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인택(吳仁澤)은 공민왕(恭愍王) 때 안우(安祐)를 따라 홍건적(紅巾賊)을 쳐서 패주시켜 공이 1등에 책록(策祿)되었으며 여러 차례 관직을 옮겨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또한 안우 등을 따라 경성을 수복하였으며, 최영(崔瑩)과 함께 흥왕사(興王寺)의 반적을 토벌하여 공훈이 모두 1등에 책록되었으며, 단성양절공신(端誠亮節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후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어 밀직부사(密直副使) 김달상(金達祥)과 함께 왕에게 총애를 받고 기밀을 마음대로 하여 내상(內相)이라 불렸다. 이때 나라에 여러 해 동안 전쟁이 끊이지 않아 내탕고(內帑庫)의 재물이 모두 고갈되었으며 덕흥군(德興君)이 또 침입하자 공이 있는 자들은 모두 관직으로 상을 받게 되었다. 오인택과 김달상은 우선 문무관을 첨설(添設)할 것을 건의하고 마침내 〈자신들이〉 관리를 선발하였다. 정벌에 나선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승진을 하여 사람들이 종군하기를 즐겼으나 청탁이 크게 성하였으며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져 공장과 천예(賤隷)들도 관직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고 관작(官爵)이 크게 넘쳐났다.
재상 중에 왕이 남쪽으로 피난을 갈 것을 권하는 자가 있었는데 왕이 자못 그럴듯하게 여기니 오인택이 말하기를, “홍건적의 난 때 〈전하께서〉 남쪽으로 파천(播遷)하시고 서울을 수복할 수 있었던 것은 저들이 실로 교활한 도적이어서 사람들이 분한 마음을 품고 구름같이 모여 죽음을 무릅쓰고 섬멸했기 때문입니다. 덕흥군은 홍건적과 비할 바가 아니니 지나치는 곳은 모두 그의 민으로 삼을 것이니 전하께서 남쪽으로 가신다면 도성(都城) 이북에서는 누가 전하를 따르겠습니까? 오늘의 계책은 친히 정벌하는 것이 상책입니다.”라고 하니, 논의가 마침내 그쳤다.
왕이 최영·유탁(柳濯)·경천흥(慶千興)을 불러 말하기를, “오인택과 김달상은 전주(銓注)를 제멋대로 행하여 현량(賢良)들은 버려두고 일가친척을 등용하여 공로를 기록하지 않고 오로지 뇌물만 보고 있다. 공장(工匠)과 같은 천류(賤類)가 중외(中外)에 널리 깔려 있어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고 재앙을 불러오는 것이 이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므로 내가 심히 안타까워하는 바이다. 마땅히 물러나게 하여 먼 곳에 보내어 하늘의 뜻에 답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오인택과 김달상은 마침 도당(都堂)에 있었는데 중사(中使)를 보내어 교지를 선포하고 오인택은 청풍(淸風)으로 유배 보냈으며, 김달상은 옥주(沃州)로 유배 보내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오인택의 아들은 전 군부판서(軍簿判書) 오영주(吳英柱)와 삼사판관(三司判官) 오영좌(吳英佐)인데, 그 어미와 함께 맹인 석천록(石天祿)에게 점을 치며 말하기를, “최영과 이귀수(李龜壽)가 어떤 때에 쫓겨나겠는가?”라고 하니, 석천록이 말하기를, “오래 기다리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새어나가자 오영주는 기계(杞溪)에, 오영좌는 천녕(川寧)에 유배되었으며, 석천록도 함께 장을 쳐서 유배 보냈다. 신돈(辛旽)이 정권을 잡자 〈오인택을〉 불러들여 지도첨의(知都僉議)에 제수하였다.
오인택과 경천흥 등이 신돈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였다가 일이 새어나가 순군에 갇히고 상주(尙州)로 장을 맞고 유배되었으며, 오영좌도 장을 맞고 수원(水原)으로 유배되었으며, 모두 적몰(籍沒)하여 노비로 삼았다. 후에 오인택이 신돈이 자신을 반드시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듣고 오영주, 오영좌와 함께 도망하였다. 신돈이 양광도, 전라도, 경상도에 사신을 보내어 〈그들을〉 체포하려고 하였으며, 또 오인택의 처자를 가두었다. 판사 옥천계(玉天桂)가 오인택의 어린 아들을 기르고 있었는데 신돈이 〈그가〉 오인택과 함께 모의한 것으로 의심하여 순군에 가두고 고문하여 죽였다. 이윽고 오인택이 붙잡혀 장을 맞고 사리성(思利城)의 봉졸(烽卒)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