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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 > 이 글은 친구들의 엣 추억을 한번 되살렸으면 하는 마음에서 쓴 수필이여...
생각은 또렸하면서도 약간 가물거리네.. 실명이 표현된 친구들도 있는데...
추억의 글이니까 이해해 주시게나..
그럼 시작함세...
나는 9살에 국민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아마도 비아 1리는 우리 또는 선배들에게 약간 문제가 있었나 보다..
나와 우리 친구들이 쪼까 부족했다든지... 아니면
선배들이 공부를 좀 못했다든지.. 아님 사고 뭉치였다든지...ㅎㅎㅎ
입학전 면접을 하던 날 나는 나보다도 11살이 많으신 큰 누님과 함께 비아초등학교 면접장에 도착하였다..
당시에 우리초등학교는 52년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일제시대에 만들어졌고, 건물은 일본식으로 만들어져서 겉 부분은 검은 판자가 옆으로 뉘어져 붙어 있었고.. 교실 바닥은 맨발로 다닐 수 있도록 양초로 광을 내어서 매우 미끄러웠다.
또 책상은 키가 아주 작고, 찐한 파란색으로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고, 각종 낙서와 칼자국으로 페어 있었다.
나는 거기에 잠시 앉아서 면접하시는 선생님께서 질문하시는 내용에 답변을 하였다..
면접 선생님 : 네 이름이 어떻게 되지? 한번 써봐~!
나 : “김효남입니다” “김효남” 이라고 꼬부랑 글씨로 또박 또박 자신있게 썼다.
면접 선생님 : 네 나이가 몇이냐?
나 : 9살입니다... 하면서 손가락으로 아홉을 나타내 보였다
면접 선생님 : 9 더하기 5는 얼마냐?
나 : 곧바로 “14입니다” 라고 대답하였고...
면접 선생님 : 음... 공부 잘하게 생겼구나~!
라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이 말은 항상 내 머릿속에서 지금도 떠나질 않았고... 농사일 때문에 오시지 않고
아들의 면접 시험일을 큰 딸에게 부탁하셨던 어머니께서도 큰누님에게서 그 말씀을 들으시고.. 웃으시면서 흡족해 하셨다..
사실 당시에는 아마 농사일 때문에 부모님들께서는 자식 교육에는 시간 투자를 못하셨고 그 때문에 문맹으로 국민학교 입학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숫자적으로 아직 100까지도 세지 못하는 친구들도 많았었다. 사실 나도 우리 어머니께서는 가갸거겨 도 모르셨지만 형과 누나들 덕분에 쪼금은 준비된 학생이었던 것 같다.
한글을 알고, 읽고, 쓰기(보고 적지 않으면 읽는 소리대로 적음), 산수는 하나부터 계속 셀 수 있는 것을 알았으니.. 공부를 쪼까 잘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ㅎㅎㅎ
사실 나도 100부터는 101, 102, .... 109, 다음에 200혔네...
입학식 날 !
나는 다른 아이들과 똑 같이 하얀 손수건에 1학년1반을 나타내는 빨강 리본을 달고, 학교에서 나누어준 명찰을 달았지...
선생님 께서 나란히 나란히 양손을 펴고 친구들 어께 위로 나란히 라고 말씀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네...
우리 1-1반 교실은 빵을 만드는 급식 공장 바로 곁에 있었고..
교무실에서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어.
초등학교 1학년때 1반은 우리 담임 배영숙 선생님이셨고, 2반은 한수자 선생님 3반은 김경애 선생님 4반은 임춘봉 선생님 이셨다. 그중에서도 우리 배영숙 선생님께서 가장 예쁘셨다.
교실에 들어온 나는 선생님께서 맺어준 짝과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고 남향 쪽 앞에서 세 번째 자리에
김해숙이란 친구와 짝이 되었다네. 당시에는 남녀가 같은 책상에 앉는 것이 부끄러워서였는지..
나는 책상의 중간에 연필로 금을 긋고 해숙이 친구의 모든 것을 넘어오는 것을 막았다네...
(여기에서 내 기억에는 해숙이로 기억되는데.. 다른 친구일 수도 있음)
나는 분단장이라는 엄청난 임무(?)를 맡게 되었고 아마 급장은 김승권이라는 친구였던 것 같아.
당시 1-3반에는 김성운이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늦깍이 국민학생이라 키도 6학년 형들보다 컷고 싸움도 지금으로 말하자면 짱이었다.
그 친구는 비아 3리 윗 장터라는 마을에 살았는데 비아 1리와 같은 지정학상 위치에 있어서 우리와 아주 친했지.. 그러고 보니 성운이는 보스, 우리는 똘마니 격이었어.
우리는 성운이가 우리의 보호막 구실을 하였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그야말로 단짝이나 같았다네.. 그러나 그러한 그 와도 적으로 싸워야 할 때가 있었으니 성운이가 가장 좋아하는 기마전을 할 때였어...
우리는 1학년이 4반까지 있었으므로 1,2반을 한편으로 하고 3,4반을 저 편으로 하여 기마전 싸움을 아침마다 벌였다네.. 아니 다시 말하면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가신 것을 확인하고, 감시하는 학생을 배치한 다음, 중간 중간에도 기마전을 펼쳤지.
내 생각에는 키도 크고 몸무게도 많이 나가는 성운이가 마부가 되어 오면 좋을 텐데.. 성운이는 마부 보다는 말들 위에 올라타서 왕 행세를 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우리는 그것을 교묘히 이용하는 전술을 펼쳤던 것이야...
성운이네 팀이 우리반 보다 가까운 2반 아이들을 물리치고 우리 1반 구역에 들어오면 우리는 창문을 열고 위에 올라가 있다가 성운이가 말 타고 기세 등등하여 우리 반 구역으로 접어든 순간 창문에서 폴짝 뛰어 성운이가 타고 있는 말위로 올라타는 것이었어...
그러면 성운이 때문에 힘이 빠진 마부는 그 자리에서 꼬꾸라 질 수 밖에 없었고 우리 1반의 마부와는 싸우지도 못하고 점멸하고 만 것이야... 이렇듯 반복해서 지드라도 성운이는 우리에게 화내지 않았고 아주 친하게 지냈다. 당시에도 학교에는 6학년 형들의 규율부가 있었으나, 성운이 때문에 1학년 교실에는 감히(?) 오질 안았다.
점심시간 무렵이 되면 항상 코끝을 자극하는 일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옥수수 식빵 굽는 냄새였다. 옥수수 식빵의 빵 냄새는 배를 더 허기지게 하였고, 그 냄새 이후에는 공부도 잘 되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면 분단장들은 양동이 하나씩을 들고 급식소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고.. 우리 반이 급식소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단연 1등으로 빵을 배급 받아 올 수있었어...
사각형 형태의 노란 옥수수빵은 파우더 때문에 중간에 바람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서 그 맛이 훨씬 맛있는 것 같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선배들에게는 강냉이 죽을 주었는데 올해부터 빵으로 급식을 하여 훨씬 맛있고 양도 많은 빵을 먹게 되었지...
가끔 결석하는 친구들이 있으면, 다른 친구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기도 하고, 분단장들이 나누어 먹기도 하였다.
배영숙 담임선생님께서는 숙제 검사는 철저하게 하시었다네... 그리고 그에 합당하는 체벌이라든지 아니면 불이익을 주시기도 하였다.
잘한 학생에게는 나선 모양의 동그라미 5개를...
아니면 도장으로 참 잘했어요! 라고 스탬프잉크로 찍어 주셨지, 그리고 못한 학생에게는 매로 체벌을 하시기도 하였다.
우리 반 중에 민병규라는 친구가 있었어...
그 친구는 숙제를 해오지 않아 선생님께서 불러서 교탁 앞으로 불려 나갔는데... 선생님께서 조그마한 매로 손바닥을 때리려 하자, 맞지 않으려고 선생님 치마를 잡고 빙빙 돌 던 생각이 나... 선생님께서도 웃으시며 용서하셨지요... 하여지간 선생님께서는 숙제를 중시하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아마 그 날은 우유빵이 나왔던 날이다. 말이 빵이지 기금으로 말하면 우유 덩어리지.
그 날도 어김없이 선생님께서는 숙제 검사를 하시었고 숙제 여부에 따라 우유빵을 다르게 배식하시었어. 숙제를 다 해온 학생에게는 하나를 덜 해온 학생에게는 절반 정도 주셨던 것으로 기억난다.
사실 우유를 반으로 쪼개는 것도 일이었다. 말이 쪼개는 것이지 이것도 전쟁이었다. 즉 반으로 쪼개는 것이 영판 힘들었던 것이야. 딱딱한 물건으로 책상위에 놓고 때리면 요리튀고 저리 튀고... 그래도 의지가 강하신 담임께서는 그 우유 식빵을 골고루 분배를 잘 하셨지. 나는 우유 빵 하나를 받아와서 집에 있는 다듬이 방망이로 다듬이 돌에 놓고 힘껏 때렸으나 다듬이 방방이가 움푹 들어가는 피해만 입고 그것을 접어야 했다..
정말 그때의 그 우유 덩어리 맛은 일품이었다. 우유의 야간 비릿한 그 맛과 향...
(나중에 우유 가루를 먹었을 때 확실하게 그 맛을 더 느낄 수있었다.)
입에 넣어도 십리 가자와 같이 오랫동안 빨아서 먹는 맛 일품이었어...
우리 가 커서 고들학교 쯤에 먹었던 오리온 밀크카라멜 보다도 훨씬 맛있었다.
이렇게 학교 생활도 잘하고, 농사일도 잘 도와드리고, 소 풀먹이는 것도 잘하고, 공부도 제법 잘하던 내가 우리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했 던 일이 있었으니 그것이 50원짜리 동전 사건이다.
당시에는 1원짜리도 건빵을 낱개로 15개씩이나 주고 하얀 십리과자도 2개씩이나 주던 시절이니까 상당히 큰 돈이었다.
큰형은 날마다 광주로 버스를 타고 광주숭일중학교를 다니셨다. (탁구 선수중 김택수씨가 숭일고를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아침마다 버스비와 기타 학용품 값을 어머니로부터 받아서 등교하게 되었고, 그 어느 날 아침.. 형은 호주머니에 50원짜리 동전을 넣다 말고, 돈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그 동전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즉 감쪽같이...
당시에 나는 방 바닥에서 책을 펴서 엎드려 숙제를 하였고... 하여간 형은 돈을 찾지 못하고 엄마에게 직쌀나게 혼나고 다시 돈을 받아 학교에 가셨지....
당시에 내 책도 들어서 털고 다했는데도 돈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한 돈이 내가 학교에서 책을 펴는 순간 책 속에 끼워져 있었다.
나를 보자 웃으면서 반기는 것처럼...
그 얼마나 반갑고 반가운 돈인가...
초등학교 다니기 전부터 나는 소를 두 마리씩이나 끌고 소 풀을 먹이려 학교에서 하교하면 책가방을 던져놓기가 무섭게 움직였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10원짜리 동전 하나를 주시곤 하였다.. 그 돈으로 십리과자나 건빵을 사서 호주머니에 넣고 소 풀을 먹이려 가면 얼마나 든든하던지...
그런데 50원짜리 동전을 주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콩당거리고, 기뻤겠는가!
돈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고 나도 외에는 아니었다... 착한 내가 엄마께서 아침에 뻔히 형에게 준 돈이라는 것을 알았으면서 나는 그것을 호주머니 속에 슬쩍 넣을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속이는 일이 되었지만...
정말 50원이라는 동전은 크고도 컷다.. 어린 내가 쓰기에는 벅찼다...
1원짜리 과자를 사먹고 40원은 종이돈으로 나머지 9원은 동전으로 바꾸어 속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러나 37원이 되던 어느날... 어머니께서는 나를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 몸에서 나는 딸랑딸랑거리는 동전의 실체에 대해 물으셨다...
나는 거기에서 온몸이 굳어지고 얼굴은 화끈거려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로 실토하고 37원이라는 거금을 어머니에게 돌려주고 말았다...
지금까지 불안 불안하던 하루 하루은 그것으로 종말을 구한 것이다.
정말 죄 짓고는 못 산다는 말이 정말 맞는 듯 했다. 나는 한동안 어머니를 뵐 면목이 서질 않았고 어머니께서는 그런 나를 침묵으로 용서하셨다... 아마 그것이 더더욱 내게 큰 반성으로 다가오게 되었고 나는 그이후로는 단 1원이라도 어머니를 속이는 일이 없었다.
지금도 그때 그 사건은 입들 수 없다..
1학년 겨울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갔을 때.. 우리는 옥수수 식빵을 더 이상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학년 때부터는 빵을 돈 주고 사먹을 사람 만 사먹으라고 했습니다.
나는 마지막 옥수수 식빵을 분배하던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에 식빵의 숫자는 우리반 학급 인원수보다도 적게 배급이 되었고..
배영숙 담임 선생님께서는 분단장들의 식빵을 부족한 다른 친구들에게 전환하여 주셨습니다. 그 이후로는 식빵을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도 옥수수 가루의 미국 원조가 1969년도에 마감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맛있는 옥수수 빵 배급을 못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길거리에 다니다 보면 옥수수 술 빵을 길거리에서 사먹어 보지만 1학년 교실 곁에서 먹던 그 향기 나는 식빵의 맛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키 크는 음식 얘기가 나왔으니 좀 더 가보죠~!
당시에 밀가루는 키가 크는 음식으로 우리는 알았고... 그래서 키 크기 위해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는 집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었고.. 칼국수, 수제비, 팥 칼국수등 밀가루 음식을 자주 해 먹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장해가 있었으니 그것은 아버지께서 밀가루 음식을 드시지 않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자매들은 아버지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한사람 당 한 수저씩 밥을 다른 그릇에 담아 아버지의 밥 한 공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야 만이 저녁에 맛있는 칼국수를 먹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밀가루 죽을 쓰는 날은 그야말로 우리집은 너나 할 것 없이 양푼 때기였습니다. 커다란 양푼에 한 가득 죽을 퍼서 먹고 또 먹곤 하였습니다. 정말 배가 남산 만할 때 까지 먹었지요..
그리고 배가 다시 고파지면 우리는 식은 밀가루 죽을 물을 조금 붓고 데워서 먹기도 하였습니다. 왜 그리 맛있던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그립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1학년은 서서히 저물어 갔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70년대가 밝아 왔습니다. 나도 2학년이 되었구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은 거닝께... 친구들이 이해해주소...
내용은 재미 없어도 친구들도 과거를 회상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네...
첫댓글 근데 그때 일이 그렇게 또렷하게 기억이 나니? 어쨌든 그때가 무척이나 그립구나...
기억력 짱!! 효남이는 이담에 늙어서 치매는 안걸리겠다~ㅎㅎ
의호가 잘쓰는 표현으로 "무담시" 눈물이 난다 효남아. 바로 어젯일같은 생생한 추억이나, 춥고 배고픈 시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등등.. 너 글 엄청 잘 쓰는구나. 냉장고 상품정도로는 너무 아깝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