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 수한이 죽다 제18회
그날 저녁, 병원으로 갔던 젊은이들이 마을로 돌아왔고 마을 사람들은 진철네 평상 주위에 모여 막걸리
잔을 나누면서 결과를 들었다. 마을 아이들도 어른들 뒤에 숨은 듯 서서 들었다.
“죽지는 않는답니다.”
“그럼 많이 다쳤나?”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한 쪽 눈이 잘못되고 손가락이 몇 개 잘렸고 오른 발 종아리 쪽에 파편이
박혀서 수술해야 하는데,”
“그럼, 병신 되는구만”
어른들은 혀를 끌끌 차면서 술을 마셨다. 늘 목격하는 사고였고, 늘 사고 이후에 나누는 대화였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어른들을 위로하는 것은 술 이였던 것이다.
가을이 접어들고 추수도 거의 끝나가면서 마을은 명절을 맞으려는 분위기가 서서히 물들어 갈 무렵인
추석을 얼마 앞둔 날 수한이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동안 수한네 집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가끔
마을 여인들이 먹을 것을 들고 찾아가 위로하는 정도였지만 누구 한 사람 그 집과 수한이에 대한 말은
아끼고 있었다. 하지만 수한네 집을 드나드는 여자들의 입을 통해 이런 저런 이야기는 흘러 나왔고 그런
이야기들은 우물가에서 물을 길으면서, 강에서 빨래를 하면서, 들에서 김을 매면서 하나 둘 밖으로 나와
온 동네에 조용하게 돌아다니니 오래지 않아 수한이의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 날 수한이는 오전에 소꼴을 한 짐 해다 놓고, 그랬다. 수한이네는 암소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그 암소는 정책적으로 정부에서 가난한 집에 장려로 대여하는 소였는데 당시에는 그런 소를 한 마리 얻어다
잘 길러 새끼를 낳으면 그 새끼 한 마리를 대가로 받았고 그 후에 그 암소를 면으로 반납하면 면에서 또 다른
집으로 보내는 소였다.
수한이는 오전에 한 짐 해놓고 한 낮 더위를 피한 후 저녁나절에 한 짐 더 할 생각을 하고 강가로 나갔다.
그리고 강에 들어가 몸을 식힌 후 뭍으로 올라오는 데 발 밑에 걸리는 촉감, 그것은 벤또(도시락) 지뢰였던
것이다. 수한이는 그것을 건져냈다. 아마 장마철에 북에서 떠내려 왔거나 이쪽에서 매설해 놓은 지뢰가
장마에 드러나면서 밀려 왔거나 어쨌든 강 속에 있으면 누구라도 밟는 경우에는 생명을 잃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일단 뭍으로 건져 놓고 초소에 신고하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물가에 건져 놓고 몸을 말린 후 일어서는데 지뢰가 눈에 들어오면서 생각나는 것이 고철 수집상들이
하던 지뢰 분해하는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저거 분해하면 어느 정도 용돈도 되고 화약
은 따로 모아서 쓰면 되겠다.’는 것이었고, 뇌관만 건드리지 않으면 괜찮다는 누군가의 말도 기억나더라는
것이다.
여자들은 귀신에 씌우면 무슨 짓인들 못하는가? 하면서 그 날 수한이는 귀신에 씌었다고 입방아를 찧기도
했지만 어쨌든 사고는 그렇게 난 것이다. 분해하기 위해 돌을 하나 들어서 지뢰 바깥 면을 천천히 내리 쳐서
껍질을 찢어지게 하면 된다는 계산이었는데 그만 내리친다는 것이 하필 뇌관을 건드려 버린 것이었다.
그 사고 이후로 수한이는 학교를 그만 두었고, 한 동안 얼굴도 비치지 않더니 그 해를 넘긴 다음 해 구정에
마을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세배를 드리는 것으로 우리 곁에 섰다. 찔룩 거리며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웃을
때 한 눈은 사기 눈알이 드러나고 한 눈은 반이나 찌그러진 표정으로, 화투를 칠 때 눈 가까이로 화투장을
가져가 몇 끗짜리 인 지를 확인하는 자세로, -계속-
첫댓글 임진강에는
비가 많이 내리면 북한 지뢰가 떠내려오기도 했겠어요~ 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그랬답니다.
지로 사고가 나도 그리 놀랍지 않던 시절을 보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