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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9) 「부활」 : 양심의 부끄러움과 은총
하느님 앞에서 다시 깨어난 양심, 사랑과 구원의 문 활짝 열다
공동체의 도덕적 건강함의 척도는 구성원들이 부끄러움에 대한 가치를 얼마나 진지하게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다. 어느 공동체나 죄스러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죄스러움에 대한 태도가 그 공동체의 의식 수준을 결정한다. 법적인 판단과 처벌에 따른 처리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내적 양심에 기초한 부끄러움의 감정이다.
1899년 71세의 나이에 톨스토이는 10년의 작업을 거쳐 「부활」을 출판한다. 로맹 롤랑이 ‘예술적 성서’라고 극찬한 작가의 마지막 장편 소설은 주인공인 네흘류도프 공작이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내적으로 부활하는 이야기이다. 톨스토이는 출간 2년 후인 1901년 러시아정교회로부터 파문당했을 정도로, 교회와 사회의 무디어진 양심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동시에 대조적으로 주인공의 다시 깨어나는 양심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바오로 사도는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하는 주된 이유에 대해, 법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 보다도, 우선적으로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거리낌없는 양심‘을 지녀야 한다고 권고한다.(사도 24,16 참조) 아우구스티누스도 도덕적 감각과 관련하여 외적인 법정보다는, 내적인 법정을 강조한다. 「고백록」에서 “하느님은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다”고 표현한 것처럼, 내적 양심은 단지 고귀한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절대적 진리를 만나는 성스러운 곳이다.
네흘류도프는 살인 사건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석했는데, 절도와 살인 혐의로 피고석에 앉아 있는 매춘부가 과거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채 쫓겨난 카츄샤임을 알아본다. ‘그 같은 죄를 양심에 파묻은 채 편히 살았던’ 그는 자신의 ‘냉혹함과 잔인함, 비열함을 인정하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만, 혹시라도 그녀와 변호사에 의해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 남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창피당할까 두려워한다.
또한 주인공은 과거의 죄스러운 기억으로 괴로워한다. 특히 동물적 욕망을 채우고 그녀에게 ‘억지로 돈을 쥐여주고 달아났던 순간‘을 떠올리며 ‘혐오와 공포‘를 느끼며 자신이 얼마나 ‘비열했는지‘ 자책한다. 소리 내어 자신을 ‘그런 무뢰배, 그런 악한‘이라고 말한다. 결국 자신의 악행으로 한 여자의 삶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한다.
자기 잘못에 대한 진실한 성찰엔 부끄러움이 따른다. 과거에 대한 반성이 깊어지면서, 주인공은 계속해서 ‘부끄럽고 역겹다. 역겹고 부끄럽다’라는 감정을 경험한다. 남들 앞에서 겪게 될지도 모르는 외적 창피함과, 자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적 부끄러움 사이에서 갈등한다. 외적 창피함을 피하기 위해선 내적 부끄러움을 견뎌야 하고, 내면의 자유를 얻기 위해선, 세상의 심판을 대면해야 하는 진퇴양난이다.
이러한 갈등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가치관의 대립이다. 외적 창피함은 남의 평가나 시선을 중요시한다. 의도적으로 내면의 상태를 감추는 외적 이미지를 꾸며낼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 위선과 자기기만을 초래한다. 그러나 내적 부끄러움은 엄숙하고 신성한 진실 혹은 진리에 기초한다. 두 개의 가치관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없어서, 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두 개의 가치관이 불러일으키는 긴장과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하느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의 대립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지상의 도성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가치관을 따르지만, 하느님의 도성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가치관이 우선적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지상의 도성 안에서 살아가는 동안 지상의 가치관을 경계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가도록 초대받는다.
결국 이러한 대립 사이에서, 네흘류도프는 진리의 목소리를 선택한다. “세상 사람들이야 마음대로 판단하라지. 그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어”라고 깨닫는다. 지상의 도성에서 창피함보다, 하느님의 도성에서 부끄러움을 더 두려워하게 된 결정적 순간이다. 남의 시선과 평가를 초월하여 내면의 엄숙하고 신성한 진실을 선택함으로써 자기 책임을 삶의 중심에 두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후 “가슴속에는 고통스럽기는 하나 평안을 주는 뭔가가 있었다.” “정말 좋다! 정말 좋다. 아, 정말 좋다!”라고 표현하며 눈물을 흘린다. 카츄샤를 버린 이후 ‘그의 내면에서 잠자던 정신적 존재가 깨어난 것을 기뻐하는 눈물‘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죄에 대한 부끄러움의 중요성을 여러 강론에서 언급한다. “고해성사를 보기 전에 반드시 ‘양심 성찰‘을 한다. 고해소에서의 진정한 고백은 ‘마음에서 일어나는데‘, 단순히 ‘죄의 목록‘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죄를 저지른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사람은, 바로 도덕적 판단력과 타인에 대한 존중감을 잃어버린 것이다.”(2020년 9월 3일 강론)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것은 은총이다”(2025년 10월 13일 강론)라고도 한 바 있다. 왜냐하면 죄스러움에 대한 부끄러움은 나약한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을 드러내면서, 우리에게 부정적인 절망의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치유의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사실 주인공은 자신의 과거 악행에 대해서 아무도 모르고, 심지어 카츄샤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내적으로 참회하고 그동안 살아오던 방식대로 편안하고 부유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난 양심의 숭고함과 성스러움은 더 이상 내면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는 나를 얽매고 있는 이 허위를 부숴버리고, 모든 것을 인정하고 모두에게 진실을 말하며 진실만을 행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카츄샤와 세상을 향해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간다. 감옥에 있는 그녀를 방문해 용서를 구하고, 자기 영지를 농민들에게 나눠준다. 그녀의 유배지인 시베리아까지 따라간다. 그러면서 사회의 다양한 모순과 불의를 목격한 후에, 카츄샤뿐만 아니라, 세상의 변화를 위해 온전히 이타적 삶을 결심한다. 죄에 대한 부끄러움은 그에게 구원의 문을 새롭게 열어 주었다.
톨스토이의 부활은 물리적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던 양심이 다시 깨어나는 것이다. 양심을 흔들어 깨울 때, 발생하는 부끄러움의 감정은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 이 감정을 통해서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다시 겸손하게 우리 자신을 낮추게 되기 때문이다. 이 순간 하느님은 우리 삶 안에서 구원의 활동을 시작하실 수 있다.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목격한 베드로가 “주님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자신을 낮추며 부끄러워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신다.(루카 5,8 참조)
그래서 부활한 양심은 내면에 머물지 않고,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향한 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간다. 부활은 한 순간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불의한 사회 안에서, 계속해서 하느님 도성의 가치관인 이타적 사랑을 살아가려는 지속적인 노력이다.
[영성의 샘]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은 – 스승, 애인, 친구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소리 높여 노래합니다. 하지만 부활이 무엇인지, 주님의 부활을 어떻게 체험하고 받아들이고 있는지, 조금 정직하게 질문을 던져보면, 사실 부활을 이해한다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부활을 어떻게 체험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만나고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분명 제 곁에 계시는 그분이시지만, 눈에 보이는 것들 안에서 그분 부활의 흔적을 찾으려는 내 노력은 언제나 회의와 실패로 끝납니다. 아마도 어쩌면 인간의 앎과 지식은 부활의 신비를 파악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서 안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한 몇 가지 시사점을 줍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세 가지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겁에 질려 예수를 배반하고 도망가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용서와 용기를 주는 스승의 모습으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따뜻한 위로의 인사를 건네는 애인의 모습으로,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사람에게 다가가 이야기와 음식을 함께 나누는 따뜻한 친구의 모습으로, 부활하신 주님은 다가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 인생의 스승이었던 사람들 속에서, 제 신앙의 애인들 속에서, 뜻을 함께하는 동지적 친구들 속에서 나와 늘 함께하고 계셨음을 희미하게나마 알 것도 같습니다. 때때론 저 푸른 하늘과 저 파란 들판이, 계절의 눈부신 변화들이 내게 따뜻한 무언의 말을 건네는 친구였음을,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지친 나를 위로하는 애인이었음을, 시간의 흐름을 깨닫게 하여 나를 겸손하게 하는 스승이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부활의 신비를 깨닫는다는 것은, 부활의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길에서 우리에게 스승으로, 애인으로, 친구로 다가왔던 사람들과 사물들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계심을 알아보는 일입니다.
살면서 참된 스승과 따뜻한 애인과 진정한 친구를 만나는 일도 어려운 것이지만, 우리 자신이 누군가에게 참된 스승과 따뜻한 애인과 진정한 친구가 되는 일은 아마도 훨씬 더 어려울 것입니다. 생의 여정에서 누군가에게 참된 스승과 따뜻한 애인과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면 우리는 분명 우리 자신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체험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참된 스승이 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자신의 신앙적 삶의 모습으로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어 신앙을 증거한다면, 우리는 아마도 부활 신앙을 진정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애인이 된다는 것 역시 참 어려운 일입니다. 자신의 아픔과 고통에만 매몰되어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아픔과 힘듦보다 타인의 아픔과 어려움에 더 예민하며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이웃들에게 위로의 손길을 건네고, 눈물을 닦아줄 줄 아는 예쁜 애인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삶으로 부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인생이라는 길의 여정에서 편안하고 헌신적인 동반자로서의 친구가 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낙심해서 엠마오로 가는 귀향길에 선 두 사람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주님처럼, 실의에 빠져 낙담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용기를 주는 진정한 벗이 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입니다. 누군가에게 진정한 벗이 되어줄 줄 아는 사람은 이미 그 모습으로 그는 부활한 주님을 닮은 사람일 것입니다.
신앙인 모두가 만나는 사람에게 스승과 애인과 친구가 되어주길
함께하는 이웃들에게 거창한 말의 가르침이 아닌 내 삶의 모습으로 따뜻한 감동을 주는 선생이 되고 싶습니다.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내 이웃들에게 위로의 손길을 건네고 눈물을 닦아줄 줄 아는 예쁜 애인이 되고 싶습니다. 이웃들과 소박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수다 떨며 소탈한 웃음으로 낄낄거릴 수 있는 편안한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이 지상에서 주님 부활의 신비를 살아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젠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스승과 애인과 친구를 얻는 일이며, 스승과 애인과 친구가 되는 일입니다.
부활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서, 부활을 체험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이 지상의 삶을 사는 동안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 우리와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진실한 스승으로 따뜻한 애인으로 헌신적인 친구의 모습으로 다가갈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의 신비를 깨닫는 일은, 부활에 대한 우리들의 진정한 신앙고백은 우리가 신앙 안에서 좋은 스승으로, 따뜻한 애인으로, 진정한 벗으로 사는 일입니다. 우리 신앙인 모두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스승과 애인과 친구의 역할을 할 줄 아는 사람이길 희망합니다.
[영성의 샘] 성모님과 함께 걷는 마음의 순례 (4) 연민과 동행, 약자를 향한 어머니의 마음
사순 1주간 주일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우리 삶에도 광야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 한켠에 설명할 수 없는 메마름과 외로움이 자리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 이유 없이 찾아오는 공허함, 그리고 문득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들. 어쩌면 우리 안에 스쳐 가는 이런 모습들이야말로 광야일지 모릅니다.
얼마 전, 평소 알고 지내던 이들과 함께 ‘자신의 광야’에 대해서 나눔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예상보다 훨씬 깊은 이야기를 꺼내 놓으셨습니다. 그분은 지난날 어머니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지만,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서 들은 말로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마치 자신이 살아온 시간 전체를 부정당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지금은 바로 그런 광야를 지나고 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평소에 그런 아픔을 드러내시던 분이 아니었기에, 그분의 광야는 더욱 뜻밖이었고 마음 깊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조용히 성모님께 그분을 위한 전구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성모님께서 약한 이들의 전구자로 우리 곁에 계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상처받은 이들의 어려움을 곧바로 없애 주시는 방식으로 일하시기보다 그들의 아픔 곁에 함께 머무르시며 하느님께 전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 성경 속의 마리아 – 약자의 노래를 부르다
성모님의 연민과 동행은 성경 안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엘리사벳을 찾아가신 성모님은 마니피캇을 노래하셨습니다. 이 노래는 단순한 개인적 감사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노래이며, 역사 안에서 억눌린 이들을 향한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는 찬가입니다. “그분께서는 …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성모님은 스스로를 “비천한 종”이라 부르시며, 권력의 자리에 서 있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변방의 젊은 여인이었고, 아무런 사회적 영향력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 모습은 십자가 아래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모든 제자들이 흩어진 자리에서 성모님은 끝까지 서 계셨습니다. 아드님의 고통을 막을 힘은 없으셨지만,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교회가 성모님을 ‘고통의 어머니’라 부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모님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함께 서 계시는 동행자의 전형이십니다.
2. 역사 속의 마리아 –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가시다
성모님의 약자와의 동행은 성경 이후에도 이루어집니다. 1531년 멕시코 테페약(Tepeyac) 언덕에서 일어난 사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당시 원주민들은 식민지 통치를 당하며 억압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권력자가 아니라 가난한 원주민 후안 디에고에게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내 작은 아들, 내 가장 작은 아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말씀은 단순한 애칭이 아니라, 짓눌린 이의 존엄을 다시 일으키는 위로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또한 성모님께서는 그곳에 성당이 세워져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이 위로받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하여 황량한 언덕은 위로의 장소가 되었고, 소외된 이들의 자리는 은총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교회는 이 사건을 통해 성모님을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로 고백합니다. 이는 어떤 이념의 언어라기보다, 마니피캇에서 이미 드러난 신앙의 고백을 이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약자를 잊지 않으시며, 성모님께서는 그 구원의 길에서 가장 먼저 약자 곁에 서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3. 오늘의 교회와 마리아 – 교황들의 목소리
오늘날 교황님들께서도 약자들의 고통과 불안을 성모님의 전구에 맡기고 계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난민과 이주민, 그리고 세상의 무관심 속에 놓인 이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시며, 그들의 눈물을 성모님께 의탁해 오셨습니다.
레오 14세 교황님께서도 전쟁과 위기, 그리고 급격한 기술 발전과 사회 변화 속에서 흔들리는 인류를 위해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셨습니다. 특히 2025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는, 로마 스페인 광장의 ‘원죄 없으신 성모님 기둥 동상’ 앞에서 성모님께 평화를 위한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오 마리아여, 희망이 꺼지지 않은 수많은 자녀들을 굽어보소서. …
거룩한 문들이 열렸듯이, 이제는 다른 문들도 열리게 하소서. 가정의 문들, 평화의 오아시스의 문들이 열려 그 안에서 존엄이 다시 꽃피고, 비폭력을 배우며, 화해의 예술을 익히게 하소서. … 교회는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 동시대인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특히 가난한 이들과 모든 고통받는 이들의 삶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 우리는 준비되지 못한 채, 무력한 듯 느껴지는 변화들 속에서 씨름하고 있습니다. … 우리가 언제나 백성과 함께, 백성 가운데 있는 교회가 되게 하시고, 정의와 희망을 부르짖는 인류 안에서 누룩이 되게 하소서. …
어머니, 평화의 모후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4. 레지오 단원들의 자리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전쟁터 한가운데 있지 않고, 난민의 처지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모님의 시선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말 못 할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 신앙 안에서 흔들리는 이들, 가정 안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곁에 조용히 함께 있으며, 기도로 동행하며, 위로의 한마디를 건네는 것, 이것이 바로 성모님의 연민을 이어가는 길입니다.
레지오 마리애는 성모님의 마음을 배우는 곳입니다. 성모님은 낮은 자리에서 고통받는 이들 곁에 서서, 하느님께 그들을 맡기셨습니다. 레지오 단원 여러분, 성모님의 시선을 따라 함께 걸으면 좋겠습니다. 연민과 동행의 길 위에서,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희망의 표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묵주기도 학교] 관상 여정의 시작
관상 여정을 여는 첫 호흡
묵주기도는 개인적 관상과 하느님 백성의 교육뿐 아니라 새로운 복음화를 위하여 날마다 영성 훈련의 풍부한 기회를 제공합니다(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 3항). 그러니 묵주기도의 시작은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돌려세우는 첫 동작이며, 동시에 매일의 삶을 복음화의 방향으로 훈련하는 출발점입니다. 방향이 바로 서면 마음이 돌아오고, 마음이 돌아오면 기도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성호경: 기도를 ‘하느님 안에’ 두는 첫 동작
묵주기도는 십자고상을 잡고 성호를 그으며 ‘성호경’으로 시작합니다. 기도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십자고상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고상에서 기도의 순환이 시작되고, 기도의 순환이 끝나며, 신앙인의 삶과 기도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합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되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이릅니다(교서 36항).
이 짧은 동작과 기도문은 작은 습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도의 자리를 옮기는 행위입니다. 내 감정과 분위기 안에서 기도를 꾸려 가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의 은총 안에 기도를 두는 일’입니다. 오늘의 기도가 내 능력이나 기분의 산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첫 고백입니다.
우리가 십자고상을 잡는 순간, ‘혼자 기도하는 사람’에서 ‘주님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성호경은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묵주기도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삼위일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신경: 관상 여정의 시작
한국 교회는 대체로 시작 기도에서 사도신경을 바칩니다. 신경은 “지금 내가 드리는 기도가 교회의 신앙 위에 놓여 있다”라는 고백이며, 묵주기도의 여정을 흔들리지 않게 붙드는 기초입니다. 동시에 신경은 우리가 묵상할 신비인 주님의 탄생과 죽음, 부활을 미리 비추는 ‘서론’이 되어, 관상으로 들어갈 길을 열어 줍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 시작을 단 하나의 방식으로 고정하지 않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에서 지역 교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묵주기도를 시작해 왔음을 언급하며, 그 관습들이 관상을 위한 마음의 준비가 된다면 “모두 똑같이 정당”하다고 말씀하십니다(교서 37항). 그래서, 어떤 공동체는 시편 70[69]편 첫 구절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로 시작합니다. 이는 기도하는 사람이 먼저 자신을 꾸미기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라는 태도를 세우게 합니다. 그 겸손이 마음의 숨을 트이게 합니다. 또 어떤 공동체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으로 시작하여, 보편 교회의 신앙 고백 위에서 관상의 여정을 또렷이 열기도 합니다.
서로 다른 출발처럼 보여도 목적은 같습니다. 시작은 ‘정답 맞히기’가 아니라 ‘준비하기’입니다. 시작 기도는 우리 마음을 단번에 완벽하게 만드는 장치가 아니라, 흩어진 마음을 다시 모아 기도의 숨을 고르게 쉬게 하는 출발점입니다.
주님의 기도-성모송-영광송-구원을 비는 기도: 호흡의 리듬
시작 기도는 신경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첫 신비 선포 전에 바치는 ‘주님의 기도–성모송 3번–영광송–구원을 비는 기도’는 묵주기도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관상으로 들어가는 리듬임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기도는 “무엇을 청할지”보다 먼저 “누구께 나아가는지”를 확정하는 첫 청원입니다. 이어지는 성모송 세 번은 마리아 공경이 결국 삼위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임을 드러내며, 마음을 그리스도께 향하게 합니다. 영광송은 시선을 하느님께 고정하며, 구원을 비는 기도를 통해 구체적인 청원을 지향합니다. 이러한 기도 형식은 본기도로 들어가도록 돕습니다.(‘구원을 비는 기도’는 레지오 회합 중에는 바치지 않습니다.)
묵주기도는 본질상 고요한 운율과 생각을 할 수 있는 느릿한 속도로 바쳐야 합니다(교서 12항). 이 운율은 흩어진 마음을 다시 묶어 중심으로 돌아오게 하는 힘입니다. 호흡처럼 기도도 리듬이 살아 있을 때 마음을 살립니다. 그러므로 시작 기도는 분심을 없애는 장치가 아니라, 분심이 와도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게 하는 길입니다.
시작 기도는 ‘관상’으로 들어가는 문
시작 기도는 묵주기도가 관상이라는 깊은숨으로 들어가는 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관상이 없는 묵주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신과 같아져 기도문만을 반복하는 위험을 초래하게 됩니다(교서 12항). 관상은 멀리 있는 특별한 체험이 아니라,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삶을 다시 하느님 안에 놓는 방식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비에 머무를 때 언제나 그분을 더욱 닮아가는 동화의 여정을 걷게 됩니다(교서 15항 참조).
공동체 기도나 가정 기도에서는 전통대로 사도신경으로 시작하되, 짧은 한 문장 안내를 곁들이면 좋습니다. 예컨대 “오늘의 묵주기도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길입니다”(교서 3항 참조)라고 말입니다. 회개와 겸손을 특별히 강조하고 싶을 때는 사도신경을 대신하여 시편 70[69]편 첫 구절로 시작하여 “주님, 저는 도움이 필요합니다”라는 태도를 먼저 세우면 좋습니다(교서 37항 참조). 교리교육이나 대축일처럼 공적 분위기에서는 기도할 때,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활용해 보편 교회의 신앙 고백을 더 선명히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방식을 택하든 핵심 원칙은 하나입니다. 시작이 관상을 위한 마음의 준비가 되도록(교서 37항), 간단하지만 또렷한 리듬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묵주기도의 시작 기도는 작은 문턱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루 전체의 영적 호흡을 바꾸는 지점입니다. 시작에서 기도의 자리를 하느님께 옮기고, 운율을 회복하고, 다시 그리스도의 얼굴로 방향을 맞추는 순간, 기도는 생활의 한 부분이 됩니다. 따라서 묵주기도는 개인의 기도를 넘어, 하느님 백성을 새로운 복음화의 길로 단련시키는 매일의 영성 훈련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