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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타리쉼터 스크랩 영웅의 선택, 급류 앞에 서다
청호짱구 추천 0 조회 15 11.10.12 19: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특별기획 2부작>

 

 

 

이 글을 먼저 보기 전에 이와 관련된 책 한권을 소개할 까 한다. 서강대 사학과 교수로 제직하고 있는 정두희 교수가 쓴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휴머니스트, 2007)을 읽어보시면 큰 도움을 받을 것이다. 특히 이 책에서 주목할 것은 임진왜란를 여러 각도에서 해석하고 있다. 특히 인터넷 서점 알라딘 소개에 따르면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이 좌절되고 더불어 그의 정권이 단명으로 끝나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중국 명나라는 청나라에게 정복되었으며, 조선왕조는 멸망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임진왜란의 상처는 왕조의 끝 무렵까지 깊은 영향을 남겼다. 전쟁은 7년에 걸쳐 참혹하게 진행되었지만, ‘패자가 없다’는 역사 서술에 대한 의심을 통해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의 실상을 파헤침으로써 또 다른 전쟁의 시작과 가능성을 배제하고자 하는 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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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독백 1.


그날의 전투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시체) 밤새도록 불화살과 조총이 불을 뿜었다. 위태로운 근접전이었다. 전투 막바지 나는 직접 북채를 들고 전투를 독려 했다. 왼쪽 가슴이 무거워졌다. 오래 전부터 예감했던 일이었다. 많은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나는 항상 적의 총구 앞에 있었다. 그곳은 피할 수 없는 급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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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 영웅선택, 급류 앞에 서다.



거제도 주변은 조선 수군의 한산해전 승리 이후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된다. 그래서 섬 곳곳에는 임진왜란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거제도 동북 쪽의 장문포, 이곳에 있는 성 역시 임진왜란 초기에 축조된 것이다. 성벽은 경사져 있고 커다란 바윗돌로 쌓여있다. 그리고 몇 차례 꺾여 돌출된 부분도 보인다. 전형적인 왜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군은 이곳 장문포와 송진포, 영등포등 거제도에만 세 곳에 왜성을 쌓았다.


나동욱 씨 지리연구원.

"만약 조선수군이 왜군의 본격지인 부산을 공격할 경우에 바로 이 거제도와 통영 사이의 좁은 수로를 꼭 거쳐가야 합니다. 특히 왜군의 입장에서 보면 번번이 해전에서 실패를 하니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령을 내리게 되는데 해안의 가까운 좋은 위치에서 배를 타지 않고 조선수군을 공격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위치를 택해서 성을 쌓으라고 명령이 내려집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거제도에 성을 쌓고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조선 수군을 포격할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그의 명령대로 일본군은 부산으로 가는 길목, 거제의 바닷가에 성을 쌓았다. 바닷가의 왜성은 이순신 함대에 연전연패한 일본군이 해전을 피하려는 궁여지책이었지만 조선 수군에게는 위협적인 조치였다. 일본군은 왜 거제도에 성을 쌓았을까? 정두희 교수는 일본군과 이순신의 대치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일본군이 성을 쌓은 직접적인 계기를 부산해전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부산은 일본군이 한국의 진출할 때 최고의 보급기지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이순신 해군의 사정권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일본군한테 굉장한 충격을 졌죠. 그것은 이젠 육전에서 그렇지 않아도 전선이 너무 기어서 고생하던 일본군들이 급격히 북방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계기도 되었고 또 하나는 한산도 해전으로 인해서 한산도 앞바다의 제해권을 이순신 장군이 장악하게 되었는데 그 제해권에 대해서 어떠한 도전도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부산포해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산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순신 함대는 약 두 달 후 적의 본거지인 부산을 공격한다. 전선 74척 협선 92척으로 이루어진 이순신 함대는 여수의 좌수영을 출발한지 한 달여 만에 부산에 닿았다. 당시 부산에는 적선 470여 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산해전 이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린 해전 금지령에 따라 모든 전선을 부두에 정박시켜 놓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은 대부분 육지에 상륙한 상태였다. 조선군은 정박 중인 적의 함대를 항해 장사진으로 진격해 갔다. 즉 모든 전선을 일렬로 정렬시켜 지나가면서 함포 사격을 한 것이다. 이 전투로 적선 150여척을 격침시켰다. 부산해전은 적의 본거지를 직접 타격하여 대승을 거둔 전투로 전략적으로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한산 해전의 패배이후 전력을 재정비하던 일본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것이다. 그 후 일본군의 최전방 부대인 평양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보급로의 단절로 평양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인터뷰) "우선 고니시군이 서해안을 따라 평양까지 가질 않았습니까. 원래 그렇게 빠른 속도로 육지를 진격하면 남해에서 서해를 돌아가지고 대규모 수송선단으로 보충인원과 장비가 보급되기로 됐는데 그것이 차단됐으니까 이걸로 인해 가장 타격을 받은 사람이 평양까지 진출한 고니시 군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산도, 안골포, 부산해전의 패배로 일본군은 오로지 육로를 통한 보급선만을 간신히 유지하게 되었다. 일본 쿠슈 대학 조선사 연구실, 왜성전문가 나카니시 씨는 보급로 문제가 일본군이 후퇴하고 또 왜성을 쌓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인터뷰) "예를 들어 배 한척이 평양에 도착하면 평양의 고니시 유티나카 부대는 3일 동안 그것으로 먹고 지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만약 부산에서 육로로 운반하려면 말이 500마리 필요합니다. 그리고 물론 운반할 500명과 호위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평양으로 진격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결국 남쪽으로 철수를 한다. 그리고는 진해 웅천에 왜성을 쌓고 주둔하게 된다. 고니시 유키나가 역시 이순신 함대에게 정박할 항구를 제공하지 않고 또한 이순신 함대를 육지에서 포격할 수 있는 지역에 왜성을 쌓았다. 일본군은 이순신 함대가 다시 부산을 공격하면 육지에서 공격할 수 있고 또 후방에서 포위할 수 있는 위치에 왜성을 쌓았던 것이다.


부산 복천박물관 조사 연구실장 나동욱

인터뷰) "그 중에서 이 거제도에 위치한 성들은 이 왜성 중에서 최대 서쪽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일본 수군으로 봐서도 전라도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최전선이 되겠고 조선수군으로 봐서도 전라도 지역으로 진출을 못하도록 막는 최대의 방어선이 되겠습니다."


일본군이 거제 동쪽 부터 부산까지를 요새화하는 동안 이순신은 또 다른 선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한산해전이 끝나자마자 전라좌수영을 통영 한산도로 옮겨줄 것을 조정에 요청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한산도를 선택한 것은 전략적 고려에 의한 것이었다. 한산도는 거제와 통영 사이의 내해를 통해 오는 적과, 거제 바깥의 외해로 들어오는 적을 모두 막을 수 있는 요충지였던 것이다. 당시 목선 위주의 함대는 위험한 외해 대신 안전한 내해로 올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순신의 한산도 선택은 견내량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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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독백 2


멀리 여수에서 부산의 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막기 위해서는 적과 가까운 거리에서, 좁은 길목을 막아야 했다. 이곳 견내량이 최적지였다. 이 물길만 지킨다면 적은 전라도로, 그리고 서해로 진출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급류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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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의 조선수군과 거제도의 일본군, 이들의 길고 긴 대치가 시작되었다. 이순신은 약 100여 척의 함대로 수십 만의 일본군을 4년 반 동안 막았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압박이었다. 언제든지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서, 절대 열세의 전력으로 적을 막아야 했다. 더구나 조정의 지원도 없고 육군의 도움도 없는 수군만의 외로운 대치였다.


정두희 교수 서강대 사학과

인터뷰) "이순신 함대의 가장 큰 약점은 이 함대 이외에는 보충할 함대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지면 끝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함대를 지위하는 이순신 장군의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이기는 싸움이 아니면 해서는 안 된다는 부담이 따르는 것이죠. 그러니까 생각해야 될 일이 더욱 많고 이것이 이순신 장군한테 큰 심적인 부담을 주는 거죠. 전 그것이 이순신 함대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이순신 자신의 상태와 심경은 그가 남긴 일기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기에는 몸이 불편하거나 아팠다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팽팽한 긴장과 압박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강한 적과 대치하면서도 전혀 보급과 지원을 받지 못했던 야전 사령관 이순신, 한산도 통제영 시절은 고난의 시기였다. 한산도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운 이순신에게 조정은 부산을 선제공격하라는 명령을 몇 차례에 걸쳐 내린다. 결국 이것은 이순신의 파직을 불렀다. 이순신은 부산을 공격 하지 않았다. 견내량을 넘으면 위험했기 때문이다. 적은 이미 이순신의 공격에 모든 방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견내량은 함부로 넘을 수 없는 군사분계선이었다.


정두희 교수

인터뷰) "이순신도 뛰어난 장군이지만, 조선으로 출전했던 일본군 장군들도 싸움에 관해서는 아주 잘아는 고수들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선제공격할 틈을 전 서로가 못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상황에서 말하자면 승리규정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약점을 드러내서 질 수가 있으니까 이순신도 한산도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선제공격도 못하고 혼자 버티려니까 그 당시 일기에 그렇게 힘들었던 모습들이 자주 드러났던 것이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균형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이 난다. 조선 수군이 거제의 칠천량 해전에서 크게 패하고 마는 것이다. 부산공격 명령을 어긴 죄로 투옥된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부산 공격에 나섰다. 그것은 조정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정면 대결을 피했다. 적을 쫓던 조선 함대는 풍랑을 만났고 결국 부산에는 접근조차 못한 채 후퇴해야 했다.


기타지마 민지 교수 일본 공립 여자 대학교

인터뷰) "일본군은 조선군에 다가갔다가 바로 도망갑니다. 그러면 조선군은 쫓아갑니다. 또 다시 한쪽에서 조선군에게 접근했다가 다시 도망갑니다. 그렇게 해서 원균 함대의 배들이 뿔뿔이 흩어져버려 반대로 공격을 당한 것입니다. 한산도에서 이순신이 유인해서 끌어낸 것과 같은 방법을 일본이 취했다고 생각합니다."


1597년 7월 16일 거제 칠천량. 가덕도에 상륙하려다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400 명의 군사를 잃은 원균의 조선함대는 풍랑에 시달리며 거제 칠천량으로 후퇴했다. 정박 중이던 조선 함대는 새벽 4시,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수백 척의 일본 수군 연합함대가 조선 수군을 완전 포위, 공격해 왔다. 전투는 조선 수군의 참패로 끝이 났다. 조선 수군 연합함대 100여 척이 격침되었고 통제사 원균 장군은 전사했다. 조선수군은 완전히 무너졌고 한산도 통제영도 궤멸했다.


나카니시 다케시 역사연구가

인터뷰) "칠천량에서 일본해군은 시마즈, 니베시마, 고니시 등 육군의 큰 다이묘들도 거의 수군과 함께 싸웁니다. 그래서 조선수군을 격파하고 그 때문에 임진왜란 때 공격할 수 없었던 전라도에도 바다를 통해 쉽게 진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견내량 군사 분계선은 무너졌다. 일본군은 이 물길을 지나 곧장 전라도로 진격했다. 정유재란의 첫번째 목표는 전라도였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전라도를 차지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그 때문에 이기지 못했다고 믿고 있었다. 칠천량 패전 후, 이순신은 전황 파악을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고 있었다. 비석 그러다가 진주의 수곡에서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 교지를 받았다. 전함도 없고 군사도 없는 해군 사령관이 된 것이다. 삼태기 그러나 이순신은 적이 휩쓸고 간 지역에서 재기를 준비했다. 각 지역을 돌면서 칠천량 패전으로 흩어진 수군들을 다시 모았다. 순천에서 60명, 보성에서 120명 등 군사를 모았으나 수십 만 일본군에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 군사들은 임진왜란 초기부터 이순신과 함께 수많은 전투를 치른 병사들이었다.


조원래 교수 순천대학교 사학과

인터뷰) "그 군세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전투 실전 경험을 갖고 있었던 지난날의 오른팔 왼팔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수군 장졸들이 한 덩어리가 된 것이죠."


이순신은 군사와 버려진 군량, 병장기를 수습해가며 서쪽으로 이동했다. 칠천량 패전 한 달 후, 장흥의 회령포에 닿았다. 당시 회령포에는 칠천량에서 도망쳐온 경상우수사 배설의 전함 12척이 정박해 있었다. 이순신은 통제사 자격으로 그 전선을 인수했다. 그리고 몇 안되는 병사들과 함께 왕명에 따라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조정의 생각은 달랐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수군을 데리고 권율장군 휘하에서 싸우라고 명령했다. 수군 해체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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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독백 3.


'안될 말이었다.' 조선이 수군을 해체하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한 번의 패전으로 조선 수군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그 많던 전선은 모두 사라지고 이제 열 두 척만이 남았다. 병장기는 부서지고 병사들도 흩어졌다. 이에 조정에서는 수군을 해체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안 될 말이었다. 수군이 없어지면 적은 손쉽게 서해 충청도 그리고 한양으로 진격할 것이다. 이 위기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수군 뿐, 바다를 포기하는 것은 곧 전쟁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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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성을 함락했던 일본군은 진로를 변경하여 일부는 계속 북상, 충청도로 올라가고 일부는 다시 남하해서 전라도 해안으로 진격했다. 그것은 이순신의 이동경로를 뒤쫓는 길이었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괴멸시킨 일등공신 도도 다카도라, 역시 칠천량의 주역 가토 요시아키, 그리고 한산해전의 패장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명량에서 목이 잘리는 비운의 주인공 구루지마 미치후사까지, 이들이 총집결하여 이순신을 쫓았다. 명량해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토 가즈오

인터뷰) "일본육군과 수군은 협조에서 한쪽은 육상에서 한쪽은 제해권을 잡은 후 서해안을 북상해서 서울로 간다는 그런 목적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육해군이 협조해서 북진을 하자는 것이 명랑의 계획이었습니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특히 이순신의 건강도 좋지 않았다. 곽란으로 인사불성에 빠지기도 했으며, 아예 움직이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1) 더구나 적은 회령포를 지나 해남으로 다가오고 있는 상황,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정두희 교수

인터뷰)"그 순간에도 자기가 싸워서 이길만한 가능성이 있는 장수를 찾았단 소리를 저는 이게 보통 내리기 어려운 결단이죠. 그 순간은 결정을 내려야 될 절박한 순간이 다가오고 길게 시간을 끌 여유도 없을 때 말이죠. 그래서 그 13척 가지고 흔들리지 않고 그걸 가지고서라도 말하자면 전쟁에 이길 가능성이 있는 장수를 찾아보자는 것이죠. 물론 이순신도 꼭 이긴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워낙 13척 밖에 안 되는 적은 숫자였기 때문에……."


명량해전 하루 전, 해남 어란포에 적선 55 척이 들어왔다. 이를 확인한 이순신은 전라우수영으로 진을 옮겼다. 전라 우수영은 명량의 물길 뒤쪽, 이순신은 여기서 적을 기다렸다. 명량은 진도와 해남 사이의 좁은 물길이다. 이곳은 우리나라 연안에서 조류의 흐름이 가장 센 곳이다. 6시간 마다 방향이 바뀌는 조류가 좁은 해역을 통과하면서 엄청난 속도와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명량 조류의 최고 속도는 시속 11노트, 전투는 커녕 배를 정지해 있기도 힘든 물살인 것이다. 이순신은 이 급류 앞에서 적의 대군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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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독백 4.


이순신) 다시 급류 앞에 섰다.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다. 적은 우리의 열 배가 넘는 전력,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다. 한산도와는 다른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 막지 못하면 적은 서해를 따라 한강으로 진격할 것이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나는 명량의 급류 위에 모든 것을 걸었다. 나 이순신과 조선의 운명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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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당시 일본군은 명량의 조류 상황을 몰랐을까?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의 유물과 자료를 보관하는 곳에서, 우리는 일본수군과 조류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를 만날 수 있었다. 오래 전 부터 일본의 수군들이 사용하던 조류시간표였다. 그것은 시간대 별 조류의 방향과 세기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일본 수군의 본거지인 에이메현, 이곳에는 일반인들에게 인기 있는 관광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조류체험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이곳의 조류는 최고 시속 10노트, 이 조류 역시 육지와 섬, 섬과 섬 사이의 좁은 해역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작은 섬들은 일본 수군의 군사기지들이었다. 기지는 빠른 조류를 이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의 일본 수군들 역시 이런 조류에 잘 적응하고 이용하지 않았을까?


후지모토 나로 어부

인터뷰) "옛날 수군의 시에는 6시간마다 조수가 바뀌는 것을 이용해서 6시간 가서 쉬고 또 6시간 가고 시눈 식으로... 조류를 이용해서 멀리 서쪽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조선군과 일본군, 모두 명량의 물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명량의 급류는 어떻게 형성되어 흐르고 있을까? 명량을 중심으로 목포와 해남 쪽은 상대적으로 넓은 바다이다. 이 넓은 바다의 물이 좁은 수로를 통과하면서 수심은 1미터 이상 높아지고 급류가 생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수중의 암초로 인해 소용돌이까지 생긴다. 그렇다면 명량해전 당일의 조류는 어땠을까? 달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는 조류는 컴퓨터로 수백 년 전의 상황도 정확하게 조회할 수 있다. 1597년 음력 9월, 명량의 조류표가 완성되었다. 명량의 조류 역시 6시간 마다 방향이 바뀌고 있었다. 명량 해전 당일인 9월16일,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 25일, 물길이 바뀌는 시간은 5시 18분, 11시 8분 등이었고, 최고조 시간은 8시 9분, 2시 45분 등이었다. 그리고 그날 오전의 조류방향은 남해에서 서해, 즉 일본군 측에서 명량 쪽으로 들어오는 조류였다. 당시 조류의 최고 속도는 9.5 노트, 명량은 바다의 고속도로였다.


김옥수 국립해양조사원

인터뷰) '당일의 조류는 오전 5시경에 물이 북쪽방향으로 흐리기 시작해서 8시경에 최대유속이 9노트 정도. 다시 흐름에 방향이 바뀌는 정도... 어란진에서 배를 띄워서 목포 쪽으로 항해한다면 약 3시간 정도를 지나면 울돌목으로 지나가게 되고 그곳에서부터 3시간 정도를 더 항해를 한다면 목포까지 쉽게 항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 날 난중일기는 적의 출현 시간을 적고 있다. 그것은 조조, 즉 이른 아침이었다. 일본군은 조류를 정확하게 타고 출발했다. 이른 아침 조류가 서해쪽으로 바뀌었을 때 어란진을 출발했던 것이다. 일본군은 순조를 타고 빠르게 돌진해 왔다. 일본군은 조류를 최대한 이용하여 명량을 통과하려 했을 것이다. 당시 적의 숫자에 대해 난중일기는 적선 부지기수, 즉,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순신은 이런 적에 대해 어떤 대비책이 있었을까? 명량해전의 승리 비결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일본 측 자료가 있다


그것은 철쇄에 관한 일본의 기록이었다. 일본군이 다가오자 이순신은 물 속에 늘어뜨렸던 철쇄를 당겨 일본 배가 걸리게 했다. 즉, 이순신은 명량의 수중에 장애물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조원래 교수

인터뷰) "그것과 관련해서 상당히 설득력을 갖는 소위 철쇄장치에 대한 그리고 어쩌면은 이 부분이 명량해전을 대승으로 이끌어 가는데 있어서 한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해주는 중요한 사료라고 이해가 됩니다.'


난중일기에도 수중 장애물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은 하루 종일 바다에 쇠사슬을 설치하는 것을 감독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2) 난중일기 기록의 현장을 찾았다. 종포는 돌산도와 여수 사이의 좁은 물길이다. 또한 이곳은 바로 전라좌수영으로 들어오는 길목이기도 한데, 이순신은 폭 640m의 이 바다 양쪽에 지지대를 설치하고 큰 바위와 나무를 이용해서 철쇄를 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의 수중 장애물과 유사한 시설이 최근 발굴되었다. 경남 문화재 연구원은 바다에서 수백 개의 나무기둥을 발굴, 현재 보존 처리 중이다. 바다 속에서 발견된 수 백 년 전의 나무 기둥들,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나무 기둥들의 굵기는 대체로 일정하다. 하지만 길이는 길고 짧은 것들이 섞여 있다.


정의도 학예실장 경남문화재연구원

인터뷰) "저 목책의 원래 길이는 약 4m~5m 정도 됐습니다. 저 목책을 가지고 개벌에 꼽게 됩니다. 개벌 밑으로 들어간 부분은 잘 남아 있는 반면에 그 위의 부분은 충해를 입게 되어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개벌 속에 많이 들어간 부분이 남아서 긴 것이고 또 개벌 속에 들어간 짧은 부분은 짧게 남아 있게 되는 겁니다."


갯벌에 박혔던 부분은 사람이 손질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조사 결과 이들은 4, 5백년 이상 갯벌에 묻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갯벌 위 바닷물에 노출되었던 부분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벌레와 파도 등의 영향일 것이다. 나무기둥이 발견된 진해의 제포,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1510년, 삼포왜란 때는 왜구들이 점령하여 큰 피해를 입었던 지역이다. 나무기둥은 해안 매립공사과정에서 발견되었다. 한쪽을 매립하자 반대쪽 갯벌이 밀리면서 나무기둥이 대량으로 노출되었던 것이다.


나무기둥은 해안을 둘러싼 형태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촘촘하게 박힌 채 네 개의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마치 나무기둥으로 인공 섬을 만든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특이한 목재 무더기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1510년 중종실록에는 이 시설의 설치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즉 큰 나무들로 수중 목책을 만들어 정박 중인 배를 보호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무기둥과 함께 커다란 돌들도 발견되었다. 돌덩이는 한결 같이 나무기둥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돌을 묶었던 새끼줄도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먼저 돌과 나무기둥을 이용하여 수중에 지지대를 설치했다. 그런 다음 지지대를 쇠줄로 연결했다. 쇠줄 중간에는 풀었다 잠궜다 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었다. 수중 목책인 것이다


정의도 학예실장

인터뷰) "우리의 배가 들어오면 고리를 풀면 되겠죠. 또 왜구의 배가 들어오면 그걸 막고 나서 풀지 않으면 못 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거기다가 배 구조로 볼 때 우리 조선 배는 밑이 평평해서 그냥 타고 들어올 수 있지만 왜구의 배는 밑이 뾰족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구조상으로 들어오기 어려운 그런 시설을 했을 것이라 예상합니다."


일본 배는 밑바닥이 깊고 뾰족한 이른바 첨저선이다. 반면 조선배는 바닥이 낮고 평평한 평저선, 따라서 수중 장애물은 일본배의 진입을 막는데 효과적이었다. 이러한 수중 장애물은 실록에 기록되지 않은 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통영의 당포에서도 제포와 거의 유사한 수중 목책이 발견되었다.


당시 정의도 학예실장

인터뷰) "이 수중 목책을 출토한 곳이 제포 진, 안골포 진, 부산포 진, 영등포 진 이렇게 군사시설이 있는 진 앞에다 설치를 해 놓습니다. 게다가 통영에 있는 방포진 앞에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지만 거기에서도 수중 목책이 발견됐기 때문에 남해안 일대에는 당시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서 전반적으로 이러한 시설을 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군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지역에는 어김없이 수중장애물을 설치했다. 기록에는 없지만 설치한 곳도 있다. 그렇다면 명량에도 수중 장애물이 있었을까?


최두환 교수

인터뷰) "만약에 장애물을 설치하지 않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전투를 했다고 하면 세력 면에서 너무나 조선 수군이 열쇠기 때문에 그건 절대 이길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로 그게 일본군이 이순신을 제대로 파악을 하긴 했다는 것이죠. 전략적인 면에서 벌써 거기서 차이 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순신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우세한 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곳을 찾아 간 것이다. 그리고 명량의 급류를 선택했다. 그는 이 급류 속에 비장의 무기를 감추고 있었다. 조류를 타고 빠른 속도로 돌진하던 일본 수군은 철쇄에 걸려 전선들끼리 연쇄충돌을 일으켰다. 대혼란의 순간을 이순신 함대는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싸움에서 적선 33척이 격침되었고 수십 척이 파손되었다. 나머지는 멀리 동쪽으로 도망을 갔다. 명량해전이 일본 측에 던진 충격과 영향은 컸다. 이 절에는 임진왜란 당시 출전한 일본군을 기리는 탑이 있다. 이 지역 출신 참전 병사들 중 조선에서 전사한 96명을 위해 세운 탑인 것이다.


윤달세 제일 사학자

인터뷰) "이 비석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 임진왜란, 장유재란에 여기서 100명의 수부가 징용되어 조선으로 출병했는데, 이곳에서는 정유재란 즉 1597년 죽었는데 폭풍우로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출전한 100명중 96명 전사, 이 지역은 이 일로 한동안 세금도 면제받았다. 그들은 왜 전사자들을 폭풍우로 죽었다고 했을까?


인터뷰) "실은 1597년 9월 명량해전에서 전사했는데 일본에서는 조선에게 전사했다고 하면 사기가 떨어진다. 또 여기서 반란도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명량에서의 패전 이후 일본군은 철수를 한다. 그리고 남동해안에 왜성을 쌓고 칩거하게 된다. 전쟁은 사실상 마무리 상태에 접어들었다. 일본은 당시의 이순신에 대해 단 한건의 기록만을 남기고 있다. 임진왜란 후 쓰여진 일본의 조선 정벌기에 단 한 줄의 기록이 있다.  그것은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


마지막 해전이 벌어졌던 바다, 이곳이 바로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던 노량이다. 노량해전은 조선군과 일본군의 정면 충돌로 가장 치열했던 전투였다. 그리고 이순신은 이 바다에서 최후를 맞았다. 7년 전쟁의 종말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비롯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군의 철수를 유언으로 남겼다. 당시 일본의 주력군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에 왜성을 쌓고 농성 중이었다. 이순신 함대는 명나라 군대와 함께 순천 앞바다를 에워싼 채 약 두 달간 이들의 퇴로를 막고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안전한 철수를 원했다. 그는 명나라 군대에 뇌물을 주어 연락선을 보내 구원병을 청했다.


고성과 사천등의 일본군 함대가 연락을 받고 노량 바다로 진격해 왔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순신 함대는 어쩔 수 없이 포위를 풀고 노량으로 나가 적을 맞았다.


정두희 교수

인터뷰) "순천에 있는 그 고니시 군을 지금 순천만에서 봉쇄를 하고 있는데 지금 명나라 군을 통해서 일본군의 연락선이 부산으로 빠져 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래가지고 경상도 쪽에서  철군을 하는 일본함대가 고니시 군을 말하자면 돕기 위해서 출동을 했다는 보고를 받은 다음에는 순천만 넓은 바다에서는 싸울 수가 없으니까 정말 할 수 없이 그 포위를 풀고 그래도 더 싸움하기 유리한 장소인 좁은 목인 노량해협으로 옮기는 데 그때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완전히 상대방 적군을 코너에 몰아넣었는데 말이죠. 그러니까 그 전투는 노량은 자기가 이길 수 있는 장소라고 먼저 고르는 장소가 아니고 양쪽에서 협공을 당할 수밖에 없는 위치가 되니까 그 협공에 효과적으로 그래도 가장 대처할 수 있는 인근의 바다는 노량밖에 없다 해서 그곳으로 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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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독백 5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노량을 선택했다. 적은 항상 급류처럼 밀려왔고 나는 언제나 그 앞에 서 있었다. 순천의 적과 남해의 적을 모두 막기는 힘들 것이다. 이 싸움이 마지막 고비가 될 것이다. 길고도 길었던 7년 전쟁의 마지막, 죽음이 기다린다 하더라도 결코 그냥 보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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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새벽 두시에 시작되었다. 노량의 좁은 바다에 수백 척의 전선이 전투를 벌였다. 처음부터 치열한 접근전으로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200여 척의 배를 잃었다. 최대의 전과를 거두었지만 조선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투 도중 남해 먼 바다를 통해 도주했다. 1598년 11월 19일 새벽, 직접 북을 치며 독전하던 도중 이순신은 총탄을 맞았다. 그의 전사는 즉각 알려지지 않았고 전투는 정오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의 죽음과 함께 7년 전쟁도 마침내 끝이 났다. 그는 마지막까지 급류를 선택 했고 그 앞에서 최후를 맞았다. 전쟁이 끝난 후, 영의정 이항복은 이순신이 남해의 세군데 물길을 지켰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고 기록3)했다.



저작권은 KBS <역사스페셜>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역사 상식에 도움이 될까 해서 작업을 해 올려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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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조선군이 사용했던 주요 무기체계' 사이트 주소

http://blog.daum.net/kukgungsarang/9

▶ 임진왜란 '한일 수군 함선' 사이트 주소

http://cafe.daum.net/Rok-Navy/2QKQ/373 



1) 1597년 8월 22일.

2) 1592년 3월 27일 , 난중일기.

3) “경상도를 거치어 전라도로 가자면은 가로막힌 곳이 한산이요, 경계는 노량이요, 그 목은 명량이라. ...... 그 날에 뉘 공로로 세 군데 험관을 막아냈던고, 그는 곧 으뜸 공신 통제사이었다.” - 이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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