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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정약용(丁若鏞, 1762.6.16~1836.2.22)
47. 정약종(丁若鍾, 1760~1801.2.26)
본관 나주(羅州).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진주목사(晉州牧使) 재원(載遠)의 아들. 약용(若鏞)의 셋째 형. 이익(李瀷)의
문인(門人)이 되어 성리학(性理學) 등을 공부한 후, 가톨릭 신자가 되어 1795년(정조 19) 이승훈(李承薰)과 함께 중국
청(淸)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맞아들이고, 1799년 서울로 옮겨와 문영인(文榮仁)의 집에서 살며 한국 최초의
조선천주교 회장을 지냈다. 전도에 힘쓰면서 《성교전서(聖敎全書)》 집필 중에 신유박해(辛酉迫害)를 만나 서소문
밖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저서로는 한자를 모르는 신도를 위해 우리말로 쓴 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가 있다.
정약종 성현은, 조선 왕조 후기에 속하는 시대인, 1760년에, 서울에 인접한 경기도 광주군 마재(오늘날의 경기도 남양
주시 와부읍 능내리 마재)에서, 진주목사였던 정재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갑술옥 사건(1694) 이후로, 관직에서 물러나 정계를 떠나기 시작한 양반 계층인 남인의 계보 속에서 성장하였다.
남인파의 실권은 정약종 성현과 형제들로 하여금 학구생활에 전념할 수 있게 하였고, 결과적으로, 이 가정은 당대로
저명한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성현의 형인 정약전 선생 (1758-1816)과, 동생인 정약용 선생(1762-1836)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학자들이었다.
특히 정약용 선생은 학문 연구 생활 중에 천주교 교리를 배웠고, 입교하여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한국 지성사
에 있어서 손꼽히는 인물로서, 다방면으로 자신의 많은 저서들을 통해서 새로운 사상을 내놓아, 오늘날까지도, 학계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정약종 성현은 강직한 성품과 함께, 뛰어난 통찰력과 꾸준한 탐구력을 지닌 청소년으로서, 시문과 경서에 능통하여
당시의 양반 자제들처럼 과거에 응시, 급제하여 관계에 진출할 수도 있었지만, 이를 포기하고 학문연구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우선, 성현은 유교 철학의 주자학과 노장(노자와 장자)의 도가 사상에 심취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주자학이 지나치게
공리공론에 치우쳤고, 도가가 허무맹랑한 사상임을 깨닫고 반발하기에 이르렀다.
때마침, 조선 왕조에는 학자들이, 부연사들을 통해서 17세기부터 서양문물과 함께 도입된 한역 천주교 서적들을 연구
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인척 관계를 맺고 있던 남인계통의 신진학자들은 '천진암'이라는 절에 모여, 그들이 탐구한
'천주학'(천주교 교리)의 새롭고도 이질적 종교 사상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전개하면서, '천주학'이라는 학문을 수용
하여 '천주교'라는 종교로서 그 신앙을 실천하기에 이르렀다. 19세의 정약종 선생도 위에서 언급한 그의 두 형제들과
함께 '강학회'라고 불리우는 이 모임에 참여하여, 교리연구와 함께 녹암 권철신 성현이 정한 규칙적 기도와 묵상의
공동생활에 참가하였다.
정약종 성현은 매우 신중한 청년이었기 때문에,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온 이승훈 베드로 성현이 강학회 회원들에게
세례를 주었을 때에, 입교를 서둘지 않았다. 그는 좀 더 많은 교리서들을 탐독하면서, 신앙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 후에,
1786년에 이르러서야 세례를 받았고, 영세 때에, 자신의 입교에 있어 망설이던 태도가 성 아우구스띠노(354-430)의
회심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여, 이 위대한 성인을 영세 주보로 모셨다.
정약종 아우구스띠노 성현은 입교한 후로는, 경건한 종교인으로서 독실하게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1791년에 일어난 '신해박해' 때에, 많은 친지들이 교회를 떠나고, 가족들이 천주교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약종 성현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천주교를 헐뜯고 신봉을 엄금하였지만, 성현은 이러한 문중 박해를 항구한 인내심을 갖고 참아 받으면서,
어버이를 공경하는 마음을 끝까지 간직하여 실천한 동시에, 신앙인의 본분도 충실하게 완수하였다.
더 나아가서 자녀들에게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을 심어주어, 훗날에 두 아들은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정약종 성현은 항상 많은 교회서적들을 정독하면서, 진지하게 천주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 전념하였다.
당시에 성현과 절친한 사이였던 황사영 선생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정 아우구스띠노는 무엇에나 자상하고
세밀하였다. 그는 여러 해를 두고 깊이 학문을 연구한 것이 아주 습관과 성품이 되어 버렸다.
조그마한 교리 한가지라도 분명하지 않다고 생각될 때에는, 침식을 잊고 전심전력하여 그것을 생각함으로 반드시
확실하게 깨닫고야 말았다.
말을 타고 가거나, 배를 타고 있거나, 언제나 묵상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혹시 자기가 통달하지 못하였던 어떤 어려운 점을 누가 풀어주면, 마음에 기쁨이 넘쳐흘러 그에게 뜨겁게 감사하였다."
또한 정약종 성현은 자신의 해박한 교리 지식을 갖고서 신자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신앙생활을 격려하면서 돌보아
주었다. 성현께서는 세속사정을 말하는데에는 어둡고 서툴렀으나, 종교적 진리를 연구하여 강론하기를 즐거워하였다.
황사영의 증언에 의하면, "그치고 타일러서, 혀가 굳고 아프게까지 되어도, 조금도 싫증내는 기색이 없었다.
아무리 우둔한 사람이라도 깨닫지 못하는 이가 없었다.
정 아우구스띠노는 교우들을 만나면, 관례적인 안부 인사를 나눈 후에, 곧 교리 이야기를 하여, 하루종일 다른 사람들
은 쓸데없는 말을 끼울 수 없었다.
냉담자나 우둔한 사람이 강론 듣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딱하게 여기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다.
사람들이 어떠한 종교 문제들을 질문하여도, 마치 호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이, 별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말이
줄줄 풀려 나와 끊어지는 일이 없었고, 아무리 연거푸 어려운 문제를 가려 내게 하여도, 조금도 막히는 일이 없었다."
성현의 논리는 질서정연하여, 신자들의 신앙을 견고케 하였고,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마음을 왕성케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광범위한 교리 지식과 함께, 교리 교육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열성을 지닌 정약종 성현은, 일반
대중을 위한 두 가지 교리서들을 저술하기로 결심하였다. 첫째, 교리서는, 두 권으로 된 「주요교지」로서 이는 한국인
이 처음으로 쓴 기초 신학서로 평가받고 있다. 저자는 여러 가지 한역 교리서들을 참고하고 인용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첨부하였다. 그리고 「주요교지」는 종교 진리를 갈구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순수한 한글로서 아주 쉽고 분명하게
해설하여, 무식한 부녀자나 어린이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진 책이다. 더욱이, 정약종 성현은 독자들이 생소
하고 이질적 문화 요소인 천주교에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당시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교리를 설명하였다. 「주요교지」의 내용은 10장 43개의 항목으로 기본적 교리를 간단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천주존재의 증명, 천주의 속성, 도교와 불교에 대한 비판, 상선벌악 및 천당과 지옥에 대한 실재, 천지 창조, 천주의 강
생과 구속, 예수의 부활과 승천, 원조의 범죄, 영혼의 불멸성, 천주교회 등이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정약종
성현이 사회 신분상으로, 양반 특수 계층에 속하는 학자로서 학문에 능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대중을 상대로 한글
로 저술한 것은, 그 자신은 당시에 자부심을 갖고 한문을 사용하던 지식층의 특권의식을 버리고, 인간의 평등사상을
터득하고 실천한, 참다운 그리스도교인임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교리서는, 미완성 작품으로서 「성교 전서」
이다.
정약종 성현은 천주교의 광범위하고도 방대한 내용의 교리들을 종합하여, 순서있게, 체계적으로 해설하여,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저술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저서는 '신유대박해' (1801) 때문에 "절반도 채 초잡지 못하고,
중단되어 그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그 동안에, 정약종 성현은 사교를 믿는다고 해서, 주위의 비난을 받았다. 1799년
5월 24일(음력)에, 대사간 신헌조가 정약종 성현이 천주교인들의 두목이라는 상소를 임금께 올렸다.
그러나, 정약종 성현은 1800년 5월에 그의 동네인 양근에서 박해가 일어나서,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이사왔다.
서울에 머물면서, 성현은 1795년에 한국에 온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신부와 자주 긴밀한 접촉을 갖고 있었고, 자기
집에 여러번 모시기도 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정약종 성현의 출중한 교리 지식과 그의 저서인 「주요교지」를 격찬하
면서, 이 저서를 신자 교육을 위한 표준 교리서로 승인하여 사용하도록 조처하였을 뿐 아니라, 성현의 교육에 대한
열성에 탄복하여, 교리 강습회인 '명도회'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00년 6월 28일(음력)에, 11세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의 계조모인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시행
하면서, 자기 가정의 정적에 대한 보복으로 11월(음력)에 이르러, 천주교 신자들을 단속하고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교회 박해의 분위기가 점차로 고조되자, 정약종 성현은 이미 자신이 천주교의 대표적 인물로 지적되었기
때문에 도저히 박해를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귀중한 성물과 교리서,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편지 등을 상자에 넣어
다른 교우 집에 맡겨 두었다.
그러나, 1801년 1월 10일(음력)에 김대비가 국왕의 이름으로, 천주교를 사악한 종교로 정죄하여, 엄금하는 윤음을
발표하였다. 그래서, 1월19일(음력)에 상자를 보관하고 있던 집도 위험하여, 집주인은 다시 다른 집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그래서 임대인(토마스)이 나무 장사로 가장하여, 상자를 솔잎으로 덮어 짊어지고 거리에 나왔다.
그러나 순시하던 포졸이 짐모양이 이상하여 국가에서 금지하는 밀도살 쇠고기를 운반하는 것으로 의심하고, 임대인
을 관청으로 연행하여 상자를 열어보니, 천주교에 관계되는 서적과 물건임을 발견하고, 이를 운반자와 함께 포도청
에 압송하였다.
포도대장은 상자의 주인이 정약종 성현임을 확인하고, 우선 물건들을 압류하는 동시에, 임대인을 구속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때에 어느 친구가 정약종 성현을 방문해서, 그의 옷에서 무수한 십자가가 밝게 빛나는 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에, 성현은 대답을 회피하여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것이 정약종 성현이 곧 고통을 받으리라는 전조라고 예측하였는데, 이는 들어맞았다고 한다.
1801년 2월 11일(음력) 아침에, 정약종 성현은 고향 마재에 들렀다가, 말을 타고 한양으로 오는 도중에, 금부 도사가
마주쳐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자신을 체포하러 가는 것이라 추측하고, 하인을 보내어 자기를 잡으러 가는 것이 확실
하면 되돌아오라고 알렸다. 성현의 추측은 들어맞았다.
정약종 성현은 곧장 관가로 압송되었다. 그는 심문관 앞에서 압수된 상자가 자기의 것임을 자백하였으나, 주문모 신부
에 대한 질문에는 침묵을 지켰다. 이때에, 성현께서 정부당국에 협조하고 배교하였다면, 자기의 목숨은 몰론 그의
가정의 비참한 운명을 구할 수 있었다. 특히, 정약종 성현은 자기의 신앙고백으로 재산이 몰수되고, 가족들은 친척들
에게까지 버림을 받아, 비참한 생활을 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하게 자기의 신앙이 진실됨을 밝히고 오히려 교리를 설명하면서, 천주교를 변호하고 정부의 금교
정책이 부당하다고 용감하게 선언하였다.
이러한 호교적 자세는 왕명에 도전하는 불경죄로 단죄되었다. 또한, 정약종 성현은 압수된 그의 일기 속에서, 세상,
마귀, 육신은 천주교 신자들이 올바른 신앙 생활을 위해서 항상 대적해야 하는 세가지 원수라고 하는 교리내용을
적었는데, 여기서, 세상이라는 표현이 정부를 지칭하는 말마디로 간주되어 국가 전복의 모반죄로 정죄되었다.
따라서 2월 25일(음력)에, 정약종 성현은 이상의 두 가지 대역부도의 죄로 기소되어, 참수형의 선고를 받았다.
정약종 성현이 최필공(토마스)과 함께 감옥에서 나와 함거에 올라 형장으로 갈 때에, 성현의 얼굴은 매우 빛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성현께서는 죽는 순간까지도,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였다. 도중에 함거를 끄는 사람에게,
"목마르다"하고 외쳤을 때에 사람들이 조용하라고 힐책하자, "내가 물을 청하는 것은 나의 위대하신 그리스도의 모범
을 본받기 위함이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정약종 성현은 큰 소리로 주위의 사람에게 말하기를, "당신네는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은 당연히 할 일이요. 대심판 때에 우리의 슬픈 울음은 진정한 낙으로 변할 것이요."라고
하였다. 형장에 도착 후에도, 정약종 성현은 형구 앞에 앉아, 아무런 두려움의 표정이 없이, 행복한 기색으로 형구를
들여다보고 나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흠숭하올 천지만물의 대주재이신 분이 당신들을 창조하셨으니, 모두 회개
하여 당신들의 근본으로 돌아와야 하오. 그 근본을 어리석게 멸시와 조소거리로 삼지 마시오. 당신들이 수치와 모욕
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내게는 곧 영원한 영광거리가 될 것입니다." "당신네는 두려워 마시오. 이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당신네는 겁내지 말고, 이 뒤에 반드시 본받아 행하시오." 형리는 정약종 성현의 말을 가로막고, 나무 위에
머리를 대라고 하였다.
이 신앙의 증거자는 눈을 뜨고, 얼굴을 하늘로 향하여, 머리를 누이면서,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죽는 것이 낫다" 라고 말하였다. 이 말에 사형 집행인은 겁을 먹고, 자신이 없이 칼을 내리쳐서, 목이
절반 밖에 끊어지지 않자, 정약종 성현은 벌떡 일어나 앉아서, 보라는 듯이 손을 벌려 십자 성호를 긋고, 조용히 다시
처음 자세로 되돌아가 마지막 칼을 받아, 2월 26일(음력)에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정약종 성현의 나이는 41세였다.
48. 정제두(鄭齊斗, 1649~1736)
본관 연일(延日). 자 사앙(士仰). 호 하곡(霞谷). 시호 문강(文康). 서울 출생. 1668년(현종 9) 별시문과 초시에 급제했
으나 정국의 혼란을 통탄,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680년(숙종 6)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사포
서별제(司圃署別提)가 되나 사퇴하였고, 1684년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잠시 지낸 뒤 다시 사직하였다.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중신(重臣)의 천거로 30여 차례나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숙종 때 주부(主簿) ·호조참의 ·회양부사
(淮陽府使) ·한성부윤, 경종 때 대사헌 ·이조참판, 영조 때 우찬성(右贊成)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 등을 잠시 지냈을
뿐, 거의 다 거절하고 주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처음에는 주자학(朱子學)을 공부하였으나, 뒤에 지식과 행동의 통일을 주장하는 양명학(陽明學)을 연구 발전시켜 최초
로 사상적 체계를 세웠다. 문집으로 《하곡문집(霞谷文集)》과 저서로 《존언(存言)》 《성학설(聖學說)》 《논어해
(論語解)》 《맹자설(孟子說)》 《중용해(中庸解)》 《천원설(天元說)》 《경학집요(經學集要)》 《경학서성(經學書成)》
등이 있다.
본관 하동(河東). 자 현로(玄老). 실학자 상기(尙驥)의 아들. 1743년(영조 19)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 동몽
교관(童蒙敎官)이 되고, 47년 검열(檢閱) ·지평(持平)을 거쳐 1756년 정언(正言)을 지냈다. 다음해 장령(掌令)으로 어제
(御製) 《상훈연성(常訓衍成)》을 필사하여 녹비[鹿皮]를 하사받았다. 1762년 장연부사(長淵府使)로 있을 때 암행어사
신익빈(申益彬)의 탄핵으로 파직되었으나, 곧 등용되어 이듬해 사간(司諫), 1767년 집의(執義)가 되었다.
실학자로서 특히 지리학 연구에 뛰어나 백리척(百里尺) 지도인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를 제작, 1757년 영조는
이 지도의 면밀 ·상세함을 보고 “칠십 평생에 처음으로 백리의 땅을 지척에서 본다”고 격찬하고 홍문관에 그 1부를
모사하게 하였다. 저서에 《상훈집람(常訓輯覽)》이 있다.
1743년(영조 19년)에 문과정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수찬(修撰) · 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1747년(영조 23년) 익릉별검을 거쳐, 1748년(영조 24년)에는 승문원에 들어갔다.
같은해 가주서로 한림회권에는 참가할 수 없었으나 영조의 탕평을 표방한 특명으로 이권(二圈)을 더하여 소시(召試)에
응하도록 하여 뽑히도록 하는 등 특은(特恩)을 입었으며 이것으로 쳥요직인 예문관검열이 될 수 있었다.
1751년(영조 27년)에는 중인(中人)의 분산(묘를 쓴 산.)을 탈취하였다 하여 1년 이상 삼척에 유배되었다.
1753년(영조 29년) 호서암행어사에 임명되어 균역법의 시행을 조사하고 실시과정상의 폐단과 변방대비 문제를 진언
하였다. 이후 홍문관수찬, 사간원헌납, 홍문관교리, 사헌부집의를 거쳤고 특히 세자(世子)의 학문정진에 대한 많은
건의를 하였다.
1755년(영조 31년)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나자 문사랑으로 활약하였고, 그 공로로 승정원 동부승지가 제수되었다.
이후 이천도호부사와 대사간을 역임하고, 《열성지장 列聖誌狀》 편찬에 참여한 공로로 1758년(영조 34년)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어 세자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목숨을 걸고
이를 극력 막아 철회시켰다. 이 사건으로 하여 후일 영조는 채제공을 지적하여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정조에게 말하였다 한다.
1770년(영조 46년) 드디어 병조판서가 되어 군마의 관리에 노력했고, 같은 해 예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어 국가
재정 확충과 국제교역에 필요한 은과 삼의 확보에 힘을 기울였다. 영조 47년(1771)에는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있으
면서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72년(영조 48년)부터 세손우빈객(世孫右賓客)이 되어 세손의 교육과
보호를 담당했다. 이에 겸하여 공시당상(貢市堂上), 지경연사, 홍문관제학이 되고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세손(뒤의 정조)과의 관계는 이때 깊어졌다.
1774년(영조 50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평안도관찰사에 재임하면서 서류통청(庶類通淸)은 국법의 문제
가 아니므로 풍속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의 상소로 서얼 출신자에게 구타당하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병조판서
와 영조의 깊은 신임으로 내의원제조를 지내며 영조의 병간호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정조가 왕세손으로 대리청정한
뒤에는 호조판서와 좌참찬으로 활약했다.
1776년(정조 즉위년) 3월에 영조가 죽자 국장도감 제조에 임명되어 행장·시장·어제·어필의 편찬작업에 참여하였고,
곧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이어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 당시의 영의정 김상로 등 사도세자를 모해했던 세력의
옥사를 처결하였고, 그 공로로 보국숭록대부로 가자되었다. 이해 가을 홍계희 등이 호위군관과 공모하여 정조를 살해
하려는 사건이 일어나자, 궁성을 지키는 수궁대장에 임명되었다. 정조특명으로 사노비(寺奴婢)의 폐를 교정하는 절목
을 마련함으로써 정1품에 이르렀다. 정조 원년과 정조 2년에도 한성부 판윤을 지냈다.
이후 규장각제학, 예문관제학, 한성판윤, 강화유수를 역임하였고, 1778년(정조 2년)에는 사은 겸 진주정사로 중국에
다녀왔는데, 이때 박제가, 이덕무등 서류로서 학식이 있던 이들을 동반했다.
1779년(정조 3년) 당시의 권세가 홍국영과의 마찰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가, 이듬해 홍국영이 실각하자 다시 예조
판서에 등용되었으나, 1781년소론계 서명선 정권이 집권하면서 홍국영과의 친분, 사도세자에 대한 신원의 과격한 주장,
정조 원년에 역적으로 처단된 인물들과의 연관하여 그들과 동일한 흉언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집중공격을 받자 벼슬을
버리고 서울근교 명덕산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1786년(정조 10년) 평안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삭직되었다
가 이듬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788년(정조 12년) 국왕의 명으로 우의정이 되었고 이때 황극을 세울 것, 당론을 없앨 것, 의리를 밝힐 것,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 권력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의 6조를 진언하였다.
1790년(정조 14년) 좌의정이 되었는데 영의정과 우의정이 없는 독상체제가 3년간 지속되며 정사를 좌우했다.
이 시기에 이조전랑의 자대제(自代制) 및 당하관 통청권의 폐지, 신해통공책 등을 실시했다.
1790년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남인 계열인 동시에 신서파의 영수로서 공서파와 대립하여 천주교 신봉의
묵인을 주장했으며, 이듬해 육의전 외에 시전의 금난전권을 박탈하는 '신해통공' 을 실시했으나 진산사건이 터지자
공서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1792년 좌의정으로 복직했다.
1793년(정조 17년)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전일의 영남만인소에서와 같이 사도세자를 위한 단호한 토역을 주장하여,
이후 노론계의 집요한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로 여러 차례 파직과 유배 등의 처벌을 받았으나 정조의 신임으로
바로 복직하였다. 화성유수가 되어 정약용과 함께 수원화성의 축조를 담당하다가 1798년(정조22년)에 이르러 사직
하였다.
1799년(정조 23년) 판중추부사로 재직 중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사림장(士林葬)으로 장례가 거행되었고, 묘는 경기도
용인에 있다.
1801년(조 1년)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면서 삭탈관직이 되었다가 1823년 영남만인소로
관작이 회복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이황·정구·허목·이익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적통으로 여겨 양명학·불교·도교·민간신앙 등을 이단이라고 비판하였다.
경기감사로 있을 때는 이익을 찾아가기도 했다. 서학(천주교)에 대해서도 그것이 비문화적·비윤리적·비합리적이라고
보았다. 즉 서학이 무부무군한 논리이고 그 내세관이 불교와 비슷하며, 이적이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학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교화와 형위·주륙 중에서 교화를 우선시했다.
따라서 그가 재상에 있는 동안에는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확대되지 않았다.
상업활동이 국가재정에 필요함을 인식하였으나 전통적인 농업우선정책을 지켰다.
그는 자신이 사는 시기를 경장이 필요한 시기로 인식했으나 제도의 개혁보다는 운영의 개선을 강조했다.
따라서 중간수탈과 부가세를 없애고 간리들의 폐를 제거함으로써 국가재정의 충실을 기하고자 했다.
재정문제에 도움을 준다는 의미에서 만부후시의 복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당쟁에 대해서는 그것이 오로지 부귀를 누리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귀들의 사익추구에 기인하는 것
이라 보고 붕당의 결과로 나타나는 세경의 폐를 지적했다.
남인청류(南人淸流)의 지도자인 오광운·강박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채팽윤과 이덕주에게서 시를 배웠다.
문장은 소(疏)와 차(箚)에 능하였고, 시풍은 위로는 이민구·허목, 아래로는 정약용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정범조·이헌경·신광수·정재원·안정복 등과 교유했다. 순조조에 박해를 받았던 최헌중·이승훈·이가환·정약용 등 남인
계열이 그의 정치적 계자가 된다.
저서로는 〈번암집〉이 전하며, 〈경종수정실록〉·〈영조실록〉·〈국조보감〉의 편찬에 참여했다.
순조 때 유태좌(柳台佐)가 청양(靑陽)에 그의 영각(影閣)을 세웠다. 1965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에 홍가신·
허목·채제공을 모시는 도강영당이 세워졌다.
1803년 개성의 양반 가문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종숙 최광현의 양자로 들어갔고 1825년 진사 시험에 급제한 일이 있
지만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다. 가세가 넉넉한 양부의 덕택으로 중국에서 발행한 책들을 수입하여 이를 바탕으로 연구
하고 글을 쓰는 데 평생을 보냈다.
일찌기 조선의 지식인들이 접하지 못한 과학 사상을 받아들여, 이를 바탕으로 동양의 철학과 서양의 과학을 접목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철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학문은 자연과학적 사유를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영역에까지
두루 적용하고자 했다.
순조 25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전심했다.
그가 살던 19세기 실학의 특색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이라든가 이용후생(利用厚生) 대신 금석(金石)·고증학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조가 주류를 이루던 때이다. 그의 철학 사상은 바로 이러한 실사구시의 실증 정신을
이어받고 이루어진 것으로서, 조선 후기 실학 사조의 마지막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실증 정신은 우선 실감할 수 없는 이(理)보다는 실감할 수 있는 기(氣)를 택한다. 그는 이기론(理氣論)에서 유기
(唯氣)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는 무형(無形)하고 기는 유적(有跡)한 것이어서 그 적(跡)을 따르면 이가 스스로 나
타나는 것이니 이는 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유기론의 입장으로부터 그는 공허한 명목(名目)에 얽매
이지 않고 알찬 내실(內實)에 착안하는 일종의 유명론(唯名論)의 사상을 싹트게 했다. 즉 그는 "눈(目)이라는 이름과
귀(耳)라는 이름을 서로 바꾼다면 눈을 귀라고 부르고 귀를 눈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지만, 보고 듣는 실용에 있어서는
바뀌어지는 법이 없다. 귀로 본다고 하며 눈으로 듣는다고 하더라도 보고 듣는 실용에 있어서야 무슨 해(害)가 있겠
는가?" 라고 말하였으니, 이 유명론적 사상이 모든 명분론(名分論) 내지 형식주의에서 벗어나게 하는 기반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실리주의(實利主義)·실용주의 나아가 실증을 중요시하는 경험주의도 유명론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경험론을 아래와 같이 피력한다.
"종을 치면 소리가 난다는 것을 만일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다면, 종을 치기 전에 치면 소리가 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그는 주자학에서 말하는 선천적인 이성(仁義禮智)의 능력을 부인한다.
이와 같이 경험에 의한 지식 그리고 어디까지나 실용성이 있는 지식의 확충을 위하여 인간은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실용을 힘쓰는 자가 결국 이기고 허문(虛文)을 숭상하는 자가 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서양은
서로를 알아야 하며, 알기 위하여 문호를 개방하고, 서로를 위하여 통상의 길까지 터야 한다는 것을 그는 역설하였다.
사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그의 기(氣)의 형이상학의 귀결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경험론자다운 기의 형이상학이
있다.
그 형이상학은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으니 '대기운화(大氣運化)'론과 '통민운화(統民運化)'론이 그것이다.
전자는 우주·자연에 관한 이론이며 후자는 인간사에 관한 이론이다. 대기운화론이란 우주 자체가 기의 운동 변화로
자연의 이법(理法)을 구현하여 간다는 것이며, 통민운화론이란 기수(氣數)에 의하여 인간 또는 인류의 흥망 성쇠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기운화'와 '통민운화'는 궁극에 가서 잘 조화 일치해야 하는 것으로 그는 생각한다.
결국 '통민운화'가 '대기운화'에 조화 일치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도
록 흥망 성쇠를 결정짓는 기수를 극복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수 극복의 사상 속에 바로 그의 진보주의적 역사관이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예나 지금이 같다 하더라도 예를 버리고 지금을 택하겠다"고 그는 주장했다.
경험 지식의 확충, 실리·실용을 위한 문호 개방 및 통상론이 모두 이 진보주의적 사상과 관련된 것으로 보아야겠다.
시대의 비운에 휩쓸리지도, 궁핍하지도 않은 환경에서 지낸 최한기는 영의정을 지낸 바 있는 최항의 후손이다.
그는 동서 과학 분야의 장단점을 이해하고 서양의 발전된 사상, 과학을 조선의 구조에 선택적으로 수용한다는 생각
으로 일관된 저술을 하였다. 조선의 쇄국은 침체된 무발전의 원인이 됨을 지적하며 개국통상의 필요성을 용기있게
논하기도 했다. 기독교 사상의 침입도 객과 주인의 자리를 현명하게 지키면 오히려 덕이 된다 하였다.
그는 가문이 몰락하고 평범한 향반으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밀려 벼슬을 지속해 나갈 수 없게 되자 중인들과 어울리며
시야을 넓혀 나갔다. 서울로 무대를 옮긴 후 역관·서자·평민 출신들과 교류하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판각을 돕는 한편
기존의 관념론을 탈피하고 경험철학의 기반을 닸았다. 그가 제시하는 사고의 방법은 경험한 바를 기초로 아직 경험하
지 못한 것을 생각할 줄 안다면 누구나 자신의 생활 환경과 습관에 따라 추측하면서 그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추측론
이었다.
북경인화당에서 출판되어 중국인 사이에서도 읽혔던 《기측체의(氣測體義)》는 동양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서양의
발전된 과학 기술과 융합하여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기측제의》는 그의 저서 <신기통>과 <추측론>을 합쳐
엮었는데 북경에서 간행된 정확한 경위는 알 수가 없다. 이 책은 기존의 책과 비교해 특이한 면이 있는데 활자가 호화
판이고 체제가 매우 고상하게 편집되어 있다. 《심기도설(心器圖說)》에선 과학 서적을 접하며 기구의 개량에 힘썼고,
우주관이나 지구의 자전론이 근본적으로 변화를 보인 《지구전요(地球典要)》는 코페르니쿠스의 자전과 공전의 내용
을 전하고자 하였지만 중국에 소개된 책을 편집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얻으려면 옛 것에만 집착해선 안 되며
저마다의 가치가 있으므로 소중히 하며 인사(人事)의 바른 등용도 촉구했다.
1834년 최한기와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지구전도(37.0*37.5cm).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원문보기: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0770
지구후도(37.0*37.5cm)
평탄한 생활에서 1천여 권의 책을 집필하며 다복한 삶을 살았던 최한기의 끊임없던 저술 활동은 1970년 이후 새로운
시각으로 연구되어 그의 삶을 통해 역사의 배경을 배울 수 있으나 현실에 적용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1830년에서 1867년까지 번역하거나 지은 책이 무려 1천여권이나 된다고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 남아있는 책은 20여종 120여권이다. 이들은 명남루전집(明南樓全集) 3책으로 영인본이 나와 있기도 하다.
한백겸은 1552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한효윤(韓孝胤)는 경성판관을 지냈고, 숙부인 한효순(韓孝純)은 대북(大北)파의
영수이며 광해군때 좌의정으로서 폐모론을 주도했으나 한백겸 형제는 이에 가담하지 않았고 당파로는 남인(南人)에
속했다. 아우 한준겸(韓浚謙)은 문장에 뛰어났고 선조(宣祖)의 유언을 받은 일곱 신하의 한 사람으로서 호조판서,
5도도원수를 역임하고 인조의 장인으로서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지고 영돈녕부사를 지냈다.
그러나 한백겸은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젊은 시절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화담 서경덕의 제자였던 행촌(杏村) 민순(
閔純)의 문하에 들어가 그로부터 소학》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계속하여 의리(義理)에 관한 연
구에 힘써 육경논맹(六經論孟)과 염락관민(濂洛關閩)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한백겸은 과거 시험에는 응하지 않고 학문 연마에만 힘을 쏟다가, 1586년(선조 19) 주변의 천거로 받아 관직에 올라
중부참봉(中部參奉)·경기전(慶基殿) 참봉·호조좌랑·형조좌랑을을 지내다가 외직인 황해도의 안악현감으로 발령받아
2년간 근무하다가 다시 함종현령을 지내고 강원도 영월군수에 부임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 때 연좌되어 귀양 갔다. 임진왜란 때 석방되어 적소에서 적군에게 아부하여 난을 선동한
자들을 참살한 공으로 내자직장(內資直長)이 되었다가 여러 내외직을 거친다.
1602년 청주목사를 지내고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통정대부 오른다. 장례원 판결사와 호조참의를 지냈다.
1608년에 선조가 죽었을 때 대신들은 한백겸이 예(禮)에 밝다 하여 빈전(殯殿)의 모든 상례(尙禮)를 맡겼다.
1612년 60세 때에 파주목사에 발령되었으나 벼슬을 사퇴하고 낙향하여 학문연구에 몰두한다. 1615년 64세에 명저인
《동국지리지》의 저작을 마치고 그해 가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묘갈명은 정경세(鄭經世)가 썼다.
묘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 산481-1
한백겸의 아들 한흥일은 효종때 우의정을 역임했고, 아우 한준겸은 인조의 국구로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아들이 정승에 오르면서 영의정에 추증되고 자신이 세웠으며 원천석을 모신 칠봉서원(七峯書院)에 그 자신도 배향
된다.
《동국지리지》는 60장에 이르는 작은 책자이다.
불과 한 편의 논문에 지나지 않은 책이지만 그의 독창성과 비판정신이 가득한 학문적 태도 때문에 영향력은 상당
하였다.
한백겸의 학문적 업적으로는‘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과 ‘기전도(箕田圖)가 있다. 기전도는 고조선의 왕 기자(箕子)가
시행하였다는 정전(井田) 제도의 유적이 평양에 남아 있음을 입증하였다. 유제설과 한백겸의 이 그림이 후대의 토지
제도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후대에 실학자들이 쓴 《반계수록》과 《경세유표》에는 토지정책의 핵심은 토지소유의 평등, 균등화로 분배를 공정히
하자는 것으로, 주자(朱子)가 부인한 이유로 주자 이후의 보통의 성리학자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던 정전제도가 한백겸
의 실증적 연구결과를 통해 실재했음이 밝혀져 후세에 공전제(公田制)의 확충을 주장하던 실학자들이 자신들의 학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활용되었다.
한백겸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통곡하던 친구들이 많았다. 당대의 재상이며 한백겸의 절친한 친구
였던 오성 이항복이 최초로 통곡한 사람으로 그는 한백겸의 죽음에 제문을 바쳤다. 이항복은 우선 한백겸이 당대의
주역 연구의 큰 학자라 하였으며, 모든 경서에 두루 밝았으나 유독 《주역》에 깊은 연구가 있어 당시의 세상에서 모
두 그가 큰 주역학자임을 인정했다고 하였다.[2] 또 다른 친구로 대제학에 이조판서를 지낸 우복 정경세(鄭經世)가
있는데, 뒤에 정경세는 한백겸의 묘갈명을 지어 한백겸은 당대의 주역학자로 국가에서 간행한 《주역전의(周易傳義)》
라는 책의 교정을 맡았다고 하며 칭송하였다.
《반계수록》과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를 쓴 반계 유형원은 “오직 근세의 한백겸이 변론했던 것이, 천년동안
정해지지 못했던 것을 깊이 알아냈으니 그분의 학설에 의해서 확정한다”고 격찬하며 그의 학설을 그대로 수용하였고,
여암 신경준, 순암 안정복 등도 한백겸 학설에서 일정분의 영향을 받았음이 확인되고 있다.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도 그의 저서 《아방강역고》에서 “한백겸의 학설은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라고
단정하여 높은 수준의 학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2] 역사학자 이기백 교수는 《구암유고 동국지리지》서문에서 “그의
주장이 반드시 옳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당시의 학문적 수준에 비추어볼 때 그의 주장은 실로 놀랍도록 참신한 새 학
설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주장은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 여러 실학자들의 전제개혁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허균은 1569년(선조 3년) 음력 11월 3일에 초당 허엽의 삼남 삼녀 가운데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허균은 아버지 초당
허엽의 둘째 부인인 강릉김씨 예조참판 김광철(金光轍)의 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아들이다.
그의 부친 초당 허엽은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동인의 영수가 되었던 인물로, 그의 나이 12세인 1580년(선조 13년)
에 부친 허엽이 상주의 객관에서 별세하였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배우다가, 나중에 둘째 형의 친구인 손곡
이달(李達)에게서 배웠다. 서자 출신으로 출세가 어려웠던 이달의 처지에 비애를 느끼고 홍길동전을 지었다 한다.
그의 나이 17세 때인 1585년(선조 18년) 초시에 급제하고, 김대섭의 차녀와 결혼을 한다. 21세 때인 1589년 생원시에
급제를 한다. 24세 때인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을 피해 피난 중이던 부인 김씨가 단천에서 첫아들을 낳고 사망
한다. 허균은 외가 애일당 뒷산의 이름을 따서 교산이라는 호를 사용하게 된다.
1593년(선조 26년) 그의 나이 25세 때 한국 최초의 시평론집인 《학산초담》을 지었었으며, 이듬해인 1594년(선조
27년)에는 정시을과에 급제하고, 1597년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를 한다. 그러나 1597년 황해도 도사가 되었으나
기생을 가까이 한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면당했다. 1604년(선조 37년)에 성균관 전적이 되고, 수안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불교를 믿는다는 다시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사퇴하였다.
1606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에 임명되자, 누이 허초희의 시선을 모아 명나라 사신으로
온 주지번에게 주어 그녀의 사후 18년 뒤에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출간되게 된다. 1607년(선조 40년) 삼척부사와
공주목사를 역임하고, 《국조시산》을 편찬한다. 그해 음력 5월 6일 숭불(崇佛)했다 하여 파직되었으나 얼마 뒤
내자시 정으로 임명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재위에 오르자, 이듬해 1609년(광해군 1년) 형조 참의가 되고, 다음해 명나라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
문을 얻어 왔다. 1610년 함열에 유배됐고, 1611년(광해군 3년) 문집 《성소부부고》64권을 엮었고, 1612년에는 최초
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저술한다.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 때 피화(避禍)하였다가 이듬해 1614년(광해
군 6년) 호조참의가 되었고, 그해에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5년에도 문신정시에서 1등을 하고,
정2품 가정대부에 올라 동지 겸 진주부사가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다. 1616년(광해군 8년) 정2품의 형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1617년에는 길주에 유배됐다가 다시 정2품 좌참찬에 오른다.
1618년 기준격이 상소를 올려 허균이 왕의 신임을 얻은 것을 기화로 반란을 계획한다고 모함하고, 허균이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그의 심복들과 함께 능지처참형을 당해 생을 마감한다.
1618년 8월 남대문 격문이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고 한다.
그의 처형을 두고 당시 조정의 권신이었던 유희분이 죄인에 대한 면밀한 심문 없이 자백 직후 형을 집행했다 하여 의문
을 제기하면서 작은 소동이 일었다. 이를 두고 허균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했던 또 다른 권신 이이첨이 처형의 정당성과
허균의 역모 혐의를 강조하면서 이 논란은 가라앉았으나, 허균이 능지처참되던 날 형장에서 죄안에 서명하기를 거부하
였다는 증언이 있어 의문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허균은 처형 직전 광해군이 친국하는 자리에서 광해군을 향해 '할 말이 있다' 고 외쳤으나 곧 제지당하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또한 이이첨은 허균이 의금부에 하옥되어 있던 당시 허균에게 처벌은 없을 것이라며 꾸준히 안심시켰다고
또한 실록은 '왕 역시 허균의 역모와 관련하여 사실 관계를 더 파악하려고 하였으나 권신들의 강압으로 형을 집행할수
밖에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군다나 허균과 함께 능지처참형을 당한 김개는 1678년(숙종 4년) '결정적인 죄안이
없다'는 당시 도승지였던 김석주의 주청에 따라 신원되면서 허균의 죄안의 존재 여부 자체에 대한 의문을 낳고 있다.
이러한 의문점 때문에 그의 하옥부터 형 집행의 순간까지를 소설화하거나 드라마로 제작하는 등 많은 흥밋거리도
낳고 있다.
1623년 3월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시절의 무수한 옥사로 희생된 사람들은 거의 복권과 추숭이 이루어졌으나, 허균만은
유일하게 조선왕조가 멸망하던 시점까지 역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처형을 예감하고 자신의 문집 《성소부부고》를 자신의 외가에 비밀리에 의탁했으며, 이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그의 사상과 학문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어 있다.
죽음이 임박해옴을 예감한 허균은 1617년말 맏사위인 이사성(李士星)에게 자신이 수집한 4000여권의 장서도 맏사위
이사성에게 보낸다.[3] 또한 자기 문집을 정리해 큰사위에게 보낸다. 허균의 문집은 외손자이자 이사성의 아들인
이필진에게 전해졌고 이필진의 묘지명에 허씨의 책 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그가 지은 소설 《홍길동전》은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허균이 진보적인 종교인이어서, 천시 받던 불교는 물론 천주교회까지 신봉하였다는 평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