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건축은 19세기 후기까지는 세계 대부분의 문명지역에 보급되었으나 그 양식의 기본적인 성격은 르네상스 이후 과거의 건축양식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그렇지만 산업혁명 이후 기술의 발전과 사회적 변혁으로 인하여 건축에도 큰 변혁을 가져왔다. 대규모의 공장 ·창고 ·
철도역 ·시장 ·백화점 ·고층빌딩 등의 건조, 대도시의 형성이나 주택문제와 같은 새로운 과제로 인하여 주철 ·선철 ·강철 ·철근콘크리트와
같은 신재료가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수공업적 기술의 쇠퇴와 노임의 상승이 전통기술의 유지와 응용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입장
에서 새로운 건축양식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과거 양식에 의존하던 건축미학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 미의식의 개혁
이 가장 곤란하였다.
W.모리스와 그 일파는 1860년경부터 단순하고 솔직한 표현을 존중하는 공예개혁운동(工藝改革運動)을 일으켜, 주택 합리화를 유도하였다.
모리스의 영향을 받아 1890년대의 벨기에에서 아르누보(Art Nouveau)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과거양식과는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양식
을 창조하고자 하는 최초의 시도로서 각국에서 일어났으나, 사회적 요구나 기술적인 발전방향과 밀접하게 합치되지 못하여 뿌리 없는 표면
상의 예술운동에 지나지 않은 감이 있다. 또한 아르누보는 피상적이며, 예술지상주의자들의 직접적인 표상의 한 발전일 뿐 그 이상의 더 큰
운동으로서의 중요성이나 사회성은 찾을 수 없다. 회화에 있어서는 1890년대부터 세잔과 고갱에 의하여 새로운
발전을 볼 수 있는데, 면(面) ·
형태(形態) ·색채(色彩)의 균형 등에서 추상적(抽象的) 회화의 미학이 점점 확립되었다.
P.베렌스가 설계하여, 1907년 독일의 베를린에 건립한 A.E.G 터빈 공장은 근대건축의 새로운 철의 시기를 기념하는 기념비적 존재인데,
베렌스의 작품에 따라다니는 고전주의적 형태가 이 건물의 기념비적 의미를 한층 강조하고 있다. 철골은 명료하게 노출되고, 측면을 벽
으로 막는 대신에 교묘하게 구획한 큰 유리면을 쓰고 있으며, 거대한 건물의 중량과 강도를 강조하기 위하여, 모서리에 돌을 사용하는 등,
기하학적 구성에 이르는 건축 디자인을 제시하였다.
프랑스에서는 A.페레가 철근콘크리트의 특성을 살리는 골조구조의 건축양식을 창조하고, 시카고에서는 L.설리반이 고층 빌딩 건축에
대하여, F.L.라이트(1869∼1959), 로마 주택건축에 대해서 나름대로 새로운 건축적 표현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을 계승하고
종합하여 건축에 있어서의 근대 디자인의 방법과 방향을 확립한 사람은 베렌스의 주임조수였던 W.그로피우스이다. 그는 파구스 제화
공장(Fagus Fabrik, 1911)과 쾰른 독일공작연맹 전람회의 모델공장(1914)에서 철과 콘크리트와 유리에 의한 자유로운 기하학적 구성과,
이것을 이룩하기 위한 기본적 건축기법을 명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1920년대의 독일에서 일어난 보다 자유로운 개성적 표현을 추구하는 표현주의 건축운동은 그 이론적 뒷받침의 미비함
으로 인하여 단기간에 종식되었으나, 같은 20년대에 그로피우스는 자기의 수법을 발전시켜 데사우(Dessau)의 바우하우스 교사(Bauhaus
校舍, 1926)를 완성하고, 르코르뷔지에는 주택에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미학을 적용하여 보다 풍부한 조형성(造形性)을 이룩하였으며,
M.V.d.로에는 바르셀로나 박람회의 독일관(1929)에 철저한 건축조형의 순수화를 추구하여 나름대로 기능주의와 기하학적 추상미학에
의한 근대 디자인을 성숙시켰다. 30년대는 근대건축의 확립기라고 할 수 있는데, 앞에서 말한 3인 외에 핀란드의 A.알토, 스웨덴의 E.G.
아스프룬트, 미국의 R.노이트라의 활동이 두드러졌으나, 독일에서는 나치즘의 대두로 근대화운동이 탄압되었으며, 소련에서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입장에서 국제적 양식이 억압되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