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용의 노후를 거울삼아
계절은 바야흐로 여름이 무르익고 있다. 무더위를 피하며 올여름을 어찌 보낼까 궁리한다.
중국 구양수는 《육일거사전》에서 곁에 만 권의 서적, 천 권의 금석문, 한 병의 술과 거문고, 그리고 바둑판을 두고 즐겨서, 자신까지 합쳐 여섯이 되므로 스스로 육일거사라고 호를 지었다.
남유용(1698∼1773)은 이것이 번다하다고 하여 서적과 술만 들어 자신과 함께 하나가 되라고 삼일당이라 당호를 정했다. 그는 사람이 무엇인가에 재미를 느끼면 빠져들게 되며 마음의 짐이 된다고 하였다. 구양수는 벼슬을 싫어하여 강호에 물러나 살았으니 그 점은 높이 살 만하지만, 책과 금석문, 거문고와 술, 그리고 바둑을 즐기면서 그것이 마음의 누가 되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자신은 책과 술만 취하고 나머지를 버림으로써 마음의 누가 되는 가짓수를 줄였다고 했다. 책과 술은 다른 욕심을 줄여주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마음의 누가 되지 않는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술이 없으면 세상사가 너무 무미건조하고 책이 없으면 방탕해지기 쉽다며, 인생에 있어 이 두 가지는 꼭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남유용은 벗 오원에게 보낸 편지에 “책 일만 권이 있고 술 한 병을 두면, 한 번 마시고 한 번 시를 읊조리기에 충분하다. 기분이 절로 좋아 즐거우니, 작게는 세사의 득실은 다르지 않게 여기고 영욕에 대한 생각을 잊을 수 있으며, 크게는 육체적인 문제를 도외시하고 죽고 사는 것을 하나로 여기게 된다.”고 적었다. 고려의 이규보는 시와 술 밖에도 거문고를 좋아한다며, 스스로 삼혹호(三酷好)라 불렀는데, 남유용은 이규보를 흠모한 게 틀림없지 싶다.
지인 중에 L 회장은 수필을 쓰고 색소폰을 불며, 서예를 즐기고 술도 잘 한다. 구양수 식으로 표현하면 ‘오일거사’쯤 된다. C 문우는 글을 쓰면서 대금을 멋지게 불고 한국화도 잘 그린다. 게다가 당구에 일가견이 있고 술을 잘하는 편이다. 그는 구양수 같이 육일거사임이 분명하다.
나는 어떤가? 드럼을 조금 배우다 말고, 당구는 젊은 날 몇 번 쳐보았을 뿐이다. 술도 멀리한 지 오래고 겨우 수필과 붓글씨 정도가 남았으니, 남유용과 같이 ‘삼일거사’쯤 될까? 허나 글쓰기는 어렵고, 서예는 2년째 초짜다. 그렇다고 둘 중에 하나를 버리고 이일거사가 된다면 너무 단출하지 않은가.
그렇지, 술 대신에 커피를 마시고 당구는 못 치니 파크 골프라도 열심히 하면 영역이 조금은 넓혀질 것 같다. 악기를 새로 배우기는 세월이 아까우니 트롯트나 가곡 감상으로 대신하면 될 듯싶다.
조선 중기의 문신 김정국은 부정하게 재물을 탐하여 선산군수로 폄적된 지인 황여현에게 편지를 썼다. 사람이 늘그막에 보내는 데 꼭 필요한 열 가지를 나열했다.
‘없어서는 안 될 것은 오직 서적 한 시렁, 거문고 하나, 벗 한 사람, 신 한 켤레, 잠을 청할 베개 하나, 바람 통할 창 하나, 햇빛 쪼일 마루 하나, 차 달일 화로 하나, 늙은 몸 부축할 지팡이 하나, 봄 경치를 찾아다닐 나귀 한 마리입니다. 이 열 가지는 비록 번거롭더라도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늘그막을 보내는 데 있어 이밖에 무엇을 더 구하겠습니까?’
남유용은 정언 벼슬에 있을 때 영조의 탕평책을 비판했다가 전남 해남으로 유배되었고 2년 뒤 해배되었다. 그 뒤 홍문관 응교, 승지, 대사성, 예조참판, 예문관, 홍문관 제학을 거쳐 세손인 정조의 원손보양관이 되었다. 세손이 세 살 때부터 무릎에 앉히고 효경과 소학을 지성스럽게 가르치고 열 살이 될 때까지 유학의 기초를 세워주었다. 만년에 대사헌, 호조참판, 형조판서를 거쳐 벼슬에서 물러났다.
남유용은 문장과 시에 뛰어났지만, 청렴하여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죽은 뒤 문집을 내지 못하자 정조가《뇌연집》을 출간토록 지원해주고 서문까지 써주었다. 정조의 스승으로 신임이 두터웠던 터에, 그의 아들 남공철은 정조 때 영의정에 올랐다. 부친의 올곧은 성정과 바른 생활 자세를 이어받은 결과가 아니겠는가?
남유용은 좋은 군주를 만나 골고루 벼슬살이를 했고, 일만 권이나 되는 책을 쌓아둔 행운아다. 게다가 한 병의 술이 떨어지지 않았고, 시를 읊으며 한 세상 잘 살았다. 벼슬에 큰 욕심 부리지 않아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거치지 않았고, 권력욕이 적어 좌·우의정과 영상에 오르지 않았다.
내 나이 고희를 지나며 삼일당의 노후생활에서 교훈을 얻는다.
(2016. 7. 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