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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 찬미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한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중년의 어머니와 이제 시집갈 날을
앞둔 딸의 이야기였습니다. 딸과 혼수를 계획하고 결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엄마가 문득 자리를 뜨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져온 조그만 상자. 그리고 엄마는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 안에는 손바닥 만한 옷이 들어 있었고, 엄지발가락에 딱 맞을 만한 크기의
벙어리장갑 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엄마의 이야기,
"복숭아 밭에 갔는데, 나무에 내 얼굴보다도 더 큰 복숭아가 나무에 달려 있는 거야. 그래서
너무 신기해서 가까이 다가가는데 그만 그 큰 복숭아가 나한테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니?
그래서 한아름, 커다란 복숭아를 끌어안았는데.. 이게 너 가질 때 태몽이란다. 그리고 이건
너의 배냇저고리, 이건 손싸게, 그리고 이거는 처음 너를 싼 포대기. 그리고 기저귀."
딸은 "와! 내가 이렇게 작았어? 왜 이제 보여주는 거야? 이런 걸 어떻게 여태껏 가지고
있었대? 근데 이건 뭐야?" 물음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온 조그만 수첩 몇 권,
육아일기 였습니다. 그리고 한 구절을 읽은 딸은 끝내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아가야, 안녕? 니가 태어나고 힘차게 울면서 내 품에 안겼을 때 나는 무척 기뻤단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꼭 아주 오래 본 얼굴 같아. 처음 젖을 물리며 엄만 생각했단다.
아가야! 난 너를 내 목숨보다도 더 사랑할 거고, 너를 꼭 지켜줄 거야! 그리고 모자라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할 거라고 약속할게."
딸이 흘린 눈물은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자기를 잘 키워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엄마의 기억 안에 간직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임을 알게 된 기쁨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께서 낳은 아기라고 생각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기가 튼튼하고 바르게 자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도록 최고의 환경과
최선의 노력을 다해 주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와
맺으신 계약에 당신 홀로 성실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셔서 당신과 같이 거룩한 존재로
이끌어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 단 한 번도 우리에게서 멀어지신 적이
없었습니다. 늘 우리를 창조하시던 때를 '기억'하셨고, 나약하기 그지없어 유혹에 쉽게
빠지는 우리를 '기억'하셨고, 그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길 원하셨습니다.
인간이 처음 범죄한 후 하느님께서는 그 죄에서 인간을 구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인간이 존재하는 내내 '기억'하셨으며, 후에 이 약속은 계약, 즉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약속으로 당신 스스로 바꾸시죠.
대홍수에서 노아의 가족을 구하시어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셨고,
그 증거로 무지개를 보여 주셨죠. 온 세상에 비가 끝없이 내리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노아를 '기억'하셨고, 비를 그치게 하셨습니다. 무지개를 걸어 증거를 보여주신 계약의
당사자는 오로지 하느님이셨고, 노아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고, 그 안에 있었던 것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기억'이
비를 그치도록 하여, 그들을 방주에서 뭍으로 내려올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노아는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기억'해 주심에 '기뻐' '감사'하며 하느님께 제사를 올렸습니다.
이는 미래에 있을 인류를 향한 당신의 구원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오로지 하느님만 믿고, 당신께 순종하는, 미래에 오실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 또한 홍수로 정화된 세상과 같이, 세례 때 물로써 정화되고, 세상에서
죽고 하느님 안에서 새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그를 시작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구원을 선사하시기 위하여
많은 후손과 그 후손들이 살 수 있는 땅을 '주시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때도 역시 아브라함에게 아무런 의무도 부과하지 않으셨고, 그런 하느님을 아브라함은
그저 믿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기에 하느님의 약속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는 믿었고, 그 믿음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이
믿음은 그와 하느님과의 계약에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신뢰하셨고, 하느님 홀로 반으로 가른 짐승의 가운데를 지나가시어 당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 계약을 반드시 지키겠시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십니다. 계약을 '기억'하신
하느님께서 장차 큰 민족이 될 아들 한 명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기쁨'에
가득 찹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앞으로 당신께 보내실 메시아의 모습 일부를 보여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중재 기도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하느님께
우리들이 올릴 기도를 중재하실 분이심을, 그가 늘그막에 얻은 아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얻은 아들로, 앞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오게 될 하느님의 외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약하며, 또한 이사악은 하느님께서 제물로 받지 않으셨지만, 당신의 아드님 예수는
나뭇가지에 뿔이 걸린 숫양을 이사악 대신 제물로 바친 것처럼, 우리 대신 나무에 달려
우리의 죄를 속죄할 제물이 되실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이집트로 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에 하느님께 부르짖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모세를 앞세워 그들을 해방시켜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셔서 모세를 앞세워 해방으로 이끄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을 맺으십니다. 그러나 이
계약은 하느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분 안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 이 계약을 맺으셨으며,
이스라엘은 계약을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의 뜻, 즉 계명에 순종할 때 생명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당신만 하느님이시며, 당신 만을 섬겨야 한다는 첫 계명을 시작으로
십계명의 전문이 그러하지요.
이 해방 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아드님 예수님을 통해 오랜 세월 뒤 우리 모두를 죄의
노예 살이에서 해방시켜주실 것이며, 죽음의 바다가 아닌 당신 친히 바다 한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셔서 죽음의 바다를 갈라 길을 열어 우리 모두를 죽음을 넘어(파스카) 영원한
삶으로 이끄실 것이라는 당신 구원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 내린 만나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셨듯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내리실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우리가 매 미사 모시는 예수님의 몸, 성체입니다.
모세를 이은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을 앞에 두고 스켐에서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 간의
계약을 새로이 확인하고 모세가 중재한 시나이 계약을 갱신합니다. 이 계약의 갱신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기쁨'에 넘칩니다. 우리 또한 매 미사
안에서 새로운 계약의 피, 성혈을 통해 구원의 계약을 갱신합니다.
인간은 나약하기 그지없습니다. 늘 유혹에 넘어가고, 쓰러지고 엎어지고 넘어집니다.
그런 이유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유혹이라는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을 때, 다시 당신께
다가갈 수 있도록 계약을 갱신할 길을 열어주시기로 하시고, 그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셨습니다. 그 길의 끝은 당신의 아드님 예수께로 향합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직접 뽑으신 왕, 다윗이 적들을 모두 물리치고 안정을 얻은 후, 하느님의
성전을 짓고자 할 때, 당신을 위한 성전 건립을 거절하시고, 오히려 다윗 집안을 튼튼히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다윗은 스스로 이 하느님의 약속을 '영원한 계약'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계약의 의미는 후대에 메시아 예언과 연결됩니다. 즉 다윗 가문에서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펼 메시아가 나오리라는 것입니다. 이에 다윗은 너무 기뻐
하느님께 긴 감사기도를 올립니다.
다윗은 용감했고, 지혜로웠으며, 솔직했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지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위하고, 그들을 하느님께로 이끌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왕들이 그 뒤로 계속 이어져 당신의 사랑을 백성들에게, 그리고 온 세상에 전해주기를
바라셨지만, 그런 다윗도 완벽하지는 않았습니다. 밧 세바를 취한 것이 그것이죠. 그리고
그 사건으로 더 이상 다윗과 같은 왕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미래에 올 다윗 가문에서 세워질 왕, 우리의 메시아는
다윗처럼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성부께 매달려 피 땀 어린 기도로 유혹을 이기고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을 선물하기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실 것입니다.
이후 예레미야는 하느님께로부터 새 계약에 관한 계시를 받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하느님과 시나이에서 맺은 계약을 깨뜨렸습니다.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주신 야훼의
계명들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던 것이죠. 인간은 하느님의 율법과 계약을 기억하고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지속되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을 보내고,
그들을 통해 아무리 가르치고 경고하여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
났습니다. 이로써 시나이 계약은 파기되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계약을 약속하십니다. 새 계약은 돌판 위에
새겨진 법이 아니라 그들 마음 안에 새겨진 법이 될 것입니다. 이 계약은 완전하고 영원한
계약이 될 것입니다. 이 계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제사를 통해 완성되게 됩니다.
당신께서 잡히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고 성찬을 제정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한 목적은 우리의 '큰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당신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반복하실 정도로 사랑과 정성을 담아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당신의 창조는 사랑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 창조하신 인간은 사물에 대한 기쁨, 인간에 대한 기쁨,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기쁨을 가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당신과 관계 맺는
것을 허락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을 통해 가장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고,
당신과의 친교에서 빚어진 기쁨만이 인간 기쁨의 절정이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기쁨의 완성은 구원 체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오랜 역사를 통해 구원을 체험했고, 그 체험을 통해 지고의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지고의 기쁨을 타민족과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역사를 통해 그 기쁨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길 기다리셨고, 단 한 사람이라도
당신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시간이 가득 차 당신께서 아드님을 보내실 때가 되었음을 확신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첫 범죄 때 말씀하신 여자의 후손 그분을, 아브라함과 같이 세상의 복이 되실
그분을, 모세와 같이 해방자가 되실 그분을, 다윗과 같이 강력한 왕권으로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하시고 다스리실 그분을, 예언자들이 그토록 오시리라 목놓아 외쳤던 그분을
이 세상에 보내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루카 복음서를 보면 구세주의 내림을 다른 복음사가들에 비해 더욱 생생하게 묘사해 줍니다.
성탄 날 밤에 천사가 예보한 "큰 기쁨"은 실로 만민을 위함 기쁨이었고(루카 2,10), '마리아의
노래'는 비천한 모든 사람들이 부르는 환희의 찬미가였습니다(루카 1,46-55).
그러나 이 기쁨은 많은 고통을 감내하고 이겨낸 기쁨이었습니다.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는 잉태를 알리는 소식에 목숨을 걸고 순명했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임신한 자신이 죽을지도 몰랐고, 약혼자 요셉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몰랐고,
앞으로 미래의 그녀의 삶이 어떻게 진행될지도 모르는 너무도 두려운 상황에도 그녀는
율법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먼저 따를 수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마치 이는 어디로 가라고 하는지도 모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아브라함의
떠남과도 같을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약혼녀가 아기를 가진 사실을 알게 된 너무나도
쓰라린 고통을 겪었습니다. 성조 요셉 또한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팔려가는
고통을 겪었지만 그에게 닥친 모든 상황이 하느님의 섭리라 믿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았습니다.
요셉 또한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 한마디에 기가 막힌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어쩌면 원치 않은 아기였을 수도 있던 태아 예수 그리스도. 엄마의 불안함을 그대로
느꼈을 태아 예수 또한 고통이 따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출산할 장소를 찾을 수
없었고, 결국 태어나서 눕혀진 곳은 구유였습니다. 이 모든 고통의 현장에서 성경은 '큰 기쁨'이
넘쳐났다고 적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모든 예언이
이루어지는 사건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요셉은 율법에 의한 처단보다는 조용한 파혼을
선택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순명과 진정한 용서가 어우러진 이 작은 사건은
세상에 큰 변화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성탄 대축일을 기념합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을 기념하며 우리는
이천여 년 전, 어느 날 예수님의 탄생이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이 아기의 탄생은 오랜
세월 참고 기다리시며 계획하신 하느님의 구원의 시작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이라는 단어는 "어떤 일을 마음에 간직하여 잊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에서는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을 현재 '기억함'으로써 과거의 사건으로 인한 결과가
현재화 내지 구체화한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 탄생 사건을 오늘 '기억'함으로써 이 아기가 이루게 될 하느님 구원의
완성, 고난과 십자가 희생과 부활에 이르는 은총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아기 탄생은 우리에게 부푼 희망을 주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속상하고, 자존심 상하고, 억압받고, 무시당하고, 소외되고, 아프고, 불편하고, 힘겹고
지친 여러분! 여러분이 겪고 있는 모든 고난은 우리 '기억'이 '기쁨'이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시고, 이번 성탄 힘없고 가난하게 벌거벗은 채로 태어난 우리 구세주 아기 예수를
'기억'하시고, 그분과 함께 누리게 될 진정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기쁨'에
넘쳐보시지 않으시겠어요? 그분의 탄생은 하느님의 은총과, 고통도 은총이라고 순명한
마리아와 완고함에 머물지 않고 용서를 택한 요셉이 있어서 가능했으니까요.
전 세계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성탄을 축합니다. 아마도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이렇게
축하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크리스마스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 때문일 것입니다.
언젠가 본 영화의 대사입니다.
"크리스마스에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 시기에 이루어지는 나눔과 희생과 봉사, 바로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성탄을 사랑과 나눔의 시간으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보내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도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이 시기,
우리 모두는 진심으로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뻐하고 있나요?
예!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 아기는 하느님의 사랑이니까요.
주님! 이번 성탄은 우리가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게 하소서. 아기가 태어날 때가 되면
엄마는 걱정에 빠지고, 목숨을 건 산고 끝에 새 생명을 품에 안는 기쁨을 갖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시고, 용서와 화해라는 산고를 통해 모두가
주님 안에서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게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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