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불칸 통일 전쟁이 본래의 내부적 적통 계승 전쟁의 성격이 변질되어
외부 침략 전쟁으로 변모한 후, 말하자면 구체적인 적이 동족이 아니
라 이종족들로 바뀐 이후로 바바리안들에게 고통과 악몽을 안겨준 전
략 요충지 중에서 손꼽히는 지역 하나가 오크들과의 격전지인 트윈벅(
Twinbug) 성이었다. 트윈벅 성이 <범오크연대전선>과 불칸 연맹간의
전쟁에 핵심적인 거점으로 파악된 이후로 양측은 사활을 걸고 이 곳에
서의 전투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그러한 결과는 1997년 가을부터 시작
하여 거의 1년에 걸치는 소모적이고 지리한 공방전으로 이어졌다. 이
와중에 양측에 입혀진 물질적, 육체적, 정신적 손실은 말할 나위도 없
었고 벌써 수 차례에 걸쳐 성의 주인 역할을 주거니 받거니 해온 탓으
로 트윈벅 전투에 참전 중인 바바리안과 오크 진영의 군인과 용병들은
주둔군의 입장이건 공성군의 입장이건 피로에 지치고 신경이 날카롭
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봐, 그러니까 잉그릿드 누이치 놈한테 걸려 있는 현상금이 50만
골드라는 사실이 우습냐 말이다.”
“제발 정신 좀 차려라. 그 눈 먼 돈이 우리 같은 일개 병사들에게 천
년을 간들 수중에 들어오기는커녕 손때라도 묻혀질 것 같냐?”
9월에 들어서자마자 또다시 오크 진영에 성을 빼앗겨버린 불칸 연방
측은 새롭게 등장한 문제의 적 장수 하나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이었다. 오크족 중에서 가장 난폭하기로 소문난 노쓰오크(North Orc
)족 출신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헌터라는 쏘일 윈트버그에 버금가는
유명세를 가지고 있으며, 이 곳 트윈벅 성을 자신만의 독특한 진두지
휘로 순식간에 탈환한 후 성을 수성 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야음을 틈타 지속적으로 기습을 감행하여 순식간에 불칸 측 병사들에
게 ‘바바리안 킬러’라는 고약하고도 소름 끼치는 악명을 얻은 그 자
의 이름은 잉그릿드 누이치였다.
게다가 불과 열흘 남짓도 안 되는 사이 단숨에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것만 보아도 불칸 측에서 이 자에게 얼마나 많은 부담감을 느끼고 있
는지 반증해 주는 것이었다. 50만 골드라면 대저택을 서너 채 사들이
고도 남을 만한 엄청나게 많은 돈이다.
"네 놈 말이 틀린 건 아니다만 우리 같은 삼류 인생에게는 이런 초횡
재수가 아니라면 상류 계급으로 상승할 기회는 없지 않냐 말이다."
"아서라니까, 그런 택도 없는 돈을 욕심내다간 목숨이 열 개라도 남아
나지 않는다고."
새벽 4시, 죽음을 답보하고 정면으로 마주 서있는 전장의 군인들에게
도 이 시간은 매우 견디기 힘든 시간이다. 며칠 사이, 성안에 틀어박
혀 있어야 할 오크들이 오히려 시시때때로 기습을 감행하는 덕에 새벽
경계가 더욱 강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불칸 진영의 최전선을 감시하고
있는 파수병들의 심신은 이 어정쩡한 시간과 더불어 더욱 피곤하였다.
"에잇, 젠장. 네 놈은 그래서 그렇게 겁쟁이로 살다가 평생 큰돈은 만
지지 못할 거다. 그 빌어먹을 오크 놈이 내 눈앞에 나타난다면 반드시
때려잡고 벼락부자가 되고 말 거다, 나는."
"그런 욕심이 큰 화를 부르는 법이지..."
순간, 낭랑한 음색이지만 너무나 어색한 악센트의 바바리안 언어가
들려왔다. 농짓거리를 나누던 바바리안 파수병들은 본능적으로 소리가
난 쪽으로 무장태세를 갖추었지만, 섬광과도 같이 날아온 거대한 쌍
날 도끼에 둘 다 수박처럼 머리가 으깨져 버렸다.
"후우... 바바리안들은 왜 이리도 어설픈 것이냐. 이런 족속들 때문에
내 조국 카티투니아(Chathitunia)가 벼랑 끝에 몰렸다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는구나."
거친 녹색 피부에 두껍고 우직한 입술, 무섭게 치켜 올라간 눈썹과
양미간을 가운데 두고 깊게 패인 주름들, 그리고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동자와 끝으로 이 모든 외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청아한 목소리.
지휘관은 전면전의 선두에나 나선다는 전선의 일반적 상식을 무시하기
로 하듯 놀랍게도 또다시 심야 기습을 지휘하고 앞장 서 나온 오크 측
의 주동자는 바바리안들의 악몽인 그 자, 잉그릿드 누이치(Ingritt Nu
itchii)였다.
"대장, 오늘은 낌새가 좀 이상한데요. 경비가 허술해지는 시간이긴 하
지만 너무 조용합니다."
누이치가 자신의 고국 카티투니아 군에서 불명예 강제 예편을 당하고
현상금 사냥꾼으로 나설 때부터, 출세길인 비밀특전단 단원의 자리를
내버리고 그를 따라 나섰던 부관 라일록스(Lillox)의 충언이었다. 누
이치 또한 자신이 겪어 왔던 숱한 죽음의 고비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었
던 동물적 직감으로 뭔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가 항상 대동하여 데리고 다니는 검은 털의 웨어 울프(were-wolf)
헬나이트(Hellknight) 또한 누이치 만큼이나 가뜩 인상을 찌푸리고 들
릴 듯 말 듯한 낮은 소리로 그르렁거리고 있었다.
"피햇!"
'피피피-피핑-파파팡-팡-'
갑자기 사방에서 빗살처럼 가득 날아오는 화살들이 파공성을 울림과
동시에, 맑고 크게 울려 퍼지는 거친 북방 오크의 외마디 고함이 들렸
다. 약 80여기로 이루어진 오크측의 병력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
다. 기습 인원으로 치자면 많다고도 적다고도 할 수 없는 인원이었지
만 이들은 누이치가 직접 선별해 온 오크 진영의 정예 중 정예였다.
'크으윽-'
물론 아무리 빠르다손 치더라도 파상적으로 날아드는 활 공격에 사상
자가 없을 리는 만무하였다. 그러나 땅 위로 널브러진 오크 병사는 불
과 열 명도 되지 않았다.
"오크 떨거지들, 씨를 말려버리자."
"죽여, 죽여."
'와아아아-'
흥분한 바바리안들이 어둠 속으로부터 뛰쳐나왔다. 그들은 마치 오크
측의 기습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저마다 창이나 도검으로 완전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바바리안들은 어둠으로부터 꾸역꾸역 계속 밀
려 나왔고 마치 개미떼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이제 기
습을 나온 오크들은 죽은목숨이란 얘기였다.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 떼
처럼 바바리안들은 미친 듯이 사방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 때 바
바리안 진영으로부터 기인 뿔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바리안 병사
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갑자기 하던 행동들을 멈추었다. 그리고 믿기
지 않을 정도로 사위는 순식간에 침묵에 빠져들었다.
"잉그릿드 누이치 선생, 거기에 있는 것을 압니다. 여기에서 개죽음
당하지 말고 모두 항복하시지요. 성을 내어준다면 목숨만은 보장합니
다."
목소리는 낮지도 높지도 않은 톤에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다만
또렷한 오크 언어의 억양과 발음은 거칠게 위협하는 음색이 아니며
공손한 존대어임에도 위압적이었다. 그리고 말을 꺼낸 당사자의 모습
이 횃불로 밝혀지는 불빛 아래 드러났다. 180센티를 조금 넘는 바바리
안으로서는 작은 키, 은색의 장발에 회색 피부, 바바리안의 특징인 뾰
족하지는 않은 큰 귀를 제외한다면 그 모습은 영락 엘프 아니면 인간
이었다. 그의 얼굴은 여성인지 남성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모호
한 용모였다. 바바리안이면서 그닥 바바리안 답지 못한 용모, 그럼에
도 불칸 연맹의 공동운명체 대중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자, 오즈마 크
리슈나 라 아그리파(Ozma Christhuna la Aggrippa) 대공이었다.
"대답이 없으시군요. 선생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냥꾼이라는 주위의
말들을 들었습니다만, 그 정도의 식견으로도 지금의 상황이 판단이
서질 않는가요? 시간은 단 1분 드리겠습니다. 내 손으로 직접 세계 최
강의 헌터를 끝장내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그것은 지독한 고요였다.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버린 오크들과 사방에
벌떼처럼 몰려있는 바바리안들 모두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열
대야의 고적한 풀벌레 소리만이 크리슈나의 질문에 화답하고 있었다.
"30초 남았습니다."
맴맴, 찌르륵, 끼륵끼륵. 여전 대답을 하는 것들은 풀벌레들뿐.
"10초."
아그리파 대공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의 표정은 기쁜 듯 씁쓸한
듯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헬다이브-"
아주 크고 청명한 외침. 어디선가 터져 나온 오크의 음성과 함께 별
빛에 반짝이는 여름 밤하늘에 거대하고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것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쏜살같이 바바리안들 쪽으로 짖
쳐 날아들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땅에 착지했다. 신장이 십미터는 족
히 넘는 괴생명체가 땅에 내려섬과 동시에 몇 명의 바바리안이 두부가
으스러지듯 깔려죽고 말았다. 터져 나오는 비명들과 함께 전장은 순
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갑작스런 돌발상황에 바바리안들이 어찌할 줄도 몰라하는 차에 괴물
은 자욱한 녹색의 입김을 뿜어내었다.
"쿠엑, 와이번이다!"
"무슨 개소리냐! 와이번이 어떻게 브레스를 뿜냐고."
"모나크, 모나크 와이번이닷!"
그랬다. 그 괴물은 준 드래곤급 몬스터인 와이번 중에서도 최강이라
는 모나크 와이번(Monarch Wyvern)였다. 와이번 중에 유일하게 브레스
를 뿜는.
"뭣들하는 거냐! 저 빌어먹을 괴물이랑 오크들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섬멸해라. 오크들을 놓친다면 전부 용서하지 않겠다."
아그리파 대공의 음성은 순식간에 평정을 잃었다. 불과 10초 전까지
의 여유 만만함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삐익하고 들려오는
오크족의 휘파람소리. 그것은 틀림없는 퇴각신호일 것이었다. 대 불
칸 연맹의 크리슈나 참모장은 피가 역류하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기
습을 예견하고 미리 매복까지 했는데 오크들을 고스란히 놓친다는 것
은 말도 안 되는 바보짓이었다.
"이 병신 같은 놈들, 이대로 오크들을 놓친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불칸 연방 참모장의 노기에 찬 목소리는 바바리안들의 비명들과 난폭
한 와이번의 괴성에 묻혀버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