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숙. 그 이름을 빼고 한국 여장농구를 얘기할 수 있을까. 열여섯 나이에 최연소 국가대표로 뽑힌 이래 그의 발자취가 바로 한국 여자농구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제 40대 중반이 되었으니 그는 더 이상 선수가 아니다.
여느 스포츠 스타들처럼 그도 이제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으려니... 많은 이가 은연중 그리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리고 보니 ‘구름관중’이 몰렸다는 프로농구 지난 시즌에도, 현재 진행 중인 아시아여자농구 선수권대회에서도 벤치에서 그를 본 기억이 없다. 혹, 농구계를 떠난 건 아닌가. 이도 아니다. 그는 지금도 ‘박찬숙의 인생은 곧 농구인생’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좀 의아스럽지 않은가.
지금쯤 ‘박찬숙 감독’은 너무도 당연한 그림이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미 국가대표팀 코치와 감독까지 지낸 바 있었으니. 아니나 다를까. 그 의아스러움의 뒤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박찬숙 씨는 마침내 이 문제를 사회에 공론화하고 나섰다.
먼저 박찬숙 씨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얼마 전, 우리은행 여자농구단의 전임 감독이 소속 선수를 성추행한 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남자감독이 여자선수들을 상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과정에서 충분히 예견되었던 사건입니다.
저도 선수시절, 남자감독에게 차마 말 못할 고민이 생길 때마다 혼자 속으로 앓아야만 했습니다. 고민을 나눌 여자감독, 여자코치 한명 없는 상황에서 오직 동료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만이 위안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여자선수들이 그때의 제 처지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작금의 사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안으로, 여성스포츠분야에서 여성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번 성추행 사건이 불거지기 이전인 2007년 5월, 우리은행 한새여자농구단측의 요청으로 신임 감독 1차 면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1차 면접에는 저를 포함해 6명이 참여했고, 이중 3명만이 2차 면접에 올라갔는데 저는 여기서 제외됐습니다.
저는 지금도 농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보다 더 뜨겁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경력이나 실력 면에서도 제가 다른 후보들에 비해 뒤쳐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은행측에서는 제가 1차 면접에서 떨어진 것에 대해 납득할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여성프로농구연맹 6개 구단 중 여성감독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10년 역사의 여자프로농구가 이제까지 여성감독을 단 한명도 배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스포츠계의 심각한 여성고용 불평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가 1차 면접에서 떨어진 이유도 여성차별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젊은 시절 실업팀과 프로팀에서 주목받으며 뛰었던 그 많은 여자선수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다는 말입니까. 우리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리더가 활발히 진출하고 있는 지금, 유독 스포츠분야에서만큼은 여성지도자가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구조적 문제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사실 국가인권위원회에 고용차별 진정서를 내기까지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우리은행 감독선임 과정에서 제가 받은 차별이 저 개인의 문제로 끝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저를 이 자리까지 오게 했습니다. 제2, 제3의 여성 피해 선수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하여, 또 지금도 열심히 코트를 뛰고 있을 여자후배들에게 새로운 비전과 희망을 만들어주고자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나는 최근 우연한 기회에 천하의 박찬숙이 ‘농구 야인’이 돼야만 했던 사연과 그에 따른 울분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지난달 열린 ‘이효재배 전국여성팔씨름대회’에서다. 그리고 우리사회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성차별의 현주소를 절감하며, 인권위에 ‘고용차별’을 진정하는 박찬숙 씨와 흔쾌히 동행하기로 했다.
【서울=뉴시스】13일 오전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평화의광장에서 열린 2007 웃어라 여성 희망을 걸어라! 행사중 이효재배 전국여성팔씨름대회에 참가한 전 농구선수 박찬숙과 서울시청여자축구단의 이성주가 혼신의 힘을 다해 팔씨름을 하고 있다. 뒤에는 1차전에서 탈락한 심상정의원이 둘의 경기를 바라보고 있다. /김명원
실제로 현재 우리나라 여성프로팀(농구, 배구) 지도자 22명 가운데 남성은 21명이고, 여성은 단 1명(코치)에 불과한 실정이다.
나는 이미 <농구 성추행 사건이 던지는 교훈(5.25)>을 통해 경기출전은 물론 선수생명까지 좌우하는 절대권력을 쥔 남성감독과 절대약자인 여성선수 사이의 ‘선수지도’가 인격모독 행위를 관행화하고, 성추행으로까지 이어짐을 지적한 바 있다.
거듭 강조하건대 성추행 사건, 그리고 박찬숙 씨의 인권위 진정은 여성체육 분야에서 여성지도자 육성, 균등한 기회보장이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여성체육 활성화와 선수들의 사기진작을 위해서도 더 많은 여성지도자가 나와야 하며, 이를 위한 각 분야의 노력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