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으로 부임했다. 그 전까지 국군 1사단장, 1군단장, ‘백 야전전투사령부’ 사령관, 2군단장을 차례로 맡으면서 전선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러나 육참총장에 오르면서 내가 관할하는 국면(局面)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모든 전쟁으로 넓어졌다. 52년 7월 이후 이듬해 7월 27일의 휴전협정 조인까지 이어진 전쟁은 과거와는 달랐다. 교착 상태의 전선을 유지하거나 북상시키면서 한국군 증강 작업을 급히 서둘러야 했다. 그 전선의 막전막후에서 한국을 도운 미군 최고위 장성, 전선을 뒤흔들면서 대한민국을 계속 위협했던 중공군 장성들을 소개한다.
미군 제임스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 … ‘대한민국 육군의 아버지’
James Van Fleet1892~1992
51년 4월 중공군 춘계공세 때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뒤 53년 2월 물러났다. 그는 국군 증강 사업의 최대 공로자였다. 매우 위급했던 51년 봄의 중공군 춘계 대공세를 막아낸 뒤,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대토벌, 국군 현대화를 위한 포병 양성과 2군단 창설을 모두 이끈 장군이다.
그는 앞에서도 여러 번 소개했듯이, 전선에서는 다른 누구보다도 단호한 장군이었다. 적을 향해 공세를 취할 때에는 추호의 주저함 없이 앞에 나서는 스타일. 그러나 늘 누군가와 함께 음식을 나눠 먹는 따뜻한 성품도 지녔다.
51년 중공군 춘계 공세 때 그는 국군의 약점을 간파했다. 그는 포병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전 수행 능력을 국군이 갖추도록 도왔고, 국군 장교 2000명을 미국 17개 병과학교에 유학시켜 최신 교리를 습득하게 했다. 아울러 육군사관학교를 창설해 정예 장교단 양성에 힘을 쏟았다. 나는 감히 그를 ‘대한민국 육군의 아버지’라 말할 수 있다.
맥스웰 테일러
중국어·일본어 등 7개국어 능통한 장군
Maxwell Taylor1901~1987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잘 이해하는 지휘관이었다. 37년 일본과의 전쟁에 들어간 중국에 체류한 적이 있으며, 일본에서도 4년 동안 주일 미 대사관 무관 보좌관으로 일했다. 중국어와 일본어를 포함한 7개 국어에 능통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101 공수사단장으로 활약했다.
그 또한 한국군 증강 작업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휴전 뒤인 54년 한국군 제1야전사령부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로써 한국군 1야전군은 40만 병력으로 휴전선 대부분을 방어하는 능력을 갖췄다. 후에 미 육군참모총장, 베트남 합동참모의장, 주베트남 대사를 역임했다.
마크 클라크
휴전협정 직접 서명한 유엔군 총사령관
Mark Clark1896~1984
매슈 리지웨이 장군의 후임으로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해 휴전협정 때 조인식에 직접 서명한 지휘관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용맹을 떨쳤다. 53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의 역사적인 첫 방일을 조율했다. 정치와 군사 분야에서 탁월한 견해를 지닌 장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강력한 반공의식으로 워싱턴과 서울·도쿄 사이의 정치적인 사안을 조율했다.
로튼 콜린스
위기 때마다 전선 직접 찾은 미 육참총장
Lawton Collins1896~1987
6·25전쟁 기간에 줄곧 미 육군참모총장으로 있으면서 미군의 작전을 전반적으로 이끌었다. 특히 한국전쟁의 위기 때마다 전선을 직접 방문해 현지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뒤 전선에 나선 미군의 후방을 효율적으로 지원했다.
펑더화이, 덩화, 셰팡(왼쪽부터)
중공군
펑더화이펑더화이
동지 마오에 숙청당한 중공군 총사령관
彭德懷1898~1974
중공 지원군 총사령관으로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중공군의 참전과 전투 등을 모두 총괄해 지휘했다. 북한의 김일성과 합동으로 사령부를 만들었으나, 김은 명목상의 지휘관에 불과했다.
50년 10월 참전 뒤 사실상 공산 측이 벌인 대부분의 전투 주체는 중공군이었으며, 펑은 이들 중공군을 모두 지휘했다. 강직한 성격의 펑은 참전 초기 매복과 우회, 기습을 반복적으로 펼치는 전법으로 전선에서 우세를 차지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51년 5월의 춘계 대공세 뒤 뚜렷한 결과를 내지 못했다.
군벌(軍閥) 출신으로 오랜 기간 전투 경험을 지녔지만,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전투 형태가 비교적 단순하다는 인상을 줬던 인물이다.
후에 중국 최고 권력자인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숙청되는 운명을 맞았다.
덩화
작전 부사령관 … ‘차이니즈 스마일’의 전략가
鄧華1910~1980
휴전회담 첫 중공 대표로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다. 참전했던 중공군의 작전 부사령관으로 전선을 지휘했다. 매우 똑똑하다는 인상을 주며, 휴전회담에서 북한군 대표였던 남일과 이상조가 극도로 굳은 자세를 지녔던 데 비해 늘 ‘중국식 미소(Chinese smile)’로 속을 감췄던 인물이다. 참전 초기에 보였던 중공군의 전술적인 우세를 이끌었다.
셰팡
일본 육사 출신의 참모장 … 냉철한 관료
解方·1908~1984
한마디로 능력이 뛰어난 관리, 능리(能吏) 타입이다. 가볍게 행동하지 않으며, 충동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다. 그는 중공군의 참모장으로 한국 전선에 나섰다. 작전 구사에 있어서 노련하면서도 실용적인 노선을 추구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 육사에서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받았다. 성품 자체는 매우 냉철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