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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18(주일) 요한복음 12:1~8 ‘진정한 헌신’
오늘은 요한복음 12장 1~8절 말씀을 통해 ‘마리아’와 ‘가룟 유다’라는 두 인물의 삶을 비교하면서 ‘헌신’(獻身, Devotion)이라는 주제를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마리아와 가룟유다 둘 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섬겼지만, 그들의 헌신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헌신이 무엇인지 깨닫고, 우리의 믿음 생활 속에서 어떻게 실천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갖기를 소망합니다.
1. 마리아의 헌신-향유를 부어드리며 예수님을 높임(1~3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베다니라는 곳에 머무십니다. 베다니에 머무신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열립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1-2절)
이 잔치가 벌어진 장소는 베다니 시몬의 집입니다(마 26:6-7). 이 시몬은 문둥병자였다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사람입니다. 아마 그는 베다니에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면서 죽었다 예수님으로 인해 살아난 나사로의 집안과 합작으로 마을 잔치를 벌인 것 같습니다. 문둥병에서 고침 받은 시몬이나,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나 똑같이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잔치를 벌였을 것입니다. 시몬은 장소를 제공하고, 마르다는 주방장이 돼서 함께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 잔치에 많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나사로의 이적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 집안 친척들, 또는 죽었던 나사로를 보려고 호기심에서 모여든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주님은 기쁜 마음으로 이 잔치에 참석하셨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주빈의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유월절이 임박한 시간, 즉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죽음과 부활의 장소인 ‘베다니’를 방문하셨는데, 그 방문 목적은 이제 하나님 주신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할 때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를 미리 안 듯 마리아는 다들 잔치 준비로 분주한 가운데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3)
우선 향유를 붓는 관습부터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왜 예수님 머리에 향유를 부었을까요? 그것은 당시 유대인의 풍속입니다. 그들은 집에 귀한 손님이 오면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주께서 내 머리에 기름을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는 귀절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7:46에서도 주님은 손님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을 귀중히 여기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을 잔치의 주빈으로 대접하는 최선의 표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의 행동에서 상식을 벗어난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가 드린 향유의 가치입니다. 잔치 집에서 귀한 손님에게 향유를 바르는 것은 늘 있는 일입니다만, 마리아는 너무 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향수는 가장 비싼 화장품 중에 하나입니다. 마리아가 가져온 향유는 나드 한 근입니다.
나드(ναρδοσ)는 인도産 식물에서 짜낸 가장 비싼 향수입니다. 그것도 불순물이나 첨가물이 없는 순수한 것이니 여자로서는 가장 아끼는 물건입니다. 마리아는 이 향유를 한 근(λιτρα, 327g)이나 가져 왔습니다. 돈으로 환산하면 300데나리온 어치나 됩니다. 당시에 일반 품꾼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안식일을 제외한다면 노동자가 1년을 쓰지 않고 벌어 모아야만 되는 돈입니다. 마리아는 이것을 아낌없이 들어부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지나친 행동으로 느껴졌습니다.
둘째로,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린 행동입니다. 당시의 유대 풍속으로 본다면 여자가 공중 앞에서 머리털을 푼 것은 수치스런 행동이었습니다. 민수기 5:18에 보면 제사장은 간음죄로 의심받는 여인의 머리털을 풀게 했습니다. 존경받는 여자는 언제나 머리를 덮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남의 눈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머리털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그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았어요. 남의 발을 닦는 일은 가장 천한 종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시겠다고 할 때에 베드로는 그렇게 하시면 안 된다고 펄쩍 뛰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명예로운 머리털을 풀고, 그것으로 주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발을 닦는 것만도 낮아진 모습인데, 머리털로 닦은 것은 자신을 낮출 대로 낮춘 모습입니다. 이런 마리아의 행동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에 거슬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이러한 헌신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1) 희생: 마리아는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향유 옥합은 그녀에게 있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소중한 가치를 상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이를 포기했습니다. 2) 사랑: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을 향한 깊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 알았고 그 분을 위해 무엇이든지 하고 싶었습니다. 3) 예배: 마리아는 향유를 부음으로 예수님을 예배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리는 진정한 예배였습니다. 마리아의 헌신은 주님을 향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처럼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요, ‘나의 상급’이라는 신앙고백이 있을 때 나의 향유 옥합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적용) 나에게는 마리아처럼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라는 신앙고백이 있습니까? 내가 아직 깨뜨리지 못하고 있는 나의 향유 옥합은 무엇입니까?
2. 가룟 유다의 헌신-배신과 탐욕(4~6절)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마리이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 한마디도 말씀을 하지 않으시니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가룟 유다가 앞장서서 마리아를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4-5절)
유다는 먼저 마리아가 깨뜨린 향유의 가치를 평가했습니다. ‘300데나리온’ 정도의 가치가 된다고 평가를 했습니다. 그 당시 300데나리온은 엄청난 비용입니다. 요즘 하루 품삯을 10만원으로 평가한다면, 300일간을 모은다면 3,000만 원은 되는 향유의 가치입니다. 가룟 유다는 그 돈을 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지 않고 허비했느냐하면서 비판했습니다. 아무리 귀한 손님이 왔다고 해도 3000만 원짜리 향수를 한꺼번에 들어붓는 것은 낭비가 아니냐?는 말이지요. 참으로 합리적이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함께 비판했습니다.(마26:8,막14:4)
그러나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가룟 유다의 의견에 다른 제자들과 같이 동조하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가 한 말뿐만 아니라 가룟 유다의 됨됨이부터 문제를 삼습니다. 4절과 6절의 말씀을 보시면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사도 요한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제자 중 하나요, 예수를 팔 자요, 가룟인’이라고 했습니다. 6절에서는 “도둑”이란 말로 향유 옥합을 깨뜨리는 마리아를 비난하는 가룟 유다를 요약 평가합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가룟 유다는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돈을 훔쳐가는 도둑입니다.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는 12제자들의 작은 집단에서 재정을 맡았지만 들어오는 수입을 적당히 자기 몫으로 빼돌렸던 것입니다. 이를 사도요한은 이미 알았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만사를 돈으로 평가하는 배금주의자라는 것이지요. 3년 반이나 따라 다닌 스승이신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넘긴 것도 결국은 그의 배금주의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룟 유다는 예수를 신앙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입장에서 따랐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자 마리아에게 왜 향유를 300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지 않았냐며 핀잔을 주며 그녀의 행동을 비난합니다(5절). 그러나 사람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시는 예수님은 유다의 본심을 아십니다. 그는 겉으로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자신이 맡은 돈궤에서 돈을 마음대로 꺼내 쓰는 자였습니다. 실상 그는 이웃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그 마음 속에 탐욕과 배신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결국 예수님을 돈으로 팔아넘기는 비겁한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가롯 유다의 헌신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입니다. 1) 겉과 속이 다름: 가룟 유다는 그의 스승인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충성으로 섬기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5)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지 않느냐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위선에 가득 찬 말입니다. 정말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니라, 돈이 아까워서 한 말입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을 빙자하여 돈을 훔치는 사람이었습니다. 2) 탐욕에 사로잡힘: 그는 돈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혀 결국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기며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성경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탐심을 경계합니다. 바울은 탐심을 우상숭배(골3:5)라 했고 C.S Lewis는 탐욕을 ‘재물에 대한 욕심’이라 했습니다. 물질에 대한 사랑, 즉 탐욕은 예수님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 하느니라”(마6:24)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사랑 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사랑을 막는 것입니다.
3) 자기 중심적: 가룟 유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이기주의(利己主義, egoism)란 다른 사람이나 사회 일반에 대해서 배려하는 마음이 전혀 없이 오직 자신들의 이익이나 행복만 고집하는 사고방식을 가리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나(me)만 생각하는 ‘개인적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득실거리며, 또한 자신의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시위를 벌이고, 또는 폭력적 투쟁을 하여 사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모습을 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성경은 이기주의적 행동을 철저히 배격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타주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가룟 유다처럼 이기주의적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 이익, 내 편리, 내 입장, 내 기분을 우선하여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상처와 손해를 보게 한다면 종교적 이기주의자일 것입니다.
자신의 부패한 마음과 탐욕스러운 죄는 보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헌신을 질투하고 비난만 한다면 우리도 유다와 다를 바 없습니다. 말로만 거룩한 척하는 인생은 결국 주님을 배신하게 됩니다. 이처럼 구속의 은혜와 믿음이 없으면 가룟 유다처럼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이익과 인간적인 정에 이끌려 구원을 위해 무엇이 더 중요한 지 분별하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값비싼 것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그 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적용) 나는 가룟 유다처럼 탐욕으로 가득차 경건한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포장하나 주님께 드리는 데 인색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헌신을 질투하며 비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큐티인묵상간증] [유다 같은 나, 강세진]
부모님이 이혼 하신 뒤 아버지는 매일 술을 드시고 제게 화를 내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가정 회복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혼자 가정에서 탈출해 행복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이후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자 공무원이 되기를 꿈꾸며 공부했으나 시험에 계속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눈높이를 낮춰 직장에 들어가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상사의 부당한 행동으로 인해 번 아웃(Burnout)을 겪으며 퇴사를 결정했습니다.
그때 저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신뢰하지 못하던 저였지만, 고난이 와서야 비로소 공동체에서 말씀으로 위로를 받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씀과 공동체를 의지하며 나아가니 하나님은 제가 교만하지 않을 만큼 물질적으로 채워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음을 알면서도 무엇 하나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지 못했습니다. 헌금을 드리기를 아까워했고, 내 시간과 노력으로 물질의 십일조를 대신하겠다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퇴사한 동생이 실업 급여와 비정기적인수입에도 십일조를 떼어 드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못마땅했던 저는 “월급도 못 받는데 무슨 십일조야? 취업할 때까지 그 돈은 너를 위해 써”라며 동생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궁핍한 환경에서도 감사한 마음으로 헌금을 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니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림 없이 십일조를 드리는 동생이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마리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마리아의 행동을 비난하는 믿음 없는 가룟 유다 같은 제 모습을 보고 회개하게 됩니다. 십일조는 신앙고백임을 기억하며, 저도 마리아처럼 주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으로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적용하기)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금과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로서 생색이 아닌 자원하는 마음으로 부서를 섬기겠습니다.
3. 진정한 헌신(7,8절)
지금까지 향유옥합을 드린 마리아의 헌신과 겉과 속이 다른 가룟 유다의 헌신을 살펴보았는데, 그러면 진정한 헌신은 무엇일까요? 7,8절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7,8절에서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을 비난했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행동을 칭찬하십니다. 7절,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렇게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칭찬하신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려고 그렇게 한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주위의 가난한 자들은 언제든지 도울 수 있지만,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비하는 일은 지금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헌신자가 되려면 우리는 늘 ‘중요한 일’과 ‘급한 일’을 구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함이 중요한 일이었음을 깨닫고 이를 자신의 가장 귀한 향유, 옥합을 깨뜨리는 일을 통해서 실천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비난한다해도 별로 신경쓰질 않습니다. 자신에게는 그것이 너무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결정을 하고 행동을 한 마리아를 칭찬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 ‘중요한 일’이 ‘급한 일’에 의해 뒤로 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요한 일이 다른 일에 비해 시간 낭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에게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중요한 일입니까?
저는 ‘거룩’과 ‘구원’이라는 단어로 중요한 일을 표현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성도는 거룩함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결혼의 목적이 인생의 행복이나 쾌락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결혼의 목적이 거룩에 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깨지고 하나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혼의 목적에 대한 기대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남편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결혼하면 행복할 줄 알았고 그런 기대를 가지고 결혼을 합니다. 그래서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면 남편도 아내에 대해서 불만이 생기고 아내 역시 남편에 대해서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질 수는 있으나 우리는 성경 말씀에 귀를 귀울여야 합니다. 그것은 결혼은 행복이 목적이 아니라 거룩이 목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의 인생의 목적은 행복에 있지 않습니다. 거룩에 있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세상과 구별됨입니다. 세상이 쾌락을 쫓아 살아갈 때 금욕함으로 거룩해지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행복을 위하여 남을 희생시킬 때, 나를 희생함으로써 행복을 주는 거룩을 쫓으시기 바랍니다.
딤전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도로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이 죄악 된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거룩함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첫째, 거룩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다스리기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거룩하게 되고 우리 삶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거룩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오직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범으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의 내용 중에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하는 기도의 내용이 나옵니다. 즉,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소원만 아뢰고 긴급한 것만을 아뢸 것이 아니라 우리 죄의 문제와 거룩함의 문제에 대해서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고하며 거룩함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죄악이 관영한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셋째, 거룩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고 말씀합니다.
둘째, 중요한 일은 ‘영혼구원’입니다. “많은 사람 지옥 가지 않게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자의 책임이요, 교회의 책임이요, 특별히 우리 교회의 책임입니다” 예수의 피 흘리심이 헛되어서는 안 되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성도는 자신의 영혼구원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현실 앞에 주님 재림의 종말론적 신앙관 가져야 합니다. ‘오늘 내가 주님 만날 준비 됐나?’ 늘 점검하고 영혼의 때를 확실히 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칭찬받은 마리아처럼 진정한 헌신자가 되려면 ‘나의 의’보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위해 먼저 헌신하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마6:33). 나의 거룩과 구원을 위해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나도 살고 남도 살릴 수 있습니다. 적용) 하나님 나라의 의보다 나의 의가 더 앞서지는 않습니까? 거룩과 구원을 위해 지금 내가 먼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결 론
오늘 우리는 마리아와 가룟 유다의 삶을 통해 헌신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진정한 헌신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중요한 일을 분별하여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 중요한 일은 바로 ‘거룩’과 ‘영혼구원’입니다. 거룩함을 이루려면 말씀과 기도, 성령충만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불신자의 구원을 위해서 힘써야 하고, 나의 영혼도 늘 깨어 주님의 신부로 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저와 여러분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지금 헌신하고 있습니까? 향유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처럼 사랑과 희생과 예배로 헌신하고 있습니까? 가룟유다처럼 외식과 탐심과 자기 중심적으로 헌신하고 있습니까? 급한 일에 밀려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 헌신하는 자들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