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인생의 황혼에서 지금껏 만난 인물 중에서 가장 잊지못할 인물을 꼽으라면 내가 다닌 중학교
교장인 석 인수 선생이다. 생각해보니 제삼의 고향인 정원의 도시, 오클랜드에서 이십육년을 살면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인물이기도 하다. 대학총장도 있고, 군대에서 사단장 부관 노릇하며 모시던 육척거인에다
부리부리한 눈을 굴려서 부하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던 별 둘 육군소장도 있고, 젊은 시절 7년간을
말레이시아 사바주의 작은 도시에 살 때 방문 차 들렸던 쿠알라룸풀에서 온 한국대사 ㅡ 군 출신인
그는 우리 교민이 마련한 중국 레스트랑 환영만찬 자리에서, 복잡할 것 같은 중국요리 시키는 가장
간단한 방법, 즉 육군(소고기) 해군(생선) 공군(닭고기) 해병대(오리고기)에 채소 하나와 스프,로 정리했다ㅡ도
있는데 왜 하필 나와 한마디 대화도 나눠보고 못한 그 분일까.
대구시 변두리 야시골(여우골)에 위치한 중학교는 신설학교로 넓은 교정에 정비가 덜된 황량한 분위기
였다. 교육도시인 대구에서 랭킹 삼위 정도의 학교라서 정을 못 붙이고, 콩나물 시루 같은 숨막히는
시내버스를 마다하고 한 시간 가까이 걸어서 통학하며 그럭저럭 학년을 보낼 때, 감색 재건복을
입고 새로 부임한 석 교장.
1961년 516 군사혁명 다음해라 사회도 학교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지시한대로, 아침조회에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국민교육헌장 제창에 이어 교단에
오른 맷집 좋은 체육선생의 주도로 국민보건체조를 했다.
석 교장이 시행한 특이한 것은 두 가지로 첫째는 '일인일기' 교육이요, 두째는 학교 자립을 위한
수익사업이었다. 일인일기로 내가 탁구부에 가입하여 코치도 유니폼도 없이, 폼나는 유니폼을 입은
야구부와 럭비부의 눈총을 받아가며 하얀 탁구공을 친 것이 나중에 직장에서는 테니스를, 다시
골프공으로 발전해서 뭐든 '동글동글한 것'에는 자신이 있게 된 계기가 됐다.
교내 동계훈련에 참가하여 야구와 럭비부가 국물이 있는 따끈한 점심을 먹을 때 탁구부에 배급 나온
몇 봉지 건빵이 얼마나 감지덕지 하던지.
자립을 위한 수익사업은 쉽게 말해서 빈 사이다병 모으기와 호박 키우기. 학교변소에서 똥을 담아,
가마니로 얼기설기 만든 단가를 두명이 들고 호박밭으로 운반하기로, 지독한 냄새로 모두가 꺼리는
작업을 교장이 '칠회를 운반하면 집에 보내주는' 출석티켓을 들고 독촉하니 학생들이 꾀를 부릴 수
없었다.
'굴토끼 키우기 사업'은 교정 구석에다 굴을 파서 토끼를 사육하기로, 토끼는 번식력이 좋아서 몇년 안에
열배로 늘어나서 수익성이 좋다며 '몇학년 몇반 책임'이라는 표를 토끼장 마다 붙이고, 학생들이 사료용
아카시아 잎을 따러 교정 밖까지 원정하곤 했다. 일년 뒤 여름 습기에 전염병으로 몰살한 토끼들..
이런 억척스런 교장 덕분에 나는 야구와 '트라이는 사점 킥은 삼점, 합이 칠점'인 럭비도 배웠다.
우리 야구선수랑 대구까지 순회원정 온 일본 모 여고생 소프트볼 팀의 대항전은 대구시 모든 학생들의
화제였다. '탱탱한 유방이 투구에 방해가 될텐데'라는 괜한 걱정과 달리 가랑이 밑으로 던진 일본 여학생의
강속구 야구볼.
그 때 익힌 탁구로 양면라켓을 들고 칠팔십, 나이든 시니어와 즐기며 초보자 레슨도 시키고 유튜브로
치키타, 챱핑 같은 최신 탁구기술을 익히고 보니, 그 때 옆 학교 협성상업전수학교 선수가 야사카
라켓으로 파다닥 공중으로 볼을 높이 띠운 묘기가 바로 '루프 드라이브' 아닌가.
오클랜드 집에다 채마밭 가꾸기와 여러 수종의 나무를 키우고, 동네를 워킹하다가 '이 넝쿨은 인동초
honey suckle요, 저 노란 대추 같은 열매나무는 카라카'라고 식물지식 자랑할 수 있음은 그 때의
석 교장의 원예반 덕이 아닌가 한다.
선생의 특이한 시책이 선생 개인의 머리에서 나 온 것일까, 검색해보니 '새벽종이 울렸네, 모두모두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라는 새마을운동이야 근 십년 뒤인 1972년에 청와대에서 시작했으니,
완전 교장의 독창적인 철학이 아닌가 한다.
못난 나는 졸업 후에 선생의 행방을 알려고 해본 적이 없었는데, 팔년 전인가 서울에서 중학 고교
동창생을 만난 회식자리에서 선생을 회고했더니 그가 '아 석인수 교장 말이지'라며 근황을 알려주어서,
내가 가슴에 담아둔 그이가 친구들 가슴에도 살아 있었구나, 라고 느낀다.
첫댓글 휴대폰으로 올린 글이라 실수가 많아요.
앞으로 문서쓰기를 배워서 제대로 올릴게요
잘 읽었습니다.
마음이 따뜻해 지네요.
그 때 교장과 선생님들이 입던 옷은 재건복으로 모택동의 인민복과
프랑스 대통령 드골의 ㅇㅇ복을 참조해서 5.16 혁명정부에서 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
혁명의 시대는 혁명적인 상징물이 필요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