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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6일 주일예배 설교
마가복음 8:22-26, 10:46-52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어느덧 사순절(四旬節) 다섯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사순절은 문자 그대로 40일의 기간인데, 이 40일에 주일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일(主日)”은 말 그대로 주님의 날,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요일인 주님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일을 가리켜 매주 맞이하는 작은 부활절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주일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작은 부활절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순절이 되면 교회는 특별히 더 예수님의 행적, 말씀, 가르침에 집중합니다. 특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집중합니다. 예수님께선 그 길을 왜 가셨으며, 어떻게 갈 수 있었는지를 묵상하며 고민합니다. 가능한 한 그 길을 이해하고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은, 이 길을 걸어간 예수를 어떻게 따를 것인지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마가복음 역시 이를 깊이 고민하는 성서입니다. 신약성경 중, 예수를 잘 따르는 것이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는 책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마가복음은 그 고민을 물씬 담은 책입니다. 이를 알 수 있는 단초(端初)가 마가복음 초반부에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은 세례를 받으신 후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의 구체적인 첫 사역으로 ‘제자들을 부르심’을 소개합니다.(1:16-20) 물론 중간에 14-15절이 껴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예수님의 구체적인 활동이라기보다는 전체 사역을 핵심적으로 요약한 주제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어쨌든, 예수의 첫 사역으로 갈릴리의 어부들인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이 두 형제들에게 예수께선 “나를 따르라”고 하시고, 이들은 군말 없이 즉각 따르는 모습이 제시됩니다. 더욱이 예수를 따라나선 이들 모두는 각각 ‘그물’, ‘아버지’와 ‘일꾼’과 ‘배’를 버리고 따랐습니다. 자신의 소유와 생계, 심지어 가족을 버리고 따를 만큼 예수를 진지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따랐다고 설명합니다. 마가복음은 이 이야기를 예수의 첫 사역으로 소개할 만큼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잘 따를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를 잘 따르는 것인지 깊이 고민하고 다루는 성서입니다.
오늘의 본문들 역시 그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이 두 군데인데 그 내용이 비슷합니다. 둘 다 예수께서 눈먼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입니다. 왜 마가복음은 눈먼 사람이 예수를 통해 눈을 뜨게 되어 볼 수 있게 되는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할까요? 기록과정에서 실수로 한 번 더 적은 것일까요? 아니면 그만큼 중요하게 여겨서일까요?
문학 기법 중에 <수미상관(首尾相關)>이 있습니다. 처음과 끝을 같거나 비슷한 내용으로 구성하는 방식의 기법입니다. ‘수미쌍관’, ‘수미상응’이라고도 하지요. 이 기법은, 비슷한 말이 반복되는 언어유희 및 운율과 같이 순수하게 재미와 즐거움을 위해서도 사용되지만, 이 재미와 함께 의미를 강조하고 부각하고자 할 때 사용됩니다. 처음과 끝을 비슷하거나 같게 함으로써 글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단락을 비교적 명확히 구분 짓고, 그 안에 있는 내용과 주제를 그 처음과 끝의 틀 안에 가두어 제시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기법입니다. 대표적인 시로는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과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등이 있고, 노래로는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사계(四季)가 있습니다.
사계는 봄으로 시작해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 다시 봄으로 끝나는데, 처음 봄과 끝의 봄의 노랫말이 똑같습니다. “빨간꽃 노란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이 노래는 2000년대 초반, ‘거북이’라는 가수가 리메이크하여 저희 세대에게도 잘 알려진 곡입니다. 당시 인기가 상당했었는데요. 원곡과 마찬가지로 곡 자체는 기본적으로 빠르고 경쾌하여 흥이 나는 곡조입니다. 그런데 잘 아시겠지만, 노래의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지요. 계절이 바뀌고, 심지어 해가 바뀌어 다시 꽃이 피고 봄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생명이 움트고 활개 치는 봄이 왔지만, 공장 안에서 밤새 재봉틀에 붙어 일해야 하는 현실, 노동의 현장을 이야기하는 서글픈 노래입니다. 이 의미는 처음과 끝에 똑같은 내용의 봄이 배치됨으로써 더 부각 되고 극대화됩니다. 사시사철 아름답게 변하는 사계와는 달리, 새해가 와도 여전히 청춘이 저물도록 공장에 갇힌 우리네들의 모습이 대조되는 것이지요. 이로써 안타까움은 더 깊어집니다.
이처럼 수미상관 구조는 그 안에 있는 내용을 부각하며 의미가 더욱 깊어지게 만들고, 그 내용들이 본래의 흐름에서 벗어나 오해될 여지를 사전에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내용과 의미를 형식과 틀 안에 가두고 포함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inclusio(포위구조, 포괄구조, 포함법)이라고도 합니다. 사순절 첫째 주일의 본문이었던 무화과나무와 성전 이야기 역시 이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눈먼 사람의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겠지요? 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반복되는 이야기들 사이에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걷는 길을 가르치는 예수님과 그 가르침에 반응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잔뜩 담겨 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8장의 본문 직후(31-38절)와 10장의 본문 직전(32-45절)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중간에 한 번 더 나옵니다.(9:30-37)
살짝 자세히 살펴본다면,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제자들의 대표격인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십니다. 그러고서 하시는 말씀이,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대제사장, 율법학자와 같은 장로들에게 수난을 당하고 결국에는 죽임당하러 가는 것이라고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물론 다시 살아날 것도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자들에겐 들리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어떻게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냐고 오히려 스승인 예수를 꾸짖고 가르치려 듭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걷는 멸망의 길이라는 것이겠지요. 이에 대해 예수께선 무리를 포함한 모두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이런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다시 올 때 나도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라는 말씀을 곁들이십니다.
이처럼 예수께선 자신이 걷는 길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며 따라오라고 하시는데, 제자들은 이를 깨닫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심지어는 완강히 거부하고 반대하는 모습이 연거푸 나옵니다.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두 번째로 가르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가르침을 깨닫지도 못했고, 묻기조차 두려워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직후 제자들이 “길”에서 서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를 놓고 다투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이로써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과 그 길, 그 삶을 얼마나 깨닫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지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세 번째 가르침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께선 이른바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중심지 곧 하나님 나라의 중심지라고 여기는 예루살렘을 향해 걷는 자신의 길은, 승리와 성공과 영광의 길이 아님을 가르치십니다. 오히려 이른바 예루살렘 사람들, 곧 이스라엘 사회 중심에 있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장로들에게 배척당하고 붙잡히고 고난받는 길임을 가르치십니다. 이뿐만 아니라 이방 사람들에게도 조롱받고 모욕받음을, 그렇게 유대인과 이방인 양쪽 모두에게 수난당하고 죽임당하는 길임을 가르치십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자신의 길은 수치와 실패, 패배와 죽음과 멸망으로 대표되는 십자가의 길임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가르침을 듣고도 깨닫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야고보와 요한, 이 형제는 예수에게 예수 다음가는 자리를 요구했고, 이를 알게 된 나머지 제자들은 매우 화를 냈습니다. “너희가 뭔데 예수님 좌우에 앉아서 우리를 다스리려고 하느냐”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예수께선 그 유명한 말씀,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는 말씀을 하시며, 제자들을 향하여 서로 섬길 것을, 특히 스스로 큰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고 가르치십니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나라의 큰 자라고 가르치십니다.
이 이야기들이 오늘의 두 본문들 사이에, 예수께서 눈먼 사람을 고치시어 눈을 뜨게 하시고 다시 보게 하시는 이야기 사이에 있습니다.
이 구조는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그리고 따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간에 예수가 걸은 길과 그 가르침에 대해 거듭 눈을 떠야만 한다는 것을 구조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눈을 뜨지 않으면 예수를 따를 수 없다고 소리 없는 음성으로 외칩니다. 그것이 설사 살아생전 예수님과 같이 먹고 마시고 자고 많은 대화를 나누며 살았던 열두제자라 할지라도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제자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왕위에 오르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오르시는 것이 가시화되자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예수를 떠났습니다. 그동안 함께했던 스승 예수를 버릴 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던 자신들의 삶도 버리고 등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신은 예수를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베드로를 대표한 제자들 모두, 남김없이 모든 제자가 예수가 아닌 다른 것을 따랐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후자의 본문에 등장하는 익명의 눈먼 사람은 그 길에서 예수를 따랐다고 최종적으로 언급합니다.
열두제자들과 바디매오, 즉 정확한 이름도 없이 그저 디매오의 아들이라고 언급되며 한 번 나오고 마는 사람 중 누가 예수를 잘 따랐을 것이라고 추측되시나요? 제자들은 맨 처음에 살펴봤듯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의 사역 초기부터 예수를 따른 자들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성서는, 적어도 마가복음은 익명의 후자가 십자가로 향하시는 예수의 길을 제대로 깨닫고 따랐다고 제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버드대 정치철학 교수인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 1953-)이 쓴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 책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라고 번역되어 출간됐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우리나라에 유명해진 그분인데요. 샌델 교수는 이 책에서 능력주의(meritocracy, 또는 실력주의)의 문제점들을 지적합니다. 그중 하나가 능력주의는 사람들을 양극으로 나뉘게 하고, 첨예한 갈등과 대립을 유발하고 심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능력으로 평가되고 능력에 따라 성과와 자원이 배분되는 것은 공정해 보이지만, 더 많이 가진 자들을 만들어내고 이들은 그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계층과 그룹을 만들어 이를 세습화하기 위한 시도를 합법적, 편법적, 불법적으로 다양하게 행하면서 이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쪽과 갈등이 심해진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능력주의는 능력·실력·성과에 따라 소득·명예·권리·권한·권력 등의 자원을 배분하는데. 자원을 가진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토대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만큼 노력했고 또 이것을 누리고 가질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야. 그러니 나한테 내놓으라 하지 말고, 그보다는 너희가 여기에 올라오도록 더 노력해. 너희 스스로 이것을 가지고 누릴만한 능력과 자격을 갖추려고 해.” 샌델 교수는 이것을 “승자의 오만”이라고 부르면서. 이 능력주의의 체제와 질서가 세계의 질서로 확고히 구축되어 있다고 안타깝게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공고히 하는 하나의 축으로, 다름 아닌 기독교 그중에서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개신교를 꼽습니다.
이들은 직업에서의 성공을 중요시하게 됐는데, 그 이유는 직업적으로 성공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것은 곧 구원받은 사람의 징표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세속적 성공은 구원받은 사람의 훌륭한 증표라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스레 성공을 추구하였고, 경제 질서를 하나님의 섭리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했고 지금도 정당화하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미국 개신교의 다수를 이루어 지금까지 이어지며 현재 미국과 세계의 질서를 정당화하는 하나의 큰 축임과 동시에 그 사상과 신념을 계속해서 제공하는 축임을 지적합니다.
즉 성공한 사람은 성공할 만한 이유와 능력 또는 선함이 있어서 성공했다는 사상과 신념, 그 질서를 개신교가 제공하고, 반대로 실패한 사람은 실패할 만한 이유와 무능력과 게으름, 약함과 악함이 있어서 실패했다는 사상과 신념, 그 질서를 개신교가 제공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렇게 개신교가 <능력주의>라는 질서와 체제를 떠받들고 있음을 비판합니다.
그리고 이 지적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으로 대표되는 제자들이 보여주는 모습에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예수와 동거동락하며 예수를 곁에서 보고 따른 제자들조차 예수가 걷는 십자가의 길은 죄인의 길이지 그리스도의 길은 절대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예배의 말씀으로 낭독한 이사야 53장이 뉘우치는 자신들의 옛 시각처럼 그 길은 하나님께 심판받는 사람이 걷는 길이지 메시아와 그를 따르는 사람이 걷는 길은 결코 아니라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연거푸 거듭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틈나는 대로 자신들이 그리스도라고 고백까지 한 스승 예수의 생각과 그 길을 자신들의 생각대로 교정하고 바로 잡으려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입장입니까?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눈으로 보고 있습니까? 혹여 우리의 눈이 멀지는 않았습니까? 눈이 먼 것도 모른 채 예수의 길을 따른다고 주장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착각하지는 않습니까?
마가복음은 독자들을 향해, 자기 자신이 예수와 그 가르침을 잘 알고 있으며 이를 잘 따른다고 여기는 우리를 향해 묻습니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진정 예수를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것을 보고 있습니까?” “정말 예수를 보고 있다면, 당신이 보고 따르는 예수는 누구입니까? 어떤 분입니까?” “강한 능력으로 무장하여 위풍당당하게 승리와 성공, 영광을 취하는 개선장군의 길을 걷는 예수를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랑과 섬김으로 온유하며 겸손하게 비천과 수치,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걷는 예수를 보고 있습니까?” “만약 전자라면, 당신은 예수를 보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제론 예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욕심을 예수에게 투영하는 것일 뿐입니다. 당신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닌 당신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 세상의 영광과 승리에 눈이 먼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사랑과 섬김, 온유와 겸손의 예수를 보고 있다면, 잘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 예수를 따르는 길이 고되고 힘들고 괴롭고 고통스럽겠지만 잘 견뎌내며 쭉 뒤따르십시오. 당신은 십자가의 길을 걷는 예수를 알아보는 예수의 참사람, 참 제자입니다. 예수를 보고 따르는 기쁨과 평화가 일평생 가득하길 빕니다. 그를 힘입어 순간순간의 걸림돌에도 걸려 넘어지지 않고 잘 걸어가길 기원합니다. 힘내십시오.”라고 마가복음은 독자들과 우리들을 향해 말을 건넵니다.
또한, 진리 곧 예수와 그 가르침을 보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도 말을 건넵니다. “당신도 예수를 진정 따르고 싶습니까? 그의 가르침을 깨닫고 이해하길 바랍니까? 그렇다면 눈을 떠야만 합니다. 우리의 눈을 다시 뜨게 하시는 예수의 손길과 그분의 말씀으로 눈을 떠야만 합니다. 그것을 간구하고 갈구하십시오. 너무 늦었다 생각해도 괜찮습니다. 지금부터 하면 됩니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사람이어도 괜찮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당신을 품으시며 당신의 자랑이 되어주십니다. 볼품없는 사람이어도 괜찮습니다. 예수께선 당신의 진실한 내면을 보십니다. 그러니 부끄러워 말고 예수께 간청하십시오. 사람들은 당신의 겉모양만 보고 당신에게 조용히 하라고, 당신은 그럴 자격이 없다고 꾸짖고 세뇌하고 공격하겠지만, 두려워 마십시오. 예수께선 그러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그 외침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 갈구를 들으십니다. 그리곤 당신에게 일어서서 자기에게 오라고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그리곤 당신의 눈을 뜨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고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치유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이십니다. 그것을 간구하고 갈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평화목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께선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정말 눈을 뜨고 시력을 회복했습니까? 진정 십자가의 길을 걷는 나를 보고 나를 따르고 있습니까? 그러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길을 걷는 나에게 오십시오. 내가 당신의 어두운 그 눈을 뜨게 하겠습니다.”
부디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셔서 시력을 회복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가득하기를, 그래서 그리스도로서 자기의 길을 걸으시는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따르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동행하는 행복과 평화가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