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두
진경산수화 외
며느리 등에 바둥거리며 미술관에 간 손주가
인왕제색도 앞에서 억지를 부린다
비 갠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왕산을 보며
고쟁이를 벗고 강아지와 질척질척
뛰어다닌 즐거움을 생각해 낸 모양으로
등에서 쏟아진 아이가 가진 붓을 꺼내어
암봉과 골짜기를 흉내 내기 시작한다
필법을 뛰어넘는 수묵화다
정선이 가르치지 않은 필법을 대담하게 압도한다
웃을 때 종소리가 나는 나이쯤에는
파리를 맞히거나 여자애의 이름을 쓰기도 하지만
와병 중인 이병연이 있을법한 기왓집에서
달팽이 모양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절의가 불끈 죽순처럼 뻗친 붓
저건 종가의 가보로 내림 받은 필기구다
속도감 있는 필체와 투박한 화풍이
선대의 수묵화와 유파를 이룬다
마무리를 정갈하게 다듬어야 할 붓
한 획이라도 어긋나면 창이 될 수도 있다
본성을 투영시켜 절제된 필법을 연마해야
족보로 내림 되는 것이다
현란한 배설 끝에 헐떡이는 수묵화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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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뒤에 쓴 편지
바람과 시간에 관한 보고서다
우주적 상상력이 역사의 개펄을 만들고
나무와 바위 인간의 벌판에
지층의 근육을 새긴 문양들
씨받이 말들이 오가던 경로당은
구렁이 지나간 제비집이다
미라로 발굴될 고독사가
거미의 방적돌기로 장례를 치르는 중이다
먼지는 애도를 깊이 머금어
방사형 거미집을 공중묘지로 꾸미고
무연고 행려 벌레를 안치하고 있다
뜯어 먹힌 육신은 극사실주의에 가깝다
수렵채집 시대도 아닌데
빈집 유리창에 먼지로 써 놓은 문자들
없어서 돌아간다 딸네미가
먼지로 고증의 흔적을 만들어 놓았다
종이 이전의 인쇄술이 이랬을까
문자를 해독할 줄 모르는 엄마에게
디지털 먼짓글을 써 놓았다
이완두|2011년 《문학예술》로 등단했으며 시집 『청보리밭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