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일반적으로 신명에 관한 기록은 그 근거가 불분명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기 록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나마 기록이 있는 경우나 잘 알려진 인물들의 경우라고 해도 이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믿거나 말거나에 가깝다. 그런데 앞으로 연재하게 될 28수 신명들의 생애는 앞서 언급한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28수 신명에 해당하는 28장은 중국 후한(後漢, 25-219)의 개국공신이다. 이들의 생애는 중국의 정사(正史)인 『후한서(後漢書)』 「열전(列傳)」에 수록되어 있다. 자신들의 전기가 정사에 실린 역사 인물들인 것이다. 28수 신명 열전을 연재하기 전에 독자들에게 간단한 소개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28수 신명이 활약하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이고 장소도 중국이다. 시기나 장소에서 이미 생소할 수 밖에 없다. 이 글을 통해 간략하게나마 28수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과 당시의 시대적 상황, 그리고 28수 신명 열전의 중요 등장인물인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에 대해서도 알아보고자 한다.
Ⅱ. 28수 신명
1. 28수
먼저 28수에 대하여 살펴보자. 28수에 언급된 별은 항성(恒星)이다. 별이라고 하면 해와 달을 제외한 모든 천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태양계 주변을 도는 행성과는 달리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별을 항성이라고 한다. 항성은 태양계 바깥에 위치하며 존재하는 장소가 일정하고 밝기가 거의 변하지 않는 천체(天體)이다. 우리가 별을 볼 때 일정한 위치에서 일정한 밝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별과 지구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실제로 별은 그 자신의 고유운동에 인해 그 위치가 약간씩 변한다.01 28수 체계의 성립 시기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BCE02 402-BCE 221) 초기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각(角)에서 진(軫)까지 28수 명칭이 전부 기록된 최초의 책은 『여씨춘추(呂氏春秋)』이다.03 『여씨춘추』는 BCE 241년 출간된 것으로 선진(先秦) 사상의 종합적 성과라는 평을 받고 있는 서적이다.04 이처럼 28수에 대한 관념은 고대부터 존재했다. 이를 통해 하늘에 대한 고대 동양의 생각을 알 수 있다. 하늘의 별과 인간의 운명을 연결하는 사고는 연원도 오래되었지만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늘의 별은 그냥 그 자리에 있을 뿐이지 그 자체로 별자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인간의 사고 속에서 하늘의 항성들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연결이 되어 별자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별자리는 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별을 어떻게 바라봤는가 하는 인식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고대 한국과 중국에서는 천문 관측이 ‘천문학’이라는 독립된 학문의 영역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사람의 질서가 서로 이어져 있다는 천지인 합일(合一) 사상의 한 축을 형성해 왔다. 즉 천문의 변화는 지상에 그대로 반영되고 이것이 인간의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견해로 동중서(董仲舒, BCE 198- BCE 106)의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을 들 수 있다.05 천인상관설의 핵심적인 주장은 인간세계의 정점에 제왕(帝王)이 있듯이 하늘에는 북극이 정점이 되고, 모든 별이 북극을 중심으로 일주하듯 인간사회의 모든 질서 또한 임금을 중심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동중서에 의하면 인간의 오장과 자연의 오행, 인간의 사지와 하늘의 사시 등 인간이 하늘의 복사판으로 하늘도 인간과 같이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06 동중서의 생각은 그의 독창물이 아니라 이미 전국시대 이후로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자주 언급된 것이다. 28수는 달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달이 매일 움직여가는 곳을 천구 위에 구성하며 28일 만에 일주하게 되는데 이를 각각 28개의 표준이 되는 별자리로 정한 것이다. 그런데 달의 공전주기는 27.3217일로 27일에 가깝다. 따라서 인도 등에서는 27수가 사용되기도 하지만 28수가 일반적이다. 중국 외에 바빌론, 인도, 아랍 등에도 28수가 있지만 명칭이나 별자리가 모두 같은 것은 아니며 별자리의 기준점 또한 다르다.07 28수 각 별자리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이미 『대순회보』 104호[각수(角宿)]를 시작으로 131호[진수(軫宿)]에 걸쳐 연재되었다.
2. 28장 이제 28장에 대해 살펴보자. 이들은 후한(後漢)의 창업군주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6-CE 57)의 공신들로 ‘중흥(中興) 28장(將)’으로 불리던 인물들이다. 유수와 중흥 28장이 활약하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전국시대를 수습한 진시황(秦始皇)이 세운 통일제국이 멸망하고 초한(楚漢) 쟁패(爭覇)를 거쳐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BCE 202년 한(漢)을 건국한다. 이를 전한(前漢, BCE 202-CE 8) 또는 서한(西漢)이라고 한다. 전한(前漢) 말 황실의 외척으로 평제(平帝)를 옹립하고 권력을 잡은 왕망(王莽, BCE 45-CE 23)08은 CE 8년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선양(禪讓)이라는 궁정쿠데타를 통해 한(漢)을 타도하고 스스로 등극하여 신(新, 8-23)을 세웠다. 왕망에 의한 이러한 형식의 왕조 교체는 이후 다른 권력자들에 의해 답습된다. 그런데 새롭게 정권을 수립한 왕망은 유교의 이상주의에 의거하여 정전제(井田制)와 같이 복고적이며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득권층의 반발과 추진과정에서의 오류 그리고 이 모든 사태에 대한 안일한 인식과 대응으로 개혁은 고사하고 이것이 전국적인 혼란의 빌미가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혼란은 후한이 건국된 이후까지 무려 21년간 지속되었다. 유수는 CE 22년 군대를 일으키고 이듬해 곤양(昆陽, 하남성 섭현)에서 왕망의 군대를 크게 무찌르게 된다. 유수는 CE 25년 다시금 한(漢)을 세우고 낙양에 도읍하니 이를 후한(後漢, 25-220) 또는 동한(東漢)이라 한다. 전국적인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은 험난했다. 통일이 깨어지고 다시 새로운 통일을 맞이하기까지 인명의 손실은 불가피하였다. <표 1>을 살펴보면 전란 전인 CE 2년 6,005,000명이었던 인구가 전란 후인 140년 1,091,800명으로 크게 줄었다.09
600만의 인구 중에 겨우 100만이 남았다. 그것도 전란이 한참 지난 뒤에 조사한 것으로 어느 정도 회복기에 들어선 시점의 인구가 100만이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전인구의 82%가 짧은 순간에 사라진 비극적 순간이었던 것이다. <표 1> 서하지역을 보면 전란 전 699,000명의 인구가 전란 후인 140년 그러니까 138년 만의 조사에서 21,000명이다. 거의 전멸에 가까운 일이 발생한 것이다. 얼마나 비참한 일들이 발생했는지 알 수 없다. 기록이 이 정도였다면 실상은 더욱 처참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광무제와 28장은 이와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등장하여 대혼란을 수습하고 그 과정에서 후한을 세웠다. 28수 신명에 관한 기록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범엽(范曄, 398-445)의 『후한서(後漢書)』와 『자치통감』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후한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중흥 28장은 전생(前生)에 하늘의 28수(宿)를 맡았다고 여겨지는데 자세하지 않다. (중략) 영평 연간에 현종께서 옛 일을 생각하고 감회에 젖어 28장을 남궁 운대에 그리도록 하였는데 그 외 왕상, 이통, 두융, 탁무 합하여 32인이다. 그 본래의 차례에 의거하여 편말에 부기하고 이로써 공신들의 순서를 나타내려는 것이다. 태부고밀후등우 중산태수전초후마성 대사마광평후오한 하남윤부성후왕양 좌장군교동후가복 낭야태수축아후진준 건위대장군호치후경감 표기대장군참거후두무 집금오옹노후구순 적노장군곤양후부준 정남대장군무양후잠팽 좌조합비후견담 정서대장군양하후풍이 상곡태수회릉후왕패 건위대장군격후주우 신도태수아릉후임광 정노대장군영양후제준 예장태수중수후이충 표기대장군역양후경단 우장군괴리후만수 호아대장군안평후합연 태상영수후비융 위위안성후요기 효기장군창성후유식 동군태수동광후경순 횡야대장군산상후왕상 성문교위낭릉후장궁 대사공고시후이통 포로장군양허후마무 대사공안풍후두융 표기장군신후유융 태부선덕후탁무10
이 기록에 의하면 광무제 유수를 이어 후한의 2대 황제가 된 명제(明帝)가 추억에 잠겨 앞선 시대와 선대 공신들을 회상하며 이들을 기리기 위해 28장과 나머지 4명의 훈신을 포함하여 32위의 초상을 남궁(南宮) 운대(雲臺)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때는 CE 60(영평 3)년 봄의 일이다. 위의 기록에서 주목할 것은 당시의 사람들은 28장이 하늘의 28수를 관장하는 신들이었고 후한의 창업자 광무제를 보좌하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 온 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후한서』의 설명을 받아들인다면 28장이 다시 <주문>의 28수 신명이 된 것은 이들에게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원대 복귀에 해당하는 일이다.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광무제 유수의 원릉(原陵)에는 <28수관>이 조성되어 있다. 두 군데로 나뉘어진 <28수관>은 양쪽에 각각 14분의 신명이 그림과 같이 상(像)으로 조성되어 있고 간단한 설명이 붙어있다. 『후한서』의 기록에 의하면 명제는 남궁 운대에 28장과 4명의 개국공신들의 초상을 안치한 것이다. 그런데 원릉의 28수관에는 상으로 만들어져 있어 궁금증을 유발하게 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원릉의 안내 책자를 보면 이는 근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28수관의 상을 조성할 때 실무를 맡았던 관계자에게 이에 대해 물어봤다. 그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28장을 상으로 조성한 것은 어떤 고증에 의한 것이 아니며, 단지 관람객의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11 아주 오래전의 기록으로만 존재하던 그림이 지금까지 어떻게든 남아 있기를 기대한 것이 무리였던 것이다. 이제 28수와 28장의 순서대로 표를 만들면 <표 2>와 같다.
Ⅲ. 광무제 유수
1. 유수의 가계와 유년시절 후한의 창업자 광무제 유수(BCE 6-CE 57, 재위 25-57)에 관한 기록은 『후한서』 「광무제 본기」에 자세하다. 이에 따르면 유수는 전한을 세운 고조 유방(劉邦)의 9세손이다. 먼저 그의 가계를 보면 <표 3>과 같다.
<표 3>을 보면 유수의 집안이 비록 한나라의 황족이긴 하지만 시대를 경과하면서 점차 축소되어 가는 가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유수는 나이 9세에 고아가 되어 숙부인 유량(劉良)의 밑에서 자랐다. 그의 이름이 수(秀)가 된 것은 그가 태어날 당시 그의 아버지 남돈령 유흠이 다스리던 지역에 한 포기에 이삭이 아홉 개 달린 상서로운 벼[일경구수(一莖九穗)]가 났기 때문이다. 유수의 자(字)는 문숙(文叔)이다. 일반적으로 동양에서 형제의 서열을 정할 때 쓰는 것이 백중숙계(伯仲叔季)이다. 그의 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위로 두 분의 형님이 있었고 그 자신은 셋째였다는 것이다. 큰 형인 유연(劉縯)은 자가 백승(伯升)이었고 둘째 형은 유중(劉仲)이었다. 어린 시절은 유수는 희망은 소박했다. 초패왕 항우가 어린 시절에 진시황의 행차를 보고 저 정도는 되어야지 했다는 포부도 유수에게는 없었다. 그 자신 황제가 된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농사일에 관심을 보여 그의 형인 유연으로부터 ‘대장부가 그게 뭐냐’라는 핀잔을 듣곤 했다. 유수는 신(新)나라 시기에 당시 수도인 장안에서 공부했는데, 그때 집금오(執金吾)를 보고 저 정도 관직이면 좋겠다고 여겼을 정도였다. 황제의 행차에 경호를 서는 집금오의 모습이 어린 유수에게는 그럴 듯 해 보였던 것이다. 유수는 ‘아내는 음려화면 족하고 직책은 집금오면 족하다’고 말하곤 했다. 음려화는 당시 남양 일대에 미인으로 알려진 여성으로 유수가 즉위하고 음황후로 책봉된다. 고위직에 미인으로 이름난 아내를 배우자로 삼는다는 소망은 일반적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2. 유수의 봉기 유수의 형인 유연은 그와는 다른 포부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왕망의 궁정 쿠데타로 인한 전한(前漢)의 몰락을 인정할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유수에게 부모나 다름없는 유연이 왕망 타도를 위한 군대를 일으키자 유수도 힘을 보태기로 한다. 아주 소박한 일생을 꿈꾸던 유수가 언제쯤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자신의 형인 유연이 죽고 난 이후가 아니었을까. 다시 그 당시의 정세를 살펴보자. 전한을 타도한 왕망이 스스로 초래한 정치적 혼란으로 민심은 한나라의 부흥을 갈구했다. 중국 전역에서 반란이 시작되었고 반란 세력 역시 한나라의 부흥을 기대했다. 이 당시 사람들은 누구라도 황제는 유씨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유연은 이때 남양(南陽, 지금의 중국 하남성)의 호족으로 일가를 규합하여 왕망 타도의 봉기에 호응한 것이었다. 반란의 구심점을 위해서도 민심을 모으기 위해서도 유씨 성을 가진 이를 택해 황제로 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수의 형인 유연은 유력한 황제 후보였다. 그런데 23년 농민반란의 지도자들은 유현(劉玄)을 새로운 황제로 내세웠다. 곧 경시제(更始帝)12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유현이 제왕의 자리에 오른 것은 그가 유능했다던가 또는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여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란 점이다. 반란의 주체 세력들이 볼 때 유현은 유수의 형인 유연보다 편한 상대였다. 경시제에 반해 유연은 쉽지 않은 상대였던 것이다. 이런 인물이 황제가 된다면 자신들이 마음대로 뜻을 관철하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에서 경시제를 추대한 것이다. 따라서 경시제가 즉위한 후, 유연을 처단한 것은 권력 투쟁의 측면에서 보면 당연한 수순이기도 하였다. 유수가 곤양(昆陽)에서 왕망의 대군을 크게 물리친 것도 소용없었다. 곤양대전은 중국 전쟁사에서도 소수의 군대가 대군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유수는 불과 수천 기로 왕망의 43만 대군을 물리친다. 왕망 패망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며 이로 인해 유수는 일약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한다. 그의 명망이 전 중국에 알려진 중요 사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연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경시제는 이 또한 탐탁치 않았다. 유연도 껄끄러운데 그의 동생 유수까지 상상도 못할 역사적인 대승리를 쟁취했다. 경시제의 두려움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다. 경시제는 유연의 휘하 장수의 작은 과실을 빌미로 유연을 처단했다. 유연의 처단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경시제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 반증하는 것이다. 유수는 곧장 형의 잘못을 사죄했다. 전후의 사정이야 어떻게 되었던 간에 실권을 쥔 쪽은 경시제였기 때문이다. 경시제의 입장에서 만약 유수가 형의 죽음이 잘못된 일이라고 반발했다면 그것을 구실로 유수를 처단하면 되었다. 하지만 도리어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를 하는 데에 경시제는 더 이상 유수를 책망할 수 없었다. 경시제는 유수를 행대사마(行大司馬)에 임명하고 작은 병력을 붙여 하북(河北)을 평정하도록 했다. 이로써 유수는 작지만 자신만의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경시제로서는 실책이나 다름없는 결정이었다. 이때 유수의 휘하에 들어온 이가 각수(角宿)를 맡은 등우였다. 등우는 유수보다 6년 연하였지만 장안에서 같은 시기에 공부를 한 인연이 있는 인물이었다. 등우는 유수에게 당시 상황과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진언한다. 등우는 이 시기부터 광무제가 중국 전역을 평정을 완성하기까지 최측근에서 그를 보좌했다. 등우를 시작으로 경감[耿弇, 기(箕) 별을 관장], 오한[吳漢, 저(氐) 별을 관장] 등 28명의 장수들이 가장 어려운 시기의 유수를 돕기 위해 휘하에 모여들었다.
3. 후한 건국과 전국 평정 하북을 평정하여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게 된 유수는 경시제와 결별한다. 25년 유수는 낙양(洛陽)에서 28명의 장수들이 주축이 된 신하들의 추대로 제위에 올라 한의 부흥을 선언한다. 이를 역사에는 한고조 유방이 세운 전한(前漢)과 구별하여 후한(後漢)이라 하며 후한의 초대 황제가 곧 광무제(光武帝)이다. 유수가 황제에 오르긴 했지만 당시 세력을 보면 유수의 세력은 여느 유력 반란 집단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못한 상황이었다. 광무제는 후한 건국이후 10년 동안 도둑의 소굴로 변한 중국 전역을 누비면서 왕망의 실정으로 촉발된 대혼란을 수습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 과정에 28장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광무제는 전국 평정에 착수하여, 적미(赤眉),13 청독(靑犢)14, 외효(隗囂, ?-33)15, 공손술(公孫述)16 동마(銅馬), 오교(五校), 대동(大彤), 고호(高湖), 중련(重連), 철형(鐵脛), 대창(大槍), 우래(尤來), 상강(上江), 오번(五幡), 단향(檀鄕), 획색(獲索) 등 헤아리기도 힘든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고 36년 전국을 평정했다. 전국 평정 이후 그는 무력의 사용을 극도로 자제하고 건국 공신들도 핵심적인 요직에서 제외한다. 광무제의 조처로 공신들의 작위는 보전되었다. 광무제의 공신들에 대한 처우는 한고조 유방의 공신들이 통일 제국 성립 이후 이런 저런 이유로 숙청된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은 것이었다. 광무제는 공신들을 현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실권이 없는 명예직에 임명하여 이들을 달랬다. 광무제의 조처로 후한의 공신들과 그 자손들은 전한의 공신들과 달리 큰 잘못이 없는 이들은 보존되었고 그 후대들까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광무제 자신은 전국 평정 이후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돌보는 데 여생을 바쳤다. 이른바 ‘광무중흥(光武中興)’은 광무제 자신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매일 아침 조회를 열어 살폈으며, 정오가 지나서야 파했고, 자주 신하들을 불러 경학과 이치를 이야기하며 토론하였고 밤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자치통감』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비록 정벌로 큰 업적을 이루었고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지만 마침내 공신들을 물리치고 문인관리를 나오게 하여 정체(政體)를 밝고 신중하게 하고, 권력의 기강을 전체적으로 관장하였으며, 때를 헤아려 힘을 쟀기 때문에 일을 하여서 허물된 일이 없었던 연고로 앞선 왕조의 매서운 업적을 회복하고 몸소 태평시대를 이룩하였다.17
광무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명제(明帝)는 황태자 시절에 광무제의 건강을 걱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간했다. “폐하께서는 우(禹)임금과 탕(湯)임금의 밝으심을 가지셨지만 황제(黃帝)와 노자(老子)가 가진 보양하는 복을 잃으셨으니, 바라건대 정신을 좀 아끼시고 즐겁게 지내시면서 스스로 편안히 하십시오.” 광무제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스스로 이러한 것을 즐기니 피곤하지 않다.” 57년 광무제의 나이 62세에 생애를 마감하고 원릉(元陵)에 묻혔는데 광무제란 그의 시호(諡號)에는 다음과 같은 뜻을 담고 있다. 광은 능히 전대의 왕업을 이어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무는 화란(禍亂)을 평정한 것을 의미한다. 즉 왕망에 의해 끊어진 전한의 왕업을 이었고, 화란을 평정한 황제라는 것이다. 광무제는 죽는 그 순간에도 민생을 염려했는데, 그의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
짐은 백성을 이롭게 한 것이 없으니 모든 제도는 문제(文帝)의 예를 따라서 줄이고 생략하라.
전한의 문제(文帝, BCE 179-BCE 157)는 진시황의 몰락, 초한쟁패로 인한 긴 전란으로 피폐된 민생을 회복한 치세[문경지치(文景之治)]를 연 황제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죽었을 때 부장품은 와기(瓦器, 질그릇)를 쓰고 내부는 금, 은, 동, 주석으로 장식하지 않았고 산에 장사를 지냈기 때문에 달리 봉분을 쌓지 않았다. 광무제는 자신의 장례를 문제의 전례대로 하라고 마지막 명령을 남긴 것이다. 황제의 장례는 성대하고 또한 많은 인원과 물자를 소비하기 마련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진시황이다. 진시황의 무덤은 그 규모도 엄청나지만 비용과 인력의 동원도 막대했다. 그러나 광무제는 자신의 죽음으로 많은 비용과 인원이 동원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민생의 안정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위정자는 죽음에 임해서도 민생을 걱정한다. 진시황이 죽고 그의 통일 제국은 와해되기 시작한다. 진시황의 통일 제국은 그의 사후 불과 3년간 지속했을 뿐이다. 후한은 광무제 자신을 포함하여 13대 196년을 지속했다. 그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이것은 광무제와 진시황의 처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Ⅳ. 맺음말
앞으로 연재할 28수 신명 열전은 각(角) 별을 관장하는 등우부터 유융[劉隆, 진(軫) 별을 관장]까지 28분의 실존했던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다. 결말을 알고 보는 드라마는 재미가 없다고 한다. 결국은 주인공의 희망이 실현되는 것으로 예측되고, 극의 흥미가 반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무제와 28장의 생애는 작가의 상상 속에서 존재하는 그런 드라마가 아니다. 광무제와 28장의 이야기는 산 자가 죽은 자를 부러워 할 정도의 난세에 태어나 모진 고난 속에서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연 주역들의 생생한 기록이다. 28장이 광무제를 도와 한을 부흥하기까지 기울인 노력은 처절했다. 아무리 28수를 관장한 신명이었고 사명을 지니고 지상에 온 이들이라고 해도 쉽사리 자신들에게 부여된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모진 고난과 처절한 사투 끝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성취한 것이며 그 과정에서 생명을 잃은 분도 있다. 그리하여 『후한서』는 광무제와 그의 최고 공신인 28장이 후한을 부흥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참으로 힘겨웠다(誠艱難也).’고 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후한의 중흥 28장의 생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물론, 이들이 <주문>에 등장하고 상제님의 공사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28수 신명의 생애가 오늘의 수도인에게 주는 교훈은 너무도 명확하다. 사명을 갖고 이 세상에 온 이들에게도 특혜는 없었다. 오로지 일념으로 자신들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매진한 28수 신명들의 생애를 보면서 성(誠)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이쯤에서 『중용』의 다음 구절이 참으로 마음에 와 닿는다. 정성이란 하늘의 도이고 정성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
01 별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이태형, 『재미있는 별자리 여행』, 김영사, 1989, 353~359쪽 참조. 02 일반적으로 기원전, 또는 기원후라고 쓰지 않고 주로 영어의 약식 표기인 BC와 AD를 쓰게 된다. 그러나, 본고와 28수 신명 연재에서는 이를 대신하여 BCE와 CE를 쓸 것이다. BC와 AD는 각각 Before Christ(그리스도 이전)와 Anno Domin(그리스도 기원)의 약자로 기독교 중심적 용어이다. 대부분의 종교학 서적에는 이미 BCE(Before Common Era)와 C.E.(Common Era)를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를 보면 기독교의 관점에서 타 종교를 매도했던 기존의 제국주의적인 시각의 문제점을 성찰하고 이를 탈피하기 위함이다. 이에 관해서 『세계종교사입문』(한국종교문화연구소지음, 청년사,1991) 14쪽 참조. 03 김일권, 『고대 중국과 한국의 천문사상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9, 37쪽. 04 『여씨춘추』의 출간연도에 관해서는 박정철, 「『여씨춘추』의 己物관계」, 『철학논구』 25, 서울대 철학과, 1997, 75쪽 참조. 05 천인상관설과 천인감응설은 거의 구분되지 않고 쓰이고 있다. 동중서의 주장은 고대로부터 이어온 천인관계론에 영향을 받았고, 당시 정치적 상황에서 현실 권력의 요구에 의해 준비된 논리였다. 이에 대해서는 김동민, 「동중서 춘추학의 천인감응론에 대한 고찰」, 『동양철학연구』 36, 동양철학연구회, 2004, 315-319쪽 참조. 06 이연승, 「동중서의 천인상관설에 관하여」, 『종교문화연구』 2, 한신대학교 종교와 문화연구소, 2000, 96쪽 참조. 07 김일권, 앞의 글, 41쪽. 08 왕망(王莽, BCE 45-CE 23). 자(字)는 거군(巨君). 위군(魏郡) 원성(元城, 현재 하북성 大名 東) 사람. 전한 말기의 대표적인 외척으로 전한을 타도하고 신(新, 8-23)을 세웠다. 왕망은 대표적인 외척 가문으로 성제(成帝, BCE 32-7) 때 대사마에 발탁되었고 애제(哀帝, BCE 6-1)가 죽자 고모인 태황태후 왕정군의 지지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자신이 옹립한 평제(平帝, BCE 1-CE 5)를 독살시키고 마침내는 전한을 타도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이 하늘의 뜻임을 나타내기 위해 부명(符命)을 조작하였다. CE 7년 황제가 된 후, 유교 경전에 의거한 개혁정책과 한나라와 다른 화폐, 관료 제도를 강력하게 시행하였다. 그러나 현실과 맞지 않은 개혁정책과 빈번한 제도 변경으로 국정의 혼선과 오류가 중첩되었고, 기근(饑饉)이 겹치면서 민심의 이반을 불러왔다. 23년 왕망은 이러한 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믿었던 권력 핵심부마저 해체되면서 장안을 침공한 반군에게 살해됐는데 이때 68세였다. 09 백양 지음 · 김영수 옮김, 『맨얼굴의 중국사2』, 도서출판 창해, 2005, 238쪽. 10 中興二十八將 前世以爲上應二十八宿 未之詳也. (中略) 永平中, 顯宗追感前世功臣, 乃圖畫二十八將於南宮雲臺, 其外又有王常, 李通, 竇融, 卓茂, 合三十二人. 故依其本第係之篇末, 以志功臣之次云爾. 太傅高密侯鄧禹 中山太守全椒侯馬成 大司馬廣平侯吳漢 河南尹阜成侯王梁 左將軍膠東侯賈復 琅邪太守祝阿侯陳俊 建威大將軍好畤侯耿弇 驃騎大將軍參蘧侯杜茂 執金吾雍奴侯寇恂 積弩將軍昆陽侯傅俊 征南大將軍舞陽侯岑彭 左曹合肥侯堅鐔 征西大將軍陽夏侯馮異 上谷太守淮陵侯王覇 建威大將軍鬲侯朱祐 信都太守阿陵侯任光 征虜大將軍潁陽侯祭遵 豫章太守中水侯李忠 驃騎大將軍櫟陽侯景丹 右將軍槐里侯萬脩 虎牙大將軍安平侯蓋延 太常靈壽侯邳肜 衛尉安成侯銚期 驍騎將軍昌成侯劉植 東郡太守東光侯耿純 橫野大將軍山桑侯王常 城門校尉郎陵侯藏宮 大司空固始侯李通 捕虜將軍楊虛侯馬武 大司空安豊侯竇融 驃騎將軍愼侯劉隆 太傅宣德侯卓茂 (『후한서』 卷二十二, 「朱景王杜馬劉傅堅馬列傳」第十二) 11 1992년에 28수관을 만들고 1995년에 28수관 소상(塑像)들의 채색을 완료했다고 한다(張雁雁, 『漢光武帝原陵』, 中國文史出版社, 2006, 139面). 12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 ?-25). 자(字)는 성공(聖公). 왕망 말년에 법을 어겨 평림(平林)으로 망명하였다가 22년 평림을 기반으로 한 반란이 일어나자 평림군(平林軍)에 투항했고 23년 호(號)를 경시(更始) 장군이라 했다. 이때 평림군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는데 곧 유수의 형인 유연(劉縯)의 위세와 명망을 시기하여 그를 죽였다. 한나라의 부흥을 바라는 민심을 업고 왕망을 몰아내고 장안을 차지하였으나 혼란을 수습할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의 잘못된 정치는 모반을 불러와 혼란을 부채질했다. 왕망 말기에 일어났던 반란세력 가운데서 가장 세력이 컸던 적미(赤眉)가 장안을 함락시킨 이후 처음에는 장사왕(長沙王)에 봉해졌으나 후에 사록(謝祿)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3 18년 왕망 말기에 번숭(樊崇)이 중심이 되어 산동(山東)에서 일어난 농민반란. 자신들을 다른 무리들과 구별하기 위해 눈썹을 붉게 물들인 까닭에 적미라는 이름이 붙었다. 14 왕망 말기에 부곡(部曲)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의 하나. 15 천수(天水) 성기(成紀, 현재 甘肅省 秦安) 사람. 왕망 시기에 국사(國師)였던 유흠(劉歆)의 속관(屬官)이었다가 향리로 돌아왔다. 유현(劉玄)이 칭제(稱帝)하자 한(漢)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10만의 병력을 모아 옹주목(雍州牧) 진경(陳慶)을 처단하고 안정(安定), 돈황(敦煌), 장액(張掖), 주천(酒泉), 무위(武威) 등을 점령하였다. 23년 유현에 투항하여 어사대부(御史大夫), 우장군(右將軍)에 이르렀다. 적미(赤眉)가 강성하여 장안이 위태롭게 되자 24년 장앙(張卬) 등과 모의하여 경시를 협박하여 경시제의 본래 근거지인 남양(南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일이 누설되어 천수로 도망쳤다. 천수에 돌아와 다시 무리를 모으고 자칭 서주(西州, 감숙성의 동부 지역) 상장군이라 했다. 6년 광무제가 경감(耿弇) 등을 파견하여 공손술(公孫述)을 정벌할 때 길을 막고 한나라 병사들을 저지하면서 공손술에게는 칭신(稱臣)의 사자를 파견하였다. 8년 공손술이 그를 삭녕왕(朔寧王)에 봉했으나 그의 부하들이 대거 광무제에 투항하여 세력이 축소되자 분사(憤死)했다. 16 부풍(扶風) 무릉(茂陵, 현재 陝西省 興平 東北) 사람. 경시(更始)가 선 이후 경시의 명을 사칭하여 스스로 보한(輔漢)장군이라 칭하고 촉군(蜀郡)태수 겸 익주목(益州牧)이 되어 무리를 모았다. 24(경시 2)년 스스로 촉왕(蜀王)이 되어 성도(成都)를 도읍으로 삼았다. 25년 4월 스스로 천자가 되어 국호를 성가(成家)라 했다. 31년 외효(隗囂, ?-33)가 칭신(稱臣)의 사절을 보내어 그의 영향력이 더욱 확대되었다. 성격이 가혹하고 귀신을 좋아하며 형벌을 남발한데다가 측근의 인사들만을 신임하여 장수들과 관리들의 마음을 잃었다. 32년 광무제가 군대를 파견하여 외효를 공격하여 승리하니 촉 지방 전체가 두려움에 떨었다. 34년 광무제가 오한(吳漢)과 잠팽(岑彭)을 보내 공격하니 다음해인 35년 패망했다. 17 사마광, 『자치통감 5』(권중달 옮김, 도서출판 삼화, 2010), 35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