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대답하기를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이 교부들이 말씀하신 침묵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네도 이해하지 못하는군. 침묵은 입을 다무는 것이 아니네. 이로운 말을 수 없이 해도 그것은 침묵으로 간주 된다네; 그러나 불필요한 말 한마디는 주님의 계명을 어긴 것이 되네: ‘사람들은 자기가 지껄인 쓸데없는 말을 심판 날에 해명해야 할 것이다.’(마태 12:36)”
4) 헤시키아와 영적인 가난
헤시키아를 내면의 고요한 마음을 지키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것은 다수로부터 하나로, 다양성으로부터 단순성과 영적인 가난으로 가는 여정에 적용된다. 에바그리우스의 용어를 빌리면, 생각은 “벌거벗겨져야” 한다. 헤시키아의 이런 면은 성 요한 클리마쿠스가 다른 곳에서 한 정의를 보아도 확실하다: “헤시키아는 생각을 중단하는 것이다.” 여기서 클리마쿠스는 에바그리우스의 말을 원용하고 있다. “기도는 생각을 그만 하는 것이다.” 헤시키아는 점진적인 자기-비움을 포함한다. 자기-비움이 진행되면서 의식으로부터 모든 시각적인 이미지와 인간이 만든 개념들이 벗겨져 나가게 되므로 순수하게 하느님의 나라를 관상하게 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헤시카스트는 프락시스에서 테오리아로, 활동적인 삶에서 관상적인 삶으로 나아간 사람이다. 시나이의 성. 그레고리는 헤시카스트를 프랔티코스와 대비하여 “…헤시카스트들은 생각을 끊고 하느님께만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이라 했다. 여기서 헤시카스트는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이나 대화를 회피하는 사람이라기보다, 그의 기도생활에서 모든 이미지와 말, 그리고 추상적인 이성논리를 포기하여 “감각 너머로 들어 높여져 순수한 침묵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이 “순수한 침묵” 은 “영적인 가난”이란 말로도 표현되지만, 단순히 무엇이 없거나 결핍된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 헤시카스트가 자신의 마음에서 가능한 한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을 벗겨내려 한다면, 이러한 “자기 무화(無化)”의 목표는 온전히 건설적인 것이다. 즉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신성의 내재로 채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나이의 성 그레고리는 이점을 잘 표현하였다: “왜 길게 이야기하는가? 기도는 사람들 안에서 모든 일을 하시는 하느님이 하신다.” 기도는 하느님의 일이다; 기도란 우선적으로 내가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내안에서 하는 어떤 것이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디아 2:20). 헤시카스트가 따르는 길은 실제로 세자 요한이 메시아를 두고 한 말,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를 윤곽으로 해서 그려진 것이다. 헤시카스트는 게으름을 피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하시는 활동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기 자신의 활동을 그친다. 그의 침묵은 말과 말 사이의 휴지가 아니며 말하기 전에 잠깐 멈추듯이 공허하거나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강렬하게 긍정적인 것이다: 주의 깊게 깨어있는 자세, 경계 그리고 무엇보다 듣는 자세이다.
헤시카스트는 빼어나게 잘 듣는 사람이며 그는 타 존재의 현존에 열려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성 요한 클리마쿠스에게 “헤시카스트는 소박하게 ‘주님, 제 마음은 준비가 되었습니다.’(시편 57:8 한국어 성경번역은, ‘제 마음 든든합니다.’) 하고 외치는 사람이다; 또한 헤시카스트는 ‘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있었지요’(아가 5:2) 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면서 헤시카스트는 하느님 앞에 서서 창조주의 말없는 소리를 들으려고 자신의 마음 속 비밀스런 방으로 들어간다. 현 시대 핀란드의 동방 정교회 저작가는 “기도할 때 네 자신은 침묵을 지켜라; 기도가 말하도록 하라” 고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도록 하라”가 되겠다. “사람은… 언제나 침묵 중에 머물러야 하며 하느님 홀로 말씀하시도록 하라.” 이것이 헤시카스트가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이다.
그러므로 헤시키아는 “나의” 기도로부터 내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기도로 변천되어간다. 테오판 주교의 말로 하자면, “수고하며” 혹은 “애쓰는” 기도에서 “스스로 움직이고” 혹은 “스스로 나아가는” 기도가 된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 진정한 내적 침묵 혹은 헤시키아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끊임없이 하는 기도와 동일한 것이다. 시리아의 성 이사악이 말했듯이, “성령께서 사람 안에 거하시게 되면,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안에 계신 성령께서 끊임없이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그가 잠들든 깨어있든, 기도는 그의 영혼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먹고 마실 때도 눕거나 앉아서 일을 할 때도 심지어는 깊은 잠에 빠졌을 때도 기도의 향은 그의 가슴에서 자발적으로 숨을 통해 뿜어져 나올 것이다.”
다른 곳에서 성 이사악은 스스로 하게 되는 기도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열쇠로 자물쇠를 연 방을 통과하는 것으로, 또 주인이 그들 한가운데 왔을 때 종들이 침묵하는 것에 비유한다. 그는 “기도할 때 혀와 마음의 움직임이 열쇠” 라고 썼다. “그 다음의 단계는 보물창고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때 모든 입과 혀는 침묵에 빠진다. 생각의 창고며 지성의 중심이고, 감각을 지배하는 용감한 정신이자 새처럼 날렵한 마음은 그 모든 힘과 자원, 중재하는 설득력과 함께 고요해질 수밖에 없다: 집 주인이 오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해된 헤시키아는 하느님의 활동과 생명에로 들어가는 것이며, 현세에서는 오로지 제한되고 불완전한 정도로만 성취가 가능한 것이다. 헤시키아는 종말론적인 실재로서 그 완전한 성취는 내세로 유보되어 있다. 성 이사악은 “침묵은 미래세계의 상징이다” 고 했다.
헤시키아와 예수기도
원론적으로 말한다면, 헤시키아는 내적인 기도를 일컫는 일반적인 용어로서 좀 더 특별한 여러 방식의 기도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실제로 현대 동방 정교회의 대다수 작가들은 이 말을 특별한 하나의 영적인 길을 일컫는데 사용 한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길. 때때로 “헤시카즘”이란 말이 좀 더 제한된 의미로서 “예수의 기도”와 결합되어 사용하는 신체적인 기법이나 호흡을 가리키기도 하나, 이는 그리 올바른 것은 아니다. 예수의 이름과 헤시키아의 결합- 또한 호흡과도 결합된 형태는 이미 성. 요한 클리마쿠스에게서 보여진다: “헤시키아는 끊임없이 하느님을 경배하며 그 앞에 서는 것이다. 예수의 기억이 네 호흡과 결합되도록 하라, 그러면 헤시키아의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예수기도와 헤시키아는 무슨 관계인가? 어떻게 이름을 부르는 것이 위에 상술한 헤시키아-내면의 침묵을 확립하는데 도움이 되는가?
기도란 “생각을 끊어버리고”, 다수에서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누구든 지성과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 앞에 서서 내적으로 기도하고자 진지하게 애써본 사람은 즉시 우리의 내면적인 분열을 알아차리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카이로스에 마음을 모을 수 없는 무능(無能)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생각들은 마치 “윙윙거리는 파리처럼” (테오판 주교) 혹은 “변덕스러운 원숭이가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건너뛰듯이” (라마크리슈나) 잠시도 쉼 없이 머릿속을 돌아다닌다. 이런 집중의 결여, 우리의 온 존재가 ‘지금 여기’에 있지 못하는 무능은 바로 타락의 비극적인 결과중의 하나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동방 정교회 수도 전통은 “생각들”을 극복하는 방법을 둘로 나눈다. 첫 번째는 직접적인 것으로, 우리의 생각을 “부정하고”, 생각에 정면으로 맞서 의지의 노력으로 추방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역효과를 내기가 쉽다. 폭력적으로 억눌려진 우리의 환상들은 좀 더 강화된 힘으로 되돌아오는 경향이 있다. 자신에 대해 대단한 확신이 없는 한, 좀 더 간접적인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안전하다. 생각과 맞서 직접 싸우며 내쫓으려 하는 대신, 우리의 관심을 생각에서 돌려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영적인 전략은 부정대신 긍정이다: 우리의 당면 목적은 우리의 마음에서 악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좋은 것으로 채우는 것이다. 바르사누피우스와 가자의 요한이 권하는 것도 이 두 번째 방법이다. 그들은 “원수들이 제시하는 생각에 반대하지 마라. 바로 그것이 원수들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주님께 도움을 청하라. 그분에게 네 무능함을 드려라; 그분은 그들을 쫒아낼 수 있고 그들을 무화(無化)시킬 수 있는 분이다.”
자신의 의지력만으로 내면의 생각과 이미지의 흐름을 중단시킬 수 없음은 우리 모두에게 자명하다. “생각을 그만하자” 하고 자신에게 말해보았자 별 무소용이다; 이는 “숨쉬기를 그만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수도승 마르꼬는 “이성적인 마음은 게으르게 쉴 수가 없다” 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영적인 가난과 내적인 침묵에 이를 수 있을까? 결코 쉴 줄 모르는 지성을 그 분주함에서 벗어나게 하여 중지시킬 수는 없지만, 짧은 형식의 기도를 계속 반복함으로서 지성의 활동을 단순화시키고 하나로 만들 수는 있다. 이미지와 생각의 흐름은 계속될 것이나, 우리는 점차로 그들로부터 이탈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반복되는 청원은 의식 혹은 무의식적 자아가 제시하는 생각이 “흘러가게”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이 “흘려보냄”은 에바그리우스가 기도란 생각을 “그만 두는 것” 이라 말할 때의 관점에 상응한다. 생각이나 이미지에 대해 격렬한 갈등을 일으키거나 맹렬한 공격으로 쫒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그러나 꾸준히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기도에 전제된 수도 심리학이다. 이름을 부르는 청원은 우리의 분열된 인격을 하나의 초점으로 모이게 한다. 시나이의 필로테오스(9-10세기 ?)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억을 통하여 흩어 진 네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고 썼다. ‘예수기도’는 생각과 싸우는 간접적인 방법인 두 번째 방법의 적용으로 보인다: 직접 부딪혀서 우리의 부정한 생각과 하찮은 상상들을 말살시키려 하는 대신에, 시선을 돌려 주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힘에 의지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이름을 통해 얻어지는 은총과 힘에 피난처를 구하는 것이다. 반복하는 청원은 우리를 “떠나가게” 하고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수다쟁이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킬 수 있게 도와준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마음에 영적 다이어트를 실시하여, 풍요롭지만 지극히 단순한 단 하나의 생각만을 먹여 집중시키고 하나가 되게 한다. 테오판 주교는 “계속 부스럭거리는 생각을 중지하려면, 마음을 하나의 생각 혹은 오직 한분에 대한 생각에 묶어두어야 한다” 고 말한다. 포티스의 성 디아도쿠스는 “마음의 모든 출구를 하느님의 기억이란 수단으로 막으면, 마음은 어떤 값을 치루더라도 뭔가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일거리를 찾는다. 바로 그때 유일한 활동으로 기도를 주는 것이다. ‘예수기도’를…‘”
이것이 예수기도가 마음속의 헤시키아를 확립하는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었던 개요이다. 다음의 두 가지는 논리적인 귀결로서 아주 중요하다. 첫째는 그 목적을 달성키 위해서 예수기도는 일정한 리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체험이 있는 헤시카스트의 경우 -초심자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이 기도는 중단 없이 가능한 한 계속되어야 한다. 로자리 로프나 호흡의 조절 등과 같은 외부적인 보조수단들은 그 주요목적이 기도에 일정한 리듬을 주기 위한 것이다.
두 번째로, 예수기도를 암송하는 동안, 마음은 가능한 한 모든 심상으로부터 비워져야 한다. 이런 연유로 예수기도를 하는 장소로는 조용한 장소가 가장 적격이다; 촛불이 밝혀진 이콘 앞에서 보다는 눈을 감든가 어두운 곳에서 하는 것이 좋다. 아토스산의 스타레츠 실루안(1866-1938)은 기도할 때 째깍거리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시계를 치워버리고 울로 짠 모자를 깊이 써 눈과 귀를 가렸다고 한다. 기도하는 동안 필연적으로 시각적인 이미지가 마음에 떠오르더라도 그것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예수기도는 그리스도의 생애 중에 있었던 일에 대한 추론적인 묵상이 아니다. 예수기도를 하는 사람은 구세주께서 바로 자신들 곁에 현존하시며 자신들의 청원을 듣고 응답해주신다는 불타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하느님 현존에 대한 의식은 어떤 시각적인 개념을 수반하지 않으며 단순한 확신이나 느낌으로 국한되어야 한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가 (395년 작고) 말했듯이, “신랑은 있으나 보이지 않는다.”
기도와 활동
헤시키아는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를 필요로 한다. 외적 혹은 내적 분리 그리고 때로는 동시에 둘 다 요구 한다: “사막으로 도피”함으로서 외적분리; “자기 자신으로 돌아감” 으로서 그리고 “생각을 그만둠”으로서 내적분리를 요구한다. 사막교부들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사람은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고, 이 세상에 오직 나와 하느님 밖에 없다, 고 말하기까지는 안식을 갖지 못할 것이다”, “홀로가 홀로에게”와 같이 말이다: 이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닐까, 창조세계의 영적인 가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동료 인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닐까? 아토스산의 실루안 신부처럼 자기 독방에서 바깥세상에 대해 눈과 귀를 닫고 기도하는 사람이 헤시카스트라면, 그는 도대체 무슨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봉사를 이웃에게 한단 말인가?
이 문제를 두 가지 주요한 점에서 고찰해보자. 첫째로 헤시카즘은 17세기 서방교회에서 정적주의가 저질렀던 것과 같은 왜곡의 죄가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헤시키아를 “정적(靜寂)”으로 번역하는 것을 신중하게 반대해왔다. 바로 “정적주의자”라는 말에 붙여진 의심스러운 의미 때문이었다. 실제로 헤시카스트는 정적주의자와 동일한 관점을 유지하고 있는가? 둘째로 헤시카스트가 자신의 주변 환경에 -인간적인 환경과 물리적인 환경- 대해 갖는 태도는 어떠한가? 그는 타인에게 실제적으로 유용한가?
“정적주의의 기본원칙은,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부인하고 단죄하는 것이다”고 말해진다. “정적주의자에 의하면 인간이 완벽해지기 위해서는 완전한 수동성을 얻어야 하며 의지를 없애버리고, 자신의 구원이나 천당과 지옥에 대한 관심까지도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하느님께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고 한다. 구원되기 위해서는 덕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서 혹은 하느님을 흠숭하기 위한 특별한 행위로서 추론적인 묵상을 거부하고 단순히 순수한 신앙으로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쉬어야 한다… 일단 사람이 완벽의 경지를 얻게 되면, 죄는 불가능하다.”
만일 이것이 정적주의라면 헤시카스트 전통은 결정적으로 정적주의가 아니다. 헤시키아는 수동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음(nepsis) 을 의미한다. “투쟁의 부재가 아니라 불확실성과 혼란의 부재다.” 헤시카스트가 테오리아 혹은 관상의 경지까지 나아갔다 하더라도, 그는 여직 프락시스 혹은 활동의 차원에서 투쟁이 요구된다, 덕을 획득하고 악을 물리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프락시스와 테오리아(praxis, theoria), 위에서 언급한 활동적이고 관상적인 생활은 연대기적으로 이어져있는 두 개의 단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둘 중에 하나를 양자택일해야 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두 개의 단계는 서로를 관통하는 영적체험의 단계로서 기도생활에서 공존한다. 누구나 인생의 마지막까지 프락시스의 단계에서 필요한 투쟁이 요구된다.
이것은 이집트의 성 안쏘니의 뚜렷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사람의 주요한 책무는 하느님의 눈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의식하는 것이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유혹이 있을 것임을 예상하는 것이다… 사막에 앉아있는 헤시카스트는 세 가지 전쟁으로부터 탈출해왔다: 듣고, 말하고, 보는 것; 그러나 그가 계속하여 투쟁하여야 하는 것 하나는,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다.”
정적주의자와 같이 헤시카스트도 기도할 때 추론적인 묵상을 하지 않는다. 헤시키아에는 생각이나 이미지들을 “흘러가게 하거나” “중지”하는 것이 포함되지만, 헤시카스트의 태도에는 “완전한 수동성” 이라든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런 것은 없다. 예수기도를 하는 중에 악하거나 하찮은 생각들을 “떠나가게” 하거나 예수의 이름이라는 하나의 생각으로 대치하는 것은 수동성이 아니며 그 자체 우리의 생각을 조절하는 긍정적인 길이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분명히 “순수한 신앙으로 하느님의 현존 속에 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구세주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이며 거룩한 생명을 좀 더 온전히 나누고자 하는 열망이다. 필로칼리아의 독자들은 헤시카스트 저자들이 “나의 예수”와의 인격적이고 구체적인 우정을 따뜻하게 표현하는 것에 놀라곤 한다. 이러한 인격적인 생생함은 특별히 바토스의 헤시키오스(9-10세기?)에게서 잘 볼 수 있다.
정적주의자들과는 달리, 헤시카스트는 죄가 없다거나 유혹이 통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그리스 수도신학이 말하는 아파테이아 혹은 적정(寂靜, 혹은 적멸 寂滅)은 수동적인 무관심이나 무감각이 아니며, 죄를 짓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를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시리아의 성 이사악은 “아파테이아는 격정을 느끼지 않음으로서가 아니라, 격정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이뤄진다” 고 했다. 성 안쏘니가 주장하듯이 사람은 반드시 “마지막 숨을 내쉬기까지 유혹이 있을 것임을 기대해야한다” 유혹이 있는 한 언제나 죄에 떨어질 가능성도 상존하는 것이다. 아바 아브라함은 “성인들에게도 격정은 살아 남아있지만 제어되어 있다.”고 했다. 한 노인이 “나는 세상에 대해 죽었다” 고 하자 그의 이웃이 부드럽게 “형제여 당신이 몸을 떠날 때까지는 그리 너무 자신하지 마오. ‘나는 죽었다’ 고 할 수 있겠지만 사탄은 죽지 않았다오.” 했다고 한다.
에바그리우스 이후로 그리스 작가들은 아파테이아와 사랑을 밀접하게 연관 지어 다뤘다. 이를 보아도 “적정” 이란 말이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아파테이아의 핵심은 영적인 자유의 상태이며, 사람은 이 상태에 있어야 비로소 불타는 열망으로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다. 아파테이아는 “단순히 육체적인 격정을 참고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새롭고 더 나은 에너지이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불타는 사랑으로 이기적이고 동물적인 격정을 위한 자리가 영혼에 남아있지 않은 상태이다.” 아파테이아의 역동적인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 성 디아도쿠스는 “아파테이아의 불꽃” 이란 표현을 쓴다. 이 모든 것은 헤시카즘과 정적주의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두 번째 질문에 답해보자: 헤시카스트의 기도방식은 의심스럽고 이단적이란 의미의 “정적주의”와는 다름을 받아들이지만, 아직도 그 기도가 보는 창조세계는 부정적이고 또 동료인간에 대한 태도 역시 반사회적이지 않은가? 사막교부들의 말씀 중에 수도승이 된 세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을 실례로 들어 설명해보자. 한 친구는 중재자가 되어 법적인 소송을 벌이려는 사람들을 화해시키는 일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다른 친구는 병자를 돌보는 일, 그리고 세 번째 친구는 사막의 고독 속으로 물러났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후, 앞의 두 친구는 완전히 지치고 낙담하게 되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그들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사람들의 요구에 모두 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거의 절망에 빠진 그들은 은수자로 살고 있는 세 번째 친구를 찾아가 자신들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 하였다.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한동안 침묵 하더니, 그릇에 물을 붇고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 자 봐라, 물이 탁하고 흔들리고 있다.” 그들은 몇 분 동안 기다렸다. 은수자는 다시 “이제 다시 봐라.” 불순물이 바닥에 가라앉아 물은 맑게 되어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얼굴까지 거울에 비친 것처럼 볼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라고 은수자가 말했다: “물이 흔들리고 있기에 그는 자기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고요해지는 것을 배운다면 -무엇보다도 사막에서-, 그는 자신의 허물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는 끝난다. 그 두 친구가 은수자의 비유를 받아들였는지 어떠했는지 더 이상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 아마도 그들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이전에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때때로 사막의 헤시키아를 찾는 시간도 가졌을 것이다. 그런 경우 그들은 세 번째 친구의 말을, 사회활동은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태풍의 한 가운데에 ‘고요한 중심’이 없다면, 사람이 자신의 그 모든 활동 한가운데 하느님 앞에 홀로 서는 마음의 비밀스런 방을 갖지 못한다면, 그는 이내 모든 영적인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조각조각 찢어질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이것이 20세기를 사는 대다수의 독자들이 위의 이야기에서 이끌어내는 교훈이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마음의 은수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말 이것이 이 이야기가 본래 의도했던 것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이 이야기의 본래 의도는 문자적이고 지리적인 의미에서 광야의 은수생활을 장려하는 것이었을 게다. 그리고 이것은 즉시 이런 은수자적 관상기도가 이기적이고 부정적이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사회에 대한 헤시카스트의 진정한 관계는 무엇인가?
14세기 헤시카스트 운동에서와 마찬가지로, 18세기 헤시카스트 르네상스와 현시대의 동방 정교회 모두, 헤시카스트 기도의 중심은 작은 ‘스케테’였음을 인정해야 한다. 스케테는 몇 명 안 되는 형제들이 세상으로부터 숨어 수도생활을 하며 가족으로 사는 은수지이다. 많은 헤시카스트 저작자들은 더 완전히 조직된 수도생활보다 이 스케테를 선호하였다: 커다란 공동체에서의 생활은 온 마음을 다하여 내적인 기도를 실천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스케테의 외적인 환경이 이상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배타적으로 독점적인 한, 선택된 아주 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혜택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준은 보통 외부의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적인 상태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특정한 외적인 환경이 다른 곳보다 내적인 침묵에 도움이 될 수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내적인 침묵을 불가능하게 하는 상황도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시나이의 성. 그레고리는 그의 제자 이시도르를 세상으로 돌려보냈다; 아토스산과 파로리아의 사막에 있던 그와 절친했던 많은 동료들은 교회의 행정가나 지도자, 총대주교 그리고 주교가 되었다. 모든 크리스챤에게 끊임없는 기도가 가능하다고 가르쳤던 팔라마스의 성. 그레고리 자신도 비잔틴 제국에서 2번째로 큰 도시의 대주교로서 삶을 마쳤다.
공무원이며 궁정의 조신이었던 평신도 니콜라스 카바실라스(14세기)는 헤시카스트 지도자들과 친구였는데 평소 이런 점을 매우 강조하였다: “모두가 자신이 하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장군은 계속하여 명령을 내려야한다; 농부는 땅을 갈아야 하며; 장인은 공예품을 만들어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지 말해주겠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기 위하여, 옷을 바꿔 입기 위하여, 자신의 건강을 해치기 위하여 혹은 지혜롭지 못한 어떤 일을 하기 위하여 사막으로 물러날 필요가 전혀 없다. 자신의 소유물을 포기함 없이 자신의 집에 머물면서도 끊임없이 묵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정신으로 신 신학자 성. 시메온은 “최상의 생활이란 하느님께 인격적으로 불린 상태로 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은수자의 생활 혹은 수도공동체에서의 생활 아니면 정부관료, 교사로서의 생활 또는 교회 행정일 등을 높이 친다. 그러나 나는 이 중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좋다고 여기지 않으며 낫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어떤 상황이나 활동이라도 그것이 하느님을 위한 생활이고 하느님께 불린 생활이라면 진정으로 축복을 받은 것이다.”
헤시키아의 길은 모든 이에게 열려있다: 한 가지 꼭 필요한 것은 외부적인 침묵이 아니라 내적인 침묵이다. 이 내적인 침묵은 기도할 때 이미지 흐름의 “중지”를 전제하지만, 이런 부정의 궁극적인 효과는 하느님 안에서 모든 존재와 모든 사람의 가치가 더욱 생생해지는 것이다. 부정의 길은 동시에 초-긍정의 길이기도 하다. 이 점은 ‘이름 없는 순례자’ 에서 매우 소박하게 표현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익명의 러시아 농부는 예수기도를 반복하면서 자신과 창조세계의 관계가 변모하여, 자신을 둘러싼 모든 자연환경이 하느님 현존의 성사(聖事)로 바뀌며 투명성을 띄게 됨을 깨닫게 된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하여 기도할 때, 내 주변의 모든 것이 기뻐하는 것 같으며 기적으로 보인다. 나무, 풀, 새, 땅, 공기, 빛 등 이 모든 것이 자신들은 사람을 위해 있으며 사람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고 있다고 나에게 말하는 듯하다. 즉 모든 것이 사람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명하며 모든 것은 하느님께 기도하고 그의 영광을 노래한다. 이를 통해 나는 필로칼리아에서 ‘모든 피조물의 언어에 대한 지식’ 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느님과 모든 피조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불타는 사랑을 느꼈다.”
이와 똑같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는 순례자와 동료 인간과의 관계도 변모 시킨다: “또 다시 나는 방랑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전과 같이 근심으로 가득 차서 길을 걷지 않는다. 예수기도는 나의 길을 기쁘게 하였다. 모든 이가 나에게 친절했으며 마치 모든 이가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누가 해를 끼치더라도 나는 오로지 ‘예수기도가 얼마나 감미로운가!’ 만 생각하였다. 그러면 부상이나 분노는 지나가고 나는 그것을 잊게 되었다.”
세상을 긍정하는 헤시키아의 본성에 대한 그 이상의 증거는 헤시카스트들이 성 변용(聖 變容)의 신비를 중심적인 자리에 두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메트로폴리탄 안소니(블룸)은 그가 모스크바에서 본 두 개의 성 변용 이콘에 대해 인상적인 설명을 하는데- 하나는 안드레이 루블레프의 것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인 테오판의 것이다. “루브레프의 이콘은 눈부신 광휘를 발하는 흰색 옷을 입은 그리스도를 보여주는데, 그 광휘는 주변의 모든 것을 밝힌다. 그 빛은 제자들에게, 산위에, 돌과 모든 풀잎 위에 떨어지고 그들과 만난다. 이 빛에는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신성한 빛, 신성한 영광이 있으며, 모든 존재는 다른 식으로는 결코 얻지 못할 강렬한 존재성을 획득 한다; 그 빛 속에서 모든 존재는 하느님 안에서만 가질 수 잇는 온전한 실재성을 갖게 된다.” 테오판의 이콘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옷은 푸른빛을 띠는 은빛인데, 주변을 비추는 빛의 광선도 역시 희고, 은빛이며 푸른 기를 띄고 있다. 전체적인 인상은 앞의 이콘보다 빛의 강렬성에 있어서 덜한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내 이 모든 빛의 광선들이 하느님의 현존에서 뻗어 나오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의 현존에서 나오는 빛은 사물의 겉모양인 윤곽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투명하게 꿰뚫는다… 이 거룩한 빛의 광선은 사물에 닿아 그 안으로 침잠하며 뚫고 들어가고, 창조된 모든 것의 핵심에 있는 그 무엇을 건드려, 동일한 빛을 반사하게 하며, 스스로 가졌던 모든 잠재성과 능력을 발휘시키고 소생시켜 좀 더 풍요로운 자기 자신이 되게 한다. 바로 이 순간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는’ 종말론적 상황이 현실이 된다.”
바로 이것이 성 변모의 영광이 주는 두 배의 효과이다: 각 사물과 사람을, 유일하고 반복될 수 없는 본질을 가진 온전히 독특한 존재로 서게 한다; 동시에 그 모든 사물과 사람을 투명하게 하여 그들 안에 그리고 그들을 넘어 현존하는 하느님의 신성을 계시 한다:
유리잔을 들여다보는 당신
잔 위에 머무는 당신의 눈;
혹 원한다면, 뚫고 들어가
하늘을 엿볼 수도
헤시키아에 의해서도 두 배의 효과가 난다. 내면적인 침묵의 기도는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하는 것이다. 이 기도는 헤시카스트로 하여금 세상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창조주를 볼 수 있게 한다; 또한 이 기도는 그로 하여금 세상으로 돌아가게 하여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여행을 떠나는 것은 출발지로 되돌아오는 것이며, 자신의 집을 새로워진 눈으로 처음 보는 것처럼 보는 것이란 말이 있다. 이것은 기도의 여행에서도 마찬가지다. 감각주의자나 유물론자가 전혀 아니지만 헤시카스트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보기에, 각 사물의 가치를 음미할 수 있다. 14세기 팔라마스의 논쟁에서 성. 그레고리와 헤시카스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창조세계의 영적인 잠재성 특히 인간 신체가 지닌 잠재적인 가치를 옹호하고자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 헤시카즘을 세상에 대한 태도에 있어 부정적이고 이원론적이라고 보는 사람에 대한 대답이다. 헤시카스트는 세상을 긍정하기 위해 부정한다; 그는 돌아오기 위해 물러난다.
헤시카스트와 사회, 내적인 기도와 외적인 행동 사이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의 말이 있다: “수도승은 모든 이와 결합하기 위하여 모든 이로부터 떨어져 나온 사람이다.” 헤시카스트는 외적으로 고독 속으로 들어감으로서; 내적으로 “생각을 중지함” 으로서 분리되는 행동을 취한다. 그러나 이 도피의 결과는 그를 이전보다 더 친밀하게 타인과 결합시키며 타인의 필요에 더 깊이 민감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감추어진 가능성을 좀 더 예리하게 의식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이것은 위대한 스타레츠의 경우에서 가장 잘 목격할 수 있다. 이집트의 성. 안소니나 사로프의 성. 세라핌 같은 분들은 수 십 년을 완전한 침묵과 물리적인 격리 속에 살았다. 그러나 이 격리의 궁극적인 결과는, 그들에게 예외적인 자비와 명료한 비전을 주었다. 그들은 각 사람의 깊은 특성을, 한 두 마디로 즉각적으로 식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한 두 마디의 말은, 그 특별한 순간에 그 사람이 가장 필요로 하는 말이었다.
시리아의 성. 이사악은 마음의 순수를 얻는 것이 이교도인 한 국가 전체를 오류로부터 개종 시키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그가 사도적인 일을 경시해서가 아니다; 그는 사람이 어느 정도 내적인 침묵을 얻지 못하는 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한 것이다. 안쏘니(4세기) 의 제자였던 암모나스는 이 점을 좀 더 평이하게 말 한다: “그들은 먼저 깊은 헤시키아를 실천했기에, 하느님의 능력이 그들 안에 있게 되었다; 그 후 하느님은 그들을 사람들 한가운데로 보냈다” 사실 많은 은수자들이 사도로 혹은 영적지도자(스타레츠)로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들의 생애동안 전적으로 타인이 모르게 계속 내적인 침묵을 실천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숨겨진 관상기도가 소용이 없다거나 그들의 삶이 낭비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활동적인 일로서가 아니라 기도로서, 그들이 행한 무엇으로가 아니라 그들이 무엇인지에 의해, 외적으로가 아니라 실존적으로 사회에 봉사 하는 것이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의 성 마카리우스처럼 “나는 벽을 지키고 있다” 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