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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사무엘상 17:12-16
제목: 골리앗과 맞짱 뜰 사람 누구인가?
우리는 인간의 짧은 두뇌로 하나님의 일을 섣불리 판단하거나 제단해 버립니다. 나이가 너무 어려서, 키가 너무 작아서, 뚱뚱해서, 못생겨서, 못 배워서, 무식해서, 가진 것이 없어서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제한해 버립니다. 교회 중직자를 세우는 데도 신앙보다는 돈이 기준이 됩니다. 사회적 신분이 기준이 됩니다. 외모와 배경을 보지 말라고 하는데도 한 사코 보려 합니다. 그리고 다 갖추어져야, 다 준비돼야 하나님이 쓰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사람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 기준에 따르면 왕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왕 삼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기준에 맞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쏙 드는 한 가지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한가지가 두가지가 되고 세 가지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성품이기도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성실함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3절,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아멘.
그렇다고 한다면, 그 성실함이 어떻게 하나님 일에 사용될까요?
첫째로,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이 하나님 일에도 성실합니다(17:12-16).
다윗은 이새의 여덟 명의 아들 중 막내입니다. 첫째 형, 엘리압과 둘째, 아비나답과 셋째 형 삼마는 장성해서 사울을 따라 블레셋과의 싸움에 나갔지만, 다윗은 막내였습니다. 막내라서 싸움에 나가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다윗 위로 형 네 명도 싸움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막내이기 때문이 아니라 20세 이상이 안 된 소년이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장 3절에 따르면, 20세 이상 돼야 싸움에 나가서 국방의 의무를 다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예전처럼 아버지 양 떼를 치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악령이 괴롭힐 때 달려가서 수금을 타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합니다.
15절, 16절 말씀입니다.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15.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의 아버지의 양을 칠 때 16.그 블레셋 사람이 사십일을 조석으로 나와서 몸을 나타내었더라.
이 말씀은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을 꼭 만나야 하는 사람처럼 사무엘서 기자가 알려주고 있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만나야 합니까? 다윗은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풀어 말씀드리면, 이스라엘을 블레셋 족속으로부터 지켜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싸움에도 나갈 수 없는 미성년자입니다. 게다가 싸움에 나가지 못한 미성년 형만 네 명입니다. 짐작하건대 15세의 소년입니다.
나이가 어려서 싸움에 나가지도 못하는 소년인데, 집에서 아버지 양을 치고 있다가 왕이 부르면 수금을 타서 악령을 떠나게 하는 소년이 어떻게 거인 골리앗과 맞짱을 뜰 수 있겠느냐? 는 것입니다. 어떻게 싸워서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해내겠느냐? 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다윗을 왕 삼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뿔에 기름을 채워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온 이스라엘이 다윗을 왕으로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하나님은 그 일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다윗이 아직 골리앗을 만나지 못했고, 그 이름이 골리앗인지도 아직 모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다윗의 성실함을 들어 쓰십니다.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는 야곱의 후손입니다. 경건한 가문의 자손입니다. 이새에게는 미성년자가 곧 싸움에 나가지 않은 다섯 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다윗에게만 자기 양 떼를 먹이고 치는 일을 맡겼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막내 다윗을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그가 성실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양 떼를 맡아서 거짓되게 치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정성을 다해 치는 것을 보고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다윗의 이러한 성실성은 본문 15절에 드러납니다. 다윗은 아버지 양 떼를 치고 있다가 왕이 부르면 달려갔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는 기브아까지 왕복 24킬로미터였습니다. 유다 땅이 산악지대이고 길이 험하므로 10시간이 넘게 걸립니다. 아스팔트 위를 하루 8시간 걸어도 지쳐 버리는데, 다윗은 사울에게 왕래하면서 아버지 양을 쳤던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성실함을 아버지가 인정한 것입니다. 그 성실함 때문에 이새는 다윗을 형들의 진영으로 보냅니다. 그곳은 장차 다윗이 맞짱을 떠야 할 상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이러한 성실함을 보셨습니다. 또한 그 성실함을 들어 쓰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그를 왕 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일에 성실한 다윗을 하나님의 일에 쓰고자 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이 하나님 일에도 성실하다는 것입니다. 성실하다는 말의 다른 뜻은 곡식 따위가 다 자라서 알이 찬 것을 의미합니다. 속이 꽉 찼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실한 사람은 속이 꽉 찬 사람입니다. 게으르고 나태하고 무능력한 사람은 성실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윗이 치는 양은 아버지의 양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수금을 타주는 사람은 자기 가족이 아닙니다. 왕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내 일처럼, 내가 아픈 것처럼, 여긴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사울이 있는 기브아까지 왕복하며 아버지의 양 떼를 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가 양을 치지 않을 때는 양을 지키는 사람에게 맡겨야 합니다. 사울의 악령을 퇴치하기 위해 수금을 타고 오면, 지칠 만도 한데 아버지 양을 돌보았다는 것입니다.
15세 소년이 하기에는 힘들고 지친 일입니다. 요즘 회사에서 내 일처럼 여기며 일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고들 합니다. 대충대충 하거나 설렁설렁 일을 하고 시간만 때우려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가 남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열심히 일하면 회사 좋은 일만, 주인 좋은 일만 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한 만큼, 땀 흘려 번 만큼 내 것이 된다고 여기면, 밤낮없이 일할 것입니다. 노는 것이 아깝고 시간이 아까울 것입니다. 내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이런 사람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 일에 성실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그 성실함을 들어서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상전들을 모신 종들에게 성실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그리스도께 하듯 하라”(엡 6:5)
이처럼 자기 일에 성실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하나님 일에 성실한 사람은 어떤 일을 맡겨도 해냅니다(17:17-21).
이새는 다윗의 성실함을 믿고 그에게 매우 중대한 일을 맡깁니다. 그것은 다윗을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싸우는 진영으로 보내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싸움에 나갈 수 있는 미성년자를 싸움에 내보낸 것은 아닙니다. 이 전쟁통에 장자 엘리압과 차자 아비나답, 셋째 아들 삼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가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이새는 다윗에게 진영에 이르거든 지체하지 말고 형들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 볶은 곡식 열두 되와 떡 열 덩이는 형들에게 주고, 치즈 열 덩이는 천부장에게 주라고 합니다. 이유는 천부장에게서 증표를 받아오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형들이 안전하다는 증표입니다. 그것을 본 후에야 자식들이 안전하다는 것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아버지 이새의 마음을 알겠지만, 그 위험한 전쟁터에 다윗을 보낸다는 것이 저 같으면, 막내를 보내지 않고 다른 아이를 시킬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새는 그에게 다른 네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이 중대한 일을 막내에게 맡깁니다.
그것은 이새가 다윗을 그만큼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형들이 안전히 잘 있다는 말만 들어도 안심할 수 있을 터인데 이새는 증표를 받아오라고 합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새는 다른 자식들은 믿고 맡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울에게 왕래하면서도 아버지 양 떼를 치는 다윗을 보면서 아버지는 다윗이 네 명의 형들보다도 책임감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막내가 비록 형들보다 어리지만, 능히 아버지가 시키는 일을 잘 해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다윗은 사울 앞에 선 소년이 증거한 것처럼, 용기가 있는 소년이었습니다. 싸움이 벌어지는 진영으로 가는 것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윗은 거기에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어디 이새에게만 적합한 아들이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해 내기 위해 왕 삼고자 하기에도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왕이라는 자리는 모든 백성의 재산과 생명을 책임지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에게 자기 백성들을 맡겼습니다. 자기가 맡은 일이 무겁고 중할수록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책임이 더 무겁고 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왕은 나라의 중대사에 대해 결정권이 있습니다. 따라서 매사에 신중하고 깊이 생각하고 판단해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결정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은 그 직책을 수행할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결정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책임질 일이 안 생기게 일을 처리하려고 하지만, 책임질 마음이 없는 사람은 성실하게 일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책임질 일이 생기면,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 시키거나 변명만 늘어놓기가 일쑤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국가의 지도자 될 자격이 있습니까? 교회 지도자 될 자격이 있습니까? 일이 무겁고 중요하다는 것은 그만큼 잘못했을 때 책임을 져야 합니다. 백성에게 책임을 떠넘기거나 참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사람도 지도자로서 부적격자입니다.
왜 책임지지 않으려고 할까요? 잘못을 인정하기 싫거나 한 번도 자기 잘못을 인정해 본 적이 없어서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책임을 지는 것은 마치 본인이 무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일하다 보면 실수할 수 있고,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직책이 무겁고 중대한 것은 자기가 지고 갈 책임이 무겁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직책은 무겁고 중한데 책임지지 않으려는 것은 본인이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하고 책임질 일을 한 것과는 무관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임금 자리는 책임이 무거운 자리입니다. 책임은 안 지고 특권만 누리겠다면, 애당초 그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부적격입니다. 상관이 부하직원에게 중책을 맡기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이 일을 잘 해낼 뿐만 아니라 그 일에 대해 실수하거나 잘못할 때는 깨끗하게 책임질 줄 알기 때문에 그에게 중책을 맡기는 것입니다. 무책임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잘못했을 때 책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에게 또는 부서원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다윗은 하나님의 일에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많은 장수가 있지만, 어린 소년에게 기름을 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겨도 능히 잘 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일에 성실한 사람이 되시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로, 그가 맡은 일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것이기 때문입니다(17:22-27).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골리앗과 맞짱 뜰 사람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 키와 용모를 보면, 다윗은 골리앗의 상대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선택하셨습니까? 오직 다윗만이 그가 맡은 일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거인 골리앗과 맞짱뜰려는 사람은 이스라엘 진영에 다윗 밖에는 없었습니다.
골리앗과 맞짱떠서 그를 죽이면 부자가 되고 왕의 사위가 되고 자기 집안 세금까지 면제해 주는 특권을 줬지만, 이스라엘 백성 중 누구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승산이 0퍼센트기 때문입니다. 골리앗 없이 블레셋과 싸우다가 죽을 확률은 50퍼센트지만, 골리앗과 싸웠다가는 개죽음당하기에 십상이기 때문에 싸움에 나설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드 사람 골리앗이 이스라엘에게 수치를 안겨주고 있다고는 생각했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가 모욕당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다윗 외에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싸움은 자기 목숨보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받는 것을 더 중하게 여기는 사람만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습니다. 다윗은 거기에 적합한 인물입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를 왕 삼아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목숨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 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왕이 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운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운 왕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운 왕은 자기 이름을 위해 전과를 올리기 위해서 싸움에 나가지만, 하나님이 세운 왕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싸움에 나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마땅합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그런 사람은 다윗 외에는 없었습니다.
여러분,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자기 이름 때문에 합니다. 자기가 높아지고 알려지고, 자기가 출세하기 위해서 그 일을 합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자기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손해 나는 일은 하지 않고, 자기가 손해날 일은 맡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부하에게 일을 떠넘깁니다. 자기가 해도 표적이 나지 않는 일은 맡지 않으려고 합니다. 일을 맡아도 적은 힘과 적은 시간과 적은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보려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힘들여서, 시간 들여서 하지 않습니다. 남의 이름이 더럽혀지든지 말든지, 남이 곤경에 처하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이름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 때문에 일을 하는 사람은 자기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더 무겁게 여깁니다. 자기는 손해가 나더라도 다른 사람의 이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남의 유익을 먼저 구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고저 10:23, 24절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구하라.”
그래서 자기에게 불리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면, 자기 손해를 기꺼이 감수합니다. 자기 이름을 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내는 것을 우선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이름 때문에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성실함으로 이새의 마음을 움직이셨고, 사울 왕의 마음도 움직입니다. 그 성실함으로 거인 골리앗과 맞짱뜨는 데 자격조건으로 사용하십니다.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은 많아도 그것을 자기 이름을 내거나 이익을 위해 성실한 사람은 많아도 하나님의 일에 성실하고 하나님 이름을 위해서 성실한 사람은 다윗 외에는 없었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오늘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일에도 그가 성실하여서 그를 들어 사용하고자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인물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