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리핀 단기 선교 보고서
- 작성자 : 신홍규 집사
☉선교기간 : 2011. 1. 1(토) ~ 2011. 1. 7(금) 7일간
☉선 교 지 : 필리핀 파나이섬 (PANAY) 일로일로시(ILOILO)와 키마라스섬 (GUIMARS) 일원
2011. 1. 1(출발일) 오후 1시반, 출발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준비된 짐들을 다시 묶고 단단히 포장함. 오후 3시반 민귀식 목사님의 잘 다녀오기를 기원하는 기도로 출발, 거가대로에 진입했으나 차량들이 많이 밀려 정체가 심해서 오후 6시경에야 김해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져간 축구공이 검사에 걸려 바람을 빼는 수고와 모기 때문에 가져간 스프레이 홈키파 두 개를 빼내고야 겨우 출국 수속을 마치고 오후 9시 30분 발 아시아나항공 OZ705편으로 마닐라행 출발. 7,25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필리핀은 인구 1억 명에 면적은 우리나라보다 3배정도 크다.(남한의 6배) 스페인, 미국, 일본에 차례로 지배당하다가 2차 대전 후 비로소 독립하였으나 아직까지 정치와 경제가 발전하지 못한 채 정정이 불안정하고 정체되어 있다. 그러나 6.25동란이 일어나자 제일 먼저 파병하여 참전해 주었고 쌀 등을 원조해 준 고마운 우방국이다. 영어와 따갈로어가 공식언어이고 일롱고어도 상당 수 사용하는데 우리의 선교지 일로일로는 일롱고어를 쓰는 지역이다. 3시간 40분간의 비행 끝에 현지시간 밤 12시 10분 (우리나라 시각 오전 1시 10분) 마닐라 니노이 아키노 공항에 도착했다. 성인들은 무비자 입국이 허락되었으나 함께 간 소년부 어린이들의 수속이 까다로웠다. 만 15세 미만 어린이 한 명당 12만원씩(400페소)의 체류비를 받는 것은 그들의 법이 그러니 따른다 하더라도 두시간 가까이 질질 시간을 끄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다 세관원들과 경찰관이 노골적으로 팁(Tip) - 돈을 요구하는 것은 정말 한심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한참 시달리고 공항을 벗어나니 거기까지 마중 나온 서태원 선교사님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함께 공항 셔틀버스를 이용하여 오전 2시 반 국내선 공항으로 이동했다. 국내선 센터니일 공항에서 두 시간 정도 기다렸다. 오전 5시 출발하는 비행기로 일로일로에 도착하니 1월 2일 오전 6시, 일로일로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중에도 신학생과 교인 여러분이 공항에 나와 환영해 주었다. WELCOME! NEW JANG SEUNG PO CHURCH BRETHREN(환영! 새장승포교회 형제들)이라 새겨진 프랭카드를 앞세우고 정성껏 만든 꽃목걸이를 걸어주었다. 하명옥, 강미선, 박은숙 집사들과는 포옹을 하며 반겼다. 차량으로 숙소인 국제선교원(IMTC)건물에 도착하니 바로 샌드위치 아침식사가 나왔다. 식사 전 조용문 목사님이 무사히 도착하게 해 주신데 대한 감사기도를 드리고, 식사 후 서태원 선교사로부터 간단히 오늘의 일정을 들은 후에 각자 3층 방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다. 오전 10시 주일예배를 서태원 선교사의 선교본부요 최초의 개척교회인 GREAT VISION CHURCH에서 드렸다. GREAT VISION 교회는 IMTC 건물과 붙어 있다. 12월 셋째 주부터 새해 1월 초순까지의 기간은 필리핀 최대의 명절이라 다수의 교인들이 고향으로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도 100명 이상의 현지교인이 참석하여 함께 예배를 드렸다. 서태원 선교사님의 설교는 영어인지라 다 알아듣지 못했는데. '영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도와 성경 읽기 및 전도에 힘써야 한다.'는 부분은 한국어로 해주셨다. 예배 후 사라가 교회를 시무하시는 조마리 에스콜드 목사님과 세키나 교회의 토니 아바드 목사님이 오셔서 반갑게 인사했다. 교회 바깥 전면의 간판에는 GREAT VISION CHURCH 아래 AGAPE CHRISTIAN INT'L MINISTER(ILOILO), INC. 다시 그 아래 GREAT VISION CHRISTIAN ACADEMY라 새겨져 있었다. 오전 11시 반부터 12시 까지 밥과 김치로 된 점심을 한 후 오후 2시까지 수면 보충을 위해 낮잠을 잤다. 비가 오락가락 하는데도 방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교회 주변의 거리를 둘러보았다. 예배시간에 그렇게 울어대던 닭을 살펴보니 대나무를 이어 붙힌 삼각형의 닭장에 닭의 한쪽 발을 묶어서 키우는데 싸움닭(투계)이어서 인지 가늘고 키가 크며 벼슬이 적었다. 엉성하게 엮은 대나무 울타리를 담처럼 둘러 친 집은 내부가 거의 들여다 보였다. 허름한 양철(함석) 지붕을 인 얕으막한 집집마다 후줄근한 어른들과 몇 명씩의 노인이나 아이들이 복닥거리고 있었다. 집 앞으로는 생활하수가 고인 작은 도랑을 끼고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 있었고, 개, 닭, 오리 등의 가축과 사람이 거의 함께 사는 모습이었다. 피로와 가난과 어찌할 수 없음이 그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두고 있는 듯이 보였다면 나만의 감상일까. 이들의 영과 육은 함께 바꿔줄 수 있는 길은 기독교 신앙의 힘밖에 없을 듯하였다. 서태원 선교사가 이곳에 GREAT VISION 교회를 세운 것도 그런 의도가 아니었나 싶었다. 우리의 숙소인 IMTC건물은 대구의 모교회가 5억원을 들여 지었는데 (International Missionary Training Center:국제선교사관학교) 처음의 의도와 합의를 어기고 그 교회에서 파견한 전도사 부부가 관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이 머무는 동안의 경비 일체도 어김없이 계산해 주어야 했다. 오후 3시 반부터 우리 소년부 학생들을 위한 현지 강사들의 영어강좌가 있었는데 막상 따라하려니 그동안 굳어 있던 혀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오후 5시~5시30분 저녁식사를 마친 후 밤 예배를 위해 교회로 들어서니 새장승포교회 비파찬양단격의 싱어들이 이끄는 복음송의 찬양 열기가 여간 뜨겁지 않았다. 우리도 아는 데까지 손뼉을 치며 따라 불렀다. 조용문 목사님의 설교가 서태원 선교사의 통역으로 진행되었다. 요한복음 15장 말씀 중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들고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달아야 하며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죽는다 마찬가지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로부터 떨어지면 우리 영혼도 죽는 것이기에 결코 포도나무되신 예수님께로부터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포도나무에 가자가 붙어 있어도 가까이에 있는 가지가 열매를 맺고 멀리 있는 가지는 열매를 잘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께 멀리 떨어지지 말고 가까이 붙어있는 가지(성도)로써, 주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서 풍성한 신앙의 열매를 맺자는 내용이었는데 서태원 선교사의 유려한 통역이 현지 교인들에게도 잘 전달되어 반응이 좋았다. 설교 후 우리 소년부 학생들의 율동과 악기연주(오카리나, 플롯, 바이올린)가 있었고 우리 일행 전원이 강단 앞으로 나가 영어로 자기소개를 했다. 간단한 선물이 모두에게 전달되었고 예배에 참석한 양 교회 교인 전원이 돌아가며 악수하고 인사하므로써 예배를 마무리 하였다. 저녁예배 후 밤 8시에 우리들만의 기도회를 다시 가졌는데 4영리 팔찌에 대한 조목사님의 설명이 어찌나 꼼꼼하던지 우리 소년부 학생들의 몸이 비비꼬였다. 흑색(검정)이 의미하는 죄 중에 가강 큰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라고 못을 박고 내일 나누어 줄 풍선아트에 대한 당부까지 마치니 오후 8시 40분이었다.
1월 3일(셋째 날) 흐림. 상위 10% 국민이 경제권을 쥐고 있는데 그 대부분이 중국계 화교라고 한다. 아직도 60% 정도의 인구가 하루 한 끼 식사를 걱정하며 살고 있다니 경제의 편중이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었다. 파나이 섬은 강원도 크기로 600만 명의 인구가 살며, 일로일로시는 50만 명, 키마라스섬은 제주도 크기에 20만 명이 산다. 아침 7시에 샌드위치와 쿠멜로스(밀감의 일종)로 식사를 한 후 8시에 숙소를 출발했다. 시내를 빠져 나왔는데도 길을 따라 계속 취락이 이어졌고 길가에는 칸다가 심겨 있었다. 차중에서 서태원 선교사님으로부터 선교현황을 들었다. 현재까지 파나이 섬 내에만 100여개의 교회가 개척되었고 초등학교 4곳과 고등학교 4곳 또한 세웠다 한다. (필리핀의 학제는 초등학교 6년, 고등학교 4년, 대학과정 5년으로 되어 있다.) 신학대학(정식인가 됨)에는 학사 40~50명이 수업중이고 석사(훈련)과정에 있는 사람이 70~80명이라 한다. 놀라운 선교 실적이었다. 이미 선교의 기초는 닦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판의 논에는 나락(벼)이 익어가고 있는가 하면 모내기를 하는 곳도 있었다. 3모작이 가능하지만 보통 2모작을 하는데 생각보다 땅값이 비싼 이유는 소수의 지주들이 과점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공동묘지가 주택가와 함께 자리 잡았는데 묘역에 대한 거부감이 적어서라 한다. 아직 장묘문화가 보수적이라 노인들이 매장을 선호하므로 교회전용 묘지 조성도 시급한 과제라 한다. 한 시간 정도 차를 달려 사탕수수 밭이 이어진 오르막 길에 이르렀을 때 어제 온 비로 길이 미끄러워 차에서 내려 걸었다. 15분 정도 걸어 올라가니 아띠부족의 마을이 나타났다. 아띠부족은 다른 민족을 거부하므로 아띠부족의 청년을 교육하여 목회자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마중나온 카스페페델리코 목사다. 다른 필리피노 보다 피부색이 검고 곱슬머리가 특징이다. 함석으로 지붕을 이은 20평 가량의 카멜로스(CAMIROS)교회, 시멘트 건물로 2005년경 500만원으로 지었다.(지금은 700만원쯤 든다고 한다) 커다란 창은 유리창 없이 대나무로 얼금얼금 엮어 막았을 뿐이고 정면 출입문은 아예 없다. 교회 내 정면의 벽에는 리본을 단 종(鐘)이 그려져 있고 Christma Day라 쓰여 있었다. 강대상에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붙이고 푸른색 페인트 칠을 하여 돋보였다. “This is day -, this is the day-" 찬양을 함께하고 서태원 선교사의 제의로 카멜로스 교회와 아띠부족 복음화를 위해 통성기도를 한 후 조용문 목사님이 대표기도를 드렸다. 이어서 우리와 동행한 아가페 신학생들의 리드에 따라 반은 신발을 신고 반은 맨발인 아띠족 아이들의 신나는 노래와 율동이 시작되었고, 미용팀은 미용봉사로, 소년부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사탕, 풍선, 4영리 팔찌를 나눠 주며 열심히 선교활동을 펼쳤다. 특기할 것은 많은 주민들이 나와 구경을 하면서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무엇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그냥 슬그머니 가버리는 것이었다. 주지 않으면 억지로 달라하지 않는 착하고 겸손한 심성이 느껴졌다. 카멜로스 교회는 아띠부족 마을의 한 복판에 자리 잡았고, 페델리코 목사님은 부족의 신임을 받고 있어 교회가 아띠부족 사회의 중심역할을 하고 있는 지라 부흥을 기대해도 될 것 같았다. 카멜로스 교회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사라가 (ZARRAGA)교회, 교회내 정면에는 WELCOME, THANKS GIVING ANNIVERSARY and CHRISTMAS CELEBRATION, 그 아래 "THANKING GOD'S UNMERITED FAVOR라 적혀 있었다. 우리를 맞이한 에스콜드 목사님은 새장승포교회는 사라가 교회의 모교회라 인사하고 특히 민귀식 목사님과 김병태 장로님에 대한 안부 말씀이 있었다. 에스콜드 목사님과 사모님의 찬양은 가창력이 돋보였다. 사라가 교회를 위한 통성기도, 조용문 목사님의 특별기도,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찬양이 이어졌다. 에스콜드 목사님의 두 딸 또한 부모님을 닮아 찬양솜씨가 뛰어났다. 우리가 점심을 먹는 사이에 제법 많은 아이와 교인들이 모였고 (50명 정도) 우리는 오전과 같은 선교봉사 사역을 행했다. 어른, 아이 모두 즐거워하는 가운데 다 함께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활동을 마무리 했다. 사라가 교회로 통하는 논길-비가 와서 진창이 된-을 걸어 나오며 복통을 일으키는 교회 마당의 우물과 진입로 등이 개선 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일단 숙소로 돌아와 한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한 후 오후 3시 45분 몰드 빈민촌지역에 대구 동문교회의 지원으로 세워진 안디옥초등학교겸 교회를 (1층은 학교, 2층은 교회)방문했다. 차를 타고 가는 도중 길가의 가게에서 파는 물고기를 보고 “뽈레기다, 뽈레기, 여기도 뽈레기가 있네” 하며 한바탕 웃었다. 100평이 넘을 듯한 교회는 학교강당을 겸하는 듯 했다. 바닷가여서 인지 창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왔다. 특히 교회 내 전면에 가득 그려진 벽화는 지상의 풍경이 아닌 몽환적 분위기로 표현했는데 교장을 겸직하는 목사님이 요한계시록을 읽고 직접 그렸다 한다. 원래 이곳은 술과 마약을 매매하던 우범지역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한다. 여기서도 우리는 선물을 나눠주고 율동, 찬양, 연주, 미용봉사를 열심히 했다.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마무리 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차중에서 전화로 받은 선교사님이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더니...”하며 우울한 표정을 짓기에 물어보니 근래에는 단기 선교단도 국내경기의 영향으로 많이 끊기고 약정한 선교비의 송금이 중단되는 일이 자주 있다고 한다. 숙소에 도착하니 서 너 명의 현지 선교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개척된 교회의 관리 또한 만만치 않은 듯 했다. 저녁 6시 식사를 한 후 영어교실을 가진 다음 우리 학생들 모두가 어울려 피구놀이를 했다. 밤늦게 서태원 선교사님이 사온 망고와 바나나를 나눠 먹었다. 망고 맛은 잊지 못할 것 같았고 바나나 또한 나무에 달린 채 익은지라 맛이 달랐다. 망고, 파인애플, 바나나, 코코넛(야자)이 4대 과일이라 한다. 밤 11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1월 4일 (넷 째날 : 화요일) 날씨는 여전히 흐리다, 오전 7시 샌드위치와 고마 바나나로 조반을 마치고 출발 전 찬양(“Jesus, I want to meet you")과 기도를 드렸다. 오늘의 행선지는 아티끼 교도소와 세끼나 교회, 야자나무 숲 아래로 검은 모래사장이 이어진 해변 길을 끝없이 달린다. 길을 따라 형성된 가촌에는 집집마다 시온의 별을 상징하는 장식용등을 걸어 두었다. 카톨릭의 영향으로 시작하여 이제는 관행이 되어버린 듯 했다. 한 시간 가량을 달린 후 주유와 휴식을 겸해 잠시 정차한 곳은 미야가오(MIAGAO) 교도소에서 나눠 줄 빵과 물을 사는 동안 스페인 식민지 시절인 1787년에 지어진 미야가오 성당을 둘러보았다. UNESCO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단다. 약 230년전에 그 정도 규모의 거대한 성당을 세웠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 순간 '정복자들의 강요된 종교'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 종교를 통하여 현지인들의 생활과 정신이 향상되지 않았다면, 전체 국민의 60%가 천주교도라는 수치는 허수일 뿐이며 그 땅은 새로운 선교지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서태원 선교사의 영향으로 건축된 교회만 270여 곳이라 하니 필리핀은 거대한 선교지가 틀림없었다. 긴 시간 한 차에 동승하며 초기 선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 필리핀에 와서 양식이 떨어져 한국으로 철수하려 했던 적이 있었고, 밀림에서 만난 무장괴한들이 겨눈 M-16 총부리 앞에서도 담대함을 잃지 않고 오히려 선교지로 개척했던 일, 산속을 헤매다 계곡물을 잘못 마셔 며칠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던 일등 셀 수 없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며 담담히 웃으셨다. 길가는 도중에 자신이 개척한 교회라 하며 가르쳐 준 곳만 10곳이 넘었다. 다시 한 시간 반을 더 달려 비포장 오르막길을 돌아 올라가서 산꼭대기에 있는 안티끼교도소에 도착했다. 바깥문 안쪽의 교도소 구역 내에도 동네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주로 재소자의 가족들이 거처하고 있다 한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쉽게 수긍하기 어렵지만 긍정적인 면도 없잖아 보였다. 그리 높지 않은 철조망을 둘러친 교도소는 양철지붕의 빨간 페인트가 거의 벗겨졌을 정도로 형편없이 낡은 건물이었다. 비가 많이 오면 새지 않나 싶었다. 시설은 열악했으나 옷을 제 마음대로 입었고 담배를 피우는 등 자유롭고 개방된 분위기였다. 우리가 온다는 말을 듣고 모두 감방에서 나와 옥사 전면의 기다란 벤치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약 200명쯤 돼 보였다. 그들이 앉은 좌측 벽에는 나무로 만든 자그마한 십자가가 붙어 있었다. 입구 한 켠으로는 연료용 나무를 도끼로 패서 쌓아 두었는가 하면 닭까지 키우고 있었다. 교도소 철조망 바로 앞과 옆에는 커다란 야자나무와 이름 모를 나무가 열매를 가득 달고 서 있었다. 토니 아바드 목사님이 사역하는 곳이라 먼저 그의 인사말이 있은 후 우리 소년부 학생들이 율동을 하려는데 가져간 녹음기가 고장이다.. 할 수 없이 바이올린과 오카리나 연주 등을 먼저 하고 에스콜드 목사님의 설교말씀이 현지어(일롱고어)로 시작 되었다. 그 틈에 간수의 허락을 받아 살짝 감방안을 살펴보니 TV가 있는가 하면 벽에 여자 사진을 붙여 두기도 했다. 좁은 감방 안에 돗자리를 깐 2층의 침상이 꽉 차 있는 것으로 보아 잘 때만 들어가는 듯 했다. 에스콜드 목사님의 설교는 열정적이었다. 나중에 선교사님을 통해 들은 바로는 ‘여러분은 죄수가 아닌 학생이다. 인생을 배우는 학생이다’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들어 이제라도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한다. 갑자기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인 채 일어나 에스콜드 목사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한사람 , 또 한사람... 거의 모든 죄수가 나아왔다. 아마 교도소를 나가면 예수 믿고 바르게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리라. 실로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이어서 조용문 목사님의 사영리에 대한 메시지가 있었고 다른 기기를 이용하여 우리 학생들이 율동을 하고 가져간 빵과 볼펜 등을 교도소장에게 전달했다. 에스콜드 목사님의 축도로 사역을 마치고 나오면서 교도소의 존재 이유인 진정한 교도가 목적이라면 비록 시설은 좋지 않아도 이곳처럼 개방적인 분위기가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누군가가 다음에는 성경책을 갖다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시 한 시간 정도 차를 달려 세키나(SHEKINAH)교회를 방문했다. 토니 아바드 목사님의 인사 말씀에 이어 서태원 선교사님이 양교회 교인들을 소개하고 모두 일어나 '목마른 사슴이...'를 찬양한 후 조용문 목사님의 축복기도가 있었다. 토니아바드 목사님 부부와 두 딸 등 온 가족이 현지어로 특송을 했다. 사모님이 유치원을 겸하고 있다는데 20평이 채 되지 않을 교회당이 비좁지 않을까 싶었고 강단 또한 초라하다 싶을 정도로 단촐 했다. 차돌로 만든 현지 수공예품을 하나씩 선물로 주었다. 준비한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했는데 우리의 한 끼 식사가 필리핀 사람들 사흘 치 식량이라 하니 여분의 음식으로 온 교회의 잔칫날이 되었다. 식후 현지 아동들에 대한 노래와 율동, 풍선, 사영리 팔찌, 사탕 나눠주기, 미용봉사로 각자 열심히 전개했다. 모두가 즐겁고 흥겨운 자리였다. 다음 방문지는 바쟝(BADIANG)교회 였는데 큰길에서 100M정도 들어간 야자나무 숲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세키나 교회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This is the day, this is the day"로 찬양하고 서태원 선교사님이 바쟝교회는 세키나 교회의 지교회이니 손자교회에 해당 된다는 교회 내력을 소개했다. 남루한 옷을 입고 무구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들, 또 그 보다 작은 아이를 안고 아무 부끄럼 없이 웃는 엄마들을 보며 자꾸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짐짓 바깥의 나무를 바라봤다. 세상에서 가장 작고 가난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교회 - 하나님, 이 교회를 축복하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조용문 목사님이 선풍기와 빵을 토니 아바도 목사님께 전달했고 토니 아바드 목사님께 전달했고 토니 아바드 목사님은 인사말을 통해 민귀식 목사님과 장로님들께 감사와 안부를 전해 달라했다.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며 작별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다오(DAO) 교회로 가는 도중에 시발롬(Sibalom)에 있는 아가페 신학교 분교를 방문했다. 이 학교에서는 신학의 초급과정(1-2학년)만 공부한 후 키마라스섬의 아가페 신학대학에서 추가로 3년을 수학하여 졸업한다고 했다. 현재 13명의 신학생이 공부중인데 매일 한 끼 식사가 염려되는 재정 상태라 한다. 서태원 선교사님의 “기도가 일을 한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말씀이 있었다. 조용문 목사님이 신학교 파라가도스 목사님께 헌금을 전달했다. 교회정면에 쓰여진 “There is no turning lack."은 그들의 의지로 보여주는 듯 했고 우리를 위해 제공된 수박은 참으로 시원했다. 거기서 30분가량을 달려 안티끼 산호세 고등학교(Antigue national highschool)에 도착했다. 원래 예정에는 없었지만 토니 아바드 목사님과 교장선생님의 친분으로 성사된 기회라 하였다. 남녀 공히 흰색셔츠를 입었고 여학생은 빨간색 치마, 남학생은 곤색 바지가 교복이었다. 학생수는 5,000명이나 된다고 했다. 개방된 강당에는 의자도 없었다. 순식간에 1,000명 이상의 학생들이 모여 들었다. 서태원 선교사님의 인사와 미야카오 교회의 로메오 혼코 목사님의 기도에 이어 선물로 준비한 선풍기를 전달했다. 조용문 목사님의 영어 찬양, 우리 학생들의 율동과 연주 후 조마리 에스콜드 목사님의 힘찬 설교를 끝으로 마무리 하려 했는데 앵콜 요청이 엄청나 율동공연을 다시 했다. 특히 권동현군의 인기는 대단했다. 오후 4시경 일정을 마치고 가까운 상가에서 아이들을 위해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개당 20페소, 필리핀 사람들의 경제 수준으로는 비싼편이다. 해안도로를 한시간 이상 달리다 왼편 산쪽으로 꺾어 들어간 비포장도로를 10분쯤 가니 다오(DAO)교회에 닿았다. 오후 5시 25분 산중턱에 있는 20여개 마을 중심지인 이곳 1Ha(4,000평)에 교회를 세우고 공동체를 형성했다. 1984년까지 미전도 지역이었던 이곳이 개척된 것은 이름을 밝히지 않는 한국의 노부부가 자신들의 재산을 정리해서 1994년 땅을 사고 건축을 함으로써 가능했는데 현재 시무중인 로제엘로센드 목사님은 맨 처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아티(ATI)부족 추장의 조카라 한다. 한국의 노부부는 이곳에 교회를 세워주고 귀국한지 얼마되지 않아 모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다오교회의 정식 명칭은 다오성경믿음교회(DAO BIBLE BELIBVING CHCRCH)다. 저녁식사 후 교회 주변에 사는 아이들과 교인들이 꾸역꾸역 교회로 모여들어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아가페 신학생들이 율동과 찬양으로 분위기를 돋우고 우리 학생들의 율동, 조용문 목사님의 찬양과 사영리 강의, 다시 찬양과 바이올린 연주등 으로 이어져 흥겹고 은혜가 넘치는 무대가 만들어졌다. '좋으신 하나님'찬양으로 끝날 때 까지 미용봉사팀도 열심히 사명을 다했다. 밤 11시쯤 됐을까, 로제목사님 사택과 잘만한 곳을 모두 여성분들과 아이들에게 주고 나니 우리가 몸을 누일 곳은 교회내에 있는 예배용 장의자 밖에 없었다. 험한 곳에서 쉬 잠드는 훈련이 되어서 일까 서태원 선교사님은 벌써 잠이 들었는지 조용히 누워 계셨다. 좁은 의자 위에서 이리저리 용을 쓰다 이런 곳에서 잠을 청하는 것도 선교훈련이다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겨우 두 세 시간 쯤 잤을까 갑자기 눈이 뜨였다. 강대상의 십자가가 검게 보였다. 일어나 앉아 기도를 드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길고 차분한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갑자기 쥐어 짜는 듯한 새벽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신호로 교회 주변 주택의 닭들이 모두 합창을 하듯 연달아 울어댔다. 그때 누군가 잠자던 의자에서 떨어져 “아이쿠”하는 소리가 들렸다. 웃을 수 없어 일어나 교회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캄캄했다. 교회 곁을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는데 교회의 불이 켜지고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 침례교회 찬송가 426장 예수안에서 승리 (Victoryin jesus)를 부른 후 로제 목사님의 기도와 혼코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있었지만 일롱고어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교회 옆 주택에 사는 처녀는 세면 시설이 없어서인지 옷을 입고 물을 끼얹어 목욕을 했다. 일찍 일어난 암탉이 열 마리 정도의 병아리를 이끌고 줄을 서서 걸어 나오는 모습은 어릴 때 이후 처음 보았다. 아침식사에 제공된 밥(쌀)과 바나나 등은 로제 목사님이 직접 제배하신 것이라 하니 더욱 고마웠다. 식후 두리아(Durian)나무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오전 7시 15분경 선교원 (IMTC)을 향해 출발했다. 등교하는 학생들이 여럿 보였다. 부지런히 차를 달려 오전 9시 45분경 IMTC에 도착하여 간단히 씻고 휴식을 취했다. 오전 12시 일로일로강 하구 바다 해변에 있는 곳에 위치한 바비큐파크(barbecuepark)라는 식당에서 점심으로 나온 것은 튀긴 치킨이나 돼지불고기에 밥을 함께 먹는 정도인데 현지식이라 했다. 볶은 멸치는 아예 먹을 수 없는 상태였고 다만 야자 한 개씩을 따서 빨대를 꽂아 곁들인 것이 다르다 할까. 중식 후 키메라스 섬으로 가기 위해 부두로 갔다. 마침 부두에는 일로일로와 마닐라 간을 운항하는 『슈퍼페리』가 정박해 있었는데 마닐라까지 22시간이 걸리지만 서민들이 주로 이용한다고 했다. 배로 20분쯤 걸리는 키메라스 섬 오른쪽 산 정상에는 커다란 십자가가 서있었는데 해마다 예수님 십자가의 고난을 돈을 받고 재현해 보인다고 한다. 때로는 죽기도 한다는데, 예수님 고난의 참된 의미를 모르는 자들이 저지르는 우스꽝스런 현대판 몬도카네란 생각이 들었다. 키메라스섬 부두 옆에는 일본군이 지은 거대한 사탕수수 가공 공장이 있었는데 운영을 하지 못해 폐쇄되어 있었다. 배에서 내려 두대의 지프니에 분승하여 꼬불꼬불 30분을 달려가니 북라이(Bugray) 초등학교에 도착했다. 비가 내렸지만 지붕이 있는 무대인지라 우리 학생들이 율동과 연주를 할 수 있었고 조용문 목사님의 사영리 강의와 복음송 찬양에 이어 에스콜도 목사님이 일롱고어로 선교 말씀을 하였다. 미용봉사팀 역시 짧은 시간에 열심이었고 여자 교장선생님도 머리카락을 자르고는 만족해 하는 모습이었다. 7명의 교사는 모두 여자 선생님이었다. 우리나라 학교의 삼분의 이 (2/3)정도의 크기의 교실에는 영어로 “mathematics is an exact science."등의 교육적 표어가 붙어 있고 몇 곳에는 필리핀의 역대 대통령 사진을 붙여 두기도 했다. 학교를 나와 다시 30분쯤 달려 가니 아가페 신학대학이 나타났다. 신학대학생들이 마중나와 꽃목걸이를 걸어주며 환영해 주었다. 양쪽 사람들의 인사가 끝나고 새장승포교회 농장에다 방문 기념으로 준비해 둔 망고 나무 묘목을 정성껏 심었다. 남은시간에 신학대학내 운동장에서 우리교회팀과 신학대학팀이 나누어 축구시합 을 했다. 대학식당에서 성심껏 준비한 저녁식사를 하고 그 자리에서 좌담을 하던 중 서태원선교사로부터 올 봄(5월)에 선교훈련차 한국에 올 계획을 듣게 되었다. 10명의 신학생을 이끌고 갈 예정인데 비행기 삯등 많은 경비 때문에 걱정하며 기도중이라 하였다. 이에 조용문 목사님을 제외한 우리 선교팀 6명이 각 10만원씩 모아 신학생 중 안토니오 전도사의 경비를 감당키로 했다. 즉석 모금을 통한 헌금이었다. 신학대학 내 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드렸다. 안톤신학대학 부학장이 인도했는데 “There's no korean, no Philippino, We are all christian.” 하고 선언할 때 가슴이 울렸다. 이어서 조용문 목사님이 사사기 2장 10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교하였다. 통역하는 서태원 선교사님과 호흡이 맞았다. 이스라엘의 고난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음으로서 되풀이 됐음을 지적하고 우리는 이와같은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찬송가 355장 『부름받아 나선 이몸...』을 부르고, 이 찬송을 부르며 서태원 선교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며 안락함에 빠져 있는 한국교회에서는 더 이상 이 찬송을 부르지 않는다고 탄식했다. 한알의 밀알처럼 기꺼이 떨어져 죽을 수 있어야 이사회와 이 나라를 살릴 수 있음을 거듭 강조하며 희생의 신앙을 부활시켜 목숨보다 귀한 선교의 사명을 다하고자 외쳤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큰 감동을 받았다. 찬송가 455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을 한후 모두 일어서서 양팔을 벌리고 통성기도를 드렸다.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신학대학에서 준비한 선물을 받고 금일봉(헌금)을 드렸다. 예배의 열기가 계속되어 찬송가 268장『마젤리나, 마젤리나』를 몇 번씩 불렀다. 아쉬움 속에 참석한 교인들 전원과 우리 일행이 악수와 포옹으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다시 지푸니로 30분을 달려 배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올 때는 제법 풍랑이 심해 멀미하는 아이도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자 발 씻고 바로 취침했는데 목사님과 선생님들은 아이들 방에서 컵라면으로 야식을 한 것 같았다.
1월 6일 (여섯 째날) 날씨는 여전히 흐리다. 일정 내내 날씨 덕을 보는 듯 했다. 구름기둥이라 할까. 오전 7시 15분 샌드위치로 조반을 마치고 8시 30분까지 도우미 신학생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오전 9시 일로일로 종합운동장으로 갔다. 축구시합 전에 『예수님 찬양』을 부르고 조용문 목사님이 마지막 날 끝까지 안전하고 좋은 교제의 시간을 갖자는 당부와 기도를 했다. 운동장에서 시합을 하는 동안 미용봉사팀은 트랙에서 연습중인 일로일로시 육상(허들) 선수단에게 다가가 사탕을 나눠주며 전도하였다. 여자 선수들 몇 명도 참가한 시합은 무승부로 끝났다. 오전 11시 15분 시합을 마치고 운동장을 출발하여 숙소에서 샤워를 하고 점심을 먹었다. 인근에 있는 SM쇼핑센터로 가서 기념품과 선물을 사는 등 쇼핑을 했다. 귀국할 가방을 챙겨 1층으로 내려오니 서태원 선교사님께서 자신이 쓴『고구마 생주스』(하나님의 사랑) 책자를 주셨다. 오후 4시 반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에 IMTC 마당에 둥굴게 둘러서서 간단히 예배를 드리고 인사를 나누었다. 오후 5시경 일로일로 공항으로 이동하여 그동안 우리와 동행하며 함께 수고했던 조마리 에스콜드 목사님, 토니 아바드 목사님, 그리고 신학대학생들과 일일이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저녁 7시 20분 일로일로 공항을 출발하여 밤 8시경 마닐라 센테니얼 공항에 도착, 밤 8시 반경 다일공동체에서 봉사중인 김혜경 목사 부부를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 김혜경 목사 부부가 타고 온 차와 공항 봉고차로 국제선 아키노 공항으로 이동 했는데 공항 주차장에서 5분 이상 차를 주차 할 수 없어 김혜경 목사 부부는 곧바로 떠났다. 공항 내 매점에서 사온 치킨과 주먹밥으로 저녁을 대신 한 뒤 우리가 공항 안으로 들어가자 서태원 선교사도 밤 비행기로 일로일로로 가기위해 돌아섰다. 새벽(오전) 1시까지 공항 내에서 기다렸다가 짐을 부치고 한국행 비행기표를 받고 나니 피로가 밀려왔다. 잠시 미팅을 가졌다. 결산과 반성의 시간이었다. 우리가 내린 결론은 1.예산이 많이 들고 효과가 늦게 나타난다 해도 “소년부 학생들의 단기 선교는 계속되어야 한다.”였다. 학생들의 평생에 밑거름이 될 뿐 아니라 신앙의 큰 씨앗이 심겨지므로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하는 장기적 투자로 봐야 한다는 취지다. 2. 좀 더 많은 연습과 준비가 필요하다. 3. 학생 등을 엄격히 선발하여 충분한 훈련을 시켜야 한다. 4. 일정 가운데 주일이 끼지 않도록 조정할 것과 선물을 바꿔서 적절히 축적되도록 해야 한다. 현지 시간 오전 3시 35분 출발하는 아사아나 항공 OZ706편으로 3시간 40분 비행하여 한국시간 오전 8시 10분경 (1월 7일) 김해공항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교회 BUS를 타고 가덕 휴게소에서 아침을 먹고 새장승포교회에 도착하여 민귀식 목사님의 감사기도로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해산하였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