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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24
우리의 자녀에게 무엇을 남겨줄꼬!
지난 주 대학 입학을 위한 수능시험이 있었습니다.
직접 시험을 치른 수험생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상으로 수험생을 둔 부모들은 무척이나 가슴 졸이며 힘들었던 한 해였습니다.
우리 부모님들, 자식이 뭐길래! 그 동안 뒷바라지하시느라고 너무 수고하셨고요.
또 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우리 수험생들에게는 우리 하나님께서 저들의 걸음들을 선하게 이끌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실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고 나서 새삼 느끼게 된 사실은 삶의 대부분이 자녀들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보면 사람을 세 시기로 나눕니다.
사람은 소년기, 청년기, 중년기를 거치게 되는데
소년기에는 부모를 위해서 살고
청년기에는 자신을 위해서 살고
장년기에는 자식을 위해서 산다고 했습니다.
이 말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공감을 주는 부분은 세 번째 부분이예요.
한국적인 삶의 방식에서는 "자식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말이 무엇보다 가장 의미 있고 설득력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우리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막상 "자녀를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 혹은
"무엇을 해 주는 것이 자녀를 축복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길인가?"에 부딪치면 철학의 빈곤을 느낍니다.
불행한 사실은 이것이 이 세상의 일반적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통하여 훌륭한 본보기(sample)을 보여줍니다.
바로 성경 속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녀 교육의 모습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토인비 교수가 말했듯이 세계사에 있어서 하나의 경이요 기적입니다.
그들은 얼마나 많은 환난을 겪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으며 얼마나 많은 역경에 시달려 왔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끈질기게 버티면서 자기들의 자녀들을 훌륭하게 길러내고 지금은 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수많은 인물을 배출해내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힘이 이 민족을 이렇게 만들고 있을까요?
한 역사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핏줄 속에는 어떤 민족도 모방할 수 없는 하나의 무서운 정열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스라엘 민족사에 나타난 이 정열을 두 개의 수레바퀴로 비유했는데, 한 수레바퀴는 교육이고 또 한 수레바퀴는 신앙이라고 말했습니다.
교육에 대한 열정과 신앙에 대한 열정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 나라가 망할 때였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들어와 포위하고 머지 않아 예루살렘을 불태워 버리게 될 때였습니다.
유대인으로서는 도저히 로마군을 이길 재간이 없었습니다.
이때 유명한 랍비 요한나 벤자카이라는 사람이 "지혜는 칼보다 강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교육을 통하여 민족을 구하기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비록 예루살렘은 불타 버린다 할지라도 저 밖에 있는 회당들은 결코 불태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병들었다는 소문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벤자카이는 죽었다는 소문을 내었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벤자카이가 관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성을 빠져 나온 벤자카이는 로마 사령관을 찾아가서 예루살렘을 다 불태우되 야프케라는 조그마한 동네만은 불태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로마사령관은 그 랍비의 부탁을 받고 그 동네만은 불태우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었습니다.
그 곳에 말씀을 가르치는 회당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육만이, 영적인 힘만이 칼을 정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랍비가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혜를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1900년만에 잃었던 나라를 되찾고, 오늘날 세계를 정복하는 유대인들이 되었습니다.
영적인 힘, 정신적인 힘을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교육에 대한 정열과 신앙에 대한 정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교훈을 통해서 우리는 자녀 교육 문제에 큰 도전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이 속해 있는 4장 1절을 보십시오.
"온 백성이 요단 건너기를 마치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넜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대한 명령을 내립니다.
4절을 보십시오.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두 사람을 뽑아서 열두 개의 돌로 기념비를 세우도록 명령합니다.
그리고 후일에 후손들이 이게 무엇이냐고 묻거든 너희는 자손에게 그 이유를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생스럽게 요단 강을 빠져나온 다음에 "이제 살았다"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이 아니라 이 고생 속에서의 그들의 소중한 경험을 나중에 자녀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19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정월 십 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여리고 동편 지경 길갈에 진치매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두 개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하나는 요단 강을 빠져 나오자마자 제사장의 발이 섰던 그 장소에 세웠고, 또 하나는 길갈이라는 안전 지대에 도착해서 열두 돌로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21절 이하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라"
이제 저들은 안전지대에 도착해서 살 만해졌습니다.
편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 교훈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다시 기념비를 하나 세우고 '후일에 네 자손이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라'고 말합니다.
여기 자기들이 받았던 모든 경험들을 후손들에게 교훈으로 주기 위해 애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끈질긴 정열과 교육의 집념을 보십시오.
그렇다면 지금 저들은 무엇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렇게 애를 쓰고 있나요?
21절에서 2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
이 말씀의 주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여호와입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마르게 하시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 같으면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이 돌을 여기 왜 세웠나요?"
"내가 옛날에 언약궤를 메고 발을 요단 강에 탁 내디디자 요단 강이 짝 갈라졌단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야. 그때 이 아버지가 참 대단했지"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 영광을 돌렸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솔직하십시오.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아무리 커다란 도움이 된다 해도 우리는 그들에게 영원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우리는 곧 그들의 곁을 떠나야 합니다.
저들 홀로 광야 같은 세상에 서야 될 때가 옵니다.
그때 저들은 누구의 도움이 필요합니까?
더 이상 부모가 자녀들을 도울 수가 없을 때, 인생의 한풍이 불어닥칠 때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그들이 삶의 부조리와 불가능과 그리고 수많은 난제 앞에 부딪쳐 어쩔 줄 몰라 할 때 그들은 누구를 바라보아야 합니까?
하나님 여호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혜로웠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 어머니의 도움이 자녀에게 미치지 못할 때에, 그들을 더 강하게, 더 능력 있게, 더 지혜롭게 지킬 수 있는 놀라우신 그 하나님을 자녀들에게 전달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그들에게 유산으로 남기기를 원한 것입니다.
탈무드에는 이런 흥미 있는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재산을 남기고 ‥‥‥ "
신앙 교육을 받지 못한 자녀들에게 재산을 남겨 보십시오
그 재산 때문에 자녀들은 오히려 더 비극적인 존재가 될 것입니다.
신앙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부자들의 자녀들이 불과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몰락해 가는 광경을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지켜봅니다.
탈무드의 교훈은 다시 이렇게 계속됩니다.
"양식 있는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지식을 남기고, 지혜로운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신앙을 남긴다. "
당신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기고 싶습니까?
잠언 14장 26절의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꿈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교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
우리의 자녀들이 인생을 살면서 폭풍우와 비바람을 직면하게 될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삶의 폭풍우와 삶의 파도 앞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보라고 가르쳐야 합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복되고, 행복한 삶을 원하십니까?
그 자녀들 때문에 모든 것을 쏟아 투자하고, 그 자녀들이 성공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좋은 학교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모님들이여, 저들의 삶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다윗의 유언은 감동적 입니다. 역대상 28장 9절을 보십시요_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찌어다. "
누구를 알라는 것입니까?
아비를 알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고, 잊지 않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다윗은 아버지인 자기 자신을 자녀에게 기억시키는 것으로 자기의 의무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무력한 부모, 이 보잘 것 없는 부모, 이 많은 잘못을 동시에 자녀들에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을 자녀에게 남겨야만 했습니다.
다윗이 아들에게 남긴 유산은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기기를 원하십니까?
물질보다도, 세상적인 지혜 이상으로 신앙의 유산을 남기는 복된 부모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 다음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교육의 몇가지 특징을 배우게 됩니다.
첫째, 저들은 모든 기회를 사용하여 자녀들을 교육하였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명절이 오면 먼저 생각하는 것이 좀 편히 쉬는 날,
오랜간 만에 늦잠 자는 일, 부지런한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는 일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명절이야말로 더할 수 없이 소중한 자녀들의 교육의 기회였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막절에 자녀를 데리고 나가서 들판에다가 천막을 칩니다.
이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짜증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항의를 할 것입니다.
"이 좋은 날에 왜 우리가 이런 일을 해야 합니까?"
아버지가 자녀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이런 천막을 짓고 이 천막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단다"
유월절이 되면 한밤중에 부모가 자녀를 깨웁니다.
한밤중에 곤히 자는 사람을 깨우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눈을 부비고 일어나면서 짜증스럽게 말합니다.
"아빠! 왜 잠을 깨워요?"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옛날 유월절 날 우리 백성들이 애굽 땅을 떠날 때, 급히, 한밤중에 온 백성을 일깨워 허리띠를 띠고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유를 얻기 위해서 애굽 땅을 떠났단다"
그들에게 있어서 명절은 단순한 명절이 아니라 가르침의 기회, 교육의 기회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열에서 다시 배워야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기회가 교육이었습니다.
명절도, 예식도, 행사도, 프로그램도, 자녀들과 함께 즐기는 시간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바로 교육의 기회였습니다.
둘째, 저들은 보여주면서 교육했습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 강을 건너갔다는 사실을 귀로만 전달한 것이 아니라 기념비를 세워서 후손들에게 보여 주는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교육도 보여주는 교육이었습니다.
실물 설교, 몸으로 보여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아름다운 비행'이라고 하는 영화를 보면 기러기 새끼들이 자기들을 부화시킨 소녀를 어미로 착각하고 그 뒤를 따라 다니는 장면이 나옵니다.
기러기는 알에서 태어나면서 처음 보는 것을 어미로 기억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는 '임프린팅(imprinting)'이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오리를 대상으로 실험을 해보면 오리는 아무리 어미의 소리를 들려주거나 환경을 바꾸어 주어도 자기가 태어나면서 처음 본 것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소리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것보다 눈으로 보고 배운 것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임프린팅 효과가 자녀교육에 있어서도 그대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경우, 왕국 분열 이후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왕국에서 각각 10명과 14명이 아버지의 왕위를 물려받아 왕이 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에서는 아버지가 악한 왕이었을 경우 아버지를 닮아 아들까지 악한 정치를 펼치는 확률이 100% 였습니다.
남 유다 왕국에서도 아버지의 성품을 따라 아들이 착해지기도 하고 악해지기도 하는 확률이 64.3%로 나타났습니다.
이를 합치면 전체 24명의 왕들 가운데 아버지의 행동을 닮은 사람이 19명으로, 평균 79.2%정도가 아버지를 그대로 닮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어쩌다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분명 이스라엘의 왕들도 자녀들에게 여러 가지 교육을 시도했을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교사들을 데려다가 특별 교육을 받도록 했을 것이고 여러 차례 좋은 말로 자녀들을 타일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왕의 자녀들은 부모의 말보다 그리고 교사의 말보다 자신들의 어려서부터 보고자란 아버지의 모습에 더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백성들을 착취하고 우상을 섬기기 시작하면 아들들도 영락없이 폭군이 되고 우상 숭배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임프린팅 효과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자녀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나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부모의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일찌감치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옛말에 "몸으로 가르치니 따라오고 입으로 가르치니 반항하더라"합니다.
예전에 서당에서 한학을 가르치던 훈장님들 사이에서 전해오는 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엄마 아빠는 T.V 앞에 붙어살면서 자녀들에게 T.V 보지 말고 공부 좀 하라고 해보십시오.
즉각 아이들에게서 반응이 나올 것입니다.
어떤 반응이겠습니까?
"맞아, 엄마 말씀 잘 들어야지, 원래 T.V는 어른들만 보는 것니까 나는 부모님 말씀대로 공부나 열심히 하자"이렇게 생각하는 아이가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생각하는 아이가 있다면 오히려 그 아이가 돌연변이일지도 모릅니다.
대신 실제 상황에서 아이들이 되뇌이는 말은 "치이 엄마는 T.V보면서 나보고 공부하래, 치사하게" 일 것입니다.
바로 이런 부작용이 부모와 자녀 사이에 회복되기 어려운 거리감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비극을 맞지 않으려면 자녀 교육을 입으로만 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은 집에서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한번 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성경을 읽어라" "기도해라"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교육은 1%의 효과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몸으로 하는 교육, 행동으로 보여주는 교육, 몸소 실천하는 교육은 다릅니다.
그런 교육은 100% 자녀에게 변화를 가져옵니다.
이것이 가정의 질서이고 이것이 올바른 가정 가정이 모습입니다.
이렇듯 자녀교육에서 성공하려면 말이 아니라 모범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나를 본받으라"
바로 이 고백이 오늘날 자녀들을 교육하는 부모님들이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본 받으라" "엄마처럼 신앙 생활하고 아빠처럼 가정과 일터에서 일해라" 바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우리의 가정이 건강해지고 우리의 자녀가 밝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셋째, 저들은 일관성 있게 자녀들을 교육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육의 효과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일관성있는 교육 방법을 채택했다는 것입니다.
교육의 효과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일관성입니다.
그래서 교육학자들은 교육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반복의 원리>라고 합니다.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념비를 세울 때, 요단 강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를 세우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길갈이라는 지역에 도착했을 때 다시 한 번 기념비를 세웁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을 방문해 보면 이스라엘 도처에 기념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지난 주 우리 어린이집 교사들과 함께 식사를 같이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는데 결론은 가정교육, 부모 교육이 제일 중요하다는데 모두가 동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교육의 일관성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 들려주시는 사명의 소리를 듣습니다.
첫째는 가정의 교육적 사명입니다.
학교 교육만 교육이라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자녀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곳은 가정입니다.
자녀들의 최고의 교사는 부모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교실은 가정입니다.
인격 교육, 신앙교육. 가정에서 먼저 세워져야 합니다.
부모가 감당하지 못하는 아이를 어떻게 학교가 감당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부모가 먼저 책임져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사랑의 자국을 미리 남겨 놓지 않는다면 마귀가 시기와 저주와 죽음의 자국을 남겨 놓을 것입니다.
둘째, 교회의 교육적 사명입니다.
교회의 제 일의 사명은 선교입니다. 영혼 구원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제 이의 사명은 교육입니다.
영국의 저술가 어기스트 해아 목사는 "봄에 잎 피지 않는 나무에서 어떻게 가을에 열매를 바라랴!" 고 했습니다.
저는 이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로서 늘 죄송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충분한 교육적인 배려를 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육 공간, 교육 시설, 교육적인 배려, 어느 것 하나 자신 있게 이야기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소망을 가지는 것은 어린 영혼들을 사랑하며, 위하여 땀흘리는 우리 선생님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선생님들의 수고와 헌신으로 인해 우리 교육부서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들과 학생들은 부흥되는데 교사가 많이 부족한 가운데 있습니다.
내년에 많은 성도들이 교육부서에 가서 헌신해 주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제 한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미국 보스턴의 한 정신 병원에는 부모도 버리고 또 치료를 담당했던 의사도 포기한 한 불쌍한 생명이 인공 호흡기에 의해 실날같은 생명을 유지한 채 구석진 병실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몰골은 가까이 하기조차 두려웠고 누구 하나 간호의 손길을 뻗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은퇴한 간호사 한 분이 자원봉사를 나왔다가 병실 한 구석에 버려진 이 불쌍한 아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불쌍하다 못해 너무나도 처참한 이 아이를 부둥켜안은 간호사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후 곧바로 병원 당국에 강력히 항의를 했습니다.
병원측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부모도 포기한 자식을 우리 의료진들이 최선을 다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가망이 없습니다.
저희들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 많은 간호사는 확신에 찬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꼭 고칠 수 있으며 앞으로 훌륭한 미국 시민이 되어 봉사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날부터 노간호사의 24시간은 죽음을 눈앞에 둔 이 어린 생명을 위한 헌신의 연속이었습니다.
매일 목욕시키고 피부와 피부를 접촉하며 따뜻한 사랑을 전달해 주고 새 옷으로 몸을 단장하고 반응없는 대화를 쉴 사이 없이 이어갑니다.
아이 옆에서 찬송을 불러주고, 성경을 읽고, 손을 꼭 잡고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볼을 맞대고 뽀뽀를 합니다.
한 달, 두 달, 세 달 그럼에도 아이에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주위에서는 포기하라고 야단이고 의사들마저 방관자의 입장에서 조롱 섞인 말을 던집니다.
6개월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노간호사도 육신적으론 많이 지쳐 있었으나 하나님께 매달려 끝없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느 날 아이를 품에 꼭 안고 깜빡 잠이 든 순간 어디서 자기가 아이에게 늘 불러 주었던 찬송가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품에 안고 있던 아이가 방긋 웃으며 그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있지를 아니겠어요?
노간호사의 기쁨은 말로 표현길이 없었습니다.
이 어린 환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헬렌 켈러의 스승인 설리번 여사입니다.
만약 노간호사의 헌신적인 사랑이 없었다면 헬렌 켈러의 위대한 스승 설리번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 또 설리번이 없었다면 헬렌 켈러 역시 세상의 무명존재로 말없이 왔다가 불쌍한 한 생명으로 소리 없이 떠났을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향하여서도 이 기도, 이 사랑, 이 헌신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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