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1월24일(일)맑음
눈이 쌓였다. 눈 치우는 울력을 한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것 같다. 손이 시리고 코가 얼어붙는 듯하다. 큰 절 아래 큰길 까지 눈을 쓸다. 몸이 굳어서 빗자루질도 제대로 되지 않고, 따뜻한 곳에 들어가 추위를 녹였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다. 울력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 누워 몸을 녹이다.
밤 정진 마치고 나오니 둥근달이 앞산 위에서 환하게 웃는다. 바람소리가 골짜기에 울려온다. 구름도 날아가고 별도 날아간다. 오리온자리의 큰 사각 형도 구름에 얹혀 실려 간다. 제대로 된 겨울 맛이 난다.
2016년1월25일(월)맑음
마음이 무한히 평화롭다. 지고 있던 짐을 벗어놓은 것처럼 가볍다. 빙소와해(氷消瓦解), 얼음이 녹고 기와가 깨어진다는 뜻으로, 아주 자취도 없이 소멸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런 기분이다. 도향스님으로부터 들은 법문 덕택이다. 도반이 선지식이다.
2016년1월26일(화)맑음
아침에 <진흙속의 연꽃> 카페에 들어가 보았더니 ‘중론은 사상체계가 아니라 테크닉, 읽고는 책장을 덮어버려야 할 것’이라는 제목으로 글이 올라와 있다. 연꽃님은 이중표 교수와 김성철 교수의 말과 글을 인용하면서 두 분의 견해를 빌어 자신의 소견을 진술해놓았다. 한마디로 무지의 소치이다. 국내 불교학의 이해 수준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중표와 김성철 교수는 불교학자로서 책을 독학하고 이해한 정도이지 무슨 학맥을 전승했다든지 고명한 스승을 사사한 적이 없다. 무릇 경율론을 가르치고 배움에는 전승되어온 스승의 맥이 있는 법이다. 한국불교 강원에서도 전승해오는 講脈강맥이 있고, 미얀마에서도 청정도론을 전승하는 강맥이 있듯이. 중론을 이야기 하려면 중론의 강맥을 이어오는 티베트 불교 겔룩파에 소속된 불교대학에서 강의를 듣고 사유(聞思修)하고 지관을 닦아야 한다. 그래야 중론 가운데 어떤 단어와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하여 강맥을 이어온 스승의 말을 직접 들어야 그 의미가 드러난다. 왜냐? 한 단어와 문장이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할 수 있는데 특정한 곳에서는 특정한 의미를 띄게 되므로, 전승되어오는 지혜가 아니면 그 특정한 의미를 확정할 수 없기에 그렇다. 그런 것이 없이 산스끄리뜨본이나, 산스끄리뜨에서 번역된 영역본이나 일본어역본, 그것을 중역한 한문본이나 한글 본을 바탕으로 이해하면 중론의 의미를 오해할 수도 있다. 이러한 얕은 견해로 중론을 기반으로 하는 교학과 수행전통인 중관학中觀學을 어찌 짐작할 수 있으리오. 학자들은 중론이 그냥 책인 줄 안다. 그래서 다른 일반 책을 읽듯이 읽고 해석하면 되는 줄 안다. 중론에 수반되는 修習止觀수습지관이 따르지 않으면 중론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도 뭘 좀 아는 것처럼 사방으로 떠벌리고 다닌다. 도대체 깊게 사유하지를 않으니, 無自性무자성이란 말을 처음부터 모르고 시작한다. 국내 학자들이 운위하는 중론에 대한 견해로는 겔룩파에서 전승해온 중관학을 도저히 알 수 없다. 중관학이라 하니 그냥 교과서 공부하듯이 하는 줄로 알겠지만, 전승되어온 스승에게 직접 듣고, 사유하여 결택하고(이 과정에서 티베트 학승들이 손뼉을 ‘딱’ 치면서 논쟁하는 훈련이 수행된다. 논쟁은 바른 견해를 확립하기 위해서 연마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이해한 바탕 위에 止觀지관을 닦는다(이것은 좌선을 요한다). 이 과정이 거의 10년 이상 걸린다. 그것도 티베트사람으로 태어나 어릴 때 출가한 스님의 경우가 그렇다는 말이니, 외부인이 그 과정을 이수하려면 얼마나 힘들 것인가? 그러므로 중론을 아는 체하는 한국 교수들이나 식자들의 정보는 아주 협소하고 무미건조하다. ‘솔직히 잘 모릅니다.’라고 말해야할 사람들이 아는 체하며 일어나 空공을 니힐리즘이라 하기도 하고, 히피철학(무애행주의)에 가깝다고 하기도 하고, 논리적 테크닉이라 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여튼 한국에서는 대승불교 특히 중관이 제대로 이해되고 실천되지 않았다. 중관에 대한 이해가 없는 대승의 말로가 어떤지 한국불교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한국 대승불교의 부정적인 면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것이 소위 ‘초기불교’인데, 그들 또한 소견이 편협하여 니까야 근본주의로 흐르고 있다. 그래서 범일스님은 대승불교는 브라만들이 만든 종파라면서 용수와 세친을 아주 저열한 외도라고 비판한다. 나아가 공을 전변설로 여기며 사견이라 치부한다. 이는 부정확하고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생긴 오해이다. 중관의 전통을 지켜온 학파의 스승에게 직접 물어서 듣고 배우지 않고 혼자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상가로서 불성실한 태도이다. 이중표, 김성철 교수, 범일스님과 연꽃님, 그리고 나는 제 각각 자기대로 꿈을 꾸고 있다. 꿈꾸는 것은 자유이니 다만 아름다운 꿈을 꾸기를 바랄 뿐이다. 돌고 도는 윤회 가운데 어찌 어찌하다가 한 자리에서 서로 만나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말없는 미소로 서로 통하니 마음이 스스로 한가롭다고 공감할 때가 있을 것이다.
2016년1월27일(수)맑음
오후에 자유정진하다. 오후 시간이 널널하여 여유로워진다. 임제록에 ‘不可向虛空裏釘橛불가향허공리정궐’하라는 말이 있다. 허공에 말뚝을 박지마라는 말. 말뚝橛 대신에 못釘을 넣으면 뜻이 더 선명할 것 같다. ‘나’가 있다는 못도 박지 말고, ‘대상’이 있다는 못도 박지마라.
我見아견: 자아가 있다는 견해. 緣起所生인 名我명아를 實我실아로 여긴다.
실아實我로 여기기에 我執아집이 생겨난다. 아집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지 살펴보라.
法見법견: 대상이 실재한다는 견해. 緣起所生인 名法명법을 實法실법으로 여긴다.
실법實法으로 여기기에 法執법집이 생겨난다. 법집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지 살펴보라.
허공에 못을 박지 않으면 장애될 것이 없고, 두려워할 것이 없다. 허공에 못을 박고 매달려 살고 있는 중생은 얼마나 불안할까,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공포가 있다. 삶의 기본 정서는 불안과 공포이다. 그러니 믿을만한 것을 더 굳혀서 굳게 잡아야 한다. 믿을 만한 것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자아’라든지, ‘신’, ‘창조주’, ‘절대자’, 절대로 변하지 않는 정신과 물질의 기본요소로서의 ‘法’, ‘절대정신’ 혹은 ‘궁극의 입자(힉스입자)’ 등등이다. 심지어 불교집안에서도 여래장, 진공묘유, 한 물건이니, 4위82법, 5위75법, 5위100법 등을 실재한다고 여긴다. 아비담마불교에서는 공간의 궁극적 기본단위 칼라파(kalapa), 시간의 궁극적 단위를 찰나(khana)라 설정한다. 만약 그것조차도 긍정하여 잡지 않으면 발판이 없어 딛고 설 수가 없으니까 불안한 거다. 그렇기 때문에 허공에 못을 박는다. 그래야 안심이 되니까. 어떤 것이라도 잡고 근거로 삼으려는 짓을 하지 마라. 그러면 집착이 생겨 치우치리라. 그러면 어떻게 살라고? 연생연멸이니, 무한한 인을 심고 무한한 연을 성숙시켜라. 보리심을 일으켜라. 바라밀을 실천하라. 불선법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일체의 선법을 익혀 행하라.
소원을 들어 주는 보석보다 귀한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을 향해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려는 결심으로
나는 항상 그들을 사랑하리라
언제나 내가 누구를 만나든
나를 가장 낮은 존재로 여기며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그들을 더 나은 자로 받들리라
나의 모든 행동을 스스로 살피게 하고
마음 속 번뇌가 일어나는 그 순간에
그것이 나와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린다면
나는 당당히 맞서 그것을 물리치리라
그늘진 마음과 고통에 억눌린
버림받고 외로운 자들을 볼 때
나는 마치 금은보화를 발견한 듯이
그들을 소중히 여기리라
누군가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
나를 욕하고 비난하며 부당하게 대할 때
나는 스스로 패배를 떠맡으며
승리는 그들의 것이 되게 하리라
내가 도움을 주었거나
큰 희망을 심어 주었던 자가
나에게 상처를 주어 마음을 아프게 하여도
여전히 그를 나의 귀한 친구로 여기리라
직접 간접으로 나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은혜와 기쁨을 베풀게 하시고
내가 또한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은밀히 짊어지리라
여덟 가지 세속적인 관심에 물들지 않아
일체가 때 묻지 않게 하고
또한 이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달은 나는
집착을 떨쳐 버리고 모든 얽매임에서 자유하리라
2016년1월28일(목)맑음
회장단이 새 거처를 찾아다니는 중이다. 전번에는 비봉산 아래의 한 곳을 점찍었다가 여의치 않아 그만두었다. 며칠 전에는 신안동에 투 룸을 찾았는데 마음에 차지 않았다. 호연거사와 보살님들이 다시 발품을 팔아 오늘 남강 변 동방호텔과 주차장 사이에 있는 남강한주타운아파트 4층의 한 방을 찾아냈다. 내부를 사진 찍어 보낸 걸 보니 공간도 널찍하고 전망도 좋아 보인다. 1억7천5백만이라고 한다. 회장님은 모아둔 돈과 대출을 낼 것을 합하면 장만할 수 있으리라 하신다. 검색해보니 주소: 경남 진주시 남강로736번길 6-3 (지번) 진주시 옥봉동 805-3
작년에 경매사이트에 나온 가격이 1억2천이었는데 그 사이 5천만 정도 오른 모양이다. 신도들의 접근성은 좋은데 주차공간이 확보될는지 알아봐야겠다. 회장님은 촉박하게 결정하지 말고 다른 곳에서 좀 더 찾아보자고 하신다. 선원이름을 <도과선원>으로 할까, <진주선원>으로 할까 생각하다.
오늘 아침부터 굿은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눈이 되었어야할 비.
2016년1월29일(금)비
빗방울 떨어지듯 정성을 이어가야지, 정념상속.
한강에 돌 던져 넣듯 정진을 이어가야지, 정념상속.
매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듯, 보리심 일으켜야지, 정념상속
겨울비가 하루 종일 내린다. 겨울비에 대한 시를 읽다.
안개 -최석우
겨울비 내리는
아침
금강이 엮어 보낸
하얀 꽃 두름
창문 열고
두 손 모아 받으니
빗방울 젖은 포옹으로
내 눈을 감기네.
빗방울에 젖은 포옹에 눈을 감으니 시가 떠오른다.
언어의 사계 - 원담
봄 고요한 가슴에 언어의 문이 열리고
여름 언어가 꽃피어나 들을 귀들이 모여드니
가을 언어가 결실을 맺어 菩提보리가 열리고,
겨울 침묵하는 산이 되어 法界법계에 잠긴다.
Winter Rain 겨울비
Ella Wheeler Wilcox 엘라 휠러 윌콕스
Falling upon the frozen world last
I heard the slow beat of the Winter rain-
Poor foolish drops, down-dripping all in vain;
The ice-bound Earth but mocked their puny might,
Far better had the fixedness of white
And uncomplaining snows-which make no sign,
But coldly smile, when pitying moonbeams shine-
Concealed its sorrow from all human sight.
Long, long ago, in blurred and burdened years,
I learned the uselessness of uttered woe.
Though sinewy Fate deals her most skilful blow,
I do not waste the gall now of my tears,
But feed my pride upon its bitter, while
I look straight in the world's bold eyes, and smile.
얼어붙은 세계의 마지막 날에
느린 박자로 떨어지는 겨울 빗소리 듣는다,
가엽고도 어리석은 방울들, 헛되이 떨어진다,
얼음으로 굳어진 땅은 미미한 힘조차 허비하니 말았으니
하얗게 응고되는 편이 훨씬 낫겠지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은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연민에 찬 달빛이 비칠 때, 다만 차갑게 미소 지으며
사람들의 눈에서 슬픔을 감춘다.
아주 먼, 이젠 희미해진 힘들었던 세월
난 고통을 말해봐야 쓸 데 없다는 걸 배웠지,
힘센 운명의 여신이 가장 솜씨 좋게 한방 먹인다 해도
나 이제 눈물 흘리며 쓴 맛을 보지 않느니,
괴롬을 이겨낸 것에 만족하면서
부릅뜬 눈으로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겨울비를 노래한 시인은 부릅뜬 눈으로 세계를 똑바로 보며 미소 짓는다. 부릅뜬 눈은 이미 운명의 여신에게 한 방 먹고 나온 반응이다. 그래가지곤 안 되지. 나는 입김으로 얼음으로 굳어진 땅을 녹이고 물을 흐르게 한다. 차 한 잔 공양 올리니 봄은 멀지 않다.
2016년1월30일(토)맑음
천상세계의 존재들도 인간으로 몸 받아 태어나기를 바란다. 인간의 삶이 제일 큰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악업을 제하고 선업을 쌓는데 제일 유리한 곳이 인간세상, 특히 남섬부주이다. 모든 붓다가 남섬부주에 출신하여 정등각을 이루었다. 과거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앞산에 안개구름 피어나 골골마다 흘러들어 잠긴다. 구름에 잠긴 산색이 진경산수화이다. 그림은 그림이로되 살아 움직이는 그림이다.
중생의 꿈은 파도 흉흉한 바다이다. 물에 잠겼다가 겨우 목을 내밀면 다시 물속으로 빠져든다. 그게 한 생이요, 다음 생이 또 다른 파도에 실려 간다. 언제 섬에 닿아 마른 땅을 밟아 보리오. 바다 깊이 잠겨 바다의 밑을 헤집어 본다. 심해의 비경을 다 돌아보고 수면으로 올라온 고래의 붉어진 눈을 보라는 헤르만 멜빌이 생각난다. 눈이 빨개진 고래는 철학자라서 그렇고, 수행자의 눈은 투명하고도 온화하다. 그 눈엔 섬이 있고, 파도와 바다가 서로 기대어 쉼을 얻는다. 밤, 잠, 쉼. 오늘이 쉼표를 찍는다.
2016년1월31일(일)맑음
시간을 분할하여 私有化사유화할 때 시작과 끝, 태어남과 죽음이 있게 된다.
공간을 분할하여 私有化사유화할 때 나와 너, 나의 것과 너의 것으로 갈라지게 된다.
사유화란 자기 것으로 만들어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사유화하여 생긴 결과가 오온, 생멸, 윤회이다.
분할할 수 없는 시간을 저 혼자 떼 내어 자기 것으로 만들면 한정된 시간을 살다 죽어가는 유한한 삶을 살게 된다. 마치 사막에 가득한 모래를 호리병에 담아 모래시계를 만들고, 모래가 한쪽 끝에서 다른 쪽으로 흐르는 것을 자기 수명으로 삼는 어리석은 자와 같다.
분할할 수 없는 공간을 저 혼자 잘라내어 자기 것으로 삼으면 한정된 공간을 점유한 몸을 갖고 몸에 갇힌 인생을 살게 된다. 마치 바닷물을 유리병에 담고, 유리병에 담긴 물을 자기 몸으로 생각하여 깨질까, 쏟아질까 염려하면서 사는 자와 같다.
일체를 사유화하지 말라. 붓다의 길은 탈사유화de-privatization이다. 탈자본주의counter-capitalistic이며 공산주의적communistic이다. 자신 것으로 여기는 몸과 마음은 사유화될 수도 없고, 사유화되어지지도 않는다. 이것이 무아의 가르침이다. 이는 듣기 좋으라고 말하는 교훈이나 교리가 아니라 우주의 보편타당한 진리이다. 시간과 공간을 사유화하지 말라. 애초부터 사유화 될 수도 없는 것을 자기 것으로 여겨서 붙잡는 순간 고통이 시작된다. 제 스스로 시간을 한정시켰으니 정해진 시간은 시시각각 줄어들며 시간에 쪼달릴 것이요, 제 스스로 공간을 제한했으니 한정된 공간은 변화와 소멸을 향해갈 것이다.
2016년2월1일(월)맑음
새벽 기운이 차다. 어젯밤에 <붓다 프로젝트>를 마지막으로 수정하여 메일로 보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으니 새벽정진에 혼침이 왔다.
죽음을 기억하는 사유를 하다.
나는 죽는다는 생각이 선명하게 확립된 사람은
죽음의 왕인 염라대왕을 만나더라도 두려움이 없다.
내가 죽으면 지금 몸으로 누리고 있는 세상의 것들과 떨어질 것이 확실하다.
이 생각 오래하면 몸에 의지한 헛된 희망과 탐욕의 힘이 약화된다.
이 몸은 오래된 질그릇과 같아
시간의 망치가 때리면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모든 현상이 아지랑이 같음을 알고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마왕의 꽃 화살을 맞지 않아
죽음의 왕이 엿볼 수 없는 경지로 나아가리라.
죽음을 기억한다, 나에게 주어진 지금 현재가 얼마나 귀중한가, 나는 얼마나 덕행을 닦고 있나, 고통 속에 있는 중생에 대한 연민을 느끼고 있나, 이런 생각을 자주 떠올리고 잊지 않는 것이 바른 마음챙김이다.
2016년2월2일(화)맑음
피부를 뚫을 듯이 춥다. 오늘은 삭발목욕일이다. 해질 녁 산봉우리는 연보라 빛이다. 이건 가장 한국적인 산의 얼굴이다.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색조의 변화를 느낄 수 없지만 잠간 다른 데로 눈을 돌렸다 다시 보는 사이 색깔이 변한다. 땅거미가 밀려올수록 연 보라 빛은 짙어지니, 진보라, 검보라에서 옅은 어둠, 짙은 어둠으로 잠긴다. 낯 동안 무슨 일이 있었든지, 어떤 일이 벌어졌든지 깨끗이 지워버리고 깊은 어둠에 묻힌다. 어둠은 깨끗하고 순결하며, 만상을 감싸 안는 품이 넉넉하여 중후하다. 그것은 산의 덕성이기도 하다. 그래, 그래서 智利山지리산이다. 南無大(智)文殊舍(利)菩薩나무대(지)문수사(리)보살.
첫댓글 사막에 가득한 모래를 굳이 호리병에 담아 모래시계를 만들어 수명을 한정짓고,
바닷물을 유리병에 담아 깨질까 쏟아질까 노심초사하면서 사는 어리석은 중생. 이름은 해성입니다.
언제나 저의 어리석음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분할하여 사유화하지 않고 사는 삶에 대해 깊이 숙고하겠습니다. 스님. _()_()_()_ ^^
_()_()_()_
모래를 담은 호리병과 바닷물을 담은 유리병에서 시간과 소유,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숙고해봅니다 ...
사두~사두~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