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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9월15일 연중 제24주일
[청주] 지비로운 아버지가 되시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민수 21, 4ㄴ - 9(또는 필리 2,6-11)
† 복음 : 요한 3, 13 - 17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24주일입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신 이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회개를 그 무엇보다
가장 기쁘게 여기십니다. 일상 안에서 찌들어 있는 우리의 모습을 주님께
내어 보이고, 그분께서 우리를 말끔히 씻어 주시기를 간청합시다.
★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백성을 대표하여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수송아지를 만들어 자신들의 신(神)으로 섬긴다.
하느님께서는 진노하시어 그들을 벌하려고 하셨지만, 모세의 간청에
재앙을 거두신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한때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박해하던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이처럼 죄인들 가운데 첫째가는 죄인인 자신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사도로 불러 주신 하느님께 찬미드린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비유를 드시며 하느님의 기쁨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여기서 하느님의 기쁨이란 죄인들이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을
가리킨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무언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작은아들이 먼 고장으로 떠났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올 때의 장면입니다. 아버지의 가산을 챙겨 나갈 때만
해도 그는 분명 화려한 옷차림에 말끔한 용모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올
때에는 그렇지 않았음이 확실합니다. 옷도 누더기였을 것이고, 신발도 없었을
것이며, 제대로 씻지도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버지는 여느 거지나 다름없는 작은아들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가까이서가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알아보았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였을까요?
자식 둔 부모라면 누구나 이 대목을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집을 떠난 뒤부터 줄곧 그 아들을 걱정하였을 것입니다.
끼니는 제대로 챙겨 먹기는 하는지, 거지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강도를
만나지는 않았는지, 죽은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돌아오려나?’ 하는 마음이 한시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거지 차림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먼 데서부터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며 주님을 등져 버렸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마음을 지니고 계십니다. 우리가 당신 곁을 떠나 영혼이 파괴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시며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돌아오려나?’ 하시며 늘 기다리십니다. 그것이 자비로우신 아버지,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자비의 아버지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2013년 다해 9월15일 연중 제24주일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 루카 15,1-32<또는 15,1-10>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시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 한결 같은
사랑입니다. 우리의 회개나 내면과 외면의 변화들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 시간 하느님의 사랑에 나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관한 말씀은 ‘탕자의 귀향’이라고도 합니다.
왜 귀향이냐? 아버지 집을 떠났다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비유의 말씀을 ‘자비하신 아버지, 사랑의 비유’로
받아들입니다. 아들을 품는 한없는 아버지의 마음을 닮고 싶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 방황하다가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버지집의 풍요로움, 즉 아버지께 대한
사랑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들의 회개를 불러
일으킨 아버지께 초점을 맞춥니다.
질문한가지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한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머물러있었고, 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챙겨 밖으로 나간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은 누구입니까? 예, 작은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성경구절을
하나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무엘 상권 16장7절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사람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 하느님은 속마음을 본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은 누구입니까? 예, 작은 아들,
큰 아들 둘 다 입니다.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면 작은아들이 집을 나갔지만, 마음을 보면
큰아들도 집을 나갔습니다. 큰 아들은 겉으로 보면 착한 아들입니다.
아버지 일을 열심히 돕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완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방황하였습니다. 아버지와 한마음
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루카15,29)하며 불평을 쏟아냅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풍요로운 집에서 불행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큰 아들은 흠이 없는 인물이지만 작은 아들의 귀향을
기뻐하는 아버지와 맞닥뜨렸을 때 어둠의 권세가 그 속에서 쏟아져
나오면서 속을 부글부글 끌어 오르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분노와
아버지께 대드는 무례함과 이기심에 사로잡힌 모습이 송두리째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옆에서 슬쩍 건드려 보면 그
사람 속을 다 알게 됩니다. 그러니 담을 것을 잘 담아야 합니다. 쏟아져도
괜찮을 것을 담아야 합니다.
사실 스스로 정의로운 사람, 올바른 사람, 열심한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가운데는 더 많은 원망과 훨씬 더 많은 비판과 저주와 분노, 편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 저 사람은 저 모양일까? 할 때가 많습니다. 사소한
것에 불평불만하고 무관심하며 무례한 모습을 통해 우리 안에도 큰 아들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바라는 것만큼의
동정과 만족을 얻어내려는 속셈으로 나의 불평을 늘어놓을 때에는 언제나
그 결과가 항상 내가 얻으려고 했던 것과 정반대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집을 나간 아들은 큰아들, 작은 아들 모두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두 아들 모두를 품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잘 잘못을 묻지 않으시고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시며 최고의 것으로 작은 아들을 맞이하고 권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큰 아들에게는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하시며 위로해 주시고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 아들은 아버지 품에 안기고 한 아들은 화가 나서 아버지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품은 한없이 넓지만 받아들이지
못하고 안기지 못하는 아들이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가장 하기 힘든
회심은 바로 집에 머물러 있던 큰아들의 회심입니다. 자기가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아버지 옆에서 일을 하는
것으로써 자기 생각의 천박함과 마음의 옹졸함을 감추어 왔던 큰 아들도
귀향을 해야 합니다. 두 아들 다 품으시는 아버지의 자비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곧 하늘 아버지 이십니다.
작은 아들은 극심한 고통, 비참한 상태에 떨어진 후에야 자기가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극심한 어둠을 겪고 나서야 밝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하며 품삯을 받는 일꾼으로라도 받아주기를 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
하느님의 큰 자비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돌아오면, 과거의
모든 것을 잊으시고 죄로 생긴 빚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인을
전보다 더 잘해주신다는 것은 은총의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성경을 보면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 두 아들 다 잃은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더 이상 주장 할 수 없었던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베드로는
절망의 와중에서도 자녀임을 주장했고 많은 눈물을 흘리며 돌아와서
으뜸제자가 되었습니다. 유다는 죽음을 택하였지만 베드로는 생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하였습니다
(로마5,20).
따라서 혹 허물이 있다면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한없는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에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잘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혹 큰 아들의 숨은 귀향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램블란트의 “탕자의 귀향”에 대해 잠깐 설명을 드리면서 묵상에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그림 보이시죠?
소련 레닌그라드(세인트 페테르스부르트)의 에르미타즈궁을 위해
1776년에 까뜨린드 대제가 획득하여 현재까지 거기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높이 8피트(2.4미터) 폭6피드(1.8미터) 의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먼저 아버지의 모습은 굽은 허리에 눈을 보면 장님에 가깝고 거기에다
사시가 되어버린 눈입니다. 아들을 향한 간절한 기다림과 사랑 때문에
눈이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망토는 넓게 펴져서 아들에게 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옆에 서 있는 큰아들이 입고 있는 망토는 그저
그냥 걸치는 망토일 뿐입니다.
그리고 손을 보면 한 손은 부드러운 어머니 손이고, 한 손은 강인한
아버지 손입니다. 어머니의 손은 위로와 평안을 주고 특히 아버지
손의 엄지를 보면 힘이 들어가 있음을 봅니다. 우리가 악수 할 때도
그 힘을 통해 마음을 표현하잖아요. 괜찮아 힘내! 하는 손, 용서와
화해로 상처를 치유하는 축복의 손, 용기를 주는 손을 표현하였습니다.
무릎을 꿇고 아버지 품에 안긴 아들의 낡은 속옷 차림과 다 닳아 빠진
신을 통해서 그 고통과 비참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품을
떠나서 얼마나 큰 고생을 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
얹어진 아버지의 손에 빛이 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
너에게 축복을 주노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은총은 바로 거기에서
나옵니다. 위안과 희망을 간직한 아버지의 자비로운 손이 핵심입니다.
작은 아들에게 남겨진 위엄의 상징은 덜렁거리며 걸려있는 단검입니다.
그것은 그의 품위가 하락하는 와중에도 아직도 그가 아버지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관계의 인연은 끊을
내야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큰아들의 모습을 보면 아버지와 작은아들의 모습을 문턱에서 그냥
말없이 서 있을 뿐입니다. 웃지도 않고 손을 내밀지도 않으며 구경꾼이고
방관자의 모습입니다. 몸과 손은 어둠 속에 남아있습니다. 그나마 얼굴에
비쳐진 빛은 차갑고 냉정해 보입니다. 그래도 빛으로 얼굴을 비추는 것은
그 아들도 빛으로 부름을 받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억지로
밀어넣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입니다.
옆에 앉아서 가슴을 치며 돌아온 탕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죄인과 세리를
대표하는 종입니다. 그리고 뒤편의 기둥에 기대고 있는 여자와 피리를
들고 있는 여자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점진적으로 다가오는
하늘나라의 잔칫집을 생각할 수도 있고 방탕한 생활을 하던 작은 아들이
머물던 곳인데 어둠으로 사라졌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다양하게 묵상할 수 있겠으나 빛으로 가득 찬 아버지의 포옹이 바로
하느님의 집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큰 아들이 되었든 작은 아들이
되었든 간에 아버지께서는 큰 사랑으로 모두를 품으십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품에 안길 수 있어야 하겠고 또 우리도
모두에게 아버지의 자비로운 손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오늘
평화의 인사는 ‘당신은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사랑합니다.
연중24주일(루가15,1-10)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시오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의지가 참으로 약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같은 고백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뉘우치고 결심했다면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할 텐데 성찰해 보면 여전히 약점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래서 늘 고해 신부님 앞에 얼굴을 붉힙니다.
때로는 모르는 신부님께 고해를 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넘어짐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돌아보게도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가15,7.10). 하시며
죄인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의인 아흔 아홉도 소중하지만 죄인
하나도 결코 그 소중함이 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인이 회개하면
기쁨이 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죄인 하나가 바로 나라면 그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요? 아흔아홉 마리 양을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는 목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세속의 계산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 마리 때문에 다른
양을 잃을까 걱정되어 한 마리를 포기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하늘에서는 아흔아홉 마리보다 한 마리의 무게가 더 무거울 수
있습니다. 사람을 양보다 질로 보는 눈이라야 이런 계산이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 안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의 두 강도 중 하나는 구원되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회개하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이었지만 옆에 계신
예수님께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가23,42).하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부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가23,43).라는
대답을 얻어냈습니다. 그러므로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시리아의 성 이사악).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 해도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습니다.”그리고‘죄인 하나’가 바로 ‘나’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는 모습을 주님께서 반기십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죄인은 제
길을, 불의한 사람은 제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이사55,7).고 말합니다. 요엘 예언자도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요엘2,12-13).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이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가5,32.)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부끄럼 없이 살면 좋지만
혹 부끄러운 모습이 있더라도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허물을 안고 있음에도 우리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으시는 주님을 믿고 그분의 자비를 청하십시오. 사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성녀 소화데레사).
세리와 죄인들은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하느님 앞에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였고, 혼자서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딱한 처지라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유일한 도움은 하느님의 자비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비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기들만 옳고 의로우며 보증된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들 편이므로 하느님의 은총을
특별히 필요로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스스로 충분히
거룩하므로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게 여겨졌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한 회개하기는 틀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보고 기뻐하십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죄를 용서받는 고해성사의 은총을 확인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봅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우리 주님의 은총이
넘쳐흘렀습니다.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당신의 한없는 인내로 대해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당신을 얻게 될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1티모테오1,13-16).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고 또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죄인에 대한 생각은 잘못을 저질러서 죄인이기도 하지만 병자,
불구자, 세리, 장애를 가진 모든 이를 죄인으로 낙인찍었고 이들은 죄의
대한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무서운
하느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은 거룩하고 다른
이들은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감히 하느님께 나아갈
수가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손길이 필요했고 은혜가
충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죄인이어서 행복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세 가지 눈을 봅니다. 자신이 자신을 보는 눈,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눈,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는 눈입니다. 누구의 눈에 들어야
하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하느님의 눈입니다. 세상을 다 차지하고
나를 뽐내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다고 하여도 하느님의 눈에 들지
않는다면 아무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나의 허물을 인정하고 자비를
청하며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의 눈에 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이는 육안, 심안, 혜안(영안)을 말합니다. 육안은 매우 객관적이지만
늘 욕망을 추구합니다. 육신의 눈은 아름다운 사람의 얼굴과 세상의
것들을 충분히 볼 수 있을지언정 그 사람의 인격이나 그 사물에 담겨있는
고난과 의미를 보지는 못합니다. 반면 마음의 눈은 지혜와 이성을 통하여
내면의 세계를 봅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잘못되면 편견과 아집이
생겨나 볼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이
그랬습니다. 영적인 눈은 영원한 것을 봅니다. 천상의 세계를 봅니다.
그래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고 거룩함을 추구합니다. 시련과 고통,
역경을 디딤돌로 삼아 하늘을 차지합니다. 하느님의 눈에 든 사람은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영적인 눈을 지녀 자신을 바라보고 주님
앞에 자비를 갈망하며 이웃에게도 천상을 갈망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귀한 도구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만이
오랫동안 냉담을 하다가 다시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형제님이 있습니다.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니고 있으며, 아침저녁 기도도 잊지
않고 바칩니다. 그런데 냉담하던 때와 비교해서 엄청나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당 나가는 시간이 지루하기만 하고, 또한 기도하는 것이
과연 효과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다시
전과 같은 냉담자의 길을 걷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고 합니다. 예수님께
돌아오면 기쁘고 행복해야 할 텐데, 이 형제님께서는 왜 그렇지 못할까요?
주님께 돌아온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형제님께서는 완전한 회개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통해 얻게 되는 주님의 용서를
뜨겁게 체험하지 못해서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저는 10년 넘게 담배를 피웠었습니다. 그런데 담배를 피우다보니 불편한
것이 참 많은 것입니다. 담배를 구입하는 경제적인 문제도 있지만, 담배
냄새를 싫어하는 신자들을 생각할 때 이제는 더 이상 피워서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또한 저의 건강 문제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아무튼 담배를 끊음으로 인해 얻는 효과가 너무나 큰 것입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담배를 끊었습니다. 그렇다면 담배를 끊자마자 제가
행복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담배를 피웠기 때문에 금단 현상이라는
것도 생기더군요.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괜히 불안한 마음이 생깁니다.
기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괜히 화가 나고 스스로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것 같습니다.
지금 현재 담배를 끊은 지 12년 되었습니다. 그때 담배를 끊으면서
느꼈던 불행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을까요? 담배 끊은 것은 정말로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하면서 행복해합니다.
주님께 돌아갔다고 곧바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담배를 피우겠다는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행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주님과 나의 간격을 멀게
하는 죄의 잔재가 사라졌을 때 비로소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생각하셨던 최우선 목표는 죄에 대한 회개였고, 회개하여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람을 간절히 원하신다고 오늘 복음에서 잃어버린
양의 비유 그리고 잃어버린 은 한 닢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미사를 참석하고, 또 신앙생활을 나름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자기 내면 깊숙이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연’은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가 끝난 사람에게 오는 선물 같은
것이다(윤태호).
제 방 베란다. 도저히 자랄 수 없을 것 같은 곳에서도 생명이 나옵니다.
진정한 회개
큰 범죄를 지은 사회 지도층 사람들이 신문과 방송 기자들 앞에서
기자회견을 할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보다는 유감이라는 말을 쓰면서 직접적인 책임을 회피하지요.
그래서일까요? 약간의 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어느 정도의
불법은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이라면 괜찮은 것처럼 말합니다. 그래서
유감이라고 말할 때에는 마치 자신이 재수가 없어서 별 것 아닌 것으로
구속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지
않습니다. 명백한 범죄인데도 이유는 다 있으며, 그 이유를 들어 어쩔
수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죄인을 찾기가 참으로
힘들지요. 심지어 사제와 단 둘이 있을 수밖에 없는 고해소 안에서도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보다는, 자신의 합리화와 다른 이들의 잘잘못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 안 깊숙이 이루어지는 진정한 회개가 필요한 지금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핑계를 듣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뉘우치는
회개를 원하십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영적 겸손이란....
소나무 신부님과 함께하는 마음의 산책
'영적 겸손이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나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2013년 9월15일 연중 제24주일 복음묵상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루카1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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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으로 선정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나 탕자의
비유가 전하는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인생이라는 나그네길을 끝마치는 순간까지 우리 모두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아니라, 길을 잃고 헤매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며, 아버지의 사랑을 배신하고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
살려달라고 아버지를 찾는 탕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 잃어버린 양을 찾아 헤매는 목자의 마음이,
그리고 집 떠난 아들이 돌아오자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표현한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메시지다.
그런데 이 쉬운 메시지를 우리는 알아듣지 못하는 냥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교만이라는 어리석음 때문이다. 우리의 교만은 늘
자신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의 무리 중 하나일 것이라고,
최소한 집 나간 둘째 아들이 아닌 아버지의 뜻에 충실했던 큰
아들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교만은 진실을 못 보게 하며, 그 영혼을 더욱 그분과 멀어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적 겸손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하느님께 청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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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겸손에 대해 묵상했던 내용을 옮겨본다)
무엇을 겸손이라고 하는가?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께 야단을 맞는
이들은 대부분 교만한 이들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겸손은 어디에서 오는가? 분명한 것은 인위적인 것은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학습된 것도 거짓일 확률이 크다. 이는
상대를 의식해서 만들어진 겸손은 거짓이라는 말과 통한다.
특히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보여지는
것은 만들어진 거짓 겸손일 수밖에 없다.
겸손한 마음은 저절로 나와야 한다.
저절로 나온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어쩌면 무척 간단한 이치일 지도 모른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다. 가득 차 있다는 말이다.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일까?
그것은 삶의 시행착오 속에서 깨달은 모든 것에 대한 진실이다.
하여, 겸손에는 삶이 담겨 있다.
우리 신앙인의 눈으로 볼 때는 그것은 하느님께서 깨닫게 해주신
삶의 의미이고 우리가 걸어가야 할 참된 삶이다.
그분 안에서 세상에 대한 올바른 관조가 가능할 때 겸손은 내 것이
된다. 내가 미워하게 된 그 사람 안에서도 그 사람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겸손해진다.
모든 아픔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겸손해진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관계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올바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겸손해진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분께서 주셔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한다. 겸손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이 삶을 깨닫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그러면 겸손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물이 될 수밖에 없다.
거짓 겸손은 비굴하다. 하지만 참 겸손은 비굴할 수가 없다.
진실로 겸손한 이들을 만날 때, 우리는 위로를 받고 치유를 받고
살아가야 할 지표를 얻게 된다.
나를 아는 이들이 나를 통해서 위안을 받는가?
나를 아는 이들이 나를 통해서 용기를 얻고 그분을 찾으려 하는가?
뒤돌아 볼 일이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연중 제24주일
2013년 다해 9월15일
이제 곧 ‘추석’입니다. 이번 추석에는 어머님이 계시는 의정부에서
지내려고 합니다. 본당에 있을 때는 한가위 미사를 봉헌했고, 신자
분들과 지냈지만 교구에서는 주방 자매님들도 추석을 지내기 위해서
집으로 가시고, 다른 신부님들도 집으로 가시기 때문입니다. 굿뉴스
가족 여러분들께서도 추석명절 즐겁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오고
가시는 길 안전하게 잘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명동에 살면 덤으로 얻는 것들이 있습니다. 명동 성당에서 개최되는
다양한 문화행사입니다. 어제는 합창단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교육관에서는 ‘한국교회의 흐름과 과제’라는 주제로 학술행사가
있었습니다. 발제자들은 초대교회의 신앙생활, 해방 후 한국교회의
사회영성, 과학적 무신론에 대한 교회의 대응‘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성직자들이 없는 가운데서도, 박해가
심해지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의 신앙을 굳게 지켜왔습니다. 그
신앙이 깊은 뿌리가 되어서 오늘날 한국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과 같은 능력을 갖고 싶어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처럼 인간은 늘 하느님의 곁을 떠나려고 시도를 한다고
합니다. 근대에서는 철학적 무신론이 등장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리에 인간의 이성과 인간의 지성을 대신하려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고, 인류는 큰 전쟁을 겪어야 했습니다.
현대에는 과학적 무신론이 대두되었습니다. 인간의 의식과 종교
또한 진화의 산물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신 영성 운동은 합리적인
사고를 하기보다는 인간의 감성을 자극합니다. ‘물신주의, 상대주의,
세속주의’는 인간을 상품화하고, 말초적인 신경을 자극하려합니다.
연은 연줄에 매달려 있어야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습니다.
연줄을 잡아당기는 사람이 있어야 바람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연의 숙명입니다.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있을 때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연은 끊임없이 연줄을 끊으려고 하듯이,
사람은 늘 하느님의 곁을 떠나려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고,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고, 사도 바오로도
그랬었고, 오늘 복음에서 둘째 아들도 그랬습니다.
끊어진 연줄을 다시 이어서 연을 하늘 높이 날리는 사람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곁을 떠난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당신 자비의 끈으로, 사랑의 끈으로, 용서의
끈으로 다시 관계를 맺으십니다. 하느님의 곁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면, 다시 돌아오는 인간을 연민의
눈으로 다시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의 속성인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아버지, 둘째아들 그리고 큰 아들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작은 형은 집을 자주
나갔습니다. 집에 있는 돈을 가지고 나가서 탕진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런 작은 형을 위해서 늘 밥 한 공기를 따로
준비하셨습니다. 언제든지 돌아오면 주려고 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작은 형은 늘 초라했습니다. 술에 취해서 돌아오기도
했고, 돌아오면 며칠 씩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런 작은
형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받아 주시는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그 지극한 사랑은 작은 형을
변화시켰습니다. 형은 수도원에 들어갔었습니다. 그리고 무료
급식소에서 봉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먼저
하늘나라고 갔지만 작은 형은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하느님
나라로 갔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우리 주님의 은총이 넘쳐흘렀습니다.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당신의 한없는 인내로 대해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카인 콤플렉스 극복하는 법
2013년 다해 9월15일 연중 제24주일
<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더 기뻐할 것이다.>
복음 : 루카 15,1-32
< 카인 콤플렉스 극복하는 법 >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세리들,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그리스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이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면 하늘의 천사들도 기뻐하는데
너희들은 왜 기뻐하지 못하느냐?”고 나무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도 말씀하십니다. 탕자인 동생이
돌아왔을 때 그 동생을 받아들여주는 아버지를 못마땅해 하는
형의 모습이 곧 그들의 모습이란 것입니다. 자신이 당연히 더
사랑받아야 하는데 그 사랑을 못마땅하게 빼앗겨버렸다고 느끼고
그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느끼는 동시에 동생까지 미워하게 되는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카인 콤플렉스’라고 한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잔뜩 받고 싶어 했던 카인이지만 아벨만 좋아하는 하느님도
싫고 동생도 싫어서 동생을 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분석학 박사이자 의사인 이무석씨가 자신의 책 ‘30년만의
휴식’에서 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휴’라는 잘 나가는 중견
기업 이사를 카인 콤플렉스의 사례로 들고 있습니다.
휴는 잘 나가는 30대 후반 직장인입니다. 직장에서 최연소 이사까지
급성장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입니다. 그는 초.중.고. 또 대학에서도
수석을 놓친 적이 없고 대기업에 특채로 뽑혀 들어간 인재입니다.
그를 잘 보았던 그의 선배가 회사를 새로 차리면서 그도 스카우트했고
그의 능력덕분으로 회사가 크게 성장했고 최연소 이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사장이 휴에게 사표를 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휴는
‘그동안 내가 사장과 회사를 위해서 희생한 게 어딘데...’하며 분노를
터뜨리고 그러면서 원인모를 설사병에 시달려 5킬로가 빠졌습니다.
그래서 이무석 교수를 찾아온 것입니다.
먼저 사직서를 제출하라고 한 이유는 그가 무척이나 경쟁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능력으로 평가했고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는 심하게 다그쳤습니다. 그러다보니 나중에 들어온 인재들이
휴와는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겠다고 하나 둘씩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사장이 가장 신임하는 후배도 떠나겠다고 하니, 사장은 그
후배를 택하고 골칫거리가 돼 버린 휴를 내보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담을 하던 중 이무석 교수의 아내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당분간 휴를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교수에게서마저 버려졌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고 꿈에서마저
교수가 탄 배가 난파되어 그가 죽는 잔인한 꿈을 자주 꾸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걱정이 되어 생사확인을 위해 전화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죽으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휴는 그러는 중에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교수를
자신의 아버지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휴는 어렸을 때부터
태어나지 못할 뻔 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형 하나만 키우면 되니 뱃 속에 있는 휴를 지우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몰래 피해있다시피 하여 간신히 세상에 태어난
휴는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어디 놀러가거나 출장을 갈
때도 형만 데려갔습니다. 휴는 아버지가 미우면서도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모든 면에서 형을 앞서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공부도
잘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형만 사랑하는 아버지가 미워 배가
뒤집혀 죽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형은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여 이민 가서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형에게 실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휴는 자신이
사귀던 여자를 떠나 아버지가 정해주는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물론
싫지 않으니까 결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자기가
증오하면서 동시에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이었고,
지금은 굳이 인정받을 필요도 없지만 어렸을 때 채워지지 않은 배고픔
때문에 누군가를 계속 아버지로 투사하며 인정받기 위해 무한경쟁과
질투 속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사장을 아버지처럼 여기고 사장으로
부터 가장 인정받고 사랑받는 사람이 되려고 했고, 이무석 박사 또한
아버지로 투사하고 인정받으려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목마름. 나의 존재가 받아들여지고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는
외적인 것으로 자신의 존엄성을 드러내려 하지만 사람의 존엄성은
존재자체지 행위가 아닌 것입니다. 옆집 아이가 더 공부를 잘 한다고
내 아이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근본적인 치유가
일어나지 않으면 이 사람은 끊임없는 카인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질투하고 경쟁하며 외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역시 자신들의 드러나는 행위와 지식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세리와 죄인들을 그들보다 더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분이 사랑하시는 탕자들을 질투하고
증오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이들을 보면서 ‘천사’들도 기뻐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마귀’들은 기뻐하지 않고 질투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자신보다 아벨을 더 사랑하시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면 천사이고,
질투한다면 마귀인 것입니다. 실상 마귀는 처음엔 천사였으나 죄인인
인간들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자신들보다 더 높아지는 것을 보고는
질투하여 하느님의 집을 뛰쳐나온 탕자의 형과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카인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질투하지 않으며
살 수 있을까요? 누군가로부터 나는 있는 그대로 사랑받기에 충분한
존재임을 가슴깊이 느껴야 합니다. 이 사랑의 빛은 마치 드라큘라가
빛을 보면 재가 되어버리듯이 내 콤플렉스를 한 순간에 녹여내어
남과 비교하지 않고 만족하게 살아가게 만듭니다.
이번 SBS 힐링캠프에서 차 사고로 몸 55%에 3도 화상을 입고도
살아나 얼굴과 온 몸이 성치 못함에도 ‘지금이 행복해서 과거의
예쁜 얼굴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당당하고 유머도 있는
이지선씨가 나왔습니다.
이지선씨는 대학교 4학년 때 오빠와 차를 타고 신호대기를 하던
중 뒤에서 음주뺑소니 차량에 사고를 당해 온 몸에 화상을 입었고
의사도 포기한 상태였지만 어머니의 사랑과 격려로 기적적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매일 온 몸을 소독해야 했는데 진통제의 효과가 떨어지는 몇 시간
동안은 극도의 고통을 당해야 했고, 살이 오그라들어 눈과 입을
몇 달 동안 깜빡이거나 다물 수 없었으며, 목의 살이 오그라들어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없어서 목과 척추까지 휘어져야 했는데,
더 힘든 것은 손가락이 곪아 8개를 잘라내어야 했습니다.
40번 가량 수술을 하면서 절망에도 빠졌었지만, CD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지금
과거의 예쁜 얼굴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 고통 속에서
찾아낸 보석이 너무 아름다워 잃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극복한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를 찾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사고를 낸 사람의
차가 보험에 들어 있어서 감사했고, 몇 달 만에 눈을 깜빡거릴 수
있게 되었을 때 감사했고, 손가락으로 글을 쓰고 숟가락을 들 수
있는 것에 감사했으며, 환자복의 단추를 혼자 힘으로 끼울 수 있어서
감사했고, 문을 열수 있어서 감사했으며, 무엇보다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한다고 합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에서부터 감사를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 것은 기도를 통해서
였습니다. 그 기도 속에서 하느님은 이지선씨를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딸아!”
이것이 내 모든 것을 녹여내는 빛인 것입니다. 그 모습 그대로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후로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보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게 되었습니다. 당당한 그녀의 모습에 어떤 남자는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가 느끼고 싶은 것은 우리가 소중하다는 것
하나 뿐입니다. 사실 나를 소중하게 느끼게 하지 못하는 추한 것들이
내 안에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모습의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지금 못난 이 모습이 사랑스러워 돌아가시고 지금도
당신 몸을 우리에게 양식으로 내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분이
사랑하시는데 내가 부끄러워하고 남을 질투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제가 “그리스도의 몸!” 하는 순간은 “내 사랑하는 아들아(딸아)!”
하는 엄청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순간입니다. 성체만큼 우리가
소중하다는 것을 온 존재를 통해 느끼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구원받게 된다면 이제 천사처럼 다른 이들이 잘 될 때 질투하지
않고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겉이 아니라 내면을 보시는 예수님
2013년 다해 9월15일 연중 제24주일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겉이 아니라 내면을 보시는 예수님
정말 놀랄 일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든” 사건입니다.
예수님 시대 세리와 창녀, 죄인들은 하느님을 등지고 살아가던 사람들,
하느님과 가장 멀리 떨어져 살던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 인간도 아닌 인간, 상종하지 말아야
할 족속들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루가 복음 18장 9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온 세리가 기둥
뒤에 숨어서 기도하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사실 세리나 창녀들은 하느님과 율법을 떠나서 살았기에 교회 공동체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눈에 띌까봐 창피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두려워서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다들
예수님 가까이 다가온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잘 먹혀들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딱딱하고 고리타분하던 당시 사제들의 설교와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장황하고 지루하기만 하던 당대
율법학자들의 강의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따뜻하고 감미로웠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들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있던 군중들은 깊은 감동으로 큰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기쁨과 희망의 에너지였습니다.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와 새 생활로 안내했습니다. 그분의 말씀으로 인해
자신들의 눈앞에서 구원이 이루어지고 일시적으로나마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 것을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이런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가면서 마침내 하느님과 담을 쌓고
지내던 세리와 창녀, 죄인들에게까지 전해졌던 것입니다.
당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하류인생들이 줄지어 당신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본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생각합니다. 저 같았으면 엄청
두려웠을 것입니다. 다들 한 가닥씩 하던 사람들입니다. 얼굴도
험악합니다. 굵은 팔뚝 여기저기에는 문신들이 가득합니다. 입만 열면
갖은 욕설이 난무합니다. 저 같았으면 서둘러 자리를 끝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처럼 겉만 보지 않으시고 그들의 내면을
바라보십니다. 그들의 상처 투성이 뿐인 과거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십니다. 나름 한번 새출발해보겠다고,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보겠다고 발버둥 쳤던 지난날을 바라보십니다. 그간 세상 사람들로부터
갖은 멸시와 따가운 눈초리를 바라보십니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들을
눈 여겨 보십니다.
그러고 나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은 정말이지 깜짝 놀라 기절초풍할
정도입니다.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반갑게 인사하시고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십니다. 그들과 함께 회식을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과 온전히 하나 되신 것, 그들의 친구가 되신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완전 무장해제 시킨 예수님께서 드디어 한 말씀
던지시는데, 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세리와 죄인들 더 감동시킵니다.
저 같았으면 이랬을 것입니다. “자네들 이제 그런 짓 그만하고 새
출발해야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몰아붙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당신의 솔직한 마음을 열어 보이십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오늘은 다른 누구를 위한 날이 아니라 바로 죄인인 우리들을 위한
축제의 날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죄인의 멸망을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어쩔 수 없는 죄인인
우리들에게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감사하며 기뻐하며
다시 한 번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서울 대교구 교정사목센터
2013년 다해 9월15일 연중 제24주일
서울 대교구 교정사목센터
서울 대교구 교정사목센터 그리고 각 교구마다 교정사목이 있습니다.
‘빛의 사람들’이라는 서울 교정센터의 건물 이름이 마음에 듭니다.
빛을 내는 사람들, 빛을 발하는 사람, 빛나는 사람들이란 뜻이겠지요.
오랜 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사회 어두운 그늘에서 살던 분들입니다.
여기서 생활하며 자활의 길을 힘차게 가는 그들의 얼굴은 참 환합니다.
빛을 발하는 사람들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주님의 말씀 되새겨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루카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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