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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죽도 그늘 아래
정 석 제
한 여자가 앉아 있다. 가시리로 가는 길목, 협죽도 그늘 아래.
협죽도 그늘 아래 치잣빛* 저고리와 보랏빛 치마를 곱게 차려입은 여자가 앉아 있다. 여자의 옷은 칠순 잔치에 맞춰 친정 조카가 마련해준 것이다. 여자는 오십여 년 전에 연분홍 치마저고리를 차려입고 가시리에서 구고례(舅姑禮)*를 치렀다. 그때의 신부가 앉아 있다. 큰길에서 보일 듯 말 듯한 곳에, 협죽도 그늘에 가려 눈에 띌 듯 말 듯한 모습으로 나무 빛깔을 하고 있는 시멘트의자 위에 앉아 있다.
한 여자가 앉아 있다. 의자는 차라리 시멘트 색깔 그대로 놔두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어설픈 나이테를 그려 넣고 의자를 세운 날짜를 적어 넣은 사람은 그 의자를 세움으로써 스스로가 원목 나이테를 한 시멘트의자 같은 시대의 인간임을, 또는 그 자신이 바로 원목 나이테를 하고 있지만 시멘트의자나 다름없는 존재임을 알리고 있다. 그 의자 위에 앉은 여자의 등 뒤로 가시리로 가는 길이 보인다. 그 길은 의자가 세워지던 해에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다. 길은 아이 밴 여자의 배처럼 불룩하다가 가라앉고 두 갈래로 갈라지다가 이윽고 천천히 굽어 끝이 보이지 않는다. 두 갈래의 길이 자루의 주둥이처럼 폐곡선*을 이루며 만나는 곳에 가시리가 있다. 여자는 가시리에서 생의 4분의 3 가까이 살았다. 여자에게는 아이가 없다. 그런데도 여자는 가시리에 살아온 대부분의 기간에 ‘어머니’로 불렸다. 여자의 시숙*들에게는 자손이 많았다. 그 조카들이 여자를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집보다는 나중에 세워진 새집에서 산다고 해서 ‘새집 엄마’라고 불렀고 줄여서 ‘새점마’로 불렀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여자를 첩이나 재취*로 오해할 수도 있는 ‘새점마’는 언제부터인가 동네 사람들이 여자를 부르는 일반적인 호칭이 되었다. 그래서 새집 엄마는 누구의 어머니도 아니면서 동네 사람 누구보다도 어머니라는 호칭을 많이 들었다. 열두 남매를 둔 둘째동서보다도 더 많이. 세월이 흐르고 흘러 자손들의 자손이 태어나자 그 아이들은 새집 엄마를 ‘새집 할머니’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새집 할머니라고 부를 아이들은 대부분 서울에서 자랐고 또 새집 할머니라는 맡은 죽여서 부르기 힘들었던 까닭에 ‘새점마’처럼 부르기 쉽고 사랑스러운 이름은 끝내 지어지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새점마라는 호칭 때문에 지은 지 오십 년이 넘은 새점마의 집을 ‘새집’이라고 불렀다. 시멘트와 술레이트와 벽돌로 해마다 새로 지어지는 집들 속엥서 새점마의 묵은 기와집만 새집으로 불렸다.
한 여자가 앉아 있다. 그 여자는 가시리에서 살아온 오십여 년 동안 새집에 사는 엄마로 불렸다. 그 새집 엄마가 자신의 어머니가 아님을 알고 있는 동네 사람들은 가시리(佳詩里)라는 동네 이름이 시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도 대충 알고 있다. ‘가시말’이라는 원래의 이름을 한자로 옮긴 사람이 시를 좋아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시’라는 마을 이름은 마을이 워낙 외진데다가 읍내의 가장자리에 있어서 지어졌을 것 이라고 도시에서 지리선생을 하는 새점마의 친정조카가 알은체했다. 그렇지만 친정 조카는 가시리에 겨우 두 번 왔을 뿐이다. 조카의 아버지, 친정 오빠는 서너 해 전에 죽었다. 처음 왔을 때 조카는 아버지의 손에 새파란 호두처럼 매달려 있었다. 아하, 사십 년 전일까, 사천 년 전 일까. 오빠는 이런 혼인은 무효이니 당장 나를 따라가자고 말했다. 누이동생은 울었다. 오빠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무효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힘없는 오빠가 늙고 병든 시아버지에게 대드는 광경이 눈앞에 떠오르는 바람에 울었다. 오빠는, “도대체 신행* 며칠을 함께 보냈다고 십 년을 처녀로 늙게 만들고, 이제 얼마를 더 청상과부로 살게 해야 잘난 반가(班家)*의 체면이 세워지겠느냐, 홍살문*이라도 세워지면 만족하겠느냐, 개명천지*에 이 무슨 썩어빠진 양반 놀음이냐”고 동구 밖으로 마중 나온 여동생에게 버럭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그 말이 동네 안까지 들렸을 리가 없건만, 들렸다 해도 동네 가장 아래쪽에 있는 시집의 담을 넘었을 리도 없건만, 오빠를 만난 시아버지는 인사치레를 한 후 단 한 번도 입을 떼지 않았다. 시숙도 말이 없었다. 오빠도 두 사람의 면전에서는 아부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빠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무슨 말을 못하는지 알고 있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누이, 동서들, 여자와 나이가 비슷한 시댁 장조카 모두. 오빠는 수백 리나 떨어진 도시의 가난한 선생이었다. 집에 다니러 왔다가 누이의 딱한 처지에 대해 듣고 흥분해서 달려오기는 했지만 그 낯설고 먼 도시로 누이를 데려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친정에는 늙은 아버지가 시아버지처럼 병석에 누워 있었다. 시집에서 가란다고 해도 누이는 친정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버지는 결코 누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오빠는 허탕을 치고 돌아가면서 아이를 가진 여자처럼 불룩이 솟았다가 휘어져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가는 동안 열 결음에 한 번씩 멈추었다. 그때마다 하늘과 땅을 향해 한숨을 내쉬며 누이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손에 이끌린 예닐곱 살짜리 소년은 아버지를 올려다보고 울고 있는 고모를 돌아다보곤 했다. 그 뒤 오빠는 다시 오지 못했다.
한 여자가 앉아 있다. 가시리로 가는 길목, 협죽도 그늘 아래 협죽도는 여름부터 가을까지 불그죽죽한 꽃을 피워낸다. 푸른 잎에 붉은 꽃잎이어서 잘 어울릴 법도 하건만, 잎은 잎대로 꽃은 꽃대로 거세게 피어 외지 사람들은 그 꽃을 볼 때마다 이름을 묻고, 이름을 들은 다음에는 촌스럽다고 흉을 보기도 한다. 협죽도의 꽃잎이 붉기만 한 것은 아니다. 붉다고 해서 그냥 붉은 것도 아니다. 홍색·자홍색·황색·흰색·황백색 꽃도 있다. 협죽도의 꽃은 어른 집게손가락만 한 지름의 화관에 윗부분이 다섯으로 갈라져서 수평으로 퍼진다. 어쩐 일인지 아이들은 그 꽃나무에 독이 있다고 믿고 있다. 협죽도는 햇볕이 잘 들고 습기가 많은 사질토에서 잘 자라는데 그게 독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도 아니다. 협죽도는 포기나누기나 꺾꽂이로 번식하는데 그건 또 독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협죽도 낱낱의 꽃이 청승맞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치명적인가. 협죽도는 공해에 강하고 가지나 잎, 꽃을 강심제*로 사용한다. 그런 사실이 독과 무슨 상관이 있을 리 없다. 협죽도에 상처를 내면 하얀 즙액이 흘러나온다. 어느 때에 소풍을 간 아이들 가운데 하나가 젓가락이 없었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협죽도의 가지를 꺾어서 젓가락으로 만들어 김밥을 먹었다. 그 아이가 다음 날 죽었다. 그때부터 그렇게 믿게 되었다고 한다. 협죽도 그늘 아래에 잠이 들었다가 꺾어진 가지에서 흘러나온 즙이 벌린 입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아이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꽃가루만으로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한다. 길가에 흔하디흔하게 핀 협죽도가 아이들에게는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이승과,저승에서 모두 바라볼 수 있는 꽃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이들은 협죽도 아래에 앉는 것조차 위험하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누가, 왜 협죽도를 심는단 말인가. 아이들이 위험성을 깨닫기 전부터 삶이나 죽음처럼 협죽도는 이미 심어져 있었고 자라고 있었고 번성하고 있었다. 그 아래에 있는 의자는 협죽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외지 사람이 제멋대로 세운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크 의자는 늘 비어있었다. 여자는 협죽도를 볼 수 없는 곳에서 시집왔다. 그래서 협죽도 그늘 아래에 태연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한 여자가 앉아 있다. 가시리로 가는 길목, 협죽도 그늘 아래. 협죽도 앞에는 버스 정류장 표지가 서 있다. 버스는 하루 네 번 온다. 언젠가 겨울에 버스가 눈에 미끄러져 논으로 떨어진 적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동네에 있는 바퀴 달린 것들은 몽땅 끌고 달려들어 미스를 길 위에 올려놓았다. 다친 사람도 없었고 버스도 크게 망가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버스회사는 며칠 동안 버스를 배차하지 않았다. 버스가 나중에 다시 다니기는 했지만 가시리 안까지는 들어오지 않고 가시리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아스팔트길에 멈추었다. 계절이 바뀐 뒤에도 길이 좁고 험하다는 이유를 들어 제멋대로 들어오거나 말거나 했다. 동네 사람들은 그걸 두고 크게 문제를 삼지 않았다. 가시리는 길 끝에 있는 마지막 동네이고 손님이 별로 없어서 버스가 이익을 내지 못한다는 걸 가시리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기실 옛적부터 가시리 사람들에게는 밖으로 나다닐 이유가 별로 없었다. 가시리에서 나는 것만 먹고도 그럭저럭 살 수 있다. 가시리에서 나는 것만 입고도 그럭저럭 살 수 있다. 가시리에서 보고 배우는 것만으로도 그럭저럭 살 수 있다. 남는 것은 없지만 모자랄 것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동네 사람들이 가시리를 무명(木棉)* 열매에 비유하기도 하고 떼도둑의 소굴 같은 곳이라고 험담할 때도 있다. 가시리에서 유난히 많이 났던 무명의 열매는 달아서 먹을 수 있고 익으면 밤송이처럼 한껏 벌어져 하얀 솜을 토해놓아 이불이며 옷을 짓게도 한다. 수백 년 전에 큰 가물이 들었을 때 가시리에서 큰 도둑이 일어났다고도 한다. 그 도둑을 잡기 위해 관아에선 무진 애를 썼지만 도둑의 이름을 듣고 도둑이 되려고 모여든 사람들의 수가 관아 사람 전체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가시리로 가는 길은 험하고 좁았다. 한 사람이 지키면 백 명이 덤벼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관아에서는 가시리로 들어가는 길을 가시나무로 둘러막았다. 가시나무가 자라 무성한 숲을 이루도록, 여섯 사또가 갈리도록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때부터 가시리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시리 입구 버스 정류장의 나무무늬를 한 시멘트의자에 앉은 여자는 거기서 열 명의 군수가 오가고도 남을 세월을 보냈다. 가시리 입구에는 가시나무가 숲을 이루도록 무성했다는 전설을 입증할 가시나무는 한 그루도 없다. 가시나무는 여자의 가슴속에서 숲을 이루었다. 가시리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한 여자가 앉아 있다. 가슴속에 가시나무가 숲을 이룬 여자는 자신의 칠순 잔치를 끝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배웅하러 나왔다. 차를 타고 온 사람도 있었고 버스를 타고 왔다가 아스팔트 도로에서 십 분 쯤 걸리는 가시리까지 걸어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여자의 친정 식구와 시집 식구 사십여 명이 모였다. 친정 식구는 하나뿐인 오빠의 자손과 이질(姨姪)*들이다. 여자의 오빠와 여동생들은 모두 죽었다. 시집 식구는 여자의 두 시숙의 며느리와 자손들이다. 큰시아주버니와 동서는 살았으면 백 살을 바라보았을 터이다. 친정 식구들은 여전히 친정 동네인 몽탄(夢灘) 가까이 살고 있어서 조카 식구를 빼고는 모두 버스를 타고 왔다. 서울 가서 사는 시집 식구들은 차를 맞춰서 함께 내려왔다. 환갑이 넘은 질부(姪婦)*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농을 던졌다. “새점마, 우리가 다 궁금해하는 게 있수. 혹 새점마 처녀 아니우?”
한 여자가 앉아 있다. 치잣빛 저고리, 보랏빛 치마가 잘 어울린다. 바람이 여자의 머리카락을 살짝 흩트린다. 여자는 처녀처럼 수줍게 옷깃을 여민다. 여자의 나이는 일흔 살이다. 여자를 처녀라고 부를 사람은 없다. 여자의 이름도 처녀가 아니다. 그렇지만 여섯이나 되는 질부와 질녀 들은 여자가 처녀인지 아닌지 궁금해한다. 처녀는 스무 살 때에 가시리로 시집왔다. 신랑은 처가에서 신행을 한 뒤에 타고온 말을 후행(後行)*에 맡기고 곧바로 서울에 있는 학교로 향했다. 신랑은 셋째아들로 대학에 막 진학한 참이었다. 신랑의 아버지, 곧 처녀의 시아버지가 될 사람은 원래 근동에서 이름난 부잣집의 셋째 아들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스무 살이 되어 결혼을 하자마자 당신의 형님으로부터 삼태기* 하나와 머릿수건 하나만 나눠 받고 살림을 따로 나야 했다. 그는 읍내 사람들이 가기조차 꺼리는 가시리로 들어가 수슷대로 집을 지었다. 백면서생*에 아는 것이라고는 글밖에 없었던 그는 험한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체면을 돌보지 않고 농사일이며 장사 일에 달라붙었다. 그는 입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든 삼켰고 주먹 안에 잡히는 것은 결코 놓치지 않았다. 문리(文
理)*가 터져 있던 그는 힘 있는 사람들과 교제를 했고 세상의 흐름을 잘 알았다. 세상이 크게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그의 재산은 널뛰듯 늘어났다. 그렇게 해서 부자 소리를 다시 듣게 됐지만 하고 싶었던 공부를 다 하지 못했다. 그의 맏아들 역시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를 도와 온갖 풍상을 함께 겪는 바람에 학교는 문턱에도 가지 못했다. 늦게 본 셋째아들에게 아버지는 공부만 하게 했다. 셋째아들은 꼭 그맘때의 아버지처럼 백면의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멀리 유학 보내는 대신 장가를 들여 손자를 보고 싶어 했다. 처녀의 아버지는 봄이면 복숭아꽃이 만발하는 몽탄의 꼿꼿한 유학(幼學)*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집안을 따지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신랑감이 학생이라는 말에 쉽사리 혼담이 성립됐다. 초행*을 치르고 간 신랑은 방학이 되면 재행(再行)*을 오기로 되어 있었다.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재행 왔을 때는 초행과는 달리 말을 타고 오지 않았다. 신랑은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과 함께 선뜻한 저녁 바람처럼 돌아왔다. 입으면 훤칠하고 환하게 태가 나던 학생복은 어디서 바꿔 입었는지, 바꿔 입고 살아남아야 했는지는 몰라도 거지꼴이나 다름없었다. 그날 저녁 신부의 아버지는 두 사람을 불러 앉혔다. 신부에게는 시집으로 갈 준비를 하라고 했고 신랑에게는 경우가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시집으로 보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음 날 새벽 두 사람은 가시리로 길을 떠났다. 신랑은 가는 도중에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차림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논에 들어가서 검은 진흙을 가져와서 처녀의 얼굴에 발라주었다. 두 사람은 세 개의 산을 넘고 네 개의 여울을 건너고 백릿길을 걸어 가시리에 도착했다. 신부는 보퉁이에서 꺼낸 치마저고리로 갈아입고 구고례를 겨우 갖추고는 시어머니와 함께 안방에서 첫 밤을 보냈다. 당시 풍습대로 일 년 뒤에나 시집을 오게 되어 있던 까닭에 미처 신방이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신랑은 아버지와 형 앞에 앉아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말하고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다가 조카들과 함께 잠을 잤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신부는 신랑과 눈이 마주치기라도 할까 싶어 부엌에 늘 숨어 있었다. 새로 지은 옷을 건네줄 때에는 조카들에게 부탁했다. 얼마 되지 않아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신부의 시집은 동네에서 가장 마당이 넓다는 이유로 공회소가 되었고 시아버지는 인민위원장이 되었다. 혹 시아버지가 세상이 흔들릴 때 늘 해오던 것처럼 바뀐 세상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식구들, 특히 세 아들, 그 가운데서도 점령지인 서울에서 도망쳐 온 셋째아들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도 신랑은 인민군이 읍내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곧바로 뒷산에 파놓은 구덩이로 옮겨졌다. 신부는 하루 한 번 아무도 모르게 주먹밥을 해서 산으로 갔다. 그 일만은 동서도 대신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주먹밥을 놓고 오는 짧은 시간 동안 신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동네 사람들은 신랑이 돌아온 줄 모르고 있었고 신부도 몰랐다. 신부는 친척집에 다니러 왔다가 전쟁 봉에 머물게 된 처녀로 소개됐다. 그래서 신부는 다시 처녀가 되었다. 이어지는 고난과 두려움과 황망함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처녀는 동네에 있는 어떤 처녀보다도 더 처녀처럼 보였다. 길다면 일생처럼 길고, 지나고 난 뒤 세어보면 몇 달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흐른 뒤, 세상이 다시 바뀌었다. 처녀의 시아버지와 시숙들은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갔다. 집으로 돌아온 신랑은 식음을 전폐하고 내내 사랑방에 앉아 있었다. 며칠 뒤, 신랑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읍내로 나갔다. 온 읍을 통틀어 몇 명 되지 않는 대학생이었던 그는, 타의 모범을 보이며 학병 입대를 자원했다. 다음 날 그의 아버지와 형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 처녀의 신랑이 군인들과 함께 지프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프에는 입대를 권유하는 붉은 글씨가 쓰인 현수막과 스피커가 달려 있었고 신랑의 목은 잔뜩 쉬어 있었다. 처녀는 물에 찬밥을 말아먹는 일행에게 다가가서 풋고추와 된장을 올려놓았다. 신랑은 그때 잠시 처녀에게 눈길을 보냈고 처녀에게만 들리도록 한숨을 쉬었다.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부엌에 들어서는 처녀의 귀에 자네 마누라냐고 묻는 군인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죄짓지 않은 신랑이 죄지은 사람처럼 그렇다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렇게 이뻐서 어디 발이 떨어지갔어” 하는 소리와 “걱정 말라우. 내가 잘 돌봐줄 테니까” 하는 소리와 함께 걸쭉한 군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신랑에게 하는 소리인지, 자신들끼리 하는 말인지, 아니면 처녀에게 하는 말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처녀는 분했다. 잘생긴 신랑이, 공부만 알고 세상은 모르는 신랑이, 부잣집 아들로 얌전히 자라온 신랑이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 분했다. 부엌에는 처녀 말고도 대여섯 명의 여자들이 숨을 죽이고 모여 있었다. 그들의 남편, 아버지는 무사했다. 처녀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여자들을 지나쳐 뒷문을 빠져나가 뒤꼍으로 갔다. 막 동글동글한 열매가 익기 시작하는 배나무 아래에서 소리 죽여 울었다. 그런데 꿈결인지 생시인지 신랑이 처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신랑은 무슨 말인가 하려 했지만 목이 쉬어 말을 하지 못했다, 신랑은 몇 번 목을 가다듬다가 포기하고는 처녀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처녀는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고 그 바람에 신랑이 손을 잡았다 놓은 줄도, 가는 줄도 몰랐다. 처녀는 가슴을 억누른 채 뒤꼍에 혼자 남아 있었다. 크르륵 하고 목에 가시가 걸린 짐승의 소리처럼 시동이 걸리는 소리에 놀라 처녀가 뛰어나갔지만 부모·형제·조카의 눈물 어린 전송은 끝난 지 오래였고, 신랑을 태운 차는 두 갈래에서 하나로 합쳐지며 뱀처럼 휘어져 보이지 않는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지프가 사라지기 직전 누군가 손을 흔들었는데 그것이 신랑의 손인지 다른 군인의 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바로 그 장면은 수백 번 이상 되풀이해서 꿈으로 되살아났다. 꿈에서 신랑은 언제나 젊었고 목이 쉬어 말을 하지 못했고 슬픈 눈으로 처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랑의 머리 위에는 막 여물기 시작한 돌배가 흔들거렸다. 그 뒤로 처녀의 신랑은 처녀에게로 오는 다른 길은 모두 잊은 듯 꿈길로만 처녀에게 왔다.
일생 동안 수백 번이나 같은 꿈을 꾸어온 여자가 앉아 있다. 가시리로 가는 길목, 협죽도 그늘 아래. 그 꿈의 주인공이 전장으로 가고 난 뒤 다시 인민군이 내려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번 부역자로 몰렸던 시아버지는 소문을 듣자마자 피난을 서둘렀다. 만일 인민군이 들어온다면 이번에는 아들을 군대에 내보낸 아버지로 잡혀갈 게 뻔했다. 가시리에서 피난을 떠난 식 구는 처녀의 시집뿐이었다. 황소에 멍에를 지우고 달구지에는 무거운 짐과 임신부를 태웠다. 처녀는 물론 임신을 하지 않았다. 처녀의 동서들은 모두 아이를 배고 있었다. 처녀는 어린 조카를 업고 안고 손을 쥔 채 달구지를 따라 걸었다. 처녀의 친정 동네 앞에서 잠시 행렬이 멈췄다. 시아버지가 발이 물집투성이가 된 처녀를 불렀다. 친정으로 돌아가 있어라. 시아버지는 나직한 목소리로 일렀다. 처녀는 몸을 반쯤 돌리고 서 있다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세 번, 네 번 거듭 흔들었다. 곧 태어날 아이를 생각해서 입이라도 하나 줄여야 하는 처녀의 동서들은 좋은 낯을 하지 않았다. 일행은 다시 묵묵히 움직였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갛 무렵, 피난 가는 사람들 앞에 수숫대가 무성한 고개가 나타났다. 갑자기 수숫대 뒤에서 온몸에 풀을 꽂은 군인들이 튀어나왔다. 놀란 일행은 모두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군인들은 얼굴이 숯처럼 검거나 머리카락이 노랬고 이상한 말을 썼다. 군인들은 총을 휘두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무어라 외쳐댔다. 식구들은 모두 떨고만 있었다. 잠시 후 여자의 시숙이 자신이 아는 유일한 외국어, 곧 일본어로 자신들은 죄가 없으니 제발 죽이지만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군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총을 내리고는 그에게 서툰 일본말로 “돌아가라”고 했다. 피난민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때 군인
가운데 한 사람이 일본말을 하는 군인에게 임신한 여인의 배를 가리키며 무어라 말하고는 자기들끼리 낄낄거렸다. 일본말을 하는 군인이 여기에 처녀가 있느냐고 물었다. 피난민들은 얼굴을 마주 보았다. 피난민 속에는 여자가 예닐곱 명이나 되었지만 한 사람은 환갑에 가까웠고 두 사람은 임신부였으며 나머지는 열네댓 살이 고작이었다. 피난민들은 대답을 찾지 못했다. 군인은 정색을 하고 천천히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시숙이 나섰다. 떠듬거리는 목소리로 있다고 대답했다. 모든 사람의 눈길이 한 사람, 곧 처녀를 향했다. 처녀는 죽을힘을 다해서 쓰러지지 않으려고 버텼다.
시집을 가서도 처녀라고 불렸던 여자가 앉아 있다. 가시리로 가는 길목, 협죽도 그늘 아래. 군인들은 멧돼지처럼 온몸에 풀을 꽂고 있었다. 군인은 여자를 가리키며 당신들의 딸인가 물었다. 남자들은 엎드린 채 일본말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혼자 서 있던 여자는 일본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수십 년 뒤에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군인이 무어라고 다시 물으려는 순간, 포성이 가까운 데서 울려 퍼졌다. 군인들은 놀란 거미 새끼처럼 흩어졌다. 군인 하나가 총을 흔들면서 “돌아가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들은 홀연히 사라졌다. 고갯마루에는 겁에 질린 피난민밖에 남지 않았다. 포성이 거듭 울렸다. 포성이 그칠 때까지 여자를 제외한 모든 피난민들이 머리를 땅에 박고 엎드려 있었다. 그런 세상에도 저녁 이 왔다. 시아버지가 소를 돌려세웠다. 친정 동네 앞에서 시아버지는 다시 처녀를 돌아보았다. 처녀는 피가 흘러내리도록 입술을 문 채 고개를 흔들었다. 시아버지는 측은한 눈길로 처녀를 바라보다가 들릴 듯 말 듯 “너는 이제부터 내 딸이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십여 년 후 임종의 자리에서 그 말을 되풀이 했다.
한 여자가 앉아 있다. 가시리로 가는 길목이다. 여자는 누구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이따금 버스가 오는 큰길을 내다본다. 잔치는 벌써 끝났고 온 사람은 가버렸다. 한번 간 이들이 다시 돌아오려면 다시 일 년이 걸릴지 십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새로 올 사람도 없다. 있을 리 없다. 없다, 없다. 여자는 그런 사실을 잘 안다. 여자의 남편은 군인이 되었다고 했다. 보통 군인이 아니라 계급이 높은 군인이 되었다고 시숙은 동네 사람들에게 말했다. 동네 사람 가운데 전장에서 여자의 남편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다.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던 중에 피부색이 바둑알처럼 검고 흰 병사들 틈에 앉은 여자의 남편을 보았다는 것이다. 여자의 남편은 지프에 타고 있었다. 동네 사람은 시숙의 말대로 서방님, 그러니까 여자의 남편이 아주 높은·계급인 것처럼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군복에 계급장을 달지 않았다고 했다. 동네 사람은 여자의 남편을 알아본 순간 까마귀 떼처럼 논바닥에 쓰러져 누운 일행에게서 떨어져 나와 지프로 다가갔다. 그는 간밤에 죽을 고비를 두어 번 넘겼고 수십 명의 전우를 잃었다. 그만하면 전장에서 만난 한고향 사람에게 가서 말을 거는 권리 정도는 얻었다고 생각했다. “나를, 나를 아시겠소?” 여자의 남편은 몹시 지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를 기억해주었다. “자네 인규 아닌가. 여기서 만나다니 이게 웬 일인가, 인규.” 인규, 곧 동네 사람은 울기부터 했다. “서방님, 나 어젯밤에 여러 번 죽었다 살아났소. 나 죽으면 우리 어머니는 누가 먹여 살리겠소, 서방님.” 여자의 남편은 측은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자네는 삼대독자 외아들이었지. 그런 사람이 전장에 끌려 나와서 이 고생이구만. 너무 걱정 말게. 전쟁이 이제 곧 끝날 테니.” 인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것보다 반가운 소식 이 어디 있겠소. 그런데 서방님은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시오?” “나는 유엔군 군 속이라네. 통역을 하고 있어.” “통역 이라니, 역시 서방님처럼 많이 배운 사람은 다르구만요. 서방님은 이 난리 통에도 살아남으시겠소.” 여자의 남편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은 지난달에 북진하면서 내가 우리 동네 앞 신작로를 지나왔었네. 시간이 없어서 동네에 들르지는 못했네만 동네 가는 길이 포탄 자국 하나 없이 멀쩡한 걸로 봐서 모두 무고하신 듯하네. 자네 어머니도 잘 계시겠지.” 인규는 속이 탔다. “아니 동네 앞을 지나가기만 하면 어쩌시우. 몇 걸음 안 되는 델 한번 들어가서 보시지 않구.” “하여튼 자네 몸 성히 집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곧 집으로 돌아간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게.” “아니오. 서방님이야말로 집으로 가시걸랑 제가 죽으나 사나 어머니 생각만 하다가 갔다고 전해주시오.” 그러는 동안 지프의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인규는 지프의 뒤를 따라가며 외쳤다. “서방님, 제발 부탁이니 높은 자리에서 살아만 주시오. 살아서 집에 꼭 가시오. 가시걸랑 제발 내 소식 좀 전해주시우.” 여자의 남편은 멀어져가며 손나팔을 하고 그에게 소리쳤다. “아버님께 내가 잘 있다고 전해주게. 형님께는 걱정 마시라고 해줘. 내 안식구한테는 내가 꼭 돌아간다고, 꼭 돌아간다고 해주게.” 그로부터 며칠이 되지 않아 인규는 포탄에 맞아 한쪽 다리를 잘라야 했고 몇 달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그로부터 몇 달이 흐른 뒤에 그 말을 여자에게 해주었다. 그러나 꼭 돌아온다던 여자의 남편은 여자의 칠순 잔치 때까지도 오지 않았다. 잔치가 끝난 뒤에도 오지 않는다.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가시리로 가는 길목, 협죽도 그늘 아래. 여자의 관자놀이에는 가늘고 새파란 정맥이 드러나 있다. 세월이 사람의 얼굴에서 가장 섬세한 부분부터 망가뜨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일흔에도 주름에 묻히지 않는 정맥은 여자가 젊을 때 얼마나 섬세한 성격이었는지를 웅변해주는 듯하다. 여자는 곱게 늙었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ㅇㅏ니, 늙었다는 말을 별로 듣지 못한다: 곱다는 말은 들었다. 한을 품으면 시체가 썩지 않는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한이 있어 살아 있는 여자에게 세월의 풍화작용이 더뎌졌는지도 모른다. 여자가 앉아 있기 시작한 지도 꽤 되었다. 차갑고 딱딱한 시멘트의자를 원목 나무의자로 보이게 만든 영리한 사람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한 시간쯤일 텐데, 그동안 여자에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은 가시리에 아주 늦게 도착했다. 가시리에는 그 소식을 전해줄 만한 신문이 배달되지 않았다. 우체부는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전사통지서를 계속 가져왔다. 그때마다 동네 한구석에서는 포연과 같은 곡성이 솟아올랐다. 늙은 여자들은 힘없는 주먹으로 가슴을 쳤고 젊은 여자들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흙바닥에 뒹굴었다. 그 광경을 보고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여자의 관자놀이에는 새파란 정맥이 불거지곤 했다. 여자의 미간에는 그때 찌푸리던 기억의 창고, 곧 세로의 주름이 생겨났다. 여자가 누군가틀 기다리던 장소는 협죽도가 심어지기 전 신작로에서 가시리로 가는 길이 만나는 곳이었다.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여자 혼자 가시리로 가는 길목 협죽도 그늘 아래에 앉아 흙바람에 고운 눈썹을 찌푸리며 누군가를 기다렸노라고. 신작로 큰길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면 여자는 용수철처럼 퉁겨져 일어났다가 그 사람이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면 다시 공처럼 둥글게 몸을 오므렸노라고. 무슨 노랜가, 옛이야긴가를 웅얼거리며 한없이 앉아 있곤 했노라고. 그래서 넋이 나간 것 아니냐, 굿이라도 해야 한다는 수군거림도 들었다고. 그걸 기억하고 거듭 자손에게 되풀이해서 들려주던 이들, 가령 여자의 손윗동서는 오래전에 죽었다. 여자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웃을 듯 말 듯하며 고개를 첫곤 했다. 어느 날 전쟁이 끝났다. 결국 끝나버렸다.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가시리에서 태어나는 짐승조차 알게 되었다. 가시리를 둘러싼 산 너머에서 격전이 벌어졌고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이룬 냇가, 풀이 우거진 곳마다 어느 편인지 알 수 없는 군인의 시체가 있었다. 얼굴이 검거나 희거나 누렇거나 간에 시체 위에 싹튼 풀들은 음흉한 검은 잎을 번들거리며 무성하게 자랐다. 용케 불타지 않은 나무들은 발악하듯 한층 더 많은 꽃과 열매를 매달았다. 짐승들은 그전보다 훨씬 많은 수의 새끼를 낳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짐승과 경쟁하듯 아이를 낳았다. 그 몇 해, 그 몇 해. 전쟁은 전장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었다. 그 시절을 보낸 가시리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낳은 아이를 업은 여자가 우는 아이를 달래며 가시리로 가는 길목에 앉아 있었다. 발을 질질 끄는 상이군인*이 나타난 적도 있었고 눈썹이 없는 나병환자가 여자를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여자는 신작로를 오가는 떠돌이들에게서 함께 가자는 희롱을 당하기도 했고 미친 여자에게 놀림을 받기도 했다. 그런 것들이 여자를 두렵게 하고 슬프게 하고 놀라게 했을지는 몰라도 매일 같은 장소에 나와 기다리는 버릇을 바꾸게 하지는 못했다. 여자가 기다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단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를 기다리는 한 여자는 초저녁의 초롱처럼 아름다웠다. 무명저고리와 검은 치마에 때 전 버선을 신어도 여자는 그림에서 도려낸 듯 아름다웠다. 초가을의 안개 속에서, 여름의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겨울의 차가운 눈보라 속에서 젖고 그을리고 갈라 터져도 여자는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기다리는 동안 여자는 스무 살 그대로 늙지 않았다.
한 여자가 앉아 있다. 가시리로 가는 길목, 협죽도 그늘 아래. 그 여자의 남편은 전쟁 중에 실종되었다. 여자의 남편은 군인이 아니었다. 군속*이었다. 군인에게는 소속이 있고 동료가 있고 부하와 상관이 있다. 전사를 한다 해도 목격자는 있다. 시체는 숲에서 냇물 속에서 흙으로 썩어져도 군번이 적힌 인식표*는 남는다 군번이 있는데 사람이 없으면 소속부대를 통해 확인절차를 밟을 수 있고 시체가 거름이 되어 누구인 줄 알아볼 수 없게 되어도 썩지 않고 녹슬지 않는 인식표만 있으면 전사 통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계급도 군번도 시체도 없이 자원하여 군속이 되었다가 실종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어떻게 처리하는가. 그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의 남편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문서로 통지해주는 일이 더뎌졌는지도 모른다. 비밀스러운 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은, 포로가 되었거나 낙오했거나 목격자도 없이 죽었다거나 하는 여러 가지 가능성과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로 그것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죽음보다 더 가혹하다. 그래서 아무도 여자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여자가 신작로와 가시리 가는 길이 만나는 곳에 나가서 누군가를 기다리기 시작한 이후, 여자에게 기다리지 말라, 혹은 기다리라고 말해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침묵했다. 여자를 둘러싼 세계가 일제히 침묵했다. 여자가 가는 곳 어디서나 사람들이 하던 말을 멈추었다. 여자가 나타나는 곳 어디나 침묵의 서리가 내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침묵하는, 침묵해야 하는 이유를 불편해하기 시작했다. 여자는 결국 달갑지 않은 침묵을 유발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언젠가부터 여자 자신이 깊은 우물처럼 침묵했다. 노래도 중얼거림도 잃어버렸다. 그 침묵은 여자의 친정아버지와 시아버지가 동시에 죽은 해, 그러니까 전쟁이 끝나고 서너 해가 흐르도록 이어졌다. 여자는 소리 없이 걸어다녔고 있는 듯 없는 듯 일했으며 기척 없이 살았다.
한 여자가 앉아 있다. 가시리로 가는 길목, 협죽도 그늘 아래. 여자의 시집에 사장(査丈)*의 부고를 전하러 온 사람은 여자가 어릴 때 산지기로 있던 노인이었다. 그때는 여자의 머리 위에 협죽도가 그늘을 드리우지 않았다. 유리 같은 푸른 하늘이 얼음 알갱이 같은 햇빛을 쏟아 붓던 시절이었다. 여자는 ‘아씨’라고 부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용수철처럼 일어섰다가 둥근 공처럼 몸을 오므렸다. 그는 동네에서 여자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왔다. 매일처럼 길가에 나와 서방을 기다리다가 결국 혼이 나가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여자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됐다. 부음을 전하자 여자의 얼굴이 박꽃처럼 희게 변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시집에 부고를 해야 하는 그의 직분을 느린 고갯짓으로 일깨워주고는 종내 그의 얼굴을 마주보려 하지 않았다. 그가 부고를 전한 뒤 다시 가시리의 좁은 입구에 이르렀을 때 여자는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조카가 여자의 손을 잡아끌어 집으로 돌아갔다. 여자의 시아버지는 여자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자를 불렀다. 병석 에서 몸을 일으킨 시아버지는 여자에게 “친정으로 돌아가거든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고 일렀다.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시아버지는 그때에야 누런 봉투에 든 행방불명 통지서를 내놓았다. 여자는 불에 덴 듯 펄쩍 뛰었다. “욕심과 미련이 지나쳐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곧 저승에 가더라도 사돈 뵈올 면목이 없다”고 시아버지는 눈물지었다. 여자는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다.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시아버지는 여자의 시숙을 불러 여자의 앞으로 된 다소간의 전답문서를 내놓았고, 부조금과 함께 그 문서를 사돈댁에 전하라고 일렀다. 여자는 벽에 기대어 고개를 젓기만 했다. 이튿날 새벽, 여자는 시숙의 뒤를 따라 친정으로 향했다. 그 길은 여자의 남편이 말을 타뇨 초행을 갔던 길이었고, 그때 시숙은 상객(上客)*이었다. 여자의 친정아버지는 유언하되, 출가한 여자들은 대문에 들어올 수 있지만 상청(喪廳)*에는 들일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여자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하루만 머물고 시집으로 돌아왔다. 여자를 보내면서 오빠는 눈물지었지만 여자는 결코 울지 않았다. 며칠 더 상가에 머물다 돌아온 시숙은 열흘 뒤 자신의 아버지의 부고를 사돈댁에 보내야 할 형편이 되었다.
한 여자가 앉아 있다. 여자의 발 가까이 도랑이 있고 도랑가에는 보랏빛 수국이 피었다. 물에 들어갔다 나온 아이의 입술처럼 푸른 수국은 누가 일부러 심은 것도 아닌데 가시리로 가는 길가에 가끔 피었다. 가시리 사람들은 수국을 과부꽃이라 부른다. 가녀린 꽃대에 비해 지나치게 커다란 꽃이 그런 이름을 불러들였는지도 모른다. 수국은 인가나 절에서 심는 대표적인 관상용 꽃이다. 버스 정류장 주변에는 인가나 절이 없다. 그런데도 수국은 천연스럽게 피었다. 인가나 절에서 도랑을 따라 씨나 싹이 흘러왔을지도 모른다. 가시리에서 흘러왔다면 사람들은 그게 여자의 집에서 왔다고 여길 것이다. 여자의 마당에는 수많은 꽃이 있다. 박태기나무·동백나무·단풍나무·산수유나무가 있고 영산홍·옥잠화·매화·글라디올러스·튤립·칸나·백일홍·도라지·금잔화·국화·진달래·맨드라미·매화·황매화·장미·모란·장다리꽃·도라지·제비꽃·분꽃이 철마다 돌아가며 꽃을 피운다. 대부분은 여자가 한 해에 한두 그루씩 가져다 심은 것이다. 한겨울에도 여자의 마당에는 꽃이 지지 않는다고 소문이 났다. 그렇지만 수국은 심지 않았다. 가시리의 아이들은 수국이 뱀을 부르는 꽃이라고 믿는다.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면 그 아래에는 꼭 뱀이 똬리를 틀고 있다고. 내놓고 말하는 법은 없지만 여자는 사람들이 수국에 관해 뭐라고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여자의 집에 놀러 오는 여자들은 대개가 일흔 살이 넘은 과부들이다. 여자가 스스로를 과부로 여겨서 수국을 심지 않는 게 아니라 여자의 벗들이 수국을 싫어하므로 심지 않는 것이다. 뱀은 상관없었다. 여자는 수국을 심지 않았고 그뿐이다. 여자는 철마다 들어오는 과일을 대부분 곰팡이가 필 때까지 내버려두었다 버리는데, 거기서 빠져나간 씨앗이 싹을 틔워 그 나무가 다시 꽃과 열매를 달기도 했다. 그게 여자의 담벼락 아래 자라는 고욤나무요, 개복숭아나무이며 개살구와 꽃사과에 돌배나무이다. 여자는 수국을 집 안에 들여놓지 않았고 버리지도 않았으며 싫어하지도 않았다. 이제 수국의 꽃은 조금씩 붉은 빛을 띠게 될 것이다. 처녀의 입술처럼 끊어지면서 늙어간다. 고추처럼 붉게 늙어간다. 여자는 수국에서 눈을 뗀다. 수국에서 날아오른 나비가 여자의 어깨 위를 맴돈다. 여자는 가볍 게 고개를 흔든다. 나비는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날아간다. 멈칫멈칫 날아가 버린다.
언제부터인가 한 여자가 가시리로 가는 길목에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여자의 발치에 보랏빛 수국이 피어 있다. 엷게 화장을 한 탓인지 여자의 나이는 훨씬 덜 들어 보인다. 거기다 여자는 일생에서 몇 년을 잃어버렸다. 중앙선이 그어진 아스팔트 길 건너에서 협죽도 그늘 아래에 앉은 여자를 보면 쉰몇 살쯤의 중년 부인으로 착각하기 쉽다. 여자는 어디서 나이를 잃어버렸을까. 그 십 년, 남들이 짐작하기조차 힘든 전쟁 후의 그 십 년의 세월이 여자에게는 도둑맞은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 십 년, 적어도 그 십 년 동안은 여자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여자는 그 십 년을 인간같이 살지 못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를 둘러싼 사람들이 사람 같지 않았다고 여긴다. 그렇게 해서 도둑맞은 시간이 이제 여자를 나이에 비해 몇 년은 더 젊어 보이게 한다. 그 십 년 중에 실종자에 대한 판결이 있었고 여자의 남편은 법적으로는 사망했다. 여자는 연금을 받기 시작했다. 여자는 시집에서 나왔지만 친정으로 가지 않고 지치고 병든 몸을 새집에 눕혔다. 그때부터 여자는 남들처럼 나이를 먹어가기 시작했다.
협죽도 그늘에 앉아 있는 여자는 한 동네, 한 집에서 수십 년을 한결같이 살았다. 한 해는 그 전해의 되풀이였고 한 달은 그 전달의 되풀이였으며 하루는 그 전날의 되풀이였다. 일 초는 그전의 일 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자는 매일 새벽이면 동네의 어느 집보다 빨리 불을 켠다. 긴 머리를 빗은 뒤, 쪽을 찐다. 빠진 머리카락을 뭉쳐 그 전날 뭉쳐놓은 머리카락 뭉치에 더하고 세심하게 방을 청소한다. 그러곤 노래와 옛날이야기의 중간쯤 되는 중얼거림으로 들리는 기도를 한다. 아침을 먹고는 집 안을 돌본다. 이따금 벗들의 방문을 받고 이야기로 소일하기도 한다. 여자가 먹는 음식은 늘 일정하다. 재래식 된장과 고추장, 간장에 야채, 밥, 한두 가지의 반찬이 곁들여진다. 오후에는 필요한 나들이를 하거나 밭을 돌보고 라디오로 음악이며 세상 소식을 듣는다. 밤이 되면 여자의 집은 동네 어느 집보다 불이 빨리 꺼진다. 요컨대 여자의 일상은 대단히 규칙적이고 가끔의 예외조차 예외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
가시리로 가는 길목에 앉아 있는 여자의 집은 헌집이지만 새집으로 불리고 실제로도 새집처럼 보인다. 벽은 한 해에 한 번씩 칠을 했고 지붕 기와도 한 해에 한 번 손질을 해서 풀 하나 없이 깨끗하다. 방바닥과 벽 역시 한 해에 한 번씩 새것으로 바르고 칠했다. 여자의 방문에는 한 철에 한 번씩 새 종이가 발렸다. 여자는 한 달에 한 번씩 마당의 잡초를 뽑고 일주일에 한 번은 장독대·수돗가·화장실을 청소했다. 사흘에 한 번은 쓰레기를 태우고 이틀에 한 번씩 뒤꼍의 그늘 아래를 살펴 곰팡이나 버섯, 물길처럼 새로 생긴 것들을 없앴다. 추녀에 걸린 빨랫줄에는 거의 매일 눈부시게 흰 빨래가 깃발처럼 펄럭였다. 벽에는 푸른빛을 배경으로 어딘가를 향해 눈길을 주고 있는 청년의 초상이 걸려 있는데, 초상을 싼 유리에 먼지 하나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묵은 오동나무 장롱은 아침저녁으로 여자의 젖은 손이 스쳐가고 방바닥 역시 미끄러질 듯 반들거린다. 그릇은 이빨 하나 빠진 데 없이 삼십 년을 버텨온 것들이 태반이다. 여자의 집에서 새 물건을 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지만 물건은 모두 새것이나 다름없다. 전기가 들어오고 나서 주변의 강권으로 가전제품을 들여놓기도 했고 전화도 여자의 경대* 위에 놓여 있긴 하지만, 그 역시 처음 들어왔을 때의 제품이 대부분이다. 여자가 돌보고 매만지는 것은 모두 여자를 닮았고 닮아간다.
여자의 머리 위에 흐드러진 협죽도의 잎과 꽃이 피고 나고 지고 떨어지듯 여자에게도 변화는 있다. 사람이 죽고 살며 나고 오간다. 날씨는 조석으로 변하고 새의 울음소리가 달라진다. 여자의 주변 사람들이 전해주는 소식도 있다. 예컨대 여자의 남편이 천신만고 끝에 북한을 탈출하여 귀국한 어느 국군 포로처럼 아직도 북한에 살고 있을 수도 있다. 그가 결혼했을지도 모르고 아이들과 손자를 바가지 속의 메주콩처럼 그득 두었을 수도 있겠다. 여자는 어느 벗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곤 살며시 웃는가 말았는가 했는데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두 번 세 번 다른 사람들이 다른 발로 같은 이야기를 해도 꼭 같았다.
여자의 방에는 여자가 시집올 때 가져온 숟가락이 있다. 끝이 초생달 모양으로 닳은 놋쇠 숟가락이다. 그 숟가락은 여자가 자신의 집에 들어와서 자던 첫날 밤, 문고리에 걸렸다. 그때처럼 여전히 끝이 날카로운 그 숟가락이 여자 아닌 누군가의 손에 의해 벗겨진 적이 있었던가. 누군가 그것을 벗기고 여자의 집에서 여자와 다른 무엇을 가져가려고 했었나. 여자만이 알 것이고 기억하리라. 그러나 가시리에서 여자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은 누가 감히 여자의 집에서 도둑질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도둑질한다고 해서 도둑질할 수도 없는 것을 가져가서 무엇에 쓰겠는가. 협죽도도 안다. 협죽도에게 물어보라. 수국에게 물으라. 남의 삶을 도둑질할 수 있는가. 있다면 그결 어디다 쓰겠는가고. 여자는 자신의 일생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한 여자가 앉아 있다. 가시리로 가는 길목, 협죽도 그늘 아래. 그 여자는 일생 동안 협죽도 아래에서 자신의 시간이 아닌 듯한 여분의 시간에 자신이 아닌 듯한 여분의 자신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한없이 긴 듯, 일순처럼 짧은 방심의 시간. 여자는 그걸 깨닫고 놀란다. 느닷없이 우리 밖으로 나오게 된 짐승처럼 사방을 살핀다. 아무도 없는 길을 내다보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앉는다. 바람이 살짝 흩트린 머리를 매만지고 옷고름을 당겨 묶는다. 이제 여자가 가고 나면 그늘도 사라지고 어처구니없이 많은 꽂을 매단 협죽도 한 그루만 남을 것이다.
아직은 한 여자가 앉아 있다. 가시리로 가는 길목, 협죽도 그늘 아래 .
『문예중앙』 (1998년 겨울호); 『홀림』 (문학과지성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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