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명 UDU(Underwater Demolition Unit). 54년 만들어진 이 부대의 전신은 이미 48년 9월에 마련되고 있었다. 원래 방첩대였던 미국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가 은밀히 가동하고 있었던 대북공작대가 바로 그것. UDU란 명칭으로 처음 선발한 것은 55년 4월이었다.
신원이 확실한 방첩부대와 해군과 해병대에서 차출된 1기, 2기 요원들은 미국령 모 처에서 훈련을 받은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산 수영만에 1차 집결한 뒤 미국 수송기에 탑승, 오키나와를 거쳐 훈련장소에 도착했지만 비행하는 동안 내내 눈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도착한 곳은 자신들도 알지 못했다고 한다.
3기부터는 훈련장소를 국내로 옮겨 서해 모 기지에서 훈련을 받기에 이른다. 이들이 수행한 임무는 주로 요인납치 및 암살, 폭파, 기습, 잔류공작원 보급 및 접수, 수송, 철로폭파, 적 통신시설 감지 등이었다.
이들의 북파공작은 71년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이후 부대는 현재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지만 대북공작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UDU 부대가 초창기의 반양성. 반음성적 성격에서 완전한 음성부대로 전환되면서부터는 현역 군인에서 차출하던 요원을 민간인 입영대상자에서 뽑게 됐다. 한번에 40~50명 선발했고 이들이 안전가옥에서 실시하는 기본교육 6개월의 과정은 상상외로 혹독해 대부분은 탈락하고 채용계약을 맺게 되는 훈련병들은 대략10명 안팎이라고 한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대부분의 UDU 출신들은 훈련과정에 대해서만큼은 말하기 꺼려했지만 자신들이 하는 훈련은 상대방과의 격투에 대비한 '일반 특공무술'이 아닌 효과적인 살상을 위한 '특수살상무술' 이라고 밝혀 특전사나 UDT, 해병대, 해병특수수색대와는 다른 훈련과정을 거쳤음을 암시했다.
특이한 것은 이들의 부대가 군의 체제가 아닌 일반 회사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 이를테면,소대장은 대리, 중대장은 계장, 부대장은 사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는 것이다.부대의 노출을 얼마나 기피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현재 이부대 출신들이 겪고 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상대적인 박탈감이다. 일단 생존자들의 경우 그들이 목숨을 바쳐 국가를 위해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후 그에 따르는 합당한 보상 이뤄지지 않았다는 부분이 그들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현재 공공연하게 실체가 인정되고 보상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HID와는 달리 최근의 북파공작원중 실종 처리되고 있는 5.16 이전 공작원들의 생사확인 또한 시급하다. 지금도 북한내에 살아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상당수의 UDU요원들은 지난달 2일 북송된 대다수의 비전향장기수와 대조를 이룬다는 점에서도 정부는 이들의 생사확인과 송환문제를 외면해선 안된다.
한편 국방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 문제(북파공작원,UDU)는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하는 부분이고 특수보안에 관한 사항이라 확인조차 힘들다. 하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희생하신 분들이 있다면 군은 이런 분들의 노고와 희생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적법한 절차에 의거해 보상해 준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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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해군첩보대원은 한국전쟁으로 비체계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전지역의 소규모 게릴라전과 서해의 수많은 도서지방에 요원들을 침투시켜 지역주민들을 특수교육시키고 부족한 병력을 충원하여 적의 정규군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당시 북한의 남침으로 낙동강까지 후퇴한 한국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대반격을 시도한다. 당시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 있기 까지는 해군 첩보부대의 특수요원들의 희생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인천지역 인근 주요 도서지방은 북한군에 점령당해 있는 상태였으며, 특히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해군 상륙함함대 및 상륙부대가 이동하는 주요거점 확보는 필수적인 상황이었다. 이곳을 탈환하려는 비정규군의 노력은 해군 첩보부대 특수요원들이 아니였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잊혀져 가는 것이 안타깝지만, 이러한 정규군의 유명한 업적의 뒤에는 보 이지 않는 첩보부대 특수요원들의 숨은 전공이 많았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후 연합군의 북진으로 한반도 최북단인 압록강까지 이르러 통일을 눈앞에 둔것처럼 할 때 갑작스런 중공군의 대대적인 개입으로 아군은 전면 후퇴하게 되었다. 이때 한국군은 북한지역에서 후퇴후 적지역에 대한 첩보수집과 게릴라전으로 적 후방을 교란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북한군의 전투력을 약화시켜 기습타격을 가할 수 있는 부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특히 미군 정보기관은 인천상륙작전에 한국 해군첩보부대원들이 벌인 첩보활동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판단하고 있던 터였다.
따라서 비정규전에 첩보부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한 미 정보기관은 한국군 정보기관과 협의하여 1954년 해군정보감 겸 정보부대 777부대장 김세원 대령의 중계로 대북 해상첩보공작부대를 발족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