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711. 묵상글 들 ( 연중 제15주일-가까운 사람에게 파견되는 우리. 등 )
----------------------------------------------------
210711.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제15주일-가까운 사람에게 파견되는 우리
오늘은 파견 얘기이고 독서는 아모스 예언자가 파견되는 얘기입니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복음은 사도들이 파견되는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파견되는 얘기를 묵상하다가 남의 파견 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나의 파견도 얘기해야 하지 않나 생각되어 나의 파견을 묵상케 되었습니다.
관구장을 마치고도 저희 관구의 선교 책임을 오랫동안 맡았던 저는
파견된 적은 없고 형제들만 파견한 것 같았기 때문인데
그런데 저는 정말 파견되지 않고 파견만 한 존재였는가?
하느님만 파견하시는 분이고 인간은 누구나 파견되는 존재가 아닌가?
이런 묵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시작된 묵상은 저에 대한 성찰로 바뀌었고,
성찰은 반성으로 바뀌었는데 그것은 감히 하느님 자리를 차지하고는
자신이 파견되었고 파견될 존재라는 저의 정체성을
너무도 어처구니없지만 까맣게 잊고 살았다는 반성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수도 생활에 관한 문헌 <봉헌 생활>이 생각났습니다.
여기서 수도 생활의 모범인 예수님께서는 <A Patre, Ad Patrem>의 존재
그러니까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가신 분이라고 얘기되고 있지요.
그러고 보니 참으로 그렇습니다.
저라는 존재는 근본적으로 출생 자체가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으로 파견된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시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거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지요.
그것도 우리의 의사를 물으시고 태어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당신 뜻대로 창조하셨고 이에 우리는 군소리 없이 태어난 존재이고요.
그렇다면 파견된 나는 과연 파견의 삶을 살고 있는가?
답하기 참 어렵지만, 예나 지금이나 파견을 거부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파견에 얼마나 깨어 있었는지 그 의식의 차원에서는
오늘 독서에서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라고 한 아모스 예언자처럼
많이 깨어 있지 못했고 특히 일상의 차원에서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선교 강의 때 참 많이 얘기한 바와 같이 우리는
매일 미사의 끝에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파견을 받는데
해외 선교사라면 해외로 파견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우리는
그 첫째가는 파견지가 바로 같이 사는 가족이요, 형제들이지요.
같이 사는 사람에게 나는 남편이기도 아내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파견되는 선교사요 예언자이기도 하다는 말이고,
그들은 내가 복음을 들고 또는 살아있는 복음으로
찾아가야 할 대상이라는 말이지요.
이렇게 우리는 이웃에게도 직장 동료에게도 파견되었고 찾아가야 하는데
수없이 만나면서도 하느님께서 나를 그들에게 파견하셨다는 의식이 없이
만났고 그래서 많은 경우 저는 복음 없이 주님은 떼어놓고 만났습니다.
게다가 요즘의 저는 현저하게 인간적인 만남조차도 소극적입니다.
일의 추진력이 전보다 못함은 물론 일을 벌이는 것도 주저합니다.
이것을 저는 전보다 힘이 떨어져서 그런 줄로만 생각했는데 오늘
저 자신을 더 성찰하고 반성해보니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성찰인데 지금의 저는 여기서 무엇을 하기보다
여기를 떠날 생각을 더 하고 그래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부터인 것 같은데 그때부터 저는
이 세상에서 뭘 하는 것보다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을 더 생각하고
그 돌아갈 준비를 서서히 하고 있었던 겁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왔으니 아버지께 돌아가긴 가야지요.
그래도 돌아갈 그때까지는 파견된 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어쩌지요?
----------------------------------------------------
210711. 연중 제15주일. 고 도미니코 신부님. -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무소유의 가난을 살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무소유의 가난 체험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겸손과 순수하고 단순한 믿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무소유의 가난은 참된 겸손으로 인도합니다.
겸손은 헐벗음, 배고픔, 불안정한 삶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가장 위대한 겸손은 당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게 되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다른 많은 온갖 것에 호기심을 갖게 되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판단하기에 분주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교만이 마음 안에 자라게 됩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위대합니다. 그들은 미천, 초라, 허무의 밑바닥에까지 내려간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모든 것이 존재하는 곳 까지 그곳은 너나 할 것 없이 벌거벗는 곳입니다.
비안네 성인은 “‘아! 겸손! 겸손! 우리가 성인이 못되는 것은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은 모든 악을 엮은 묵주요, 겸손은 덕을 묶은 묵주입니다. 겸손은 마치 저울대 같아서 사람이 한쪽에서 자기를 낮출수록 다른 쪽에서 더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무소유의 가난은 단순하고 순순한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모든 종류의 안락함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의 집과 종족 마을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의 외아들에 대한 애착마저 버려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떠났습니다. 이것이 순수한 믿음이요, 꾸밈없는 믿음이다.
참된 무소유의 가난은 물질 자체을 멀리하는 물질적 가난에 집착하는 자기중심적인 가난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유익하다면 물질을 소유하고 그 물질을 다른함께 나누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물질을 주어진 상황에 따라 감사하게 누릴 줄 아는 것입니다. 이는 사도 바오로의 삶에서 잘 드러납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필리 4,12)
무소유의 가난을 진정으로 살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그 사람 안에 영의 가난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살아도 자신의 비방이나 오해와 모욕을 당할 때 분노 등으로 마음의 평정을 잃고 있다면 물질적인 무소의 가난은 공허함에 불과할 것입니다.
바로 성 프란치스코는 이 영의 가난에 대해서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여러 가지의 기도와 일에 열중하면서 자기 몸에 많은 극기와 고행을 행하지만, 자기 육신에 해가 될 것 같은 말 한마디에, 혹은 자기가 빼앗길 것 같은 그 무엇에 걸려 넘어져 내내 흥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들은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정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참조: 루카 14,26), 자기 뺨을 치는(참조: 마태 5,39)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
210711. 연중 제15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다.”
우리는 모두 각자 사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사명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그것은 신원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신원에 대한 각성이 자신의 사명을 충실하게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전례>는 “말씀 선포의 사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파견 받은 이”라는 신원에서 주어집니다.
<제1 독서>에서 아모스는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파견 받음에서,
<제2 독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는 아버지로부터 파견 받음에서,
그리고 <복음>에서 열두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음에서 그 사명이 주어집니다.
오늘 <제1독서>는 남 유다의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에 와서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자, 사제 아마츠야가 그를 위협하며 쫓아내는 장면입니다. 왕실 사제인 아마츠야가 자신을 반대하는 아모스를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은 자신의 신원과 권한이 침해당하고 위협당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득권을 놓을 수 없어, 일종의 제도권의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이처럼, 말씀의 선포는 아프게 찌르기에 때로는 받아들여 지지 못하고, 주변부로 내쳐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역사 속에는 흔히 말하는 말씀의 유배 시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내쳐졌고,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 성문 밖에서 매달리어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오늘 <제2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소아시아의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옥중서한의 서두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파견하시어 그분의 피를 통해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고, 이 사명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성령을 파견하셨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의 파견 장면입니다.
이는 세 장면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기 이전의 장면과, 파견하시는 장면, 그리고 파견 받은 제자들이 그 사명을 이루는 장면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는, 마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아모스를 붙잡으셨듯이,
<제2독서>에서 우리를 창조 이전에 이미 선택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마르 6, 7).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가르쳐주십니다
. 파견 받은 자에게 길을 떠날 때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곧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의 돈도 가지지 말며, 신발도 옷도 두 벌을 가지지 말라(마르 6, 8 참조)고 제시하십니다.
이는 자신의 능력으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탁하여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
성경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지팡이는 모세의 지팡이입니다.
양치기 모세에게는 너무도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지팡이였지만, 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 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 병든 이들이 쳐다보기만 하면 살아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인 이 지팡이, 그것은 곧 “말씀의 지팡이”입니다. 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요, 쌍날칼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하느님의 권능인 이 말씀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는가?
그래서 말씀의 권능에 위탁하여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파견 받은 이들이 한 일에 대해서 전해줍니다.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다.” (마르 6,12-13)
이는 파견 받은 자는 파견 하신 분의 뜻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을 하여야 함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의 권능으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는 파견 받은 자임을 돌이켜보고, 내가 지금 파견하신 분께 매여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 말씀의 지팡이를 꼭 붙들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 6,8)
그렇습니다.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무능함과 허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
210711. 연중 제15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눈팔지 마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오직 당신께 의지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의지하는 만큼 주님의 사랑을 체험케 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면 실망하고 상처를 안고 살지만 주님께 의지하는 이는 하는 일마다 잘될 것입니다. 이 시간 각자에게 주어진 주님의 소명을 일깨우고 그분의 바람을 살 힘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먼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냥 빈손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능력을 담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자를 파견 하셨습니까? 사도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대로 “하늘의 온갖 영적인 축복을 주심”과 당신의 가르침, 즉 “하느님나라 건설”을 위해서입니다. 그 사명은 열두제자에게 국한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실 우리도 이미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고 마귀를 끊어버리고 허례허식을 끊어버리겠다고 약속했으며 그 기초 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주님의 능력을 입었고 파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온갖 유혹 앞에서 주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꿋꿋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파견하셨습니다. 짝을 지어 파견한 것은 증언 내용에 대한 진실성을 말해주는 관례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공동체성을 상기시켜 주며 복음의 선포는 개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래서 함께하면서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고 서로의 연약한 마음을 붙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이 함께하는 것은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가야할 길을 갈수 있도록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도 혼자 독불장군으로 일하지 말고 협력자와 함께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시편에서는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55,23)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함께 일하되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이웃과도 함께합니다.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과 함께하는 척 할 수는 있겠지만 진심으로 함께하지는 못합니다. 먼저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을 파견하기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한 눈 팔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옛 말에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것에 대한 애착을 아예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께 의지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먹을 것이 많고, 소유하는 것이 많으면 당연히 하느님께 가는데 소홀해지기 마련입니다.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입니다. 주님께 의지하여 도움을 청하고 주님의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모든 것(먹을 것, 입을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당에 나오면 뭐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하고 왔는데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런저런 일에 신부님으로부터 잔소리 듣고, 시간을 투자해야 하며 거기다 돈도 내야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정직하게 살려고 하니 손해 보는 느낌입니다. 좋은 마음으로 기도하러 왔는데 왜 그리 말이 많고 설치는 사람이 많은지…밖의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주님은 눈에 보이는 힘을 비울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채워주십니다. 더 큰 마음의 자유와 기쁨과 평화를 주십니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준다”(이사41,10). 그러므로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을 전하는 가장 큰 몫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의로움을 선택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 접하기도 합니다. 고지식한 사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세상의 것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답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돌아보면 은총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당장의 결과에 얽매이지 말고 삶의 자리에서 충직하시기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면 열매는 주님이 주십니다. 주님의 뜻을 행했으면 결과에 연연해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내가 흘린 수고와 땀은 주님께서 차고 넘치도록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근본을 얻으면 일의 결과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따라서 농부가 온종일 땀 흘리며 고랑을 파듯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생명의 길을 파는 농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열심히 일해 어떤 좋은 결과를 이루었을지라도 가까운 이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면 낙담과 실망에 빠져서 일할 의욕을 잃고 손을 놓아 버리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고, 사람들은 음모를 꾸미고 심지어 죽이려고도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 안에서도 당신의 일을 한결같이 행하셨습니다. 우리도 누가 무어라 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사도들을 파견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의 일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에 매이지 말고 천상 것을 추구하는 의로움을 통해 주님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정에서 주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기쁨을 주며 힘을 주시는 분입니까? 아니면 그렇게 만드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지켜줄 힘과 능력을 지닌 분입니다. 성경은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하고 선언합니다.
우리 가정은 하느님의 말씀과 더불어 사랑의 생활을 하는가? 아니면 출세와 물질에 치중하고 있는가? 점검하고 사랑의 삶을 증가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가? 데리고 사는가? 자문하며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영적축복을 전하며 또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한 어린이가 어머니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엄마, 도둑질 하는 것과 거짓말 하는 것 중에 어는 것이 더 나쁜 거예요?” 엄마는 이이에게 “그야. 도둑질 하는 것이 더 나쁘지”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엄마, 아니예요, 거짓말이 훨씬 더 나빠요. 왜냐하면 도둑질 한 것은 돌려 줄 수 있지만 거짓말은 돌려줄 수 없잖아요!” @@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약속과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지키지 못할 때 본이 아니게 거짓말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주님께 한 약속에 충실하고 이웃에게 한 약속을 꼭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210711. 연중 제15주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신(新) 준주성범(遵主聖範)
⒈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의 길은 우상을 멀리 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조성하시고 인간에게 맡기신 뜻은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 안의 모든 선, 즉 사랑과 자유, 자비와 평등, 정의와 평화 같은 최고선을 기본으로 인간의 존엄성,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 선택, 연대성과 보조성, 공동합의성 같은 공동선을 구현함으로써 인류가 행복하게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처음 에덴 동산에서부터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가로막고 방해해 온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힘을 추구하도록 부추겨왔습니다. 하느님의 뜻 대신에 인간의 힘을 내세움으로써 자신이 하느님이라도 된 듯한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마귀의 전략은 인류 역사상 종종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⒉ 오늘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북 이스라엘 왕국의 사제 아마츠야와 대결하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살던 그 시기는 나라 안팎으로 무법천지를 방불케 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아직 강대국 앗시리아가 일어서기 전에, 고만고만한 나라들끼리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도토리 키재기 같은 힘을 겨루며 온갖 죄를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⒊ 국제적으로 보면, 다마스쿠스 사람들은 타작기로 길앗 사람들을 짓뭉갰으며(아모 1,3), 가자와 에돔 사람들은 전쟁에서 포로로 사로잡은 이들을 모조리 끌고 가서 에돔에게 노예로 팔아 넘겨 버렸습니다(아모 1,6.9). 에돔 사람들은 칼을 들고 제 형제를 뒤쫓으며 무자비한 분노를 품었고(아모 1,11), 암몬 사람들은 저희 영토를 넓히려고 길앗 여자들의 임신한 배를 갈르는 죄도 저질렀습니다(아모 1,13). 모압 사람들은 에돔 임금의 뼈를 불살라 횟가루로 만들어 버렸고(아모 2,1), 동족인 유다 사람들은 주님의 법을 배척하고 우상에게 홀려 버렸습니다(아모 2,4).
⒋ 그런가 하면 국내적으로도 사람들이 빚돈을 빌미로 무죄한 이를 팔아 넘기고 신 한 켤레를 빌미로 빈곤한 이를 팔아 넘겼습니다(아모 2,6). 또 힘없는 이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다 짓밟고 가난한 이들의 살 길을 막았으며, 아들과 아비가 같은 처녀에게 드나들고 있었고(아모 2,7), 저당 잡은 옷들을 펴서 그 위에 드러누워 즐기고 벌금을 모아 사들인 포도주를 제사를 드려야 할 하느님의 집에서 마셔대고 있었습니다(아모 2,8). 의인을 괴롭히고 뇌물을 받았으며, 공정한 재판을 펴야 할 성문 앞에서 빈곤한 이들을 밀쳐 내기도 했습니다(아모 5,12).
⒌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돌무화과 나무를 재배하며 양떼를 키우던 농부 아모스에게(아모 7,14-15) 예언자가 되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너희의 그 거룩한 집회를 반길 수 없다. 시끄러운 노래를 집어치워라(아모 5, 21-23).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아모 5,14).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24).
⒍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이유는 이러한 죄악들이 세상을 더럽히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던 마귀를 쫓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자니 마귀 들려 고생하거나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돕는 일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바야흐로 다가왔음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받아들여 믿는 것이 회개였습니다.
⒎ 아모스 예언자 당시에 북 이스라엘 안팎에서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죄악을 저질렀던 이유는 자기를 앞세워 힘을 추구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상을 숭배하는 짓이고 마귀의 지배를 받는 짓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라고 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부터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삶으로 솔선수범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부활하는 영원한 삶입니다.
⒏ 하느님을 믿고 섬긴다는 것은 힘이 아니라 뜻을 추구하는 것이며, 뜻을 추구한다는 것은 진리를 향하여 선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최고선을 바탕으로 공동선에 투신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천지창조 이전에 우리를 택하시어 당신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게 하시고, 진리와 선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
210711. 연중 제15주일. 키엣 대주교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모든 것을 버리고 선교에 꼭 필요한 것만 지니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멀리가면 갈수록 짐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데 모든 것을 버리고 가라고 하시니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 꼭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예수님과의 친밀한 유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생활한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 동안 스승님을 이해하고, 스승님과 하나되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스승님과 하나되는 친밀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먼 길을 떠나는 주님의 제자들이 꼭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친밀함을 지니고 떠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하나되는 친밀함이야말로 성공리에 선교를 마칠 수 있는 원천입니다.
선교를 떠날 때는 주님께 의탁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
돈과 물질은 한 순간의 달콤한 안락과 성공을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 성공이 마치 자신의 능력으로 만든 것이라는 착각과 오만, 자만심을 갖게 하여 주님의 뜻보다는 내 뜻이 중요하고, 주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이 나에게 실현되기만을 바랍니다.
그러나 빈곤은 자신의 부족함과 무력함을 깨닫게하여 주님께 의탁해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성공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의지할 때만이 영원하고 변치 않는 성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의탁하는 마음은 선교를 떠나는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을 버리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믿음만 갖고 떠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선교는 혼자가 아니라 연대감속에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두 명씩 짝을 지어 보내셨습니다. 나약한 인간이기에 서로 도와주며 소명을 완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증거하는 말은 한 명보다는 두 명, 두 명보다는 세명의 일치된 말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치된 여러 사람의 증언을 더 신뢰합니다.
선교는 자비로운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여유롭고 풍족한 사람들이 아닌 가난하고 장애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사회에서 소외된 불우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이처럼 나약한 형제들과 함께 살아야 하기에 더욱 주님과 같은 자비로운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선교의 소명을 받은 주님의 제자입니다.
주님께서는 세례와 견진 성사를 통하여 당신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선교의 열매를 거두려면 주님과 함께,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고, 형제자매와 연대감을 이루고, 자비로운 사랑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이 이웃과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이 모든 사람과 불화가 없는 연대를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이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있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우리 모두는 하느님을 증거하는 사도직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주님께 받은 소명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2. 주님이 말씀하신는 선교를 떠날 때 필요한 것들을 나는 얼마나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3. 이웃에게 주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가장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
210711. 연중 제15주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은 우리 학생들에게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 이때를 놓치면 공부하고 싶어도 못 해. 대학교에 들어가서 실컷 놀고 지금은 열심히 공부할 때다.”
각종 고민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를 향해 어른들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합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 좋아진단다.”
어떻습니까? 모두 맞는 말입니까?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다 거짓말 같습니다. 공부는 고등학교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하는 것이었고, 어른이 될수록 책임이 커져서 더 힘든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어른이 하는 말에 문제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어쩌면 세상 안에 거짓이 많아서 거짓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닐까요?
시간이 지나면 잘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보다는 분명히 잘 되는 근거 있는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바로 주님이 그 희망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 그 나라에 대한 희망이 지금에 더 충실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이라는 거짓된 희망이 아닌, 주님이라는 진짜 희망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 그런데 특별한 명령을 하십니다.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많은 것을 챙겨줘서 기쁜 소식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시니 이해하기 힘듭니다. 더군다나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제자가 아닙니까? 특히 악이 가득한 세상에 제자들을 보내는 것이 불안하지 않으셨을까요?
세상의 것에 희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만 희망을 둘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의 것에 희망을 두고 세상의 것을 채우다 보면 주님의 자리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빈 마음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빈 마음이 있어야 그 자리에 주님께서 사랑으로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희망을 두고 있을까요? 주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만이 희망 없는 세상 안에서 진짜 희망을 품고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꿈은 머리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손으로 적고 발로 실천하는 것이다(존 고다드).
--------------------
괴물이 되면 안 됩니다.
기원전 4세기에 활약하던 그리스 조각가 프락시텔레스는 어느 날 두 개의 조각상을 만들었습니다. 모두 정교하고 빼어난 작품이었습니다. 이 중 하나를 감추고, 다른 하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공개했습니다.
공개된 작품을 보고 “이곳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라고 사람들이 말하면 그 말대로 고쳤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하나도 흘려버리지 않고 모두 따르면서 조각상을 만들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조각상은 어떠했을까요? 처음에 만든 작품보다 더 뛰어난 작품이 되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하나의 괴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숨겨둔 조각상을 꺼내 보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혼자 만든 것인데 이렇습니다. 그리고 이 괴물은 사람들의 말을 모두 듣고 만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모두 달라서, 제가 모든 사람에게 아름답게 칭찬받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겠다고 고치다간 이렇게 괴물이 될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이 때로는 필요하겠지만, 전적으로 따르다 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괴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말씀만을 온전히 따르면서 자기 고유의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
210711. 연중 제15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마천과 우장춘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사마천은 중국의 사관입니다. 사마천은 ‘기전체(紀傳體)’라는 양식의 기록을 남겼고, 후대의 사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기전체는 인물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사마천의 기록을 통해서 중국 고대의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진시황제의 이야기, 황우와 유방의 이야기를 사마천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삼국유사, 고려사는 사마천의 기전체 양식을 따른 우리의 역사서입니다. 사마천이 역사에 남을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사형을 모면하는 대신 남성으로서의 기능을 포기하는 궁형을 감수했기 때문입니다.
우장춘 박사는 세계적인 육종 학자였습니다. 일본에서 공부하였고, 일본인 아내와 자녀를 낳아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1950년 대한민국은 가난하였습니다. 농사를 지을 씨앗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모든 씨앗을 일본을 통해서 얻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국의 농림부 장관은 우장춘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한국에 와서 일할 수 있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우장춘 박사는 195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대한민국의 농업발전을 위해서 헌신하였습니다. 제주도에서는 감귤을 재배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강원도에서는 씨감자를 재배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배추를 재배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우장춘 박사가 한국의 농업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에서의 풍족한 삶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포기’의 또 다른 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마천이 명예로운 죽음을 포기하고 궁형이라는 수치스러운 삶을 선택한 것은 후대에 남을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장춘 박사가 일본에서의 풍족한 삶을 포기하고 신생 대한민국에서 고된 삶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 나라에 대한 헌신이라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2018년 교구청에서 성소국장으로 5년을 지내고 떠났습니다. 특수사목을 5년 동안 했었기 때문에 본당사목을 원하면 주교님께서는 본당사제로 보내 주셨을 것입니다. 저는 주교님께 본당으로는 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의 청을 받아 주셨고,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로 갈 수 있는지 제안하셨습니다. 저는 주교님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2019년 8월 21일 미국으로 왔습니다. 어느덧 2년이 되었습니다. 사마천이나 우장춘 박사처럼 특별한 사명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의 포기를 후회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사명감’을 이야기합니다. 사명감은 목적지와 같습니다. 목적지를 아는 사람은 비록 힘들어도, 고난이 닥쳐도 한걸음, 한걸음 발길을 내딛습니다. 1시간만 더 걸으면 시원한 오아시스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참을 수 있습니다. 곧 더위와 갈증을 피할 수 있는 물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모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아모스는 그저 가축을 키우는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아모스는 가축을 키우는 목자의 삶을 포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빵도, 전대의 돈도 포기하라고 하셨습니다. 신발은 신지만 옷도 두벌은 입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여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성공, 명예,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의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박해와 고난이 있었고, 목숨을 바쳤지만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포기한 것이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포기도, 선택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
210711. 연중 제15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유럽의 수호자 사부 성 베네딕도 아빠스(480-547) 대축일
참된 구도자(求道者)의 삶
- 찾아라, 사랑하라, 섬겨라 -
“아브라함아!”(창세22,1)
바로 이 성구는 오늘 종신 서원을 하는 아브라함 수사 상본의 성구입니다. 오늘은 유럽의 수호자 사부 성베네딕도 아빠스 축일이자 우리 성 베네딕도회 남양주 요셉 수도원의 정영훈 아브라함 수사의 종신서원식날이고 제 사제서품 32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정영훈 아브라함 수사님!
종신서원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변함없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완전한 신뢰를 드리며, “예”로 응답드리기 위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을 봉헌하러가는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길을 나서는 수사님의 지향과 신뢰에 주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기원해드립니다.”
아마 종신서원식을 앞두고 이렇게 축하메시지 많이 받은 수도자도 드물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 수사만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를 부르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우리의 성소를 새롭게 확인하는 절호의 날이기도 합니다. ‘과연 어떻게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나?’,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가 항상, 날마다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이런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참 좋은 모범이 바로 오늘 기념하는 성 베네딕도 아빠스입니다.
성 베네딕도 아빠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의 멘토가 되는 전인적, 온전한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베네딕도란 이름 뜻 대로 참으로 복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브라함- 요셉- 베네딕도, 일련의 믿음의 족보를 대하는 느낌입니다. 오늘 복음 선포에 앞선 부속가도 성인의 면모를 감동깊게, 인상적으로 보여줍니다.
-“새빛 선물 가져오는 위대하온 지도자를 기념하는 대축일
성총받은 그 영혼이 노래하는 찬미가는 마음 속에 울리네
동쪽 길로 가는 아름다운 성조 용모 감탄 울려 퍼지네
태양같은 생명으로 많은 후손 얻은 그는 아브라함과 같도다
작은 굴에 있는 그를 까마귀의 복사로써 엘리야로 알리네
강물에서 도끼 건진 성 분도를 엘리사 예언자로 알도다
무죄 덕행 요셉같고 장래일도 알아내니 야곱처럼 알도다
그의 생각 지극하여 예수님의 영복소에 우리 인도하소서.”-
‘스승이 없다’, ‘멘토가 없다’ 탄식할 것은 없습니다. 기념, 기억하라고만 있는 성인 축일이 아니라 우리 각자 성인을 보고 배워 살라고 있는 축일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 주님을, 또 이런 성인을 멘토로 삼아 성령의 인도따라 살면 충분합니다.
지난 7월8일 식당 독서시 들은 베네딕도 규칙서 내용이 새로운 감동이었습니다. 수도원 살림살이를 맡은 재무인 당가의 사람됨됨이에 대한 규정이지만 성인의 인품과 성인이 바라시는 이상적인 수도자상이 환히 드러나는 내용입니다.
“수도원의 당가로 선정될 사람은 공동체에서 지혜롭고, 성품이 완숙하고, 절제있고, 많이 먹지 않고, 자만하지 않고, 부산떨지 않으며, 욕을 하지 않고, 느리지 않으며, 낭비벽이 없고, 오히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전체 공동체를 위하여 아버지처럼 해야 한다.
그는 모든 일들을 돌볼 것이나 아빠스의 명령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명령받은 바를 지킬 것이며, 형제들을 슬프게 하지 말 것이다. 만일 어떤 형제가 무엇을 부당하게 청하더라도, 무시함으로써 그를 슬프게 하지 말고, 부당하게 청하는 사람에게 겸손되이 이치에 맞게 거절할 것이다.
당가는 ‘잘 관리하는 이는 좋은 자리를 얻는다’하신 사도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여 자기 영혼을 보살필 것이다. 온갖 염려를 다하여 병자들과 어린이들과 손님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 줄 것이니,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심판의 날에 헴바치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수도원의 모든 그릇과 전 재산을 제단의 축성된 그릇처럼 여겨 아무것도 소홀히 다루지 말 것이다. 인색하지도 말고 수도원의 재산을 낭비하거나 허비하지고 말 것이며, 모든 것을 절도있게 그리고 아빠스의 명령에 따라 할 것이다.“(성규31,1-12)
주옥같은 내용중 일부만 인용했습니다. 구구절절 명료하고 완벽합니다. 그대로 성인의 전인적 면모를 보는 듯 합니다. 비단 수도원 당가뿐 아니라 참되 구도자의 삶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는 가르침입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라 했습니다. 진짜 영적인 사람은 이처럼 일상의 평범한 삶에 지극히 충실한 사람입니다. 뜬 구름 잡는 영성이 아니라, 하늘 높이 뻗을수록 땅속 깊이 뿌리내리는 나무의 이치와 똑같은 영성입니다. 하여 ‘기도하고 일하라’는 성 베네딕도회의 모토입니다. 어떻게 참된 구도자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입니다.
첫째, “찾아라!”
찾아서 진짜 사람입니다. 찾는 인간, 바로 인간의 정의입니다. 진정 살아있음의 표지가 찾음입니다. 죽은 사람은 찾지 않습니다. 참으로 살아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찾고 묻습니다. 무엇을 찾느냐에 따라 형성되는 삶의 꼴입니다. 무엇을 찾습니까? 돈을, 명예를, 좋은 사람을, 자리를, 일을, 놀이를, 음식을. 찾습니까? 부귀영화를 찾습니까?
아닙니다. 찾음에 있어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지혜를, 진리를 찾는 것입니다. 궁극의 지혜이신 하느님의 지혜이신, 진리이신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는 감추어진 보물인 지혜를 찾으라는 간곡한 당부입니다. 참으로 간절히, 한결같이 찾을 때 찾습니다. 발견합니다. 만납니다. 찾지 않으면 절대 찾지도 발견하지도 만나지도 못합니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내 말을 받아들이고 내 계명을 네 안에 간직한다면, 지혜에 제 귀를 기울이고 슬기에 네 마음을 모은다면, 네가 예지를 부르고 슬기를 향해 네 마음을 모은다면, 네가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고 보물을 찾듯 그것을 찾는다면, 그때에 너는 주님 경외함을 깨닫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찾아 얻으리라.
주님께서는 지혜를 주시고 그분 입에서는 슬기가 나온다. 그분께서는 올곧은 이들에게 주실 도움을 간직하고 계시며, 결백하게 걸어가는 이들에게 방패가 되어 주신다.”
참으로 지혜를,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찾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축복의 선물입니다. 아니 이미 끊임없이 찾는 ‘순수한 마음’ 자체가 축복이자 구원이요 진짜 구도자의 삶입니다.
둘째, “사랑하라!”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평생 사랑의 학교 인생에서 사랑 공부중인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졸업이 없는 평생 사랑을 배워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참으로 사랑을 배워가며 하느님을 닮아가며 참된 구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2독서 콜로새서에서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말씀도 사랑하라는 한 마디 말로 요약됩니다. 구체적 사랑 항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참으로 참된 구도자가 되어 하느님을, 형제들을 항구히, 한결같이 지칠줄 모르는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할 때, 이처럼 우리의 사랑 나무들에 주렁주렁 달리는 풍성한 사랑 축복의 열매들입니다.
셋째, “섬겨라!”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파스카 신비의 영성뿐이요 파스카 신비의 영성은 바로 섬김의 영성입니다. 수도원은 주님을, 형제들을 섬기는 배움터입니다. 섬김의 겸손, 섬김의 사랑,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등 끝이 없습니다. 섬김의 삶은 영성생활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 친히 평생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최후만찬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장면은 바로 섬김과 겸손의 사랑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섬김의 여정중에 온통 자신을 비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분발케 하는, 또 한없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예수님의 모범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 모두 지배하고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겸손히 섬기는 어린이 같은 사람이 되라 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섬기는 분으로 늘 현존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섬김의 한복판에서 만나는 주님입니다. 우리가 날로 예수님 사랑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은 그대로 비움의 여정이자 섬김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찾음과 사랑과 섬김의 여정중에 참된 구도자의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종신서원 예식중 ‘수쉬페’와 영광송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대로 저를 받으소서, 그러면 저는 살겠나이다. 주님은 저의 희망을 어긋나게 하지 마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210711. 연중 제15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주일 미사의 말씀은 부르심과 파견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6,7)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어 파견하십니다. 부르심과 파견은 온전히 예수님의 권한입니다. 누군가를 어떤 이유로, 또 어떤 목적으로 부르시고 파견하시는지는 오직 주님만 아십니다. 부르심을 받아 파견된 이는 진지한 기도와 성찰을 통해 그 이유와 목적을 더듬어 찾아나갈 뿐입니다. 그 과정이 곧 자신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알아나가는 여정이 될 겁니다.
제1독서는 아모스 예언자의 소명을 다룹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아모 7,14-15)
자신을 못마땅해하고 경계하는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의 위협에 아모스 예언자가 꾸밈없이 답합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입니다. 남 유다 출신 목자요 농부인 아모스가 스스로 어떤 의도를 품고 북 왕국까지 가서 주님의 말씀을 전한 게 아니지요, 그는 그저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했을 따름입니다. 아모스는 주님의 깊은 뜻을 다 알지 못해도 순명함으로써 소명을 완수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선택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에페 1,4)
한 사람의 부르심과 파견은 이미 태초부터 시작된 여정입니다. 세상은 사람을 뽑을 때 배경이나 전문성, 기술이나 신분을 따지지만 주님은 가능성을 보십니다. 그 가능성은 당신께서 태초에 그를 창조하실 때 그에게 심어주신 것입니다.
한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 저마다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정을 거쳐 다시 주님께 돌아가는 순간까지 이 부르심은 차츰 선명해지고, 이윽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완성의 상태를 향해 갑니다. 이 완성은 자기 혼자서 끌어갈 수 없고, 가족과 이웃, 공동체가 함께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함께 파견하십니다. 짝을 지워 주십니다. 때로는 왜 그러는지도 모르면서 직관과 영감에 의해 끌어주고 협력하며 함께 주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겁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12-13)
파견된 이는 파견하신 분의 일을 합니다. 예수님에게서 파견을 받은 제자가 어부였건 세리였건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게 됩니다. 그들의 말과 손을 통해 일어나는 기적만이 기적이 아니라, 그들의 변화부터가 기적인 셈입니다. 회개를 선포하고 구마와 치유를 베푸는 일은 예수님의 일이 동시에 예수님을 파견하신 아버지의 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해 주소서."(복음 환호송)
이 말씀이 바로 무지한 우리가 일생동안 바쳐야 할 기도입니다. 우리는 주님에게서 저마다 고유한 부르심을 받아 파견되었지요. 꼭 수도자와 성직자, 선교사가 아니어도 우리는 가정과 공동체, 사회와 국가 그리고 이 세상에 파견된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당장은 내가 왜 이곳으로, 이들과 이 환경 가운데로 불리우고 파견되었는지 주님의 뜻을 명확하게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저 모든 게 모호하고 희미한 가운데 인내하며 나아가야 하는 시간이 꽤 길어질 수도 있고요. 때로는 지금의 모습이 잘못된 만남과 어리석은 선택의 결과처럼 느껴져 후회되고 슬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태초에 우리를 선택하셔서 당신의 꿈과 바람을 우리 존재 안에 심어 주신 주님의 계획을 믿고, 주님의 그런 기대가 차츰차츰 내 존재 안에서 완성되어 가리라고 희망해야 합니다. 당장의 결실과 성취가 없을지라도 우리 모두는 불리우고 파견된 자리에서 미소하나마 주님의 일을 하는 중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각자 파견된 자리에서 주님의 일, 곧 사랑을 이루어가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
210711. 연중 제15주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6,7)
'사도들의 삶!'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하는 파견사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세상 안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러면서 떠날 때에는 지팡이와 신발과 옷 한 벌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세상 안으로 파견 되어진 사도들의 삶은 안주하는 삶이 아니라, '떠나는 삶'입니다. 예수님처럼 늘 새로운 복음화의 땅을 향해 '떠나가야 하는 삶'입니다.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나그네와 순례자의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진 것이 많아서는 안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진 것이 많고, 소유하고 있는 것, 집착하고 있는 것이 많으면 쉽게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죽을 때도 쉽게 죽지를 못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나의 존재가 '선택된 존재', '뽑힌 존재'이며, '파견된 존재'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아마츠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 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아모스7,14-15)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교회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에페1,4-5)
그러니 '우리는 참으로 위대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먼저 이에 대한 분명한 신원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하느님의 은총을 사회속으로 전하는 '또 하나의 사도들'이 됩시다!
----------------------------------------------------
210711. 연중 제15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수도자로서 오랜 초기 양성기간을 마무리한 형제들, 이제 곧 사제품을 받고 본격적인 사목 일선에 투입될 형제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길이기에, 다양한 어려움이 곳곳에 산재한 십자가 길이기에, 선배로서 이런 저런 충고를 하다 보니 말이 자꾸만 길어지더군요.
“잘 아시는 바처럼 사제품은 끝이 아니라 출발입니다. 여러분은 신입사원도 아니고 수습사원인 셈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궂은일을 하는데 주저하지 말길 바랍니다.
만나게 될 신자들과 청소년들, 함께 일하는 직원들 앞에서 한결같은 겸손의 자세를 유지해 주십시오.
‘내가 신부인데! 내가 원장인데!’하는 말은 절대 금지입니다.
무엇보다도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한평생 가난한 사제로 살아주십시오.
소임이동 때는 여행용 가방 두개면 충분합니다.
양손에 가방 두개 달랑 들고 고속버스 타고 이동해주시면 그 자체만으로 사제로서 성공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목 실습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저처럼 훈시 한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 용 짐을 이런 식으로 꾸리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를 ‘여장규범’이라고도 합니다. 여러 말씀 가운데 유독 다음의 말씀이 가슴이 꽂힙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갖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을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코 복음 6장 8~9절)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에게 럭셔리한 부자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떠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이 자신의 힘이나 세상의 힘을 믿기 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 유사한 말씀이 ‘열두 사도의 가르침’ 11장 6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 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예수님의 미니멀리즘과 관련된 당부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사목자들이 좀 더 헌신하지 못하는 이유, 신앙의 본질과 핵심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 비본질적이고 지엽적인 것들에 몰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제 개인적 생각인데, 아무래도 우리가 행하는 제반 사목에 대한 지속적인 회개의 결핍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사목자로 서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반성이 요구됩니다.
거듭되는 사목적 회개가 필요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은혜로운 사목적 회개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수도회 입회 전, 중고등부 교리교사를 할 때였습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부족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일종의 천국 체험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을 위해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다른 것들은 별로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자연스레 교리교사로서의 사명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수도회 입회 후에도 비슷한 체험이 계속되었습니다. 상처 입은 아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틈만 나면 티격태격했지만, 그 와중에 아이들로부터 혈육 이상의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을 맛본 이후 사목자로서의 대대적인 회개가 이루어졌습니다.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니 그걸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습니다.
힘들지만 아이들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최고의 행복이었습니다. 돈이며, 좋은 차며, 메이커 옷도 다 필요 없었습니다.
어디 외출 나가도 머릿속은 늘 아이들 생각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아이들의 행복, 아이들의 구원만이 유일한 관심사였습니다.
자연스레 나 자신을 위한 투자는 줄어들었습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청빈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왜 우리가 부차적인 것들, 외적인 것들, 스쳐지나가는 것들에 그리도 관심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일까요?
진정한 사목적 회개가 이루어지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사목 대상자들, 양떼들로부터 진한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그들이 나를 너무 사랑하고 존경해서 틈만 나면 나를 찾고, 내 소매를 붙들고 늘어진다면, 그 사랑 체험을 한 이후 어찌 그들에게 헌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210711. 연중 제15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가 지닌 말씀의 칼날을 날카롭게 유지 하려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왜일까요? 혼자 다니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 충실할 수 있을 텐데 둘이 다니면 계속 상대를 신경 써야 하는데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근본이 먼저 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사랑실천에 있음을 보여야 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본당 신부와 보좌 신부, 본당 신부와 수녀님들, 혹은 수녀님들 간에 화목하지 못한 상황이라면 그분들이 어떤 복음을 신자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요?
먼저 복음을 전하는 이들 안에서 사랑이 실천되어 화목하고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 내용보다는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주님이 계심을 믿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 실천해야 하는 것이 ‘가난’입니다.
예수님은 빵과 돈과 여벌 옷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먹고 자고 입을 것에 신경을 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충분히 있어야 신경을 쓰지 않게 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가질수록 더 신경 쓰게 되어있습니다. 그냥 주님의 섭리에 맡기면 됩니다.
저도 돈이 필요할 때면 사람들이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돈을 줄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 분별하게 됩니다.
욕심이 생기면 사람의 영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익을 챙길 도구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큰 장애가 됩니다.
만약 어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지나치게 막 대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시어머니는 자신처럼 부잣집에 자기 아들처럼 대단한 사람에게 며느리가 합당하지 않다고 여겨서입니다.
이렇게 돈을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이 공동체에 있다면 그것 때문에 공동체가 갈라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오는 사람도 그러한 시선으로 보기에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만약 복음을 전하는 이가 이런 시어머니와 같이 되면 아무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중국 고대 전국시대 문혜왕(文惠王)을 위하여 당시 최고의 백정인 포정(庖丁)이란 사람이 소를 잡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의 손이 닿는 곳이나 어깨를 기대는 곳이나 발로 밟는 곳이나 무릎으로 누르는 곳은 푸덕푸덕 살과 뼈가 떨어졌습니다.
칼이 지나갈 때마다 설겅설겅 소리가 나는데 모두가 음률에 들어맞았습니다.
그의 동작은 상림(桑林:탕 임금이 만든 춤)의 춤과 같았으며,
그 절도는 경수(經首:요임금이 만든 음악)의 절주(節奏:가락이 반복될 때의 그 규칙적인 음의 흐름)에 들어맞았습니다.
문혜왕이 보고 말하였습니다.
“아아, 훌륭하도다. 재주가 이런 지경에 이를 수가 있을까?”
백정이 칼을 놓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道)로서 재주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처음 제가 소를 잡았을 적에는 보이는 것 모두가 소였습니다.
그러나 3년 뒤에는 완전한 소가 보이는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의 작용은 멈춰 버리고 정신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천연(天然:사람이 힘을 가하지 않은 상태)의 조리를 따라서 큰 틈을 쪼개고 큰 구멍을 따라 칼을 찌릅니다.
소의 본래 구조에 따라 칼을 쓰므로 힘줄이나 질긴 근육에 부닥뜨리는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에야 부딪치겠습니까?
훌륭한 백정은 일 년마다 칼을 바꾸는데 살을 자르기 때문입니다.
보통 백정들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의 칼은 19년이 되었으며, 그사이 잡은 소는 수천 마리나 됩니다.
그러나 칼날은 숫돌에 새로 갈아 내온 것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엔 틈이 있는데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곳에 넣기 때문에 휑하니 칼날을 움직이는데 언제나 반드시 여유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19년이 지나도 칼날은 새로 숫돌에 갈아 내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뼈와 살이 엉긴 곳을 만날 때마다 저도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조심조심 경계하면서 눈은 그곳을 주목하고 동작을 늦추며 칼을 매우 미세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면 뼈와 살이 후드득 떨어져 흙이 땅 위에 쏟아지듯 쌓입니다.
그러면 칼을 들고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기분에 잠깁니다.
그러고는 칼을 닦아 잘 지킵니다.”
문혜왕이 말하였습니다.
“훌륭하도다. 나는 백정의 말을 듣고서 삶을 기르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이 이야기는 『장자』의 '양생주(養生主)'편에 나오는데 포정이 소를 잡는다는 뜻으로 ‘포정해우’(庖丁解牛)라 합니다.
장자가 말하는 ‘도’(道)’란 우리가 말하는 ‘진리’와 같습니다.
진리를 터득한 포정은 다른 백정들과는 달리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정신으로 봅니다.
진리를 터득한 사람은 소를 돈으로 보지 않고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분해한다는 뜻입니다.
무아의 경지에서만 소의 본질을 보고 그것을 분해하는 데에서 춤추듯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도 병자가 잘 낫지 않고 악령을 쫓아내려고 해도 잘 안 됩니다.
어쩌면 우리 진리의 칼이 무뎌졌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선 내가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이들과의 관계가 좋은지 살펴야 합니다.
좋은 공동체를 형성하며 서로 사랑한다면, 그다음은 ‘가난’에 집중해야 합니다.
내가 세상 것을 바라고 있다면 그 사람의 시선이 소에게 빼앗겨 힘줄을 건드리고 뼈를 건드려 칼날이 무뎌집니다.
우리도 포정이 소를 육신의 눈이 아닌 정신으로 대하되 이치에 따라 조금도 억지가 없이 춤추듯 칼을 놀리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 대해 스스로 욕구를 버리고 대상에 대한 의식이 없이 자연의 섭리를 따라 행동한다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욕구에 사로잡히면 자연의 이치를 보는 눈을 잃어 성령의 칼날도 무뎌지고 그러면 복음을 전할 힘을 잃습니다.
백정이 무딘 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말씀의 칼날이 무뎌지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공동체가 사랑의 가족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우리 자신부터 세속의 욕망을 없애 공동체와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무언가 세속적인 것을 바라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210711. 연중 제15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계획으로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에페 1,4)하셨으며, 이 구원은 복음선포를 통하여 실현된다(마르 6,7-13 참조). 오늘의 주제는 복음선포이다. 오늘 우리의 활동들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하고 계시다. 하느님께서는 목자이면서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인 아모스를 선택하셨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여야 한다. 예언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선포해야 한다. 이래서 예언자들은 거부를 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언제 어디에서나 부정과 불의와 부패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우는 자유로운 예언자의 전형이다. 십자가의 죽음이란 바로 나자렛의 목수(마르 6,3)인 예수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고(마르 1,14 참조) 세상이 심판받을 때가 되었다(요한 12,31 참조)는 사실을 선포한 충실성과 진실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다.
복음: 마르 6,7-13: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셨다.
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구원계획을 첫 번째로 실행하시는데 아모스의 경우와 같은 모습이다. 그들의 사명 역시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도적 사명이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사도들의 파견은 인간적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존하라는 것이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8-9절). 즉 이 말은 그 규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한 “열정”이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리라는 무한한 신뢰를 하라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이제는 사람에 대해 신뢰도 해야 한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협조자가 된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10절). 그러나 때로는 거절당할 수도 있다.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11절). 그것을 각오해야 한다.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것은, 복음이 선포되어 실현되고 있는 약속의 새로운 땅에 가까이 갔느냐 못 갔느냐를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의 파견을 받은 제자들은 자신들의 전교활동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하신 복음선포와 구원의 활동을 계속한다(12-13절 참조). 이렇게 교회는 세상에 주님을 증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반영시키고 그분의 모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성과는 어느 정도 우리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현대의 복음선교 76). 그것은 이런 의미이다. 우리의 복음선포가 아모스의 경우나 그리스도의 예언적 선포와 같이 권력이나 힘 앞에 항상 자유로운가?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들든 안 들든 하느님의 진리를 선포할 용기를 항상 가지고 있는가?(로마 1,14참조).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가 아니면 우리의 능력을 믿는가? 극단적일 때 발바닥의 먼지를 떨어버릴 각오가 되어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영원한 구원계획이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에페 1,10)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될 것이다’라는 말은, 전에 파괴되었던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다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창조의 근본적 의미가 다시 드러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 구원계획은 우리들의 협력, 특히 교회가 실현하여야 하며, 이를 이루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서 비록 고달프게 느껴져도 우리가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신 그 사명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세상에 주님을 증거하고 우리 자신이 그분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아모스와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진리를 용감하게 선포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 갈 것이다. 주님께 파견받은 제자들과 같이 힘차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청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210711. 연중 제15주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마르 6, 12)
제자들은
주님께서
바라시는대로
길을 떠난다.
길을 떠나면서
더더욱
깨닫게되는
하늘 나라의
신비로운
여정이다.
사랑은 회개를
동반한다.
회개의 삶이란
소유하지 않고
나누는
하늘나라의
삶이다.
하늘 나라의
삶은 빛처럼
감출 수 없다.
우리의 삶이란
신비로운
만남의
연속이다.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총이다.
떠나고
돌아오는
모든 여정이
은총이다.
떠나는 여정은
믿음의 여정이다.
믿음은
소유하지
않는 가난한
여정이다.
가난하기에
깨어있을 수 있고
맡길 수 있다.
가난한 마음이
믿음이다.
우리가 가지고
떠나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니라
믿음이다.
물질은 우리를
얽매이게 하지만
믿음은 우리를
자유롭게한다.
믿음은
구체적인
하늘 나라의
나눔이다.
떠남도
회개도
선포도
나눔이다.
은총은
나눔으로
빛을 발한다.
제자들은
사람들 안에
계시는 주님,
그 빛을
기쁘게
뵙게된다.
믿음은
거룩한
만남의
여정이다.
거룩한 은총의
주일에 기도를
나눈다.
믿음의 향기와
맛은 간절한
마음에 있다.
활짝 피어나는
믿음의 꽃이길
기도드린다.
----------------------------------------------------
210711. 연중 제15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7-13).”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 28,20).
이 약속은 승천 후에도 항상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이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승천 전에도 항상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때가
가끔 있었지만, 그런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언제나 항상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에도 제자들만 보내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함께 가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파견된 제자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에,
결코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수호천사’를 보내 주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은
선교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의 상황에도 해당됩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탈출 23,20).”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시편 91,11).”
우리는 수호천사의 존재를 믿고 있고,
수호천사가 언제나 항상 우리를 지켜 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또는 수호천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제자들은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힘에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에 세속의 물질에 의지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는 것이고,
예수님의 보호를, 또는 수호천사의 보호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는 사람은 복음을 선포할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당신만 믿고 의지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러 가는 사람은 ‘복음만’ 가지고 가면 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님만 믿으면 됩니다.
(이 말은 신앙생활 전반에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여행인데,
이 여행은 예수님과 함께 가는 여행이고, 예수님만 믿으면서 가는 여행입니다.)
“그래도 최소한의 생활비와 활동비는 필요하지 않은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믿음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들을 언제나 어디서나 믿어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마태 6,31-32).”
(이 말씀에서 ‘다른 민족들’이라는 말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생활비와 활동비를 걱정하는 것은 믿음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선포하러 떠나는 제자들이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빈손’으로 가는 것은, ‘능동적인 버림’입니다.
가져갈 것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호만’ 선택하고, 다른 것은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능동적인 버림’은 곧 ‘능동적인 응답’입니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1).”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일은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그리고 자신들이 원해서 능동적으로 한 일입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린 것은,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러 가는 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전히 복음 선포에만 집중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모두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그렇게 사는 것은 당연하고 옳은 일이지만,
세속 생활과 신앙생활을 병행해야 하는 일반 신자들은 ‘빈손’으로 살 수 없다.
‘빈손으로 떠나라.’ 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일반 신자들에게까지
확대 적용하면 안 된다.” 라고 말할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신앙인이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전부 다 수도자가 될 수는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각 개인에게 주어진 ‘부르심’이 다르고, ‘탈렌트’가 다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면 안 된다.”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마태 6,24) 모든 신앙인이 지켜야 하는 계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혼자서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만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하느님은 우리 목숨의 주인이십니다.
목숨도 나의 것이 아니니, 재물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
210711. 연중 제15주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여행을 떠나려고 짐을 싸다 보면 가방이 언제나 작게 느껴집니다. 필요한 물건을 하나씩 챙기다 보면, 어느새 빈 공간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제는 여행에 무엇을 가지고 갈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놓고 가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여행 가방 앞에 우두커니 서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따져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여행을 떠나십니다. 여행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이 여정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 여행은 ‘머물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떠나기 위한 여정’입니다. 그래서 가벼워야 합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머무는 동안 더 가지려고 집중합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그들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채우려고 집착합니다. 짐이 가벼우면 쉽게 떠날 수 있습니다. 나의 울타리, 습관, 행동 방식, 소유와 집착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쌓여 무거워지고 챙겨야 할 것이 많아지면 떠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짐 꾸러미를 가볍게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지금 예수님과 함께 떠나야 합니다. 자신을 묶어 두었던 것으로부터, 자기가 선택하고 결단하였다고 생각한 것들로부터, 그러한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세상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그대로 지니고 간다면, 또 다른 집착에 허덕이며 살게 될 것입니다.
짐을 가볍게 하고 예수님과 함께 떠나는 길은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 그 중심으로 향하는 여정입니다. 그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머무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를 발견합니다. 버리고 떠나 봅시다. 그러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210711. 연중 제15주일.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아모 7,12-15)는 하느님의 뜻에 승복할 수밖에 없는 예언자의 사명을 말해줍니다.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하브암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자 솔로몬의 신하였던 예로보암은 이스라엘의 북쪽을 휘어잡고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1열왕 11-12장). 예로보암이 북쪽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추대되면서(기원전 933년) 베텔과 단에 제단을 세우고 하느님이 아니라 금송아지에게 제물을 바치고 분향하면서 섬기라고 강요했습니다(1열왕 12-14). 그러자 아모스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북쪽 이스라엘의 베텔로 가서 이스라엘의 성소들과 예로보암 임금 집안의 파괴를 예언했습니다(7,9). 이뿐 아니라 예로보암은 칼에 맞아 죽고 이스라엘은 제 고향을 떠나 바빌론에 유배를 될 것을 아모스는 예언했습니다(4,3; 5,5.27; 6,7; 7,11). 한때는 베텔(하느님의 집)의 사제였지만 예로보암의 하수인이 된 아마츠야가 아모스를 ‘무엇을 조금 볼 줄 아는 자’(“선견자”)라면서 북쪽에서 예언하지 말고 고향(유다)으로 돌아가라고 쫓아냅니다. 아모스는 남쪽 유다지방(드고아)에서 돌무화과를 가꾸고, 양들을 치던 목동이었습니다. 아모스는 예언자로서의 교육도 받지 못했고, 예언자라는 칭호도 거부했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예언자로서의 대우를 제대로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를 붙드시어 북쪽 이스라엘의 멸망과 유배를 선포하라고(7,16-17) 보내셨습니다. 아모스의 예언은 사실로 드러납니다. 예로보암은 남쪽 유다의 임금 아비야에 의해 죽고(기원전 911년: 2열왕 13,1-23), 약 200년 뒤에 북쪽 이스라엘은 바빌론에 짓밟힙니다(기원전 722년: 2열왕 17장).
복음(마르 6,7-13)은 하느님 나라 선포를 위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고향에서 무시당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즉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본래의 목적은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3,14-15) 그래서 복음에 대한 증인으로서의 가치와 효력을 지니도록(신명 19,15) 하는 것은 물론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둘씩 짝지어 파견하면서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비록 제자들이 다는 알아듣지 못했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쳐주셨으며(4,10-12), 그들이 선포해야 할 “하느님의 복음”(1,14)에 대하여 여러 차례 설명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갈릴래아 지역에 복음을 선포하라고 파견하시지만, 머지않아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것을 위해(13,10) 미리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교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지팡이나 신발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 것을 권고하십니다. 지팡이와 신발은 야생동물이나 다른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어서 여행자에게는 필수 소지품이었습니다(탈출 12,11). 그러나 오직 당신께만 의지하도록 다른 것들을 일체 지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빵과 돈, 여행가방과 지갑조차 가져가지 말라는 것은 유다인들의 관습에 따라서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불린 사람들은 정당한 수고의 대가로서 최소한의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가난한 모습으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뜻입니다. 한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한 곳에 머무르라는 것은 제자들을 받아들인 집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인 집이므로(사도 16,15)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공동체를 설립하고,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환대를 받으려고 이집 저집 옮겨 다닌다면 겪어보지 않았으면서도 인간적인 약점을 왜곡시켜 널리 퍼뜨릴 수도 있기 때문에, 그리고 없는 말을 만들어서 퍼뜨릴 수 있기 때문에 복음 선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자신의 부족함을 신앙으로 감싸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의존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하느님 나라와 회개를 선포하는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이 선포하는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 증거로서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쫓겨났던 상황을 암시합니다.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린다는 것은 친교를 단절한다는 것으로서(이사 52,2) 유다인들이 이방인들의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그곳을 떠날 때에 반드시 했던 행동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태도에 대해 심판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한다는 것은 구원의 힘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호하게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예수님처럼 회개를 외치고(1,14-15), 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부어 고쳐주고, 마귀들을 쫓아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회개한 이들의 공동체를 만들었고, 기름을 부어(이사 1,6; 루카 10,34) 많은 이들을 치유해주었습니다.
제2독서(에페 3,3-14)는 에페소 공동체에서 세례를 주기 전에 바치던 찬미가입니다.
성부께 드리는 찬미로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셔서(4절),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기(5절) 때문에 우리에게 온갖 영적 축복을 내리셨습니다(3절). 당신의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사랑과 은총을 넘치도록 베푸셨고(6절; 8절),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구원의 신비를 알려주시면서(9절), 예수님과 함께 다른 민족들과 공동 상속자가 되도록 미리 정해주셨습니다(11절; 3,6). 다음으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구원의 계획이 실현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3절; 4절; 7절; 11절; 13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5절),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6절),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7절) 그리스도 안에서(10절)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끝으로, 아버지와 아드님께서 나누시는 생생한 사랑인 성령을 말하는데, 이 찬미가의 결정적인 구절로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이며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기 때문에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다고(13절)합니다.
삼위일체의 하느님께서는 세례를 받을 사람들이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도록(4절) 온갖 영적 축복을 주셨으니(3절) 당신의 자녀가 되도록(5절), 죄를 용서받도록(7절), 지혜와 통찰력을 갖추도록(8절), 그리고 모든 이가 공동 상속자가 되도록(11절)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감춰졌던 하느님의 구원계획이었는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는 감사기도입니다. 온갖 영적 축복을 주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희망을 두었다면 반드시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중요한 의미를 담아놓은 많은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에페소 공동체에 모여든 세례 대상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신자가 되어달라고 축복의 기도를 합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임금(예로보암)과 어용 사제(아마츠야)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이를 배척하지 말라는 것이며,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던 제자들이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인다면 주님께서 베푸시는 자애와 우리의 진실이 서로 만나고, 우리가 이루는 정의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입을 맞출 것입니다(화답송: 시편 85,9-14).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온갖 영적 축복을 전해주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를 불러주셔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하느님을 조금만 안다면, 그리고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조금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당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고,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한 은총을 넘치도록 베풀어주셨음을 조금만 안다면, 복음대로 살려고 애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정당하게 받아야 할 수고의 대가가 있다면 존경도 칭찬도 아니고, 내 사람이 되어 달라고 적극적으로 다가감도 아니고, 단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주는 것과 약점이 있음에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느라고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을 신앙의 눈으로 봐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봉사자들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재물이나 명예, 그리고 인기에 의존하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가 해야만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아예 신앙을 포기하고 싶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봉사하는 이들의 인간적인 약점을 부풀리거나, 한 번의 실수를 상습적인 것으로 확대시키거나, 혹은 겪어보지 않았음에도 단편적인 모습과 행동만 듣고 본 뒤에 그 모습이 마치 그 사람의 전부인양 과장되게 말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
210711. 연중 제15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회개를 선포하셨던 것처럼,
이제는 그 임무를 제자들이 넘겨 받습니다.
물론 회개에 대한 언급은
요한이 먼저 했지만,
요한은 세상에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위해서
회개를 이야기한 것이기에,
회개는
예수님의 주된 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회개를 이야기하는 것도
예수님의 명을 받아 하는 것이기에,
제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전하는 것,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이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전하면서
제자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가혹하시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것들이 생활에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하느님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그런 것들을 챙겨 간다는 것이
매우 귀찮은 일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단 하나,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냈고
병자들을 치유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해낸 일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농력이 없는 사람들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
하느님의 은총을 전해주고,
하느님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것들,
빵이며 잠자리 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서로 주고 받는
사랑의 나눔이 이루어집니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을
굳이 어렵게 들고 다닐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위해
하느님께서 중심에 계셔야 합니다.
하느님을 전해야지
나의 능력을 드러내서는
이런 나눔이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회개는
예수님의 명이며,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임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210711. 연중 제15주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
210711. 연중 제15주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15주일 제1독서(아모7,12~15)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14)
앞선 아모스서 7장 10~13절에 기록된 북부 이스라엘 아마츠야의 아모스 예언 활동에 대한 악의적 호도와 협박과 회유에 이어 아모스서 7장 14절이하 17절에는 아모스의 답변이 나온다.
아모스의 첫번째 답변은 자신이 예언자가 아니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본문에는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하야'(haya)동사가 기록되지 않아, 아모스가 과거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현재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어떤 이는 아모스가 아마츠야에게 자신은 종교적 기득권에만 연연하는 당신과 같은 직업적 종교인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내용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아모스가 이런 당당한 태도를 갖는 것이 예언 행위를 자신의 생계를 위한
수단이나 직업과 관련시키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예언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래서 영역본 중에는 본문의 전반부를 '나는 당신같은 직업적 예언자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다'(I'm not one of your professional prophets)로 번역한 것이 있다.
또한 아모스는 자신이 예언자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첫째, 아모스가 당시 하느님의 계시와 무관하게 혈통을 따라 세습되던 직업적 종교인이 아님을 주장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열왕기 2권 2장 3절, 4장 1절등에 제시된 예언자 학교 생도(제자) 출신이 아니라는 언급으로도 볼 수 있다.
셋째, 어느 특정한 예언자 단체의 회원이 아니라는 의미로 말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아모스가 생계를 위해 일하는 직업적 예언자도 아니고, 훈련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 예언자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런 본문의 아모스의 주장에는 자신을 강조하기 위해서만 사용되는 '나는'에 해당하는 '아노키'(anoki)가 두번이나 사용되었다.
즉 본문은 아모스가 예언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반복하여 강조하여 묘사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자신을 다른 예언자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로 부각시키기 위한 교만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전하는 예언의 신적 기원과 권위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본절 상반절에서 자신은 직업적 예언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예언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온 계시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하반절에서는 자신의 생계를 위한 직업을 소개한다.
즉 자신이 생계를 위해서 예언 활동을 하는 자가 아님을 분명히 하는 의도로 제시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모스는 생계를 위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언을 하는 것이 오히려 그의 생계에 지장을 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을 전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먼저 '목자'에 해당하는 '보케르'(boker)는 구약 성경에서 본문에서만 유일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서 사용된 원어의 표현은 '노케드'(noked)이다.
이는 새끼 양 십만 마리와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조공으로 바친 모압의 왕 메사를 언급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아모스는 흔히 생각하는 가난한 목자라기 보다는 상당한 재력가였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돌무화과나무'에 해당하는 '쉬케밈'(shiqemim)의 원형 '샤캄'(shaqam)은 팔레스티나 저지대에서 자라는 '무화과나무'(sycamore-figs)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가꾸는'에 해당하는 '볼레쓰'(boles)의 원형 '빨라스'(balas)는 '모으다' 혹은 '관리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아모스는 무화과 나무과 같은 식물들을 심고 가꾸어 자라게 했다기보다는 야생으로 자라는 나무에 열린 열매를 따서 파는 일을 했다고 보는 것이 좋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모스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자신을 예언자라고 소개하지 않고, 목자와 농부로 소개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예언자로 부르신 사실을 부인하기 위함이 아니라, 아모스서 7장 15절에 기록된 것처럼 자신이 북부 이스라엘에 전한 모든 예언이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말씀이라는 점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본문은 아모스가 주님의 계시를 받아 예언 활동을 감당하는 자신과 사제직에 대한 소명은 없이 직업적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아마츠야를 구별하기 위한 표현이며, 자신이 북부 이스라엘에서 예언 활동을 하는 것이 다른 무엇도 아닌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연중 제15주일 복음(마르6,7-13)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7)
제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주시어 실제로 파견하여 복음 전파의 현장에서 일하게 하신 마태오 복음 6장 7절부터 13절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갈릴래아 전기 활동이 끝나고 후기 갈릴래아 활동이 시작된다.
즉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배척당하신 이후에 복음 전파와 당신이 선택하신 열두 제자를 복음의 봉사자로 훈련시키기 위해 파견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배척당하심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복음을 전하는 스승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 길인지를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 6장 7-13절에 나오는 제자들에게 권한을 주시어 복음 전파자에게 필요한 교훈을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부르시어'에 해당되는 '프로스칼레이타이'(proskaleitai; he called to him)의 원형 '프로스칼레오마이'(proskaleomai)는 '~을 향하여', 혹은 '~을 위하여'라는 뜻을 갖는 전치사 '프로스'(pros)와 '부르다', '초대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칼레오'(kaleo)의 합성어로서 '~로 초대하다' 혹은 '~을 위하여 부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여기서는 천국 복음의 봉사자로 파견하기 위하여 부르셨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로 번역된 '아포스텔레인'(apostellein; sent out)의 원형 '아포스텔로'(apostello)는 '~로부터'라는 뜻으로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apo)와 '떠나다'는 뜻이 있는 '스텔로'(stello)의 합성어로서 '~로부터 분리되어 보내다'는 문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단어에는 '특별한 사명을 부여하여 파견한다'는 뜻을 지닌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추종자들 가운데 열두 제자를 따로 분리하여 복음 전파의 봉사자로 파견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 단어의 명사형인 '아포스톨로스'(apostolos)가 그리스도의 사도를 의미한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에 해당하는 '뒤오 뒤오'(dyo dyo; two by two; '둘씩 둘씩')로 보내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상호간에 도움을 주는 협력을 강조하는 것이며, 동시에 복음을 듣는 자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한 벙법이기도 하다.
또한 6장 11절에서 등장하는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 대한 증거와 관련해서 증인의 최소 인원을 확보하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유다인에게 있어서 '둘'은 증인의 수였으며, '둘'의 증언을 거부하는 것은 확실한 거부로 여겨질 수 있었던 것이다(민수35,30; 신명17,6; 마태18,16).
이 둘씩 짝지어 파견되는 전통은 초대 교회 선교 여행에서도 계속하여 이어져 갔다(사도15,22).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문맥으로 보아 이 권한(권세)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타락시키는 악령을 내쫓고 거룩함을 회복시키는 권세를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마귀(악령)의 특징을 더럽다고 규정하는데, '더러운'으로 번역된 '아카타르톤'(akatharton; unclean)의 원형 '아카타르토스'(akathartos)는 부정 접두어 '아'(a)와 '정결하게 하다', '속죄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카타이'(kathairo)의 합성어로서 '정결하지 않은', '속죄되지 않은', ' 불순한' 이라는 뜻을 나타내며,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거룩한 신성(神性)과 접할 수 없는, 즉 우상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을 뜻한다(사도10,28; 1코린7,14).
특히 마르코 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쫓아내야 할 '더러운 영들'은 단순히 하느님의 적대자로 존재하는 악령(마귀) 자체만이 아니라, 그러한 악령의 활동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악하고 더러운 모든 영적 현상과 인간 마음의 상태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주시고'에 해당하는 '에디두'(edidou; gave)는 원형 '디도미'(didomi)의 미완료 과거 시제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12제자들 뿐만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그러한 권한(권세)으로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부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것은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일회성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계속해서 요청해야 하며, 또한 계속적으로 부여받아 사용해야 함을 드러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