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후/이화란
여행을 떠나기 전날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내일은 멀리 강원도로 여행을 떠난다는데 어떤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하니 마치 유년시절의 소풍전날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방안에는 낮 동안의 피로를 풀어내는 남편의 고단한 숨소리가 들려왔으나 봄밤을 노래하는 새소리에 뒤척이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창 밖을 내다보니 별은 손을 흔들듯 반짝이고 너부죽한 모습을 한 달이 날씨는 염려 말라는 듯 넌지시 웃어주었다. 나도 편안한 마음으로 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서산에서 회원들이 모여 출발하는 차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반 넘게 세상을 살아오며 이제 세상의 이치를 어느 정도 이해하여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이렇게 기대감이 있다니, 가슴 설레는 일이 없는 인생은 얼마나 따분할까?
곧 버스가 왔고 반가운 얼굴들이 차안에 가득했다. 차는 예산을 향해 달리고 곧 예산문학회의 회원 두 분과 귀여운 카시아가 대전에서부터 합류했다. 일행이 모두 모이자 이순수 회장님이 인사를 하고 박만진 시인님이 일정을 설명했다. 김명순 총무가 정이 담뿍 담긴 미소로 임시 사회자를 소개했다. 제95회 마삼말씀시낭송회 문학기행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잘 아는 사이지만 새로운 얼굴들이 여러 분 있어서 자기 소개를 하게 되었으며 이어서 과수원길, 고향의 봄, 옹달샘, 낮에 나온 반달 등을 불렀다. 이순수님이 골라 온 아리랑 목동은 버스 안에 감흥을 불러들였다. 이렇게 불을 지핀 자리에 우리의 분위기 메이커 배정숙과 강영숙이 가만히 있을소냐. 그 동안 간직해 온 노래 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하여 총무의 한 재롱도 웃음을 더해주었다. 박경리 문화관이 있는 강원도 원주까지는 가깝지 않은 거리이고 수원근처를 지날 때는 차량까지 밀려 참 지루한 여행일 수도 있었는데 유쾌한 리더들의 열정으로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점잖기만 하던 김정환 부회장님도 올 때 한 곡 갈 때 한 곡 부르려고 준비해 두었던 접대용 노래가 바닥이 나 새로운 레토파리를 개발해야만 했다. 배정숙의 화려한 무대매너에 감동한 극성맞은 팬이 팁을 내놓자 이에 질투한 강영숙의 혼신을 다한 도전을 보고 감전된 여성 팬이 또 팁을 아끼지 않았다. 예산에서 온 이승구 시인의 노래가 이어지자 그의 청아한 이마가 매력을 발휘했고 섹시한 목소리에 여성 팬들은 속옷을 적셔야했다. 그에 질세라 박만진 시인의 묵직하고 그윽한 노래가 이어지자 철없는 언니들이 주축이 되어 새로운 오빠부대가 결성되기도 했다.
여주휴게소에 내려 점심을 한 후 음주가무는 계속 되었다. 마이크가 좌석과 좌석을 누비며 오갈 때마다 새로운 노래가 소개되었고 평소에 얌전하던 임현순도 멀미를 이기기 위해 노래의 용광로에 한 곡을 바쳤다. 소양강처녀 딱 한 곡만 있던 은희영도 다른 사람이 부를까 염려되어 얼른 부르고 송낙인님이 빨간구두아가씨를 부르자 나는 김영수님의 빨간구두를 보며 멋진 패션에 미소를 보냈다. 박분숙님은 반주 없이 아목동아를 불러 매력을 더했고 김연희님은 시낭송할 때는 김남조 노래할 때는 최진희라는 찬사를 듣고 더없이 기뻐했다. 김영만님은 여전히 즉석 색소폰 연주를 제공했으며 회장님은 봄날은간다를 불러 멋진 날의 아쉬움을 표했다. 그래도 이순숙님은 마이크를 잡지 않았다.
흥이 가라앉을 무렵 차는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회촌마을의 토지문화관에 도착했다. 기대했던 박경리 선생님은 못 만났고 우리는 문화관 내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문학이 우리 사회에서 더욱 활성화되기를 기원하며 그곳을 나왔다.
“사고(思考)하는 것은 능동성의 근원이며 창조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능동성이야말로 생명의 본질인 것입니다.-이하생략-”
문화관의 벽에 걸린 작가 박경리님의 제언이 더욱 뜻깊은 화두가 되었다.
토지 문화관을 나와 차는 평창군 봉평면의 이효석 문학관으로 향했다. 차로 가는 동안 사회자는 가산 이효석의 출생과 유년시절 그리고 작품세계에 대해 설명을 했다. 이윽고 차는 가산의 문학관에 도착했고 회원들은 그의 유품과 육필원고 작품집 등을 보며 36세에 요절한 그의 문학적 재능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의 개성은 서구의 문물을 각별히 좋아하던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고전음악을 좋아했으며 사진을 재현한 그의 방안에는 축음기와 피아노 그리고 서양 여배우의 사진이 있어 그의 심미적인 예술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정경이나 장편 ‘화분’의 배경,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느끼는 자연과 생활의 아름다움을 그는 충만하게 누리고 살았던 듯하다. 당시 일제 강점기 아래서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있었던 그의 처지가 다소 의아하기도 했다.
사물이란 주인이 있는 듯하다. 가산이 메밀꽃 필 무렵을 쓰기 이전엔 그저 평범한 구황작물의 하나로 여겨졌던 메밀이 가산의 문학관 옆에 나란히 전시되고 가공식품으로 개발되어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메밀의 종류와 생태 그리고 쓰임새를 자세하게 연구하여 전시하는 주최측의 정성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문학관을 나온 후 근처의 식당에서 메밀묵과 메밀전에 막걸리를 곁들이고 나오다가 문득 여기가 충주집(‘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주막 이름)이라면, 하는 생각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현대의 허생원들이 가족의 손을 잡고 봄바람을 맞으며 문학관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일행은 차에 올라 숙소로 이동했다. 설악동의 스마일 모텔에 이르러 여장을 풀고 이곳까지 와서 방구들을 짊어지기에 안타까운 축들이 밖으로 나가 대포항에 이르렀다. 항구엔 건어물이 한없이 진열된 가게들이 관광객을 부르는 불빛이 대낮 같았다. 불붙은 갈탄 위에 석쇠를 얹어 조개, 새우, 도루묵 등을 굽는 연기가 밤하늘로 올라갔다. 우리도 한 자리 차지하고서 소주를 한 잔씩 했다.
다음날 아침 숙소에서 식사를 하고 양양으로 출발했다. 낙산사에 도착하여 절집을 둘러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동해의 끝 모를 바다가 시선을 잡아당겼다. 그 풍경에 푹 잠겨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안고 오죽헌으로 이동했다. 조선의 경세가이자 대학자인 율곡 선생이 탄생한 곳이며 신사임당의 친정이기도 하다. 율곡 선생이 남긴 생활에 적용되는 ‘격몽요결’의 글귀들이 오죽헌 곳곳에 걸려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擊蒙격몽이란 몽매한 이들에게 지혜를 계몽하여주는 일, 즉 교육을 말하며 要訣요결이란 그 일의 중요한 비결이라는 뜻으로 이를 한데 묶어 ‘격몽요결’이라 이름한 것이다.
버스는 연이어 휴휴암으로 향했다. 크게 소문난 절은 아니지만 손가락 바위, 연화법당 등 바위로 이루어진 지형이 좋았고 그 위 민박집 마루에서 바라본 동해의 풍광은 가슴속에 쌓인 세속의 먼지를 씻어주는 듯 했다.
여행할 곳은 많이 있었으나 연휴에 나온 차량의 정체 때문에 우리는 아쉽지만 일정을 접고 서산으로 향했다.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시낭송을 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창 밖을 내다보니 벚나무, 개나리, 목련, 명자나무 등이 생명의 등불을 달고 돌아온 봄을 축하했다. 회원들은 제각기 시를 낭송하며 삶의 아름다움에 기뻐했다.
긴 여행의 단조로움을 잊고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한 노래가 시작되었다. 얼마나 불렀을까 오락시간도 다하고 이제는 끝을 맺어야했다. 우리는 서로 이번 여행동안 있었던 일로 덕담을 했다. 예산문학의 이진수님이 졸다가 무릎을 꼬집히면서 시낭송을 해야했던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며 다시 웃음바다가 되었다. 김영수님의 두 자매 중 김연수님께서 우리 모임의 발전을 기원하며 천안에 내려 서울로 향하고 카시아도 예산에서 내려 대전으로 떠났다. 예당가든에서 저녁을 함께 하였는데 저수지에 비친 물결이 조명을 받아 우리의 즐거움처럼 일렁거렸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어느 곳에 아지트를 만들어 시내에 나오면 서로 만나고 공부도 하고 밥도 먹고 차도 마시자는 의견도 오고갔다. 언젠가는 돈을 모아 해외여행을 하자는 제의도 있었다. 모두들 행복해 했다. 우리는 마치 친형제자매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세상이 더욱 살아갈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댓글 이번 문학탐방을 다녀와서 이화란님이 쓰신 글을 올립니다.
낮에 화란언니가 갖다준 원고를 읽고 까페에 올려야 겠다고 생각하였는데 발빠른 총무님 긴글을 타이핑 하는라 수고가 많으셨네요 우리가 겪은 일들이라 실감나고 좋았어요 그죠?
자판기 두드리지 않았네요. 화란씨가 메일로 보내왔어요~~~아셨죠? 저 수고하지 않았다는 사실.
앗! 그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을 줄이야!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