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를 처음 만난 것은 80년대 후반, 군사정권이 종말을 고하기 위해 마지막 씻낌굿을 하던 쯤으로 기억합니다. 지저분한 분식집에서 기억나지 않는 누구에겐가 건네받았던 시집은 투박한 판화 그림으로 멋없게 장식되어 있었고, 표지 뒷쪽의 빈 자리는 얼굴 없는 혁명시인에 대한 호기심을 한껏 자극하고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그 시집은 제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박노해의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만이 보다 세련된 모습으로 읽혀지지 않은 채 제 책장에 꼳혀 있을 뿐입니다. 몇 편 뒤적이다 그대로 덮어 놓았던 두 번째 시집을 보며, 삶이 죽으면 글도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보다 절실해지더군요.
그리움
공장 뜨락에 따사론 봄볕 내리면 휴일이라 생기 도는 아이들 얼굴 위로 개나리 꽃눈이 춤추며 난다
하늘하늘 그리움으로 노오란 작은 손 꽃바람 자락에 날려 보내도 더 그리워 그리워서 온몸 흔들다 한 방울 눈물로 떨어진다.
바람 드세도 모락모락 아지랑이로 피어나 온 가슴을 적셔 오는 그리움이여 스물다섯 청춘 위로 미싱 바늘처럼 꼭꼭 찍혀 오는 가간에 울며 떠나던 아프도록 그리운 사람아 「박노해, 노동의 새벽」
제가 살던 충남 당진은 지금 생각해도 축복받은 땅이었습니다. 비가 폭포처럼 쏟아져도 물에 잠긴적 없었고, 가을이면 언제나 황금색 들판이 풍년을 알려왔습니다. 겨울이면 봄철 모내기를 위해 막아 놓은 보뚝 위에 광장같은 얼음판이 펼쳐졌고, 개구쟁이들은 점심도 잊은 채 그 곳에서 한나절을 살았던 기억들.... 아무도 없는 집 쪽문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다가 갑자기 소들평야 끝으로 까맣게 밀려오는 먹장구름을 보며 떨었던 기억, 결국 그 먹장구름은 내 머리 위까지 덮어 함석집을 요란스럽게 투드리고 지나갔던 기억 기억들... 불덩이 같은 신열로 아무도 없는 방 한 칸을 지키다가 갑갑증이 치밀어 미닫이문을 열치고 바라본 앞마당에, 밉살맞도록 이글거리는 아지랑이를 바라보다, 아직은 찬 기운이 남은 나무마루에 그대로 볼 한 쪽을 구겨 박고 그 환한 세상을 부러워 했던 기억....
시의 감상은 자기 체험의 확대를 통해 보다 구체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들판 끝에서 밀려오는 먹장 구름을 보며 공포감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시어로 선택된 “먹장구름”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기 힘들 것이며, 신열로 휘청이며 아지랑이를 바라보지 못했던 사람은 조금씩 가슴을 축여내는 갑갑증을 느껴내기 힘들 것입니다.
노동에 지친 소녀들이 모처럼 맞은 휴일... 내가 신열에 들떠 망연하게 바라보았던 아지랑이를 그 소녀들은 어떤 심정으로 마주하고 있을까? 처음 품었던 첫 사랑 남정네를 가슴아프게 떠나보내고, 힘없는 웃음으로 날려 보내는 개나리 꽃눈.... 함께 가난할 순 없다며 떠난 사람이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함께 소녀의 가슴팍을 쥐어뜯을 것인데, 봄철 아지랑이는 왜 그토록 영롱하게 이글거리는지....
내가 통과해온 시절을 되돌아 보면 노동자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두 노부모님은 평생를 농삿일로 몸이 망가졌지만, 부모님과 함께 살 때도 전 늘 반들거리며 농삿일을 회피했습니다. 공장의 언저리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노동의 새벽’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노동의 땀방울과, 일한 만큼 받지 못해 삶이 고단한 노동자였던 기억이 없으니, ‘노동의 새벽’, 그 못생긴 시집을 끼고, 곱씹었던 20대의 경험들은 한낱 치기어린 감상이었을까?
시다의 꿈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 손으로 장밋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피 흐르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아직은 시다 미싱대에 오르고 싶다 미싱을 타고 장군처럼 당당한 얼굴로 미싱을 타고 언 몸뚱아리 감싸줄 따스한 옷을 만들고 싶다 찢겨진 살림을 깁고 싶다
떨려오는 온몸을 소름치며 가위질 망치질로 다짐질하는 아직은 시다. 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 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싶은 시다의 꿈으로 찬바람치는 공단거리를 허청이며 내달리는 왜소한 시다의 몸짓 파리한 이마 위으로 새벽별 빛나다
「박노해, 노동의 새벽」
전 다행스럽게도 내가 감당해 내지 못했던 노동의 경험을 소중한 책 한 권을 통해 하게 됩니다. 표지까지 흰색바탕에 ‘전태일 평전’이란 제목만 씌여 있어 수식이 필요 없는 고인의 삶을 엄숙하게 표현했고, 종이의 질도 좋아져서 세월이 흘러 누렇게 바랠 염려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 책 한 권을 통해 여공들이 손바닥만한 다락 방에서 모진 날을 어떻게 견뎌냈는 지를 읽었고, 그 책 한 권을 통해 요지부동이던 현실의 절벽이 어떤 사람들의 힘에 의해 조금씩 조각나기 시작했는가도 읽었습니다.
21세기.... 어쩌면 재단사의 꿈을 안고 철야를 버티던 시다들은 이제 우리 곁에서 더 이상은 볼 수 없을지 모릅니다. 고통에 뒤틀리고 짓눌린 삶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렸다고 자위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국가부도를 슬기롭게 극복해내고, 선진국을 향한 고비에서 마지막 시련을 견뎌내고 있는 중이라고 억지로 억지로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노동의 새벽을 힘겨운 희망 하나로 버텼던 그들이 어쩌면 서울역 지하도를 메우고 있는 노숙자들인지도 모르고, 수백만의 신용불량자가 되어 21세기 우리 눈앞에 엄연한 현실로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혁명을 꿈꾸던 시인의 삶은 편안해진 가운데 색바랜 채로 우리 곁에서 멀어졌지만, 어두운 구석 방에서 가슴조리며 시집을 읽어냈던 사람들에게 그 혁명의 과제는 그대로 남겨져 있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