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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병은 예향의 도시 남원이 고향이다. 남원은 춘향전, 흥부전, 홍도전 고전(古典)문학의 발생지이고 동편제(東便制)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김두병은 대강면 풍산리에서 김창원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했다. 대강면 사무소에 취직하여 지역 주민들의 촉망을 받으며 성실히 근무하면서 24살에 김복순 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4형제를 두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무속에 빠져, 교회를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그가, 첫 아이를 잃고 아내를 남원 동부교회에 보낸다. 아내가 교회에 가서 목사님의 기도를 받던 중 “마귀가 일절 틈타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좋아하며 무릎을 치면서 다음 주일에 동부교회에 출석하였다. 그리고 집에서 가까운 기독교 수도원 ‘동광원’에 출입하며 성 프란시스 같은 이현필 선생을 통하여 ‘순결, 순명, 청빈, 사랑의 교제, 노동의 봉사’를 배운다.
김두병 장로
김두병은 전주로 이사하여, 전주중앙교회에 출석하며 열심히 신앙생활 하였다. 그는 ‘동광원’에서 배운 대로 예수의 참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신앙인이었다. 어려움을 당한 교인을 성심껏 도와 집에 데려와서 침식을 같이하였고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교인들을 주일 예배 후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였다. 구걸하는 거지와 늘 겸상을 하였으므로 그의 집에는 거지가 끊이지 않았다.
김두병은 1944년 일제 말기에 징용병으로 끌려가 일본 북해도 북단 아오모리 광산지구에서 강제노역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선을 타고 오던 중 부산 앞바다에서 어뢰에 난파되어 기름 바다를 헤치며 가까스로 생환했다. 1941년 서리 집사, 1946년 안수집사를 거쳐 1949년 6월에 전주 중앙교회에서 장로로 임직하고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할 것을 다짐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6월 25일 그날에도, 전쟁 소식을 들으면서 교회 시설에 페인트칠 하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교회를 사랑하며 목회자를 섬겼고 부산으로 피난길을 떠났지만 교회 일이 마음 놓이질 않아 다시 전주로 돌아왔다가 붙잡혔다.
김두병 장로의 손자 김정곤 목사 가족
전북 토목관구 사무소(현 명보극장)에서 인민재판을 했는데, 학살에 가담한 자들은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삽과 곡괭이를 가지고 쳐 죽이는 천인공노(天人共怒) 할 만행을 저질렀다.
공산주의자들은 김 장로에게 “너는 믿는 사람이니 어디 죽여도 사나 보자”고 조롱하면서 마지막 소원을 말해 보라고 할 때 김 장로는 “나는 믿음으로 살아왔고, 죽으면 천국에 갈 터이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만 다만 아쉬운 것은, 나는 일흔이 넘으신 어머님이 계신 데 내가 먼저 죽는 것이요, 또 하나는 사랑하는 교우들과 함께 고별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죽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하늘나라에서 우리 모두 함께 예배드릴 날이 있음을!” 이 말을 마친 후 손을 모아 기도할 때, 곡괭이와 삽에 찍혀 순교 당했다.
이 시기에 같은 중앙교회 김용준 안수집사도, 상관면 냇가에서 인민군에게 붙잡혀 예수쟁이라고 무참히 죽임당했다. 김두병 장로는 평소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처럼,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고 교회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했으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몸으로 살아 낸 사람으로, 후손들에게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라.” 는 유언과 함께 몸소 실천한 삶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교회에 설치된 판넬
그는 1950년 9월 28일에 순교하였고 전주시 효자공원묘지에 모셨다. 유족으로는 아내 김복순 권사가 81세로 1994년에 소천했고, 장남 용신은 전주중앙교회에서, 차남 용희, 삼남 용문, 사남 용운도 교회에 충성하고 있으며, 고인의 장손인 김정곤 목사는 현재 서울 ‘송암교회’를 담임하며 순교자의 길을 걷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전주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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