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의 의미(927)
유 병 덕
이제 뜨거운 여름도 가고 추석연휴도 끝났다. 그런데 난 아직도 추석을 의미 있게 보낸 잔영이 남아 있다. 그만큼 유년시절부터 추석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추석하면 어린 시절 즐거웠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새 옷을 사주면 그 옷을 입고 동네방네 자랑했다. 차례지내고 나면 상에 올렸던 맛있는 밤, 대추, 곳 감은 내차지였다. 또한, 집안 어른께 인사를 드리면 주셨던 용돈에 대한 추억도 아련하다. 게다가 이번 추석은 6촌 형제들이 합심하여 정말 큰일을 해낼 수 있었던 특별한 기회였다. 그래서 추석은 더욱 의미가 있다.
우리의 전통명절인 추석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2017년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28.8%가, 모 유통업체에서 이번 추석을 앞두고 30~40대 성인대상 실시한 설문에서는 40%가까이가 추석차례나 성묘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추석차례나 성묘대신 해외로 여행을 떠나거나 국내 캠핑을 하면서 연휴를 즐긴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추석을 연휴로 즐기더라도 추석명절의 전통은 보전· 발전시켜야한다고 본다. 추석은 농경문화에서 시작하였지만 현대사회에서도 의미 있는 명절이다. 오랜만에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조상께 감사드리고 친교와 화목을 다지는 기회이다. 또한, 많은 고향친구를 만나 정담을 나누어 기쁘다. 나 역시도 친가에서의 조상차례를 올리고 성묘를 다녀옴은 물론 처갓집 장인, 장모님을 찾아뵙고 왔다.
나는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셨다. 부모님 산소는 무명의 서산 가야산자락에 모셔있다. 서쪽으로 서산시내가 내려다보이고 북동쪽으로 개심사 절이 자리하고 있다. 증조부께서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사시다 일제강점기 초에 피신하여 충북 진천, 충남 아산을 경유하여 서산에 새 터를 잡으셨다 한다. 그 윗대 중시조 및 조상님들의 선영은 대부분 경기도 하남시 검단산 자락에 있다. 그런데 우리문중(기계 유씨)의 뿌리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북 포항시 기계면이다.
돌아가신 부친께서는 대부분 서울 마포에서 생활하셨다. 젊은 시절에는 6.25이후 38선 통제지역이 수복되면서 의정부, 춘천, 양구 등을 옮기며 군 생활을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들어 갈 무렵 양구에서 돌아 가셨다. 그 당시 둘째 할아버지 후손인 충남 서산에 살고 계신 세분의 당숙께서 오셔서 서산 선영으로 모시자고 하여 서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런데 추석을 앞두고 나는 그동안 선영을 관리하던 당숙께서 많이 편찮으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것저것이 두루 걱정이 되었다. 지난봄에 갔을 때 겨울을 나면서 일부 말라죽은 잔디를 보식을 했었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추석에 사면 잔디가 파랗게 산소를 보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여름 장마가 일찍 끝나고 오랜 폭염과 가뭄이 지속되면서 잔디가 사라진 것이다.
사실, 이 서산의 선산은 조부 명의로 되어있다. 이 곳에는 부친, 조부, 증조부, 고조부, 그리고 둘째 조부의 묘가 있다. 증조부께서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조부께서 장손으로 의당 산소를 수호하여야하나 그러하지 못했다. 나는 실은 조부를 뵙지 못했다. 돌아가신 큰 당숙 부 말씀에 의하면 조부께서는 객지로 전전하다가 가끔 서산을 찾아오시곤 했다는 것이다. 또한 부친께서도 그러하셨다. 그래서 둘째 조부와 후손이 산소를 관리해 온 것이다.
유교문화 속에서 보면 그 집안의 장자는 조상을 수호할 책임이 주어져왔다. 나는 장손 집안 후손으로 조상께 부끄럽게 생각해 왔다. 직접 산소를 관리하지 못하고 일 년에 두 번, 설과 추석에 찾아뵈니 말이다. 그동안 조부도, 부친도 그리고 나도 장자의 책임을 못해왔다. 도심에서 생활하며 자신의 삶이 바쁘다고 무관심하거나 소홀히 한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선영을 수호해 온 당숙 어른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현재 둘째 당숙께서 선영아래서 살고 계신다. 그분은 한평생 산소를 관리해온 것이다. 젊은 시절 다른 곳에 살다 결혼한 한 후에 산소를 돌보기 위해 위하여 서산으로 이사 하셨을 정도이다. 그동안 시간이 나는 대로 산소를 찾아 잡풀을 뽑아주고 산짐승이 파놓은 자리를 흙으로 메우는 등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이제 당숙께서 연로하여 산소관리가 어렵다. 하지만 나는 장손으로서 선영산소에 대하여 납골당이나 수목장 등으로 바꾸자고 말씀 드릴 수 없다. 당숙어른께서 조상 묘지 수호의지가 워낙 완고하시기 때문이다.
서산에는 둘째 조부의 후손인 세분의 당숙께서 살고 계셨었는데. 큰 당숙은 수년전에 돌아가시고, 이제 산소를 관리하던 둘째 당숙도, 시내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셋째 당숙도 거동이 불편하시다. 이제 우리세대가 산소를 돌보아야 할 입장이다. 다행인 것은 얼마 전에 서울에 살던 6촌 동생(둘째 당숙의 자)이 선영 아래로 귀향을 했다.
그러니까 추석 전에 귀향해 사는 그 육촌 동생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왔다. “형님, 추석 앞두고 산소에 올라가보니 잔디가 다 죽었네요. 그래서 우선, 큰아버님 산소와 형님네 두 산소를 중장비로 정비하고 잔디를 다시 입혀야 좋겠네요.”
나는 육촌 동생의 말에 추석을 앞두고 더욱 조상님께 뵐 면목이 없었다. 무조건 그렇게 하자고 답하였다. 산소에 잡풀이 무성하도록 방치한 것은 나의 잘 못이 크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잔디를 고사하게까지 했으니 조상님들께 송구스럽기만 했다.
귀향해 사는 6촌 동생은 서둘러 포크레인 중장비와 기사, 산소 일을 할 기술자 그리고 필요한 잔디를 확보하기로 하였다. 나는 제일 연배인 큰 형님께 전화하여 추석을 앞두고 산소를 수호할 수 있게 형제들 힘을 모으자고 제안했다. 서산에서 추석 일주일 앞두고 모이자는 연락이 왔다. 나는 대전에서 새벽에 출발했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등산화, 작업복, 땀수건과 속옷을 챙겨서 차에 싣고 서산으로 달렸다. 나는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길을 1시간 반 달려 도착했다.
나에게 4촌 형제는 없다. 제일 가까운게 형제 말고는 6촌들이다. 큰 아버님이 계셨으나 일본으로 징용되어 행불상태이니 4촌이 있을 수가 없다. 마침내 6촌 형제들이 사초를 모시기 위해 선영 아래 다 모였다. 그곳에 서울에서 귀향한 동생이 갤러리를 만들어 놓았다. 서울 동생은 전시회를 할 정도로 유화를 잘 그린다. 그 곳에서 형제들은 우선 동생의 유화 작품을 검상하면서 커피한잔을 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는 동안에 포크레인 중장비와 인부들이 도착했다. 나는 가져간 작업복과 등산화 그리고 땀수건을 목에 두르고 선친 산소에 올랐다. 우선 조상 산소 앞에서 성묘를 드리고 산소 주변 정비와 잔디를 입히는 작업을 시작했다.
우선, 잔디를 죽게 만드는 그늘을 없애기 위하여 포크레인으로 산소주변의 소나무를 제거했다. 이어서 봉분을 헐어 내고 다시 잔디를 놓고 위에 생흙을 옮겨와 다졌다. 또한, 봉분 앞이 협소하여 포크레인으로 흙을 옮겨 성토를 하고 배수구 작업도 추가하였다. 일을 하다 보니 생각보다 늦어졌다. 오후 5시가 되니 중장비와 기술자들이 간다는 것이다.
날이 저물어 하루 일을 더하기로 하고 하산하였다. 일하던 사람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서산 큰 형님께서 집에 가서 함께 쉬자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사양했다. 내가 가면 불편할 것 같았다. 그것보다도 오래전 서산에 살고 있는 친구가 한번 만나자고 연락이 왔었다. 그 친구는 충남도청에 근무를 했다. 그를 만나 해미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덕산 온천으로 와서 쉬었다. 조상 산소를 수호하러 와서 친구까지 만나는 추억을 되살릴 수 있어 즐거웠다.
다음날 아침, 덕산 리조트 인근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오늘 일하는 사람들이 먹을 생수와 빵을 사서 차에 싣고 해미로 달렸다. 산소에 도착하니 모두 모여 있었다. 잔디를 심는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보다 손발이 잘 맞았다. 한쪽에서는 잔디를 자르고, 나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괭이로 홀을 파고, 심고, 다지고 하여 5천여 장의 잔디를 모두 심은 것이다.
나는 잔디가 말라죽을까봐 걱정되어 통나무를 들고 다니며 산소의 경사면과 봉분을 다졌다.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이렇게 정성들여 심은 잔다가 잘 살았으면 좋을 텐데 하는 마음으로 전문가에게 물어 보니 “겨울나면 대부분 죽습니다. 내년 한식 때 다시 한 번 더 보식하여야 합니다.”
하고 말을 한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매년 이러한 작업을 반복하여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제 시대는 많이 변하였다. 그리고 비좁은 나라에서 산소봉분을 만들어 이렇게 관리해야만 조상을 위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긴 했었다.
이제 특별한 의미를 가졌었던 추석이 지난지도 여러 날이 가고 있다. 오늘따라 날씨는 청명하기만 하다. 그렇게 무덥던 여름도 가고 이젠 정말 완연한 가을이다. 뭉게구름 한 덩이가 여유롭기만 하다. 나는 그 하늘을 바라보며 추석 전 서산 선산에 평안히 모신 조상님을 생각한다. 다시 생각해도 지난 추석 전의 선영 수호 작업은 정말 의미가 있었다. 6촌 형제간에 모두 합심해서 한 작업이지만 오래 만에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가족의 화합을 다졌던 그 작업은 을 생각할수록 잘한 일인 것만 같다. 나는 앞으로 더욱 성심을 다해 조상님께 의례를 갖추고 6촌들과 함께 선영을 돌볼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추석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