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의 피 - '피'는 '생명'을 상징한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피를 흘리심은 자기 생명을 속전으로 바쳐 희생시키셨음을 의미한다. 화목 제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힐라스테리온'인데, 이 단어의 번역에 따라 견해 차이가 생긴다. (1) 속죄 제물을 의미한다는 견해. '힐라스테리온'이 히 9:5에서는 지성소에 있는 '속죄소' 혹은 '시은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힐라스테리온'은 지성소에서 행해지는 '온 백성을 위한 속죄' 행위를 강조한다. 그리고 본절에서 희생의 '피'가 언급되어 있으므로 '속죄 제물'로 번역되어야 한다.공동번역 이 견해에 따라 번역했다. (2) 화목 제물. 바울은 이미 앞에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언급을 했으며 본절에서도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언급을 했으며 본절에서도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힐라스테리온'은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속죄뿐 아니라 백성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제사를 드린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24절에서 이미 '구속'에 대한 언급을 했으므로 속죄에 대한 것을 계속 반복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본절은 '속죄'보다는 '화목'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벌게이트 역본, KJV등이 이 견해를 따라 번역했다. 이 두 가지의 견해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으나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
우선 문자적으로 '힐라스테리온'의 의미를 밝혀야겠지만, 신약성경 가운데 이 용어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해결될 가능성은 없다. 다만 좀더 포괄적인 의미로 받아들여 '힐라스테리온'이 '구속'과 함께 '화목'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피는 일차적으로 '속죄'와 관련되어 있지만, 그 속죄의 결과는 인간과 하나님간의 '화목'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피는 일차적으로 '속죄'와 관련되어 있지만, 그 속죄의 결과는 인간과 하나님간의 '화목'으로 나아간다. 그런 이유로 '힐라스테리온'은 '속죄 제물'과 '화목 제물'의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역 성경 중 NIV는 이 두가지 번역의 시도를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헨드릭슨이나 어드만 같은 학자도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인정한다. 세우셨으니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티데미'는 '계획을 도모하다',
'제출하다', '앞에 두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본절에서는 '의도하다'란 의미가 적절하다. 길이 참으시는 중에...간과하심으로 -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신 것'은 결코 하나님의 불의하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알지 못하던 시대에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이런 의미에서 '간과'는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의 인내로 말미암아 죄의 가리움을 받았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롬 3: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곧 이 때에 - '카이로'는 정해진 때를 의미하는데 이 때는 종말론적인 시기, 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실현하시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관용으로 인간의 죄를 간과하셨던 시기와 대조를 이루는 때로서 지금 믿는 자들에게 현재적인 칭의를 제공하는 때를 의미한다.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 바울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변호를 하고 있다.
인간의 죄를 간과하시는 것이 오해되어 하나님의 공의에 손상이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죄를 간과하시고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독생자를 속죄 제물과 화목 제물로 삼으사 그에게 하나님의 공의에 따른 진노와 저주를 담당케 하신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처사는 여전히 공의로우시며 그의 공의로운 처사를 따르는 자들도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믿는 자를 의롭다하려 하심 - 본절에서 '의'를 뜻하는 '디카이오스'는 서로 다른 형태로 세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맨 마지막에 사용된 '디카이운타'는 서로 다른 형태로 세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맨 마지막에 사용된 '디카이운타'는 앞에 있는 두 의로움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다. 요한은 '디카이오스'를 심판과 구원의 개념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우리 죄를 사하신다고 말하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또다른 두 가지 의미에서 해석한다.
(1) 바울은 죄인들의 행악을 당장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오랜 세월 동안 간과하신 하나님의 인내를 의의 개념으로 해석하며 (2) 또한 절대적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속에 드러낸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자기 안의 의로움을 인하여 참으시기도 하셨으며 또한 죄인의 의로움을 위하여 희생적 죽음을 원하셨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으므로 대속적 죽음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전가가 되는 사건 곧 의롭다고 간주하는 신분의 변화가 현재적인 시간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바울은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피흘림에 동참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롬 3: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자랑할 데가 어디뇨 - 인간이 의롭게 되는 모든 과정에서 인간 자신은 조금도 개입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활동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존재이다. 특히 바울은 여기서 율법을 받은 것을 자랑하는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있다.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 바울은 '믿음의 법'을 행위와 대조시킴으로써, 믿음이 결코 인간 편에서 취한 행위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이 믿음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선물에 불과하다(엡 2:8).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다.
[롬 3: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그러므로 - 어떤 사본에는 접속사 '가르'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개역성경과 같이 본절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가 사용되면 27절에 종속되어 부가적인 설명이 된다. '믿음의 법'에 대한 변호를 위해서 본절은 독립적으로 해석되기보다 종속적으로 해석되는 편이 타당하다. 율법의 행위 - 20절 주석 참조. 우리가 인정하노라 -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예수를 믿는 자'를 의미하며 바울 자신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
'인정하노라'에 해당하는 헤라어 '로기조메다'는 '생각하다'(롬 4:3;갈 3:6;약 2:23) '추론하다' 또는 '결론을 맺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로기조마이'의 현재 중간태로서 '그러므로'가 지시하는 두 가지의 요소를 확고 부동하게 인식한다는 뜻이다. 바울이 성도들과 더불어 확실하게 결론을 맺은 두 가지는 (1)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며 (2)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누구든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다음 구절에서 '누구든지'라는 사상을 다시 한번 반복한다.
[롬 3:29]"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유대인에게만 국한시킨 종족 수호신의 개념을 공격하면서 범우주적 창조주, 섭리주,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을 역설하고 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근동 지방의 다른 나라들과 같이 자기들만의 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제사장 나라로서(출 19:6) 열국의 구속을 위해 살아야 할 의무를 무시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율법의 준행과 할례 제도의 시행이 그러한 자신들의 신앙이 옳은 것임을 나타낸다고 확신했다. 바우른 이처럼 유대인의 잘못된 신앙관을 비판함으로써 유대인들이 섬겼던 하나님을 이방인들이 믿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4:1-25에서 유대인의 자랑거리인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자의 조상이 된다는 자신의 주장을 미리 정당화 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무시했던 것을 고려하면 바울이 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매우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감히 부르지 않았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이방 민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성 모독과 같이 무거운 범죄에 해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히려 유대인의 교만을 책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방인의 하나님되심을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소신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하여 예언된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이방인들을 '고임'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노동자들과 같은 '집단' 또는 '무리'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혈연 관계의 결속보다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쓰여졌다.
족장 시대에는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발견할 수 없으나(창 12:2;18:18) 시내산 계약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선별 의식과 하나님의 유일한 백성이라는 민족 의식에 의하여 배타 의식은 강화 되었다. 특히 헬라 시대에 들어와서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더욱 배타적이어서 '이방인'이라는 말 자체가 경멸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예언서에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찾으며(사 11:10) 참 이스라엘의 영광을 높이는 자로서(사 60:5, 6) 묘사되었으며, 그들의 구원은 메시야가 오셔서 참된 빛이 되시고 세상을 구원하실 때에 이루어질 것이고(사 42:6;49:6) 그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라고 기록되었다.
예수께서도 그의 사역 가운데서 이방인의 메시야되심을 증거하셨으며 또한 제자들을 이방 가운데 파송하시면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도록 하셨다.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에 동참한 이방인(갈 3;14)은 참된 이스라엘이 되었으며 또한 영적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이 된 것이다.
[롬 3: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9절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대조된 것처럼 할례자와 무할례자가 같은 방식, 같은 의미로 언급되고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 이신 칭의를 얻는 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한 가지 길밖에 없다. 유대인이 율법과 할례를 통해서 의롭게 되지 못함을 바울이 그동안 강조해 왔듯이, 이방인도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는 의롭게 될 수 없다.
여기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란 표현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적절하게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이신 칭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동일하시다'란 의미로 이해된다. 29절의 내용에서도 역시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하나님은 동일하시다는 사실을 바울이 주장했던 점을 참고해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롬 3: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 바울은 지금까지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이 없다(20절)고 주장했으며, 또한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주장하면서 믿음의 법(27절)을 율법과 배치되는 원리로 설명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직접 주신 그 율법이 아무 쓸모없다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으며, 구약성경의 하나님과 현재 바울이 주장하는 하나님간의 단절이 생각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단절의 반론을 잠재우기 위해 바울은 신약과 율법이 서로 배치되지 않음을 피력하고 있다. 실제로 초대 교회 시대에 마르시온뿐 아니라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저급한 신으로 취급하면서 구약성경 자체를 무시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이 말은 '도리어 율법을 굳게 지킨다'란 의미이다. 어떻게 해서 율법을 굳게 지킬 수 있는가 ?
이에 대한 대담은 이신 칭의에서 나온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으나 율법을 굳게 지킬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율법의 원리에 따라 살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증거된 하나님의 의를 믿는 사람은 그 의를 받게 되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구약성경에 증거된 율법의 원리대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원리에 따라 사는 것은 율법의 증거를 더욱 확실하게 보증하며 율법이 지향하는 목적을 남김없이 성취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