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아내를 위로한다고 멀리서 친구 부부가 찾아온다고 해서 아침부터 할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덥수룩해진 머리를 먼저 잘라야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아내에게 미용실을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서려다 문득 아내를 한 번 안아주고 나가고 싶어서 안방에 들어가서 볼 키스를 하고는 돌아서려는데 아내가 한마디 한다.
“뽀뽀 말고 마사지, 너무 거저먹으려는 것 아니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30년을 당신 섬기며 살았는데 어디서 뽀뽀로 때우려고 하느냐”는 아내의 말이 크게 공감되어서 “저녁에 해 줄게”라고 말하고 돌아섰다. 사실인즉 아내는 나에게 참 신실한 사람이었다. 남들은 남편 덕에 편하게 목회한다고들 하지만 아내는 다른 남자들보다 열 배나 더 무거운 한 남자를 떠받들고 사느라 참 고생이 많았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 때문에 돌아서면 또 다른 일을 벌이는 남편이 버겁고 힘겨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묵묵히 모든 일을 뒤처리하면서 나의 목회 동역자로 30년을 지켜주었다.
“당신이란 사람 참, 버겁다” “교인 100명보다 당신 한 사람이 더 힘들어”
목회를 시작한 지 20년쯤 지났을까? 아내가 내게 한 말이었다. 평소에 말이 없던 아내의 푸념이 나는 그렇게 충격적이었다. 아내는 하나도 힘들지 않을 것이라고, 목회는 내가 다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내에게는 목회보다 남편이라는 존재가 더 버겁고 힘든 과제였다.
그래도 묵묵히 잘 버티던 아내가 연초에 갑자기 주저앉았다. 아침마다 일어나 아내가 30년 동안 해온 아침 밥상을 차리고 식사를 마치면 설거지하고, 일과를 시작하고 또 점심을 차리고 운동시키고, 도대체 쉴 틈이 없었다. 다행히 3개월쯤 지나면서 서서히 아내가 일어나 스스로 운동도 하고 아침밥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자 나도 최근에 조금 마음을 놓고 지낸 것 같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뽀뽀 말고 마사지”라고 제동을 건 것이다.
친구 부부를 보내고 서재에서 밀린 원고를 정리하면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있는데 마사지 크림을 꺼내 놓고는 약속한 대로 마사지하라고 신호를 보낸다. 어쩌면 아내가 원하는 것은 마사지가 아니라 진심이 담긴 남편의 관심이었을 것이다. 아내보다 일에 파묻혀서 아내의 말을 건성으로 들어 넘기는 남편이 늘 타인처럼 느껴져서 외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시간을 내서 제대로 된 마사지를 충분히 해 주었다. 지난 이틀간 잠이 안 온다고 하더니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잠든 아내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아내가 속히 털고 일어나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드렸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살펴보면 가르치는 일과 설교하는 일 그리고 치료하는 일로 대부분을 보내셨다. 그 가운데 치료사역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성경은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라고 적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르치시며” “전파하시며” “고치시니” 세 가지를 예수님의 공생애 3대 사역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고치신 병자들은 다양하다. 나병환자를 시작으로 중풍 환자, 혈루증 환자, 뇌전증 환자, 고창병 환자, 열병 환자, 시각 청각 등 다양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모든 사람을 고치실 때 주님은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셨다. 로마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실 때는 말씀으로 고치셨고 어떤 사람은 장소를 옮기셔서 고치셨으며 혹은 현장에서 손을 얹어서 고치셨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은 자기가 직접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나았다.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보지 못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누구 때문에 저렇게 되었는지 원인분석에 관심이 많았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을 고통에서 해방 시켜주는데 더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요 9:6~7)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그 사람은 시키는 대로 했고 돌아올 때는 눈이 밝아져서 볼 수 있었다.
왜 예수님은 백부장의 하인처럼 말씀으로만 그를 고치지 않았을까? 왜 어떤 사람에게는 말씀만으로 고치시고, 또 어떤 사람은 손으로 직접 만지시고 실로암 환자처럼 진흙 마사지까지 해서 고치셨을까?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치료 방법이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과 그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고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마다 사랑을 느끼는 방식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매일 사랑한다고 말을 해 줘야만 아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묵묵히 바라만 봐줘도 느끼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은 환자의 입장에서 그를 만나시고 그 사람이 가장 소원하는 그 방법으로 치료하셨다.
주는 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받는 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시고 그들의 처지에서 만나 주셨다. “나는 있고 너는 없으니 내가 주는 것이나 받아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가진 자의 횡포다.
그래서일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고 우리들의 위치에서 우리의 문제를 몸소 체험하시고 우리를 치유하시고 구원하셨다. 내가 해 주고 싶은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람이 원하는 사랑을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서 배운다. 그리고 오늘 나는 누구에게 어떤 사랑으로 다가가야 할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