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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軒 李景奭 先生 交遊 人物錄
仁同 張達洙 編
본 자료는 백헌 선생의 문집에 거론된 인물과 타 문집에서 백헌 선생과 수창한 시. 서간문 등을 참고하여 선생과 연관이 있는 분들의 글을 한데 묶어 봄으로서 선생의 행적을 더 소상하게 알고자 편집하였다.
백헌집의 번역본을 구하지 못하여 원문을 수록하였으니 뒷날 국역문을 다시 수록할 예정이다.
본문은 580여 쪽으로 자료가 많아서 생략하고 목차만 카페에 올립니다.
백헌 선생 교유록 목차
*김장생(金長生) 1548년(명종 3)∼1631년(인조 9).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심희수(沈喜壽)1548년(명종 3)∼1622년(광해군 14). 一松集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백구(伯懼), 호는 일송(一松)
*정광적(鄭光績) 1550년(명종 5)∼1637년(인조 15).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경훈(景勛), 호는 남파(南坡)·서간(西澗).
*이신의(李愼儀) 1551년(명종 6)∼1627년(인조 5).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경칙(景則), 호는 석탄(石灘).
*이호민(李好閔) 1553년(명종 8)∼1634년(인조 12).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남곽(南郭)·수와(睡窩).
*홍천경(洪千璟) 1553년(명종 8)∼1632년(인조 10).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군옥(群玉), 호는 반항당(盤恒堂).
*회은군(懷恩君) 덕인(德仁),1554(명종 9)∼1644(인조 22)
정양군의 장남이다.
*유윤창(柳允昌) 미상∼1647년(인조 25).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욱(伯勗), 호는 금은(琴隱).
*조존성(趙存性) 1554년(명종 9)∼1628년(인조 6).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수초(守初), 호는 용호(龍湖) 또는 정곡(鼎谷).
*강인(姜絪) 1555년(명종 10)∼1634년(인조 12).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인경(仁卿), 호는 시암(是庵).
*성여학(成汝學) 1557년(명종 12)∼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학안(學顔), 호는 학천(鶴泉)·쌍천(雙泉).
*심종직(沈宗直) 1557년(명종 12)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사경(士敬), 호는 죽서(竹西).
*한준겸(韓浚謙) 1557년(명종 12)∼1627년(인조 5).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川).
*서성(徐渻) 1558년(명종 13)∼1631년(인조 9).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
*이전(李㙉) 1558년(명종 13)∼1648년(인조 26). 상주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재(叔載), 호는 월간(月磵).
*민여임(閔汝任) 1559년(명종 14)∼1627년(인조 5).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지(聖之), 호는 취옹(醉翁) 또는 진의(振衣).
*차운로(車雲輅) 1559년(명종 14)∼미상.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만리(萬理), 호는 창주(滄洲).
*이준(李埈)1560년(명종 15)∼1635년(인조 13). 蒼石集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
*이홍주(李弘胄) 1562년(명종 17)∼1638년(인조 16).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윤(伯胤), 호는 이천(梨川).
*이수광(李睟光) 1563년(명종 18)∼1628년(인조 6).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
*전식(全湜) 1563년(명종 18)∼1642년(인조 20).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
*박동열(朴東說) 1564년(명종 19)∼1622년(광해군 14).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열지(說之), 호는 남곽(南郭)· 봉촌(鳳村).
*김수현(金壽賢) 1565년(명종 20)∼1653년(효종 4).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정수(廷叟), 호는 둔곡(遁谷).
*신흠(申欽) 1566년(명종 21)∼1628년(인조 6).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상촌(象村)·
*이덕형(李德泂) 1566년(명종 21)∼1645년(인조 23).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원백(遠伯), 호는 죽천(竹泉).
*장만(張晩) 1566년(명종 21)∼1629년(인조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
*윤경(尹絅) 1567년(명종 22)∼1664년(현종 5).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미중(美仲), 호는 기천(岐川).
*이경전(李慶全) 1567년(명종 22)∼1644년(인조 22).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집(仲集), 호는 석루(石樓).
*조위한(趙緯韓)1567년(명종 22)∼1649년(인조 27). 玄谷集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지세(持世), 호는 현곡(玄谷).
*한명욱(韓明勗) 1567년(명종 22)∼1652년(효종 3).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욱재(勗哉), 호는 율헌(栗軒).
*변흡(邊潝) 1568년(선조 1)∼1644년(인조 22).
본관은 원주(原州).
*이구징(李久澄) 1568년(선조 1)∼1648년(인조 26).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징원(澄源), 호는 백촌(栢村).
*심열(沈悅) 1569년(선조 2)∼1646년(인조 24).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학이(學而), 호는 남파(南坡).
*심집(沈諿) 1569년(선조 2)∼1644년(인조 22).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자순(子順), 호는 남애(南崖).
*이윤우(李潤雨) 1569년(선조 2)∼1634년(인조 12). 칠곡 석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무백(茂伯), 호는 석담(石潭).
*김상헌(金尙憲)1570년(선조 3)∼1652년(효종 3). 淸陰集
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
*김류(金瑬) 1571년(선조 4)∼1648년(인조 26).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
*박홍미(朴弘美) 1571년(선조 4)∼1642년(인조 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경립(敬立), 자는 직재(直哉)· 호는 관포(灌圃).
*심액(沈詻) 1571년(선조 4)∼1655년(효종 6).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중경(重卿), 호는 학계(鶴溪).
*신경진(申景珍)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인.
본관은 평산(平山).
*이안눌(李安訥)1571년(선조 4)∼1637년(인조 15). 東岳先生集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기협(奇恊) 1572년(선조 5)∼1627년(인조 5).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여인(汝寅).
*이목(李楘) 1572년(선조 5)∼1646년(인조 24).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문백(文伯), 호는 송교(松郊).
*조찬한(趙纘韓)1572년(선조 5)∼1631년(인조 9). 玄洲集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선술(善述), 호는 현주(玄洲).
*서경우(徐景雨) 1573년(선조 6)∼1645년(인조 23).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시백(施伯), 호는 만사(晩沙).
*성하종(成夏宗) 1573년(선조 6)∼1645년(인조 23).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이술(而述).
*이후기(李厚基) 1573(선조 06) ∼ 1650(효종 01)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대재(大哉)
*김집(金集)1574년(선조 7)∼1656년(효종 7). 愼獨齋集
본관은 광산.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신적도(申適道)1574년(선조 7)∼1663년(현종 4). 虎溪集
본관은 아주(鵝州). 자는 사립(士立), 호는 호계(虎溪).
*전대년(田大年) 1574년(선조 7)~미상.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경유(景有)이다.
*남이웅(南以雄)1575년(선조 8)∼1648년(인조 26).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적만(敵萬), 호는 시북(市北).
*목대흠(睦大欽) 1575년(선조 8)∼1638년(인조 16). 茶山集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탕경(湯卿), 호는 다산(茶山) 또는 죽오(竹塢).
*엄성(嚴惺) 1575년(선조 8)∼1628년(인조 6).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경보(敬甫), 호는 동강(桐江).
*이찬(李燦) 1575년(선조 8)∼1654년(효종 5). 조선 중기의 의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중명(仲明).
*조희일(趙希逸) 1575년(선조 8)∼1638년(인조 16).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이숙(怡叔), 호는 죽음(竹陰) 또는 팔봉(八峰).
*한여직(韓汝溭) 1575년(선조 8)∼1638년(인조 16).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안(仲安), 호는 십주(十洲).
*신달도(申達道) 1576년(선조 9)∼1631년(인조 9). 의성 출신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형보(亨甫), 호는 만오(晩悟).
*신민일(申敏一)1576년(선조 9)∼1650년(효종 1). 化堂集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공보(功甫), 호는 화당(化堂).
*정광성(鄭廣成) 1576년(선조 9)∼1654년(효종 5).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수백(壽伯), 호는 제곡(濟谷).
*최연(崔葕) 1576년(선조 9)∼1651년(효종 2). 남원 출신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유장(孺長), 호는 성만(星灣)·성연(星淵).
*곽희태(郭希泰) 1577년(선조 10)∼1663년(현종 4).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종여(宗余), 호는 선주(仙舟).
*곽희진(郭希震)
자는 기여(起余) 곽희태의 동생
*곽지흠(郭之欽) 1601년(선조 34)∼미상. 곽희태의 아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흠로(欽魯), 호는 지포(芝浦).
*김영조(金榮祖)1577년(선조 10)∼1648년(인조 26). 忘窩集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중(孝仲), 호는 망와(忘窩).
*홍립(洪雴) 1577년(선조 10)∼미상.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경시(景時), 호는 독정재(獨靜齋).
*구인후(具仁垕) 1578년(선조 11)∼1658년(효종 9).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중재(仲載), 호는 유포(柳浦).
*윤이지(尹履之) 1579년(선조 12)∼1668년(현종 9).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중소(仲素), 호는 추봉(秋峯).
*이경엄(李景嚴) 1579년(선조 12)∼1652년(효종 3).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릉(子陵), 호는 현기(玄磯).
*임광(任絖) 1579년(선조 12)∼1644년(인조 22).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자정(子瀞).
*조익(趙翼)1579년(선조 12)∼1655년(효종 6). 浦渚集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비경(飛卿), 호는 포저(浦渚)·존재(存齋).
*김광욱(金光煜)1580년(선조 13)∼1656년(효종 7). 竹所集
본관은 안동. 자는 회이(晦而), 호는 죽소(竹所).
*김육(金堉)1580년(선조 13)∼1658년(효종 9). 潛谷集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회정당(晦靜堂).
*엄황(嚴愰) 1580년(선조 13)∼1653년(효종 4).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명보(明甫).
*이경용(李景容) 1580년(선조 13)∼1635년(인조 13).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복(汝復), 호는 두곡(杜谷)·계곡(桂谷).
*송연(宋淵)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사인.
본관은 여산(礪山). 호는 둔암(芚菴).
*김시양(金時讓) 1581년(선조 14)∼1643년(인조 21).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김시언(金時言), 자는 자중(子仲), 호는 하담(荷潭).
*이시백(李時白) 1581년(선조 14)∼1660년(현종 1).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돈시(敦詩), 호는 조암(釣巖).
*남선(南銑) 1582년(선조 15)∼1654년(효종 5).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택지(澤之), 호는 회곡(晦谷)·대몽(大夢).
*민성휘(閔聖徽) 1582년(선조 15)∼1647년(인조 25).
본관은 여흥(驪興). 초명은 민성징(閔聖徵), 자는 사상(士尙), 호는 졸당(拙堂)
*민응회(閔應恢) 1582년(선조 15)∼미상.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이정(而精), 호는 환성(喚醒).
*윤신지(尹新之)1582년(선조 15)∼1657년(효종 8). 玄洲集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중우(仲又), 호는 연초재(燕超齋).
*허직(許㮨) 1582년(선조 15)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춘용(春容) 호는 백석(白石)
*장환(張喚)1583(선조16) 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흥덕(興德). 자는 유신(幼新), 호는 용계(龍溪).
*최내길(崔來吉) 1583년(선조 16)∼1649년(인조 27).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대(子大).
*최온(崔蘊) 1583(선조16)∼1659(효종10) 전남 곡성
본관은 삭녕(삭녕(朔寧)) 자는 휘숙(輝叔) 호는 폄재(폄齋)
*하선(河璿) 1583년(선조 16)~1653년(효종 4) 松臺先生文集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사윤(士潤). 호는 송대(松臺)
*한인급(韓仁及) 1583년(선조 16)∼1644년(인조 22).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원지(元之), 호는 현석(玄石)·서석(瑞石).
*구영(具瑩)1584년(선조 17)∼1663년(현종 4). 竹牖詩集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영연(瑩然), 호는 죽유(竹牖).
*권경기(權儆己) 1584년(선조 17)∼미상.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고(子顧).
*이성구(李聖求) 1584년(선조 17)∼1644년(인조 22).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이(子異), 호는 분사(分沙)·동사(東沙).
*이시담(李時聃) 1584년(선조 17)∼1665년(현종 6).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현충(玄忠), 호는 사우당(四友堂).
*이식(李植)1584년(선조 17)∼1647년(인조 25). 澤堂集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
*이지굉(李志宏) 1584년(선조 17)∼미상. 조선 중기 문신.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수약(守約)이고, 호는 동명(東溟)
*홍영(洪霙) 1584년(선조 17)∼1645년(인조 23).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택방(澤芳), 호는 추만(楸巒).
*홍정(洪霆) 1581년(선조 14)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시(以時)
*김지수(金地粹) 1585년(선조 18)∼1639년(인조 17).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거비(去非), 호는 태천(苔川)·천태산인(天台山人).
*김효성(金孝誠) 1585년(선조 18)∼1651년(효종 2).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행원(行源).
*이경여(李敬輿)1585년(선조 18)∼1657년(효종 8). 白江先生集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봉암(鳳巖).
*이상형(李尙馨) 1585년(선조 18)∼1645년(인조 23).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선(德善), 호는 천묵재(天默齋).
*홍보(洪靌) 1585년(선조 18)∼1643년(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여시(汝時), 호는 월봉(月峰).
*김상(金尙) 1586년(선조 19)∼미상.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우고(友古), 호는 사은(士隱).
*임뇌지(任賚之) 1586년(선조 19)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양보(良輔)
*조경(趙絅)1586년(선조 19)∼1669년(현종 10). 龍洲先生遺稿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주봉(柱峯).
*정광경(鄭廣敬) 1586년(선조 19)∼1644년(인조 22).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공직(公直), 호는 추천(秋川).
*최기남(崔奇男)1586년(선조 19)∼미상. 龜谷詩稿
본관은 천녕(川寧). 자는 영숙(英叔), 호는 구곡(龜谷)·묵헌(默軒).
*최명길(崔鳴吉)1586년(선조 19)∼1647년(인조 25). 遲川集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
*김응조(金應祖) 1587년(선조 20)∼1667년(현종 8). 안동 출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 또는 아헌(啞軒).
*김휼(金霱)1594년(선조 27)~미상. 조선 중기 문신.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운서(雲瑞)이고, 호는 매사(梅沙).
*심명세(沈命世) 1587년(선조 20)∼1632년(인조 10).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덕용(德用).
*오준(吳竣)1587년(선조 20)∼1666년(현종 7). 竹南堂稿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여완(汝完), 호는 죽남(竹南).
*윤선도(尹善道)1587년(선조 20)∼1671년(현종 12). 孤山遺稿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장유(張維)1587년(선조 20)∼1638년(인조 16). 谿谷集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
*정홍임(鄭弘任) 1587년(선조 20)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임지(任之)
*최유연(崔有淵)1587년(선조 20)∼미상. 玄巖遺稿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성지(聖止)·성지(聖之)·지숙(止叔), 호는 현암(玄巖)
*최유해(崔有海) 1587년(선조 20)∼1641년(인조 19).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대용(大容), 호는 묵수당(默守堂).
*김응해(金應海) 1588년(선조 21)∼1666년(현종 7).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군서(君瑞).
*서정연(徐挺然) 1588년(선조 21)~미상. 조선 중기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수부(秀夫).
*신익성(申翊聖) 1588년(선조 21)∼1644년(인조 22).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군석(君奭), 호는 낙전당(樂全堂)·동회거사(東淮居士).
*여이징(呂爾徵) 1588년(선조 21)∼1656년(효종 7).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구(子久), 호는 동강(東江).
*성여관(成汝寬) 1589년(선조 22)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율(子栗).
*이광(李珖) 의창군(義昌君) 1589년(선조 22)∼1645년(인조 23).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장중(藏仲), 호는 기천(杞泉).
*이민구(李敏求)1589년(선조 22)∼1670년(현종 11). 東州先生詩集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시(子時), 호는 동주(東洲)·관해(觀海).
*이제(李穧) 1589년(선조 22)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이실(而實)
*김광혁(金光爀) 1590년(선조 23)∼1643년(인조 2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회경(晦卿), 호는 동림(東林).
*심로(沈𢋡) 1590년(선조 23)∼1664년(현종 5).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원직(元直), 호는 죽사(竹沙)‧죽계(竹溪). 서울 출신.
*이경의(李景義) 1590년(선조 23)∼1640년(인조 18).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방(子方), 호는 만사(晩沙).
*이만승(李曼勝)1590년(선조 23)∼1659년(효종 10). 槐堂先生文集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숙망(叔望), 호는 괴당(槐堂)이다.
*조문수(曺文秀)1590년(선조 23)∼1647년(인조 25). 雪汀詩集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실(子實), 호는 설정(雪汀).
*강대수(姜大遂) 1591년(선조 24)∼1658년(효종 9). 합천 출신.
본관은 진주(晉州). 초명은 대진(大進), 자는 면재(勉哉)·학안(學顔), 호는 춘간(春磵)·한사(寒沙)·정와(靜窩).
*윤순지(尹順之) 1591년(선조 24)∼1666년(현종 7).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행명(涬溟).
*이척연(李惕然) 1591년(선조 24)∼1663년(현종 4).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오(省吾), 호는 동이(同異).동포(東圃).
*이해(李澥) 1591년(선조 24)∼1670년(현종 11).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자연(子淵), 호는 농옹(聾翁).
*최혜길(崔惠吉) 1591년(선조 24)∼1662년(현종 3).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적(子迪), 호는 유하(柳下).
*나만갑(羅萬甲) 1592년(선조 25)∼1642년(인조 20). 나주 출신.
본관은 안정(安定). 자는 몽뢰(夢賚), 호는 구포(鷗浦).
*박미(朴瀰)1592년(선조 25)∼1645년(인조 23). 汾西集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연(仲淵), 호는 분서(汾西).
*송민고(宋民古) 1592년(선조 25)∼미상. 조선시대의 문인화가.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순지(順之), 호는 난곡(蘭谷).
*신천익(愼天翊)1592년(선조 25)∼1661년(현종 2). 素隱先生遺稿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백거(伯擧), 호는 소은(素隱).
*오단(吳端) 1592년(선조 25)∼1640년(인조 18).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여확(汝擴), 호는 동암(東巖) 또는 백암(白巖).
*오숙(吳䎘) 1592년(선조 25)∼1634년(인조 12).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숙우(肅羽), 호는 천파(天坡).
*정홍명(鄭弘溟) 1592년(선조 25)∼1650년(효종 1).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자용(子容), 호는 기암(畸庵) 또는 삼치(三癡).
*김세렴(金世濂) 1593년(선조 26)∼1646년(인조 24).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도원(道源), 호는 동명(東溟).
*안응창(安應昌) 1593년(선조 26)∼1673년(현종 14).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우졸재(愚拙齋).
*강대적(姜大適)1594년(선조 27) ~1678년(숙종 4) 鷗洲先生文集
본관은 진주. 자는 학중(學仲), 호는 구주(𩿨洲).
*김휼(金霱) 1594년(선조 27)~미상. 조선 중기 문신.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운서(雲瑞)이고, 호는 매사(梅沙).
*심동구(沈東龜)1594년(선조 27)∼1660년(현종 1). 晴峯集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문징(文徵), 호는 청봉(晴峰).
*이시방(李時昉) 1594년(선조 27)∼1660년(현종 1).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명(季明), 호는 서봉(西峯).
*허계(許啓) 1594년(선조 27)∼미상.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옥여(沃余), 호는 성암(醒菴).
*백상현(白尙賢) 1595년(선조 28) 영암 출신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경휘(景輝). 호는 월주(月洲)
*이경증(李景曾) 1595년(선조 28)∼1648년(인조 26).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성(汝省), 호는 미강(眉江) 또는 송음(松陰).
*이기조(李基祚) 1595년(선조 28)∼1653년(효종 4).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선(子善), 호는 호암(浩菴).
*이명한(李明漢)1595년(선조 28)∼1645년(인조 23). 白洲集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천장(天章), 호는 백주(白洲).
*장신(張紳) 1595년(선조 28)∼1637년(인조 15). 안산 장곡리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현국(顯國), 호는 취애(翠崖).
*조극선(趙克善) 1595년(선조 28)∼1658년(효종 9).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유제(有諸), 호는 야곡(冶谷).
*조속(趙涑) 1595년(선조 28)∼1668년(현종 9). 조선 후기의 서화가.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희온(希溫)‧조경온(趙景溫), 호는 창강(滄江)‧창추(滄醜)‧
*허목(許穆)1595년(선조 28)∼1682년(숙종 8). 眉叟記言別集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
*김남중(金南重)1596년(선조 29)∼1663년(현종 4). 野塘遺稿
본관은 경주. 자는 백진(白珍), 호는 야당(野塘).
*윤순거(尹舜擧)1596년(선조 29)∼1668년(현종 9). 童土先生文集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노직(魯直), 호는 동토(童土).
*임담(林墰) 1596년(선조 29)∼1652년(효종 3).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재숙(載叔), 호는 청요(淸曜).청구(淸癯).
*정언열(鄭彦說) 1596년(선조 29)~1656년(효종 7)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득지(得之)
*홍명구(洪命耉) 1596년(선조 29)∼1637년(인조 15).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원로(元老), 호는 나재(懶齋).
*구봉서(具鳳瑞) 1597년(선조 30)∼1644년(인조 22).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경휘(景輝), 호는 낙주(洛洲).
*민응협(閔應協) 1597년(선조 30)∼1663년(현종 4).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인보(寅甫), 호는 명고(嗚皐).
*박황(朴潢) 1597년(선조 30)∼1648년(인조 26).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덕우(德雨), 호는 나옹(懦翁)·나헌(懦軒).
*성태구(成台耉) 1597년(선조 30)~미상. 조선 중기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백첨(伯瞻).
*송국택(宋國澤)1597년(선조 30)∼1659년(효종 10). 四友堂先生集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택지(澤之), 호는 사우당(四友堂).
*이상질(李尙質) 1597년(선조 30)∼1635년(인조 13).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문(子文), 호는 가주(家洲).
*이행진(李行進) 1597년(선조 30)∼1665년(현종 6).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사겸(士謙), 호는 지암(止菴).
*정두경(鄭斗卿)1597년(선조 30)∼1673년(현종 14). 東溟先生集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군평(君平), 호는 동명(東溟).
*신상(申恦) 1598년(선조 31)∼1662년(현종 3).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효은(孝恩), 호는 은휴와(恩休窩).
*이소한(李昭漢)1598년(선조 31)∼1645년(인조 23). 玄洲集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도장(道章), 호는 현주(玄洲).
*이시성(李時省)1598년(선조 31)∼1668년(현종 9). 騏峯集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삼(子三), 호는 기봉(麒峰).
*이후원(李厚源) 1598년(선조 31)∼1660년(현종 1).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심(士深), 호는 우재(迂齋).
*최휘지(崔徽之) 1598년(선조 38)∼1669년(현종 10).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자금(子琴), 호는 오주(鰲洲).
*권칙(權侙) 1599년(선조 3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경(子敬). 호는 국헌(菊軒)
*박일성(朴日省) 1599년(선조 32)∼1671년(현종 12).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학로(學魯).
*서정리(徐貞履) 1599년(선조 32)∼1664년(현종 5).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면중(勉中).
*이해창(李海昌)1599년(선조 32)∼1651년(효종 2). 松坡集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계하(季夏), 호는 송파(松坡).
*채유후(蔡裕後)1599년(선조 32)∼1660년(현종 1). 湖洲先生集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창(伯昌), 호는 호주(湖洲).
*박의(朴漪) 1600년(선조 33)∼1645년(인조 23).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련(仲連), 호는 중봉(仲峰).
*신속(申洬) 1600년(선조 33)∼1661년(현종 2).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호중(浩仲), 호는 이지(二知).
*안헌징(安獻徵)1600년(선조 33)∼1674년(현종 15). 鷗浦集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성관(聖觀), 호는 구포(鷗浦).
*윤지(尹墀) 1600년(선조 33)∼1644년(인조 22).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군옥(君玉), 호는 하빈옹(河濱翁).
*이시해(李時楷) 1600년(선조 33)∼1657년(효종 8).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범(子範), 호는 남곡(南谷)·송애(松崖).
*윤명은(尹鳴殷) 1601년(선조 34)∼1646년(인조 24).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이원(而遠), 호는 사정(思亭).
*윤형각(尹衡覺) 1601년(선조 34)∼1664년(현종 5).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선(景先).
*이시만(李時萬) 1601년(선조 34)∼1672년(현종 13).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석여(錫汝).
*이시필(李時苾) 1601년(선조 34)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방(子芳)
*조전소(趙全素) 1601년(선조 34)~미상.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자현(子玄)이다.
*김시성(金是聲) 1602년(선조 35)∼1676년(숙종 2).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청도(淸道). 자는 문원(聞遠), 호는 금포(錦浦).
*김중일(金重鎰) 1602년(선조 35)∼미상.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백진(伯珍).
*민진량(閔晋亮) 1602년(선조 35)∼1671년(현종 12).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명윤(明允). 호는 구졸(九拙).
*박서(朴遾) 1602년(선조 35)∼1653년(효종 4). 온양 출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상지(尙之), 호는 후계(後溪).
*이시중(李時中) 1602년(선조 35)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화(士和)
*정태화(鄭太和)1602년(선조 35)∼1673년(현종 14). 陽坡遺稿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유춘(囿春), 호는 양파(陽坡).
*강백년(姜栢年)1603년(선조 36)∼1681년(숙종 7). 雪峯遺稿
본관은 진주. 자는 숙구(叔久), 호는 설봉(雪峯)·한계(閒溪)·청월헌(聽月軒).
*유현(柳炫) 1603년(선조 36)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회(汝晦)
*이시매(李時楳) 1603년(선조 36)∼1667년(현종 8).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화(子和), 호는 육은재(六隱齋).
*권영(權坽) 1604년(선조 37)∼1675년(숙종 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고(子高), 호는 우곡(愚谷).
*이만영(李晩榮)1604년(선조 37)∼1672년(현종 13). 雪海遺稿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춘장(春長), 호는 설해(雪海).
*신익전(申翊全)1605년(선조 38)∼1660년(현종 1). 東江先生遺集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여만(汝萬), 호는 동강(東江).
*이지항(李之恒) 1605년(선조 38)∼1654년(효종 5).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월여(月如).
*홍우원(洪宇遠)1605년(선조 38)∼1687년(숙종 13). 南坡先生文集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군징(君徵), 호는 남파(南坡).
*황위(黃暐)1605년(선조 38)∼1654년(효종 5). 塘村集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자휘(子輝), 호는 당촌(塘村).
*송준길(宋浚吉)1606년(선조 39)∼1672년(현종 13). 同春堂先生文集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장린(張遴) 1606년(선조 39)∼1656년(효종 7). 정묘호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장연(長淵). 자는 군택(君擇).
*정창주(鄭昌胄)1606년(선조 39)∼미상. 晩洲先生集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사흥(士興), 호는 만사(晩沙)·만주(晩洲)·묵헌(默軒).
*조석윤(趙錫胤) 1606년(선조 39)∼1655년(효종 6).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윤지(胤之), 호는 낙정재(樂靜齋).
*홍석기(洪錫箕)1606년(선조 39)∼1680년(숙종 6). 晩洲遺集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원구(元九), 호는 만주(晩州).
*홍주원(洪柱元)1606년(선조 39)∼1672년(현종 13). 無何堂遺稿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건중(建中), 호는 무하당(無何堂).
*김휘(金徽) 1607년(선조 40)∼1677년(숙종 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돈미(敦美), 호는 사휴정(四休亭)‧만은(晩隱).
*송시열(宋時烈)1607년(선조 40)∼1689년(숙종 15). 宋子大全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이유태(李惟泰)1607년(선조 40)∼1684년(숙종 10). 草廬集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태지(泰之), 호는 초려(草廬).
*홍명하(洪命夏) 1607년(선조 40)∼1667년(현종 8).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대이(大而), 호는 기천(沂川).
*조한영(曺漢英)1608년(선조 41)∼1670년(현종 11). 晦谷集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수이(守而), 호는 회곡(晦谷).
*목행선(睦行善) 1609년(광해군 1)∼1661년(현종 2)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행지(行之), 호는 남간(南磵).
*유도삼(柳道三) 1609년(광해군 1)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여일(汝一), 호는 경암(敬庵).
*이익한(李翊漢) 1609년(광해군 1)∼1668년(현종 9).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치흠(稚欽), 호는 향파(香坡).
*정치화(鄭致和) 1609년(광해군 1)∼1677년(숙종 3).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성능(聖能), 호는 기주(棋洲).
*조복양(趙復陽)1609년(광해군 1)∼1671년(현종 12). 松谷先生集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중초(仲初), 호는 송곡(松谷).
*김익희(金益熙)1610년(광해군 2)∼1656년(효종 7). 滄洲先生遺稿
본관은 광산. 자는 중문(仲文), 호는 창주(滄洲).
*송시철(宋時喆) 1610년(광해군 2)∼1673년(현종 14).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숙보(叔保), 호는 설촌(雪村).
*신유(申濡)1610년(광해군 2)∼1665년(현종 6). 竹堂集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군택(君澤), 호는 죽당(竹堂)·이옹(泥翁).
*정필달(鄭必達)1611년(광해군 3)∼1693년(숙종 19). 八松先生文集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가행(可行), 호는 팔송(八松).
*박장원(朴長遠)1612년(광해군 4)∼1671년(현종 12). 久堂先生集
본관은 고령. 자는 중구(仲久), 호는 구당(久堂)·습천(隰川).
*이일상(李一相) 1612년(광해군 4)∼1666년(현종 7).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함경(咸卿), 호는 청호(靑湖).
*홍주세(洪柱世)1612년(광해군 4)∼1661년(현종 2). 靜虛堂集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숙진(叔鎭), 호는 정허당(靜虛堂).
*정지화(鄭知和) 1613년(광해군 5)∼1688년(숙종 14).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예경(禮卿), 호는 남곡(南谷).
*김진표(金震標) 1614년(광해군 6)∼1671년(현종 12).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건중(建中), 호는 오애(浯涯).
*서필원(徐必遠)1614년(광해군 6)∼1671년(현종 12). 六谷先生遺稿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재이(載邇), 호는 육곡(六谷).
*유창(兪瑒)1614년(광해군 6)∼1692년(숙종 18). 秋潭集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백규(伯圭), 호는 추담(楸潭)·운계(雲溪).
*심일삼(沈日三) 1615년(광해군 7) 月溪公遺集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성오(省吾), 호는 월계(月溪)
*이문재(李文載) 1615년(선조 7)~ 1677년(숙종 3) 石洞先生遺稿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원(子遠). 호는 석동(石洞) 남원출신
*조구석(趙龜錫)1615년(광해군 7)∼1665년(현종 6). 藏六堂遺集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우서(禹瑞), 호는 장륙당(藏六堂).
*조세환(趙世煥) 1615년(광해군 7)∼1683년(숙종 9).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의망(嶷望), 호는 수촌(樹村).
*오정위(吳挺緯) 1616년(광해군 8)∼1692년(숙종 18).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군서(君瑞). 서장(瑞章), 호는 동사(東沙).
*유혁연(柳赫然 )1616년(광해군 8)∼1680년(숙종 6).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회이(晦爾), 호는 야당(野堂).
*이정영(李正英) 1616년(광해군 8)∼1686년(숙종 12). 선생 조카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수(子修), 호는 서곡(西谷).
*조비(趙備) 1616년(광해군 8)∼1659년(효종 10).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사구(士求), 호는 총계와(叢桂窩).
*최후량(崔後亮) 1616년(광해군 8)∼1693년(숙종 19).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한경(漢卿), 호는 정수재(靜修齋).
*승려 각성(覺性) 1575년(선조 8)∼1660년(현종 1). 선승(禪僧)‧승병장(僧兵將).
성은 김씨, 자는 징원(澄圓), 호는 벽암(碧巖). 각성은 법명이다.
*승려 처능(處能) 1617년(광해군 9)~1680년(숙종 6) 白谷集
*승려 현변(懸辯) 1616년(광해군 8)~1684년(숙종 10) 枕肱集
*승려 태허대사 東溪集
*이은상(李殷相)1617년(광해군 9)∼1678년(숙종 4). 東里集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열경(說卿), 호는 동리(東里).
*홍주신(洪柱臣) 1617년(광해군 9)~1660년(현종 1)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거경(巨卿)
*이홍상(李弘相)1619년(광해군 11)∼미상.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제경(濟卿), 호는 동곽(東郭).
*심유(沈攸)1620년(광해군 12)∼1688년(숙종 14). 梧灘集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중미(仲美), 호는 오탄(梧灘).
*이구(李球) 1620년(광해군 12)∼1684년(숙종 10).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대옥(大玉), 호는 은와(隱窩).
*인평대군(麟坪大君)1622년(광해군 14)∼1658년(효종 9). 松溪集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요(㴭), 자는 용함(用涵), 호는 송계(松溪).
*이급(李伋) 1623년(인조 1)∼미상. 조선 중기의 왕족‧화가.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만사(晩沙).
*이행도(李行道) 1623년(인조 1)~미상.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사원(士源).
*이행일(李行逸) 1626년(인조 4)
자는 사휴(士休). 이행도(李行道)의 동생
*홍주국(洪柱國)1623년(인조 1)∼1680년(숙종 6). 泛翁集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국경(國卿), 호는 범옹(泛翁)·죽리(竹里).
*신혼(申混) 1624년(인조 2)∼1656년(효종 7).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원택(元澤), 호는 초암(初庵, 草庵).
*이합(李柙) 1624년(인조 2)∼1680년(숙종 6).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윤적(允迪), 호는 대산(臺山).
*이익상(李翊相)1625년(인조 3)∼1691년(숙종 17). 梅澗集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필경(弼卿), 호는 매간(梅磵).
*김수흥(金壽興)1626년(인조 4)∼1690년(숙종 16). 退憂堂集
본관은 안동. 자는 기지(起之), 호는 퇴우당(退憂堂) 또는 동곽산인(東郭散人).
*남용익(南龍翼)1628년(인조 6)∼1692년(숙종 18). 壺谷集
본관은 의령.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곡(壺谷).
*민정중(閔鼎重) 1628년(인조 6)∼1692년(숙종 18).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
*이단상(李端相)1628년(인조 6)∼1669년(현종 10). 靜觀齋先生集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유능(幼能), 호는 정관재(靜觀齋)·서호(西湖).
*김수항(金壽恒)1629년(인조 7)∼1689년(숙종 15). 文谷集
본관은 안동.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남구만(南九萬)1629년(인조 7)∼1711년(숙종 37). 藥泉集
본관은 의령.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또는 미재(美齋).
*박세당(朴世堂)1629년(인조 7)∼1703년(숙종 29). 西溪先生集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潛叟)·서계(西溪).
*조원기(趙遠期)1630년(인조 8)∼1680년(숙종 6). 九峯集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면경(勉卿), 호는 구봉(九峯).
*김만균(金萬均) 1631년(인조 9)∼미상.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정평(正平), 호는 사휴(思休)‧취선(醉仙)‧이호(梨湖).
*박세채(朴世采)1631년(인조 9)∼1695년(숙종 21). 南溪先生集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조종저(趙宗著)1631년(인조 9)∼1690년(숙종 16). 南岳集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취숙(聚叔), 호는 간재(艮齋)·남악(南岳).
*이지걸(李志傑)1632년(인조 10)∼1702년(숙종 28). 琴湖遺稿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수천(秀天), 호는 금호(琴湖).
*김석주(金錫胄)1634년(인조 12)∼1684년(숙종 10). 息庵先生遺稿
본관은 청풍. 자는 사백(斯百), 호는 식암(息庵).
*신익상(申翼相)1634년(인조 12)∼1697년(숙종 23). 醒齋遺稿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숙필(叔弼), 호는 성재(醒齋).
*이세백(李世白)1635년(인조 13)∼1703년(숙종 29). 雩沙集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중경(仲庚), 호는 우사(雩沙) 또는 북계(北溪).
*신후재(申厚載)1636년(인조 14)∼1699년(숙종 25). 葵亭集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덕부(德夫), 호는 규정(葵亭)·서암(恕庵).
*송광연(宋光淵)1638년(인조 16)∼1695년(숙종 21). 泛虛亭集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도심(道深), 호는 범허정(泛虛亭).
*조지겸(趙持謙)1639년(인조 17)∼1685년(숙종 11). 迂齋集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광보(光甫), 호는 우재(迂齋).
*임방(任埅)1640년(인조 18)∼1724년(경종 4). 水村集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대중(大仲), 호는 수촌(水村)·우졸옹(愚拙翁).
*신완(申琓)1646년(인조 24)∼1707년(숙종 33). 絅菴集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공헌(公獻), 호는 경암(絅庵).
*최석정(崔錫鼎)1646년(인조 24)∼1715년(숙종 41). 明谷集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석만(錫萬). 자는 여시(汝時)·여화(汝和), 호는 존와(存窩)·명곡(明谷).
*서종태(徐宗泰) 1652년(효종 3)∼1719년(숙종 45). 晩靜堂集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군망(君望), 호는 만정(晩靜)·서곡(瑞谷)·송애(松厓).
*조정만(趙正萬)1656년(효종 7)∼1739년(영조 15). 寤齋集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정이(定而), 호는 오재(寤齋).
*신성하(申聖夏)1665년(현종 6)~1736년(영조 12). 和菴集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성보(成甫), 호는 화암(和庵).
*이시항(李時恒)1672년(현종 13)∼1736년(영조 12). 和隱集
본관은 수안(遂安). 자는 사상(士常), 호는 화은(和隱).
*조태억(趙泰億)1675년(숙종 1)∼1728년(영조 4). 謙齋集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대년(大年), 호는 겸재(謙齋)·태록당(胎祿堂).
*이하곤(李夏坤)1677년(숙종 3)∼1724년(영조 즉위). 頭陀草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재대(載大), 호는 담헌(澹軒) 또는 계림(鷄林).
*심육(沈錥)1685년(숙종 11)∼1753년(영조 29). 樗村遺稿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화보(和甫)·언화(彦和), 호는 저촌(樗村)·저헌(樗軒).
*이광덕(李匡德)1690년(숙종 16)∼1748년(영조 24). 冠陽詩集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뢰(聖賴), 호는 관양(冠陽).
*이만수(李晩秀)1752년(영조 28)∼1820년(순조 20). 屐園遺稿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중(成仲), 호는 극옹(屐翁)·극원(屐園).
*김영기(金永蓍) 平谷先生文集
*이긍익 연려실기술
*권상하 한수재 집
*이유원 임하필기
*이익 성호사설 239명
침고: 본문 중 일부
남구만(南九萬)1629년(인조 7)∼1711년(숙종 37). 藥泉集
본관은 의령.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또는 미재(美齋).
개국공신 재(在)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현령 일성(一星)이다.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 1651년(효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가주서·전적·사서·문학을 거쳐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1659년 홍문록에 오르고 바로 교리에 임명되었다.
1660년(현종 1) 이조정랑, 이어 집의·응교·사인·승지·대사간·이조참의·대사성을 거쳐, 1668년 안변부사·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62년에는 영남에 어사로 나가 진휼사업을 벌였다.
1674년 함경도관찰사로서 유학(儒學)을 진흥시키고 변경 수비를 튼튼히 하였다. 숙종초 대사성·형조판서를 거쳐 1679년(숙종 5) 좌윤이 되었으며, 같은해 윤휴(尹鑴)·허견(許堅) 등의 방자함을 탄핵하다가 남해(南海)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부제학·대사간 등을 역임하였으며, 1680년과 1683년 두 차례 대제학에 올랐다. 병조판서가 되어 폐한 사군(四郡)을 다시 설치할 것을 주장하여 무창(茂昌)·자성(慈城) 2군을 설치했으며, 군정(軍政)의 어지러움을 많이 개선하였다.
1684년에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 1687년 영의정에 올랐다. 이즈음 송시열(宋時烈)의 훈척비호를 공격하는 소장파를 주도하여 소론(少論)의 영수로 지목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고, 169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701년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처벌에 대하여 중형을 주장하는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 노론의 주장에 맞서 경형(輕刑)을 주장하다가 숙종이 희빈 장씨의 사사를 결정하자 사직, 낙향하였다.
그뒤 부처(付處)·파직 등 파란을 겪다가 다시 서용되었으나, 1707년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가 기로소에 들어갔다. 당시 정치운영의 중심인물로서 정치·경제·형정·군정·인재등용·의례(儀禮) 등 국정전반에 걸쳐 경륜을 폈을 뿐만 아니라 문장에 뛰어나 책문(册文)·반교문(頒敎文)·묘지명 등을 많이 썼다.
또한, 국내외 기행문과 우리 역사에 대한 고증도 남기고 있다. 서화에도 뛰어났으며,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가 《청구영언》에 전한다. 숙종 묘정(廟庭)에 배향, 강릉의 신석서원(申石書院), 종성(鐘城)의 종산서원(鐘山書院), 무산(茂山)의 향사(鄕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약천집》·《주역참동계주(周易參同契註)》가 전한다. 글씨로는 좌상남지비(左相南智碑), 찬성장현광비(贊成張顯光碑), 개심사(開心寺)·양화루(兩花樓)·영송루(迎送樓)의 액자를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남구만(南九萬) 약천집 제1권
시(詩)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의 환후(患候)가 평상(平常)을 회복한 뒤에 백헌(白軒) 이 상국(李相國) 경석(景奭) 이 지은 시운에 차운하다.
주려는 대궐을 둘러싸고 / 周廬環繞紫宸宮
숙직하는 집은 비스듬히 오른쪽 궁궐과 연하였네 / 直舍斜連右掖中
경연(經筵)에서 논사함은 나의 일이 아니요 / 經席論思非我事
성궁을 조호함은 공(公)의 공이라오 / 聖躬調護是公功
[주1]주려(周廬) : 궁궐을 지키는 군사가 번(番)을 들어 자는 곳을 이른다.
[주2]경연(經筵)에서 논사(論思)함 : 논사는 의논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제왕이 학사(學士)들과 학문을 강론함을 이르는바, 여기서는 경연을 맡은 홍문관(弘文館)의 관직을 가리킨 것이다.
[주3]성궁(聖躬)을 …… 공이라오 : 성궁은 성상의 몸이고 조호(調護)는 임금의 옥체를 돌보는 것으로, 정승이 내의원(內醫院)의 제조(提調)가 되어 임금의 건강을 보살피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두 번째
엿을 무는 것 다시 낙양궁에서 보게 되니 / 含飴復見洛陽宮
옥체가 만만년 강녕하시리라 / 玉體安寧萬歲中
이로부터 삼조에 여가가 있을 것이니 / 從此三朝應有暇
천한 신하 집희의 공부 깊이 기대하네 / 小臣深望緝熙功
*백헌(白軒)
나는 큰 병을 앓은 뒤에 마음과 정신이 흐릿하여 지나간 일을 모두 잊고 지내다가 옛 상자를 뒤져 보니 지난해 겨울 궁중에서 제공(諸公)과 수창(酬唱)한 시가 연이어져 축(軸)을 이루고 있었다. 이는 지옹(止翁)의 처소에서 온 것으로서 아직도 어지러운 서책 가운데에 있으면서 아련히 꿈속의 일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감회를 일으키게 하였는데, 끝 부분에 남 학사(南學士)가 지은 시가 있었다. 학사가 왕명을 받들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간 지 봄이 지나고 여름도 반절이 지났다. 그런데 지난번 갑자기 중병을 앓으므로 대신(大臣)이 성상께 아뢰어 어의(御醫)를 보내어 약을 지어 주어서 병이 나을 수 있었다. 마침내 운(韻)에 따라 졸구(拙句)를 엮어서 애오라지 회포를 붙이고, 겸하여 지암(止菴)에게 편지해서 여러 작품을 다시 돌려받아 후세에 전하여 보이는 방편으로 삼게 하였다. - 지암은 참판 이행진(李行進)의 호이다. -
남한산성에서 한양의 궁중 수고로이 꿈꾸느라 / 南漢應勞夢漢宮
봄이 돌아왔는데도 녹음 속에 머물러 있네 / 春歸仍住綠陰中
문신(文臣)의 한 병환 국사(國事)로 인한 것인데 / 詞臣一疾緣王事
성주의 은혜 깊어 약을 내려 효험이 있었다오 / 聖主恩深藥有功
[주1]엿을 …… 되니 : 엿을 문다는 것은 원래 엿을 물어 스스로 먹고 손자들을 희롱하여 즐거워하는 것으로, 나이 많은 노인이 말년에 즐겁게 여생을 보냄을 이르며, 낙양궁(洛陽宮)은 낙양에 있는 궁궐로, 낙양은 오랫동안 도읍지가 되어 서울의 대명사로 불리운다. 여기서는 대왕대비가 쾌차하여 다시 엿을 물고 손자들의 재롱을 보게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주2]삼조(三朝) : 세 곳의 조회로, 노침(路寢)에서 하는 연조(燕朝), 노문(路門) 밖에서 하는 내조(內朝), 고문(庫門) 밖과 고문(皐門) 안에서 하는 외조(外朝)를 이르는바, 천자와 제후는 매일 세 곳에서 조회하였다.
[주3]집희(緝熙)의 공부 : 집희는 계속하고 밝히는 것으로,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아, 경건하신 문왕이여. 아, 집희하여 공경하였다.〔穆穆文王 於緝熙敬止〕” 하였는바, 이후로 제왕의 학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주4]지옹(止翁) : 지암(止菴) 이행진(李行進)을 높여서 칭한 것이다.
[주5]남 학사(南學士) : 홍문관에 있던 약천(藥泉)을 가리킨 것이다.
*백헌(白軒) 이 상국(李相國)이 궤장(几杖)을 하사받은 영화를 읊은 시에 차운하다.
태평성대에 특별한 예로 원로대신 우대하니 / 聖代殊章禮老臣
까만 안석과 비둘기 지팡이 명령이 새롭구나 / 烏皮鳩刻命初申
조각하고 옻칠한 안석은 본래 선왕의 제도에 부합하고 / 彫髹自合先王制
영수 지팡이는 참으로 대로(大老)에게 마땅하다오 / 靈壽眞宜大耋人
한 절개로 위태로운 나라 떠받드니 복록(福祿)이 응하고 / 一節持危膺福履
세 조정이 의지하여 중해지니 은혜로운 윤음(綸音) 내렸네 / 三朝倚重渙恩綸
괴극을 맞이하여 즐기느라 손님 자리 진열하고 / 邀懽槐棘羅賓席
초선에게 잔치 베풀어 대신들 궁중에서 나오누나 / 侈讌貂蟬出禁宸
내부의 향기로운 술은 바다처럼 술잔에 가득하고 / 內府香醪盈似海
이원의 법곡은 따뜻한 봄이 돌아온 듯 / 梨園法曲暖回春
정신을 편안히 하니 굳이 마른 오동나무 필요하지 않고 / 怡神不數槁梧適
노인을 부축하니 어찌 녹옥의 진귀함을 논하랴 / 扶老何論綠玉珍
집어는 풍아를 짓는단 말 듣고 싶고 / 緝御佇聞風雅作
이기에는 다시 예의가 새로워짐 보겠구나 / 伊耆復覩禮儀新
편안한 날에 국체를 높일 것 생각하였고 / 思尊國體安身日
밥 먹다가 목 메는 것 조심하는 때에 백성의 굶주림 구제하고자 하였다오 / 欲濟民飢戒饐辰
지팡이 잡고 일어나 술잔에 절하니 오히려 공경하고 삼가며 / 攜起拜觴猶敬謹
안석에 의지하여 글씨를 쓰니 오히려 정신이 새롭구나 / 憑來揮翰尙精神
아름다운 시집들 받들어 보니 모두 당시의 명사라 / 追攀佳什皆時彦
초미(貂尾)를 이음 이 몸에 미친 것이 부끄럽네 / 貂續還慙及此身
[주1]까만 …… 새롭구나 : 비둘기는 소화를 잘한다 하여 지팡이 윗부분에 비둘기 모양을 조각하였는바, 노대신을 예우하여 궤장(几杖)을 하사하라는 명령이 막 내렸음을 말한 것이다.
[주2]영수(靈壽) : 영수는 가물태나무로, 지팡이를 만드는 좋은 재료이다.
[주3]괴극(槐棘) : 회화나무와 가시나무로, 조정의 대신들을 지칭한다. 주(周) 나라 때 조정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와 아홉 그루의 가시나무를 심고 공경(公卿)과 대부(大夫)들이 그 아래에 나누어 앉아서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의 자리를 정하였다. 이 때문에 후세에 삼공과 구경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주4]초선(貂蟬) : 초선관(貂蟬冠)인데, 담비 꼬리와 매미 날개 모양으로 장식하여 삼공들이 썼으므로 현귀(顯貴)한 대신을 범칭하게 되었다.
[주5]내부(內府)의 향기로운 술 : 내부는 대궐 안을 이르는바, 궁중에서 빚은 좋은 술을 가리킨다.
[주6]이원(梨園)의 법곡(法曲) : 이원은 악부(樂府)의 별칭이다. 당(唐) 나라 현종(玄宗)이 음률에 정통하여 좌부(坐部)의 젊은 남녀 300명을 뽑아 이원에서 가르쳤으므로, 궁중의 악부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법곡은 법도에 맞는 곡조를 이른다.
[주7]정신을 …… 논하랴 : 마른 오동나무는 오동나무로 만든 안석을 가리키며, 녹옥(綠玉)은 지팡이를 높여 칭한 것이다.
[주8]집어(緝御)는 …… 싶고 : 집어는 계속하여 모시는 것이며, 풍아(風雅)는 《시경》의 국풍(國風)ㆍ대아(大雅)ㆍ소아(小雅)로, 훌륭한 시(詩)나 악곡(樂曲)을 이른다. 《시경》 대아 행위(行葦)에, “안석을 주어 집어하게 하였다.〔授几有緝御〕” 하였는데, 그 주에, “집(緝)은 계속함이요 어(御)는 모심이니, 집어는 공경하여 편안하지 못한 모양이다.” 하였다. 여기서는 안석을 주어서 계속 모시게 하므로 《시경》의 행위편과 같은 시가(詩歌)를 다시 듣고 싶음을 말한 것이다.
[주9]이기(伊耆)에는 …… 보겠구나 : 이기는 옛날 왕자(王者)의 칭호로, 처음 납향(臘享) 제사를 만들어 노인을 편안히 쉬게 한 자라고 한다. 여기서는 노인에게 궤장을 하사하여 편안히 쉬게 하는 아름다운 의식을 다시 보게 됨을 말한 것이다.
[주10]밥 …… 하였다오 : 일(饐)은 일(噎)과 통하는바, 밥을 먹다가 목이 막힘을 이른다.
[주11]초미(貂尾)를 …… 부끄럽네 : 초미를 이었다는 것은 초미가 부족하여 개 꼬리로 이었다는 구미초속(狗尾貂續)을 이른다. 고대에 군주를 가까이 모시는 대관(大官)들은 초미로 관을 꾸몄는데, 대신을 너무 많이 임용하여 초미가 부족하므로 개 꼬리로 대신하였다 한다. 이 때문에 나쁜 것으로 좋은 것을 뒤이음에 비유하여, 문학 작품이 앞의 것은 좋으나 뒤의 것은 나쁨을 뜻한다. 여기서도 궤장(几杖)을 하사함을 축하하는 시에 자신의 아름답지 못한 문장이 끼게 되어 부끄럽다고 말한 것이다.
잡저(雜著)
*백헌(白軒), 회곡(晦谷), 서계(西溪)를 논함 신묘년(1711, 숙종37)
3월 4일 입으로 불러 주다.
백헌의 묘표(墓表)와 서계의 지문(誌文)과 회곡(晦谷)의 비문 추기(追記)를 내가 모두 짓고자 하였으나 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제 장차 죽게 되었다. 후일에 만약 내가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있어서 짓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는 나의 본의가 아니다. 지금 비록 산정(刪定)하지는 못하나 일단(一段)의 문자를 지어서 나의 뜻을 간략히 기록하여 후일에 보게 하는 바이다.
사람들이 선대를 위해 선생과 장자(長者)의 한마디 말씀과 한 글자의 칭찬을 얻으면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모두 감격해서 금석(金石)의 소리로 받들어 모신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사람이 한 글자라도 감히 함부로 다른 사람에 대해 쓰지 못하는 것이니, 이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비록 장열(張說)과 같은 간사한 소인으로서도 이미 요숭(姚崇)을 위해 “팔주승천(八柱承天)”이라고 말하고 나서는 그 뒤에 감히 다시 요숭의 단점을 말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이고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인 사람이 마침내 감히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백헌을 찬양한 말씀을 번복하여 이르기를 “마음속으로는 본래 그르다고 여겼으면서 입으로는 마침내 이러한 빈말을 한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장열 같은 소인도 차마 하지 못했던 것을 그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행한 것이다. 백헌의 옳고 그름은 우선 제쳐 두고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어찌 인도(人道)의 큰 변고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저가 증거로 삼아 중요하게 의탁한 근거가 율곡(栗谷)에게 있으니, 그렇다면 율곡도 잘못한 것인가? 이는 그렇지 않다. 앞뒤의 말이 때로 서로 맞지 않음이 있는 것은 비록 성현이라도 혹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 마치 과거 보는 선비의 사서의(四書疑) 제목에 “성현의 앞뒤 말씀도 같지 않음이 있다.”는 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그렇지 않다. 입을 열어 말할 때에 그 옳지 않음을 미리 스스로 알았으면서도 우선 이러한 말을 하고는 후일에 와서야 비로소 그 뜻을 나타낸 것이니, 어두운 곳에 숨겨 두었다가 실상이 드러날 때에 기회를 엿보아 일어남은 진실로 간사한 소인의 정상이다. 어찌 율곡이 사람의 잘잘못을 말함에 있어 때로 혹 맞지 않은 것이 있으나 마음의 본체는 본래 광명한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 또 저 사람 김창흡은 자기 아버지를 어떠한 사람으로 보았기에 자기가 도리어 흔쾌히 원수의 노예가 되어서 눈썹을 치켜뜨고 눈을 부릅뜨면서 한 사람의 손바닥을 펴서 온 세상의 눈을 가리려고 한단 말인가. 아첨하는 병통이 너무도 심하다. 이 밖에 무엇을 더 꾸짖겠는가.
또 사람을 평론할 때에 혹 추켜세우고 깎아내림이 없지 못하나 임금께 아뢸 때와 만사(輓詞)와 제문(祭文)을 지을 때에는 충효의 큰 절개라느니, 상서로운 기린과 위엄스러운 봉황과 같다느니 하면서 극구 칭찬하고, 그 후에 별다른 잘못이 없었는데도 마침내 늙어서 죽지 않은 손 종신(孫從臣)에게 견주었으니, 충성과 효도를 하고 기린과 봉황이 된 뒤에 다시 따로 죄를 지은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백헌의 처지와 사세를 가지고 말한다면 삼전도 비문(三田島碑文)을 지은 것은 원래 불가할 것이 없으며, 혹 실수가 없을 수 없었다 하더라도 계곡(谿谷) 장유(張維)에게 비하면 훨씬 가볍다. 그런데 송 정승 시열은 마침내 장기(長鬐)에 위리안치되어 있던 중에 계곡의 비문을 지으면서 극구 칭찬하였으며, 그 비문이 궁중에 흘러 들어가기까지 하였다. 송 정승은 어찌하여 백헌은 마땅히 용서해야 하는데도 용서하지 않고 도리어 이와 같이 폄하하고 박대하였으며, 어찌하여 계곡은 마땅히 죄주어야 하는데도 죄주지 않고 도리어 이와 같이 받들어 높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 일의 저의는 본래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니,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자기 사심(私心)대로 조종하기 위한 것이었다. 계곡을 옳다 하고 백헌을 그르다 한 것도 생각은 각각 딴 데 있으면서 이것을 빌려서 이야깃거리로 삼은 것일 뿐이니, 시비의 근본이 된 근원에야 어찌 털끝만큼인들 생각이 미쳤겠는가.
또 문곡(文谷)의 본의는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았는데, 그 아들이 그 아버지를 훼방한 자인 송시열에게 잘 보이고자 해서, 후손들의 생각에 저 송시열의 말이 이와 같이 망극한데도 도리어 사제 간의 훈계라고 핑계 대면서 얼굴에 침을 뱉으면 닦지 않아도 저절로 마르는 것을 스스로 다행으로 여겨 감히 조금도 거역하려고 하지 않으니, 실로 다른 사람이 차마 들을 수가 없다. 김창흡이 이러한 말을 한 뜻은 본래 자기 아버지를 위하여 한때의 졸렬함을 감추고자 해서 구변으로 사람들의 말을 막다가 차츰차츰 옮겨가 그 아버지를 우롱하였다. 그리하여 하늘을 혼미하게 하는 죄과에 이르러서도 꺼리지 않는 바가 있었으니, 어찌 몹시 애통하고 깊이 슬퍼할 만하지 않겠는가.
양반 가문은 온 나라가 함께 사모하는 바인데, 이치를 거스르고 상도를 저버림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양반의 가문이 이와 같다면 온 나라가 끝내 서로 함께 죄에 빠지는 화를 면할 수 있겠는가.
송 정승이 평소에 주장한 것은 윤휴(尹鑴)를 배척하는 것을 큰 절목으로 삼고 명나라 조정을 높이는 것을 큰 의리로 삼았다. 그리하여 일이 혹 윤휴를 배척하는 것에 관계되기라도 하면 비록 세상에서 유림의 종장(宗匠)이라고 칭하고 평소에 도의지교(道義之交)로 허여한 집의(執義) 윤선거(尹宣擧)와 같은 자에게도 엄한 말로 준엄하게 배척하여 조금도 너그러이 용서하지 않았다. 회곡(晦谷)이 윤휴를 배척한 것이 송 정승 당사자보다 더하였으니, 사리로 따져 본다면 진실로 가시나무 회초리를 짊어지고 회곡의 집에 가서 회곡에게 죄를 청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 송 정승은 회곡을 용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사사로운 원수보다 더 심하게 미워하였다.
그리고 송 정승은 일이 혹 명나라 조정을 높이는 것에 관계되기라도 하면 비록 서서 오줌 누는 것을 금했다가 웃음거리가 된 민여로(閔汝老)일지라도 한 번 도목정(都目政)에 올리지 않았다 해서 이조 판서인 이경징(李慶徵)을 물리쳤다. 회곡이 3년간 설교(雪窖)에서 생활한 것을 민여로의 쓸쓸한 한마디의 척화(斥和)하는 글에 비한다면 태산과 작은 티끌의 차이일 뿐만이 아닌데, 회곡은 또한 이것으로써 송 정승에게 털끝만큼도 용납받지 못하였다. 이로써 논한다면 송 정승이 평소 주장하여 사랑하고 미워한 것은 본래 윤휴를 배척하였느냐 배척하지 않았느냐, 명나라 조정을 높였느냐 높이지 않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서계(西溪)의 일은 이 형의 평소 행위가 높은 곳은 지나치게 높고 낮은 곳은 지나치게 낮아서, 비록 이처럼 좋은 정직한 마음을 부여받았으나 이른바 너무 지나친 곳은 비록 형을 친애하고 형을 소중히 여기며 형을 사랑하고 형을 높이는 이 아우의 마음으로도 끝내 너무 지나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 《사변록(思辨錄)》 중에 선유(先儒)들이 성(性)만 논하고 기(氣)를 논하지 않은 것을 구비되지 않았다 하고 옳지 않다 하며, 함양(涵養) 공부와 성찰(省察) 공부 가운데 함양 공부 한 가지는 폐지해도 된다고 말한 것은 모두 옳지 않다. “마음과 뜻이 곧바로 성(性)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은 비록 사리에는 그르다 하더라도 생각에 간사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였으니, 이러한 이기(理氣)와 심성(心性)의 깊고 넓은 근원에 대해서는 진실로 용이하게 말하기가 어렵다. 이제 잘못된 것을 들어 그르다 하고 옳은 것을 들어 옳다 하려고 한다면 그 형세가 혹 뛰어난 점과 좋은 점까지도 아울러 깎아 없애는 데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 형 박세당이 말년에 뜻을 다해 연구하여 스스로 깊이 얻은 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인데, 그 시비와 득실을 논하지 않고 데면데면하게 말하고 지나가는 것은 또한 우리 형을 위하여 묘지문을 짓는 본의가 아닐 것이다.
다만 이 아우는 평소 우리 형의 정직한 마음에 깊이 감복할 뿐이다. 이로써 또한 형이 정직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을 가지고 말씀하여 실로 한 점의 깨끗하지 못한 사심도 섞여 있지 않다는 것을 깊이 알 뿐이다. 이로써 말한다면 형에게서 나온 말씀이 설령 다소 사리에 어긋나는 점이 있고, 설령 선유의 말과 다른 점이 있다 하더라도 이른바 정직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지나치게 신복하는 근본이 되었으므로 또한 일찍이 허물로 삼지 않은 것이다. 형과 같이 정직한 사람이 어찌 고금 천하에 다시 있겠는가. 비록 고금 천하에 오직 형 한 사람뿐이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또 서계 형이 요로에 있는 송시열에게 죄를 얻은 것은 완전히 백헌의 비문과 그 아들 태보(泰輔)의 문집에 연유한 것이다. 이른바 《사변록》이라는 것은 상자 속에 넣어 둔, 남몰래 지은 초고에 지나지 않으니, 죄를 얻은 근원은 본래 여기에 있지 않다. 그중에 설혹 문자의 잘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말할 것이 못 된다. 만약 후세 사람이 이전 사람의 말을 함부로 옮기고 바꾸었다 해서 죄로 삼는다면 구양공(歐陽公)은 〈계사전(繫辭傳)〉을 공자의 말이 아니라고 하였고, 사마광(司馬光)은 《맹자》를 의심하였으니, 성인(聖人)의 문하에 죄를 얻음이 《사변록》 가운데 한두 구절이 다른 정도에 그치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구양공과 사마공 두 분은 당시에 죄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묘(文廟)의 배향에 참여하기까지 하였으며, 후세의 공론이 또한 허물로 삼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서계의 잘잘못을 논하려면 다만 백헌의 비문으로 결정해야 할 것이니, 《사변록》은 본래 공중을 지나가는 뜬구름과 같은 것이다. 죄로 삼고자 하는 것이 여기 백헌의 비문에 있으면서 칭탁하여 말하는 것은 저 사변록에 있으니, 이는 진실로 뜻은 동쪽에 있으면서 말은 서쪽을 한다는 것이어서 마음과 말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이다. 무릇 이러한 언론과 의도는 오래전부터 전해 오는 내력이 있으니, 어찌 다만 한때 한 사람의 죄이겠는가. 만약 본심이 다소 밝아 세도(世道)에 물들지 않은 자가 이것을 본다면 이른바 《사변록》의 시비에 관한 문제는 본래 한번 웃고 말 정도일 뿐이니, 어찌 여러 말로 변론할 것이 있겠는가.
이 글은 《사기(史記)》에 두영(竇嬰), 관부(灌夫), 전분(田蚡) 세 사람을 합하여 한 전(傳)을 만든 것과 비슷하다. 내가 병이 심하여 죽게 되어서 세 분에 대해 각각 따로 글을 짓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 이 세 분 집안의 일은 서로 시(始)와 종(終)이 되고 서로 관통하니, 무릇 오늘날 조정의 시비가 전도되고 당론(黨論)이 멋대로 분열되며 곡직(曲直)이 구분되지 않는 것은 모두 여기에 연유한다. 후인들이 만약 오늘날 조정의 분란을 알려고 한다면 반드시 이 세 전을 합하여 보면 그 전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내가 죽은 뒤에 이 글을 세 분 집안에 보내어 만약 사용하려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만약 사용하려고 한다면 한계를 정해 피차간의 항목을 나누기 어려우므로 본가(本家)를 위하여 말한 내용만을 뽑아내어 사용하기 어려울 것이니, 사용하려면 전문(全文)을 사용하고 사용하지 않으려면 또한 전문을 다 버리기 바란다.
회곡의 집에서 청한 것은 바로 비문 후기인데, 설교(雪窖)에서 절개를 세운 것과 시호를 내린 은전을 미처 거론하지 않았으니, 이 글을 가지고 비문 뒤의 추기(追記)로 삼을 수는 없다. 또 평소의 문장의 고하를 논하지 않았으니, 문집의 서문으로 쓰기에도 격식이 맞지 않다. 그러나 자벌레처럼 굽혔다가 용처럼 펴는 것은 그 일이 본래 중요한 법이니, 문장의 잘잘못은 다만 천고에 안목이 있는 자를 기다리면 또한 충분하다. 지금 세세히 논하지 않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으니 어떠할지 모르겠다.
이는 비록 사사로운 글이라고 하나 세도(世道)가 위태롭고 혼란해지는 근본이다. 그러므로 나는 30년 동안 대신의 지위에 있었으면서 끝내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세도를 위했다고 하나 내가 신하로서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지고 있어 이미 이것을 조정에서 드러내 놓고 말하고 공공연히 논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죽은 뒤에 사사로운 글을 급급히 남에게 보이는 것은 또한 삼가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뜻이 아니다. 그러하니 반드시 나의 상(喪)을 마친 뒤에 비로소 글을 청한 세 집에 보여 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비록 헌 빗자루라 하더라도 천금처럼 귀하게 여겼으니, 내가 죽은 뒤에 세도가 설령 중간에 크게 바뀌어 문자에 설령 분명히 잘못된 부분이 있더라도 나의 자식 된 자는 한 글자도 빼거나 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주1]회곡(晦谷) : 조한영(曺漢英 : 1608~1670)의 호이다. 1640년(인조18) 청나라에 구원병과 원손(元孫)을 보내는 것을 반대하다가 김상헌(金尙憲), 최명길(崔鳴吉), 함창(咸昌)의 유생 채이항(蔡以恒) 등과 함께 심양(瀋陽)에 잡혀가 용골대(龍骨大)에게 심문을 받았으나 끝내 굽히지 않고 심양의 옥에 갇혀 김상헌과 함께 《설교집(雪窖集)》을 지었으며, 3년 만에 의주(義州)로 이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효종 때 승지로서 윤휴(尹鑴)의 등용을 적극 반대하다가 전직(銓職)에서 물러났다.
[주2]서계(西溪) : 박세당(朴世堂 : 1629~1703)의 호이다.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의 비문을 지어 송시열(宋時烈)을 비판하였고, 《사변록(思辨錄)》을 지어 종래의 경설(經說)을 개작하여 한때 물의를 일으켰는데, 1703년(숙종29) 그의 《사서집주(四書集註)》가 주자(朱子)의 학설을 비방하였다 하여 추방되었다.
[주3]장열(張說)과……못하였다 : 당나라의 장열과 요숭(姚崇)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요숭이 죽을 때 그의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나의 비문을 장열에게 맡겨라.” 하였다. 그의 아들이 꾀를 써서 장열에게 비문을 맡기니, 장열이 비문의 첫 줄에 “여덟 개의 기둥으로 하늘을 떠받들었다.〔八柱承天〕”는 등의 칭찬하는 문구를 써 놓고 뒤에 후회하였으나 이미 칭찬하는 글을 지어 주었으므로 요숭의 단점을 말하지 못하였다. 《太平廣記 卷170 知人2》
[주4]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인 사람 : 김창흡(金昌翕) 형제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주5]원수의 노예 : 우암 송시열이 일찍이 김창흡의 아버지인 김수항(金壽恒)을 비판하였는데, 김창흡 형제가 송시열을 사사하였으므로 김창흡의 원수인 송시열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주6]손 종신(孫從臣) : 종신(從臣)은 시종하는 신하로, 송나라 때 흠종(欽宗)을 시종하고서 금나라에 잡혀가 흠종 대신 항복문을 지은 손적(孫覿)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삼전도 비문을 쓴 이경석을 비유한 것이다. 흠종이 정강(靖康)의 난리에 금나라에 잡혀 있을 적에 금나라 사람들이 항복하는 글을 받으려 하므로 흠종은 부득이 종신인 손적에게 짓게 하였는데, 손적이 항복문을 지으면서 지나치게 송나라를 깎아내려 금나라에 아첨하였다. 그는 항상 사람들에게 “천명을 따르는 자는 보존되고 천명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라고 말하므로 어떤 이가 조롱하기를 “그대가 오랑캐 진영에 있을 적에 천명을 따른 것이 매우 심하였으니, 수(壽)하고 강녕(康寧)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니, 손적이 부끄러워 응답하지 못했다 한다. 《朱子大全 卷71 雜著 記孫覿事》
[주7]민여로(閔汝老) : 1598〜1671. 현종 때의 문관으로 젊었을 때에 척화(斥和)하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에 청요직에 올라 대간(臺諫)이 되었는데, 서서 오줌 누는 것을 금하였다가 한때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 후 이조 판서 이경징(李慶徵)이 이것을 흠으로 여겨 그를 도목정(都目政)에 올리지 않자, 송시열은 이경징이 의리를 몰라 기절(氣節)이 있는 사람을 등용하지 않았다고 크게 비판하였다. 이경징은 이로 말미암아 결국 물러나 번뇌하다가 등창이 나서 죽었는바, 이에 대한 내용은 《약천집》 제34권 〈가아에게 부침〉에 자세히 보인다.
[주8]도목정(都目政) : 이조와 병조에서 매년 6월과 12월에 벼슬아치의 성적을 평가하여 면직하거나 승진시키는 일을 이른다.
[주9]회곡이……것 : 설교(雪窖)는 눈 쌓인 움막을 이르는바, 소무(蘇武)와 같은 굳은 절개를 말한다. 한 무제(漢武帝) 때 소무가 흉노에 사신 가니 선우(單于)가 억류하고 항복시키려 하였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자, 큰 움 속에다 감금하고 음식을 주지 않았다. 소무는 눈과 털방석을 섞어 먹고 살았으며, 뒤에 북해(北海)의 무인지경에 옮겨졌는데, 흉노에 억류된 지 19년 만에 흉노와의 화친으로 귀국하였다. 《漢書 卷54 蘇武傳》 여기서는 조한영(曺漢英)이 병자호란에 청나라에 잡혀가 지조를 변치 않고 추운 지방에서 고생한 것을 소무에 비유한 것이다.
[주10]자벌레처럼……것 : 현재는 송시열 등의 비난으로 매몰당하지만 뒤에 반드시 크게 인정받을 날이 있음을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주11]헌 빗자루라……여겼으니 : 분수를 알지 못하고 자기 것은 무조건 최고로 여김을 비유한 것이다. 《문선(文選)》〈전론 논문(典論論文) 위 문제(魏文帝)〉에 “속담에 ‘집안에 못 쓰게 된 빗자루가 있는데 천금을 호가(呼價)한다.’는 말이 있으니, 이는 자기를 돌아보지 못하는 탓이다.” 하였다.
박세당(朴世堂)1629년(인조 7)∼1703년(숙종 29). 西溪先生集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潛叟)·서계초수(西溪樵叟)·서계(西溪). 좌참찬 동선(東善)의 손자이며 이조참판 정(炡)의 아들이다.
4살 때 아버지가 죽고 편모 밑에서 원주·안동·청주·천안 등지를 전전하다가 13세에 비로소 고모부인 정사무(鄭思武)에게 수학하게 되었다.
1660년(현종 1)에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고, 그뒤 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병조정랑·지평·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함경북도병마평사(兵馬評事) 등 내외직을 역임하였다.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왔지만 당쟁에 혐오를 느낀 나머지 관료생활을 포기하고 양주 석천동으로 물러났다.
그뒤 한때 통진현감이 되어 흉년으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쓰기는 하였으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맏아들 태유(泰維)와 둘째아들 태보(泰輔)를 잃게 되자 여러 차례에 걸친 출사권유에도 불구하고 석천동에서 농사지으며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만 힘썼다.
그뒤 죽을 때까지 집의·사간·홍문관부제학·이조참의·호조참판·공조판서·우참찬·대사헌·한성부판윤·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의 관직이 주어졌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702년(숙종 28)에는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서 송시열(宋時烈)을 낮게 평가하였다 하여 노론(老論)에 의하여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탄되기도 하였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성장기의 고난과 청·장년기의 관리생활을 통한 개혁의식, 그리고 당쟁의 와중에서 겪은 가족의 수난과 어려운 농촌에서 지낸 그의 생애 등을 통해서 형성된 사회현실관의 반영이라 하겠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보기 드문 민족적 시련과 정치적 불안정 및 민생의 곤궁이 매우 심하였던 시기이었다.
즉 병자호란의 국치와 당쟁의 격화로 말미암아 국력은 약화되고 민생이 도탄에 허덕이고 있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내외의 현실을 직시하며 국가를 보위하고 사회개혁을 통한 민생의 구제를 목표로 하는 사상적 자주의식을 토대로 해서 그의 학문과 경륜을 펼쳤던 것이다.
그의 근본사상에 대하여는 유학의 근본정신을 추구하는 데 있었다는 견해가 있고, 주자학은 물론 유학 자체에 회의하여 노장학(老莊學)으로 흐른 경향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의 근본입장이 당시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주자학을 비판하고 중국 중심적 학문태도에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는 데는 이론이 없다.
뿐만이 아니라, 17세기 우리나라의 사상계는 국내외적 시련에 대한 극복을 위하여 사상적 자주의식이 제기되어 이의 수정과 사회적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입장도 주자학에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반성이 싹튼 것은 16세기에 비롯하였지만, 주자학에 대한 정면도전이 표면화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이 때문에 주자학의 열렬한 신봉자들인 송시열 등은 주자학 비판자들을 사문난적이라 하여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이러한 배척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그와 윤휴(尹鑴)·윤증(尹拯) 등이었다.
이들은 주자학을 비판함에 있어서 공통적이었지만 그들의 학문연구의 입장은 달라 대략 세 방향을 띠었다.
즉, 첫째는 고대의 유학, 특히 한(漢)나라 때의 유학을 빌어 통치이념을 수정하려는 윤휴와 같은 남인(南人)계통의 학파이고, 둘째는 명나라 때 왕양명(王陽明)의 유학을 도입하여 채용해보려는 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 등 양명학파(陽明學派)이며, 셋째는 노장사상을 도입하여 새로운 시각을 모색하려는 박세당계통이었다.
박세당은 당시의 학자들이 꺼려하였던 도가사상(道家思想)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노장서(老莊書)에 탐닉하면 스스로 되돌아올 줄 모르고 심취하게 된다고 고백할 정도이었다.
그가 이러한 학문경향을 지니게 된 데에는 젊었을 때 지녔던 그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개혁적 사고 때문이었고, 또 백성의 생활안정과 국가를 보위하는 데 있어서 차별을 본질로 하는 유가사상(儒家思想)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해서지방(海西地方)의 암행어사와 함경북도병마평사를 역임한 뒤, 홍문관수찬으로 있으면서 응구언소(應求言疏)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양반지배세력의 당쟁과 착취로 비참한 경지에 이른 백성들의 생활안정책과 무위도식하고 있는 사대부(士大夫)에 대한 고발이었다.
그는 요역(徭役)과 병역의 균등화를 주장하였고, 모든 정치·사회 제도가 문란하므로 개혁하지 않을 수 없고 모든 법률이 쇠퇴하였으므로 혁신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국민 가운데 공사천민(公私賤民)이 6할, 사대부양반이 2할, 평민이 2할인데, 사대부양반은 8∼9할이 놀고 먹으니 이는 봉록(俸錄)만 받아먹는 나라의 커다란 좀〔蠹〕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중국대륙의 세력변동에 주체적으로 적응하는 실리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는 고대 삼국 가운데 국력이 가장 미약하였던 신라가 당나라에게 망하지 않은 원인이 외교정책의 현실주의적 실리추구에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고려말 정몽주(鄭夢周)와 자기의 선조 박상충(朴尙衷)에 관한 평가에 있어서도 고려에 대한 충절로서보다는 원나라·명나라 교체의 국제적 변동에 대처하려는 대외정책으로 신흥 명나라를 섬기고 원을 배척할 것을 주장한 실리주의자였던 데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숭명배청(崇明排淸)이 풍미하던 당시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현실적 생존과 국가의 보위를 위하여 국제사회에서의 주체적 적응이란 입장에서, 존명사대(尊明事大)의 명분을 버리고 민족자존의 실리를 위한 친청정책(親淸政策)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대내외정책에 대한 개혁의식을 가졌던 그는 관직을 버린 뒤 《논어》·《맹자》·《대학》·《중용》 등 사서와 《도덕경(道德經)》 및 장자(莊子)의 연구를 통하여 주자학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는 학문적 지향을 취하였다.
그는 육경(六經)의 글은 그 생각이 깊고 취지가 심원(深遠)하여 그 본뜻을 흐트러뜨릴 수 없는 것인데, 후대의 유학자들이 훼손하였으므로, 이를 바로잡아 공맹(孔孟)의 본지(本旨)를 밝혀야 한다는 뜻에서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자유분방하여 매우 독창적이었다. 예를 들면, 그는 유가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인(仁)에 대하여, 공자가 말하는 ‘인’이란 인간과 동물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조화(自然調和)의 심정이 아니라 동물에 대한 인간중심적인 사랑이며, 사람과 동물에 차별을 두지 않는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맹자의 인에 대하여도, 맹자의 차마 할 수 없는 심정인 불인지심(不忍之心)으로서의 ‘인’이란 도살장과 부엌을 멀리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 고작일 뿐, 역시 살생을 배격하지 않는 잔인성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라고 꼬집는다.
또한, 맹자는 ‘왕도(王道)’를 민심을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하지만, 민심을 얻는 데만 뜻을 먼저 둔다면 이는 패자(覇者)의 행위이고 왕도는 아닐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는 주자가 제왕권체제(帝王權體制)를 강화하기 위하여 설정한 모든 만물의 근원적 원인자(原因者)로서의 태극(太極)에 대한 이해에도 이의를 제기하였다.
주자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현실적 차별이 이러한 현상에 앞선 원인자인 태극에서 연유한다고 주장하여, 인간이 제왕권(帝王權)에 복종하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당연한 도리이고, 또 인간이 감각적 욕구를 추구하는 것은 인욕(人欲) 또는 인심(人心)으로서 악행(惡行)이라고 피력하였으나, 그는 태극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함께 감각적 욕구를 작용시키는 감성(感性)도 인간의 불가피한 기능임을 지적하였다.
그는 도심(道心) 못지않게 인욕의 충족도 중요시하였던 것이니, 이는 백성들의 생활안정을 위하여 명분론보다도 의식주와 직결되는 실질적인 학문이 필요하다는 그의 실학사상을 나타낸 것이라 보겠다.
그는 도를 밝힌다는 것은 지식과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있으며, 백성들이 실질을 떠나서 허위의 비현실적인 가치관만을 배우게 되면 이것을 다스리려 하여도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백성의 생활가치를 신장시키는 것에 학문의 목표를 두었기 때문에, 이단시되던 노장학까지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노장학도 그 본질면에서 보면 세상을 바로잡는 길에 보탬이 될 뿐만 아니라, 버릴 것이 없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도가사상이 차별사상이 아니고 민중중심적인 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인의 지배욕구의 포기를 그 근본으로 하는 것이 《도덕경》의 정신이라고 주장하였다. 노자의 무위(無爲)란 일하지 않는 불사(不事)가 아니라, 사사로운 욕구에 얽매이지 않는 무욕(無欲)의 정치태도이며, 장자의 무위자연도 자연을 벗삼아 사는 것이 아니라 치자(治者)에게 과도한 지배욕구를 버리고 백성들의 생활권을 신장시키는 데 힘쓸 것을 요청한 무욕의 뜻이라고 이해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자신도 스스로 무욕을 실천하는 생애를 보냈지만 정치와 사회현실에 전연 무관심한 것이 아니었고, 비교적 혁신적 사고를 지녔던 소론파(少論派)와 빈번하게 교류하였다.
그는 소론의 거두인 윤증을 비롯하여 같은 반남박씨로 곤궁할 때 도움을 준 박세채(朴世采), 처숙부 남이성(南二星), 처남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과 교유하였고, 우참찬 이덕수(李德壽), 함경감사 이탄(李坦), 좌의정 조태억(趙泰億) 등을 비롯한 수십인의 제자를 키우기도 하였다.
그의 학문과 행적에 대한 변론은 계속되어 그가 죽은 지 약 20년이 지난 1722년(경종 2)에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서계선생집 西溪先生集》과 《대학》·《중용》·《논어》·《상서》·《시경》 등의 해설서인 《사변록》, 그리고 도가에 대한 연구서인 《신주도덕경 新註道德經》 1책과 《남화경주해산보 南華經註解删補》 6책이 전하며, 편저로는 농서(農書)인 《색경(穡經)》이 전한다.
박세당(朴世堂) 서계집
제발(題跋)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의 뒤에 쓰다
이는 인조(仁祖) 7년 기사년(1629)에 그린 그림인데, 곧 명(明)나라 숭정(崇禎) 2년에 해당된다. 모인 곳은 성남(城南)의 못가이며, 연꽃을 구경한 때는 곧 6월 5일이다. 모인 사람은 모두 12명인데, 관작(官爵)보다 연치(年齒)를 우선하였다. 이에 송계옹(松溪翁)이 81세로 가장 나이가 많아 상석에 앉았고, 다음 윤 파흥(尹坡興)ㆍ이 첨지(李僉知)는 모두 80세이고, 다음 연릉(延陵)은 77세이고, 다음 이 정랑(李正郞)ㆍ홍 동지(洪同知)ㆍ강 우윤(姜右尹)은 모두 75세이고, 다음 연평(延平)은 73세이고, 다음 서 참찬(徐參贊)은 72세이고, 다음 강 첨지(姜僉知)ㆍ유 좌윤(柳左尹)은 모두 71세이다. 심 청평(沈靑平)은 68세로 가장 나이가 어려 제공들 사이에 낄 수 없었는데도 모임에 참여하였으니, 당송(唐宋)의 고사(故事)가 있기 때문이다.
제공들에게는 또 모두 시종(侍從)한 자제(子弟)들이 있는데, 많게는 3명에 이른다. 그 가운데 가장 벼슬이 높은 사람은 이 판서(李判書)와 백헌 상국(白軒相國), 연양 상국(延陽相國)과 연성군(延城君), 서 상국(徐相國)과 달성 도위(達城都尉)가 있으며, 송계만 시종한 자제가 없다. 그림 아래에 모두 각각 관질(官秩)과 성명(姓名)을 열거하였는데, 이를 쓴 사람은 백헌이다. 그리고 이 판서 및 계곡(谿谷 장유(張維)) 장 상국(張相國)이 나란히 서문(序文)을 지었으며, 계곡은 시(詩)까지 써넣었으니, 아, 이 그림 하나에서 전배(前輩)들의 풍류를 볼 수 있다 하겠다.
시대가 흘러서 기사년이 지금과의 거리가 63년 정도일 뿐인데, 아득히 멀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고(上古) 시대와 같은 느낌이 든다. 이것이 내가 자주 손으로 어루만지며 마음속에 잊지 못하여 왕희지(王羲之)가 말한 “세대가 다르고 일이 다르다.”는 말에 깊은 감회가 생기는 까닭이다.
오늘날 사대부(士大夫)들을 보건대, 서로 교유하는 꼴이 한배를 타고서도 서로 해치려고 키를 뽑고 상앗대를 꺾으며, 같은 방을 쓰면서도 서로 해치려고 상을 던지고 의자를 밀치고, 심지어는 한쪽은 어육이 되고 한쪽은 식칼이 되고서도 분쟁을 그치지 않으니, 어떻게 다시 이 그림 속의 전배들처럼 학발구장(鶴髮鳩杖)으로 자제들을 거느리고 한자리 한석상에서 술을 마시고 기쁨을 나눌 일이 있겠는가.
이구(李構)는 송계의 5대손이다. 이 그림을 가지고 와서 보여 주며 말하기를, “당시에는 이 그림과 똑같은 것이 모두 12본(本)이어서 제공들이 모두 하나씩 자기 집에 보관하였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상란(喪亂)을 겪는 바람에 11개는 모두 없어졌고, 저희 집에 보관하던 것만 다행히 유실되지 않아 현재 이 그림만 유일하게 세상에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 그림에 발문을 써 주십시오.” 하기에 이 글을 써서 돌려준다.
신미년(1691, 숙종 17) 12월 11일 신미일에 반남(潘南) 박세당(朴世堂)은 삼가 쓰다.
[주1]당송(唐宋)의 고사(故事) : 송(宋)나라 때 문로공(文潞公) 문언박(文彦博)이 서경 유수(西京留守)로 있으면서 당(唐)나라 백거이(白居易)의 구로회(九老會)를 모방하여, 당시의 원로 명재상인 부필(富弼)과 사마광(司馬光) 등 학덕(學德)이 높은 13명의 노인들과 함께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를 결성하였는데, 사마광이 일흔이 못 된 나이로 특별히 참석했다고 한다. 《石渠寶笈 卷35 宋人耆英會圖》
[주2]세대가 …… 다르다 : 왕희지(王羲之)의 난정기(蘭亭記)에 “후세에 지금을 봄이 또한 지금에 옛날을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니, 슬프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을 차례로 쓰고 그들이 지은 글을 기록하니, 비록 세대가 다르고 일이 다르나 감회를 일으킨 이유는 그 이치가 마찬가지이다. 후세에 이것을 보는 자 또한 이 글에 장차 감회가 있을 것이다.”라고 한 말이 보인다.
題跋
書南池耆老會圖後
圖作於仁祖七年己巳。爲明崇禎二年。其會則城南池。賞蓮時。卽六月五日。會者共十二人。先齒而後爵。於是松溪翁年八十一。爲最老居前。次尹坡興,李僉知。俱年八十。次延陵年七十七。次李正郞,洪同知,姜右尹。俱年七十五。次延平年七十三。次徐參贊年七十二。次姜僉知,柳左尹。俱年七十一。沈靑平年六十八最少。不及諸公。亦與會。有唐宋故事焉。諸公又皆有子弟得侍。多者至三人。其最貴則有李判書與白軒相國。延陽相國與延城君。徐相國與達城都尉。獨松溪無子弟侍。圖下。皆各列官秩姓名。其書者白軒。而李判書及谿谷張相國。並爲序引。谿谷又有詩。嗚呼。卽此一圖。足見前輩風流。世運升降。己巳距今六十三年耳。而邈焉若羲農之去而不可復還也。此吾所以屢手摩而心不能已。深有感於臨川所言世殊事異者也。見今之士大夫。其相與也。同舟而拔柁斬篙。同至而投床抵榻。甚則爲魚肉爲刀几。方且棼然其未已也。寧復有如圖之鶴髮鳩杖左扶右侍銜杯接歡於一筵一席之間者哉。李構。松溪之五世孫。携此圖來示曰。當時如圖者共十二。諸公皆藏其一於家。中經喪亂。其十一皆已亡。獨藏構家者幸不失。今惟此圖在世間耳。請有以記之。書此以還之。辛未十二月十有一日辛卯。潘南朴世堂。謹識。
영의정 백헌(白軒) 이공(李公) 신도비명
《시경》에 이르기를, “비록 노성(老成)한 사람은 없으나 그래도 전형(典刑)은 남아 있다.” 하였으니, 전형의 유무에 국가의 치란과 존망이 달려 있고 전형은 또 노성한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노성한 사람을 지금 다시 볼 수는 없으나 다행히 전형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까닭에 능히 우리 자손과 백성을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니, 아, 노성한 사람이 국가에 관계됨이 또한 크다 하겠다. 그리고 《서경》에 이르기를, “노성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 하였으니, 노성한 사람의 중요함이 이와 같다. 노성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자가 있다면 천하의 일 가운데 이보다 더 상서롭지 못한 것이 없고 상서롭지 못한 일을 행하는 데에 과감한 자에게는 또한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과보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는 하늘의 이치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은 휘는 경석(景奭),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이니, 정종(定宗)의 열째 아들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의 6대손이다. 증조는 함풍군(咸豐君) 휘 계수(繼壽)이고, 조부는 증 좌찬성 휘 수광(秀光)이고, 부친은 동지중추부사 증 영의정 휘 유간(惟侃)이고, 모친은 개성 고씨(開城高氏)로 대호군 한량(漢良)의 따님이다.
공은 선조 28년인 을미년(1595) 11월 1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 형 효민공(孝敏公 이경직(李景稷))에게 배웠는데 매양 영창(映窓) 앞에서 글을 읽었다. 집안이 가난한 데다 흉년이 들어 아침에 나가서 배고픔을 참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는데 조모가 밥상을 대하고 계시므로 잠시 몸을 숨기고서 다 드실 때까지 기다린 적도 있었으니, 그 지극한 효심이 이와 같았다. 13세에 부친이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로 있고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경력으로 있었는데 청음이 공을 매우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우리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다.
광해 5년(1613)에 진사가 되었다.
계해년(1623, 인조 원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 해에 등제(登第)하여 괴원(槐院)에 분관(分館)되었고 사국(史局)에 들어가 검열(檢閱)과 봉교(奉敎)가 되었다.
갑자년(1624)에 주서로 옮겼다. 이괄(李适)의 난에 상이 남쪽으로 파천하였는데, 백관이 다 도망하여 숨고 어가를 호종(扈從)한 자는 승지 한효중(韓孝仲) 및 공과 내관(內官) 2인뿐이었다. 당시 나루에는 배가 한 척도 없고 밤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효민공이 전라 병사를 맡아 아직 부임하기 전이었는데 남쪽 강안에서 배 한 척을 찾아내어 어가를 맞이하였다. 강을 건넌 뒤에 상이 승상(繩床)에 앉아 밤을 지새웠는데 공 형제가 시립하여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 도보로 수가(隨駕)하여 공주(公州)에 이르렀다. 어가가 환궁한 뒤 전적(典籍)으로 천전되었고 정언을 거쳐 수찬이 되었다.
을축년(1625, 인조3)에 정언이 되어 경연을 열 때에 면대하여 아뢸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양사가 연석(筵席)에 들어간 것은 이때에 시작되었다. 헌납과 부교리를 역임하였다.
병인년(1626) 가을에 이조 좌랑으로 천전되었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중시(重試)에 1등으로 등제하였다.
정묘년(1627)에 청군(淸軍)이 쳐들어오자 체찰사 장만(張晩)의 자벽(自辟)으로 군대를 따라 서도(西道)로 나갔다. 이어 관동(關東)에서 군량의 운반을 감독하고 3월에 행조(行朝)로 돌아왔다. 처음 군대가 출동할 때에 싸울 군사가 적고 또 큰비까지 내려 중론이 잠시 머물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조정에서 필시 3일 동안 행군하고도 임진(臨津)을 건너지 않은 것으로 죄를 줄 것이니, 우선 진군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는데, 이튿날 저보(邸報)를 받아 보니 과연 공의 말과 같았다. 수찬, 직강을 역임하였다. 김원(金垣)이란 자가 남의 사주를 받아 상소하여 명류(名流)를 무고하였는데 공도 포함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으므로 고향의 장원(莊園)으로 물러나 있다가 몇 달 만에 돌아왔다.
무진년(1628)에 이조 낭관에 배수되었다.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이귀(李貴))이 패장(敗將)인 이일원(李一元)을 서변(西邊)의 수령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적들이 필시 우리에게 인물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하여 마침내 중지되었다. 유효립(柳孝立)의 옥사가 일어나자 문사낭청(問事郞廳)이 되었고 그 공로로 통정대부로 자급이 올랐다. 가을에 승지에 배수되었고 좌부승지로 천전되었다. 종성(鍾城)의 토착민인 박중남(朴仲男)이 오랑캐에 투항하였는데 기사년(1629) 봄에 오랑캐 사신과 함께 나왔다. 전상(殿上)에 앉는 것을 허락하려고 하자 공이 안 된다고 하였고 차(茶)를 내리는 순서도 뒤로 미루니, 중남의 기세가 꺾였다. 3월에 정시(庭試)에 2등으로 입격하였고 호당(湖堂)에 선발되었는데 특명으로 직임을 그대로 띠었다. 가을에 부모의 봉양을 위해 지방관을 청하여 외직으로 나가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었다.
경오년(1630, 인조8) 가을에 어버이의 병환을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갔다. 양주에 있을 때에 서리가 말리는데도 듣지 않고 누적된 미납 세금을 모두 견감(蠲減)해 주었는데 그 결과 격례(格例)에 구애되어 오랫동안 파산(罷散)된 상태로 있었다.
신미년(1631)에 위장(衛將)이 되었다. 위장은 으레 견여(肩輿)를 탔는데 공은 유독 걸어서 다녔다.
임신년(1632) 봄에 은대로 돌아왔다. 상이 감귤을 하사하여 어버이에게 주게 하자 공이 감격하여 시를 지었는데, 진신(搢紳)들이 이 시를 전송(傳誦)하여 화운(和韻)하였다. 4월에 우승지로 승진하였다. 공은 오랫동안 후설(喉舌)의 직임에 있으면서 내지(內旨)를 받들지 않고 반박하여 바로잡은 것이 많았다. 여름에 장릉(章陵)을 추숭(追崇)하였는데 그 공로로 가선대부로 자급이 올랐다. 부친과 맏형이 이미 2품에 올라 부자와 형제가 모두 재신(宰臣)의 반열에 있게 되니, 사람들이 영예로운 일로 여겼다. 6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갑술년(1634)에 또 부친상을 당하였다.
병자년(1636)에 복제(服制)가 끝나 부제학과 도헌(都憲)에 연이어 배수되었다. 이해 봄에 청인(淸人)이 칭호(稱號) 문제로 사신을 보내왔다. 당시의 의논이 사신을 참하여 화친을 끊고자 하였는데 사신이 달아나 조야가 흉흉하였다. 공이 상에게 아뢰기를, “시세(時勢)를 돌아보지 않고 함부로 강한 도적을 건드린다면 그들이 오는 것은 필연입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권경기(權儆己)가 장오죄(贓汚罪)에 걸려 참수를 당하게 되자 공이 그 억울함을 논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12월에 청병(淸兵)이 대거 침입해 왔다. 상이 강도(江都)로 행행하려고 남문(南門)을 나서니, 적기(敵騎)가 이미 사령(沙嶺)에 들이닥쳤다. 이에 공이 급히 어가 앞으로 나아가니, 상이 문루(門樓)에 임하여 공을 나아오게 하고 물었다. 이에 공은 아뢰기를, “사세가 급박하니, 남한산성으로 가셔야 합니다.” 하였고 상이 김류(金瑬)에게 물으니, 김류는 강도로 행행할 것을 청하였다. 공이 한사코 다투니, 상이 공의 의견을 좇았다. 공이 장수를 보내 미리 적을 막을 것을 청하니, 상이 또 따랐다. 당시 일이 창졸간에 터졌으므로 공은 도보로 남한산성으로 달려갔다. 부제학에 배수되었다. 성이 포위되자 삼사(三司)의 명류(名流)를 모두 독전어사(督戰御使)로 삼아 대오를 편성하고 주야로 경계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심사숙고한 뒤에 좋은 계책이라고 하였다. 큰 눈이 내렸는데 사졸들이 그 눈을 그대로 맞자 공이 또 대소의 관원으로 하여금 옷을 벗어 병사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청하여 그것으로 눈비를 막게 하니, 군사들이 솜옷을 입은 것처럼 감격해하였다. 공은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계곡(溪谷 장유(張維))과 함께 개원사(開元寺)에 거처하였다. 공은 밤마다 한두 차례 일어나 행궁(行宮)까지 걸어가서 문안하였고, 물러 나와서는 서로 손을 잡고 통곡하면서 서로 충의(忠義)로써 권면하였다. 상이 성을 나오게 되었을 때에 공이 줄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자 상이 측은히 여겨 수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정축년(1637, 인조15) 1월에 어가를 호종하고 돌아와 지신사(知申事)에 배수되고 부제학과 도헌으로 이배되었으며 다시 지신사가 되었다. 종묘의 신주를 고쳐 쓰게 되었는데 처소를 정하지 못하자 공이 묘내(廟內)로 나아가 행할 것을 청하였고, 또 시사(視事)를 행하여 신료들을 자주 접견할 것과 제사(諸司)가 매일 개좌(開坐)하여 군읍(郡邑)의 서리와 차인들이 오랫동안 서울에서 지체하는 일이 없게끔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랐다. 부제학, 대사헌, 공조 참판을 역임하였고 다시 부제학이 되었다. 상차(上箚)하여 예닐곱 가지 일을 진달하고 또 윤황(尹煌)이 척화로 인해 정배되었으니 풀어 주어야 마땅하다고 아뢰었는데, 상이 모두 가납하였다. 당시 청인(淸人)이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세우고자 하여 그 비문을 요구하였다. 상이 장유(張維), 조희일(趙希逸)에게 명하여 지어 올리게 하였지만 두 사람이 지은 비문이 모두 저들의 뜻에 차지 않아 더욱 거칠게 으르렁대자 상이 마침내 공을 면대하여 명하기를, “구천(句踐)은 신첩(臣妾)이 되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강(自强)을 도모하였으니, 지금은 다만 저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어야지 혹시라도 격노를 사서는 안 된다.” 하였다. 공이 마지못해 명을 받들고 석문공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문자를 배운 것을 후회합니다.” 하였고, 또 “부끄럽게도 오계(浯溪)의 백 길 절벽을 저버렸도다.”라는 시구가 있으니, 공의 뜻을 알 수 있다.
무인년(1638, 인조16)에 상차하여 백성의 힘을 덜어줄 수 있도록 강도를 보수할 때에 남쪽 백성들을 동원하지 말며, 남한산성을 쌓을 때에 너무 넓고 크게 하지 말며, 포를 거두고 쌀을 운반하게 할 때에 모두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필 것을 청하였다. 대제학에 배수되었다. 7월에 이조 참판에 배수되었다. 경연에서 강할 때 하늘의 노여움을 공경하고 백성의 원망을 풀어 주고 세금과 부역을 경감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가납하였다. 이날 《시경》을 진강하였는데 “화락한 군자여, 천자의 나라를 안정시킬 것이로다.〔樂只君子 殿天子之邦〕”라는 대목에 이르자 상이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렸다. 공이 이공 시백(李公時白)과 더불어 눈물을 흘리니, 보는 자들이 모두 감동하였다. 당시 유석(柳碩), 박계영(朴啓榮), 이계(李烓) 등이 청음을 헐뜯었는데 상이 평소 동계(桐溪 정온(鄭蘊))와 청음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터라 그 말이 제법 먹혀들었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김상헌과 정온에게 죄를 주어서는 안 되니, 현혹되지 마소서.” 하였다. 사직하여 이조 참판에서 체차되었다.
기묘년(1639) 봄에 이조 판서로 승진하였다.
경진년(1640) 봄에 밀소(密疏)를 올렸다. 당시 승려 독보(獨步)를 중국에 들여보냈는데 공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과 은밀히 상의한 것이었다. 공은 독보를 밀실로 불러들여서는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였다. 3월에 사직하여 문형(文衡)에서 해직되었다. 청인이 다른 사람을 대신 볼모로 보낸 것을 힐책하였는데 공 또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겨울에 특별히 서용되어 이식(李植)과 함께 논의하여 국서(國書)를 지었다. 도헌에 배수되었다. 당시 조석윤(趙錫胤)이 일을 논하다가 파직되었고 허계(許啓) 등이 청음이 심양에 들어가 죄를 받는 것을 늦추고자 하였다. 공이 이 두 가지 일을 말하니, 상이 즉시 따랐다.
신사년(1641, 인조19) 봄에 우참찬에 배수되었고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판결이 마땅함을 잃어 억울함을 풀 수가 없음을 말하였는데 상이 공을 소견하고 사수(死囚) 4인을 석방하였다. 가뭄이 더 심해지자 또 죄수를 소결(疏決)하여 풀어 주고 중외에 신칙하여 형옥(刑獄)을 남용하지 말게 하며, 내옥(內獄)을 혁파하고 내공(內貢)을 없애고 집을 짓는 것을 중지할 것이며, 신료들을 접견하고 백성의 고통을 조사하여 상하의 마음이 통하게 하며, 남한산성의 치욕을 잊지 말아서 더욱 경계하고 삼갈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가을에 수 이사(守貳師)가 되어 심양에 갈 때 상이 인견하여 세자를 잘 보도할 것을 권면하였다. 공은 심양에 도착하여 날마다 서연을 열어서 빈객(賓客)으로 하여금 교대로 진강하게 할 것을 청하고 일에 따라 직언으로 극간(極諫)하니, 세자도 공을 공경하고 예우하였다. 일찍이 비밀히 글을 올려 세자의 잘못을 극론하였으나 원본을 폐기한 탓에 전하지 않는다. 청인이 식량의 공급을 꺼려 여러 볼모들로 하여금 농사를 지어 자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농정(農丁)을 데려올 것을 재촉하자 공은 불가하다고 극력 다투어 말하기를, “내가 직임을 받고 왔다. 진실로 국가에 유익하다면 감히 일신을 돌아보겠는가.” 하니, 청인도 감히 억지로 하지 못하였다. 청인이 또 갖은 방법으로 힐책하였는데 주선하여 무마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청음이 박황(朴潢), 조한영(曺漢英)과 오래도록 갇혀서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공이 심양에 들어가고 나서 3일째 되는 날 은밀히 세자에게 아뢰어 처벌의 화를 늦추도록 도모하였다. 세자가 공과 함께 모의하여 당로자에게 뇌물을 주니 청주(淸主)가 세자를 불러서 묻고 돌려보내는 것을 허락하고 이사(貳師)로 하여금 함께 나가게 하였다. 제공이 끝내 아무 탈이 없었던 것은 모두 공이 힘쓴 덕분이었는데 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임오년(1642, 인조20) 3월에 다시 심양에 들어갔다가 여름에 조정으로 돌아왔고 7월에 다시 들어갔다. 이에 앞서 중국의 선척이 선천(宣川)에 이르렀는데 방백 정태화(鄭太和)가 그대로 돌려보낸 일이 있었는데 청인이 뒤늦게 이를 알고 공을 보내 핵문(覈問)하게 하였다. 8월에 우리나라로 돌아와 그 상황을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 공으로 하여금 남아서 조사하게 하고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감사 심연(沈演)과 병사 김응해(金應海)만 파직하고 공에게 돌아가 보고하도록 재촉하니, 공은 어쩔 도리가 없어 9월에 다시 심양으로 돌아가 보고하였다. 청인이 노하여 변방 수령과 장령(將領)들을 두루 잡아다가 심양에서 조사하려고 하자 공이 극력 변호하여 선천의 수령만 조사에 응하게 하였다. 청인이 또 공이 중도에서 지레 돌아왔다고 하면서 자주 와서 힐책하자 공은 조정이 허물을 입게 될까 봐 그 실상을 스스로 밝히지 않았다. 청주가 마침내 명을 전달하지도, 왕을 만나지도 않고 돌아왔다고 하여 동관(東館)에 가두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봉황성(鳳凰城)으로 보내어 여러 사람들과 함께 가두었다. 당시 세자가 청의 장수를 따라서 먼저 봉황성에 도착하여 그 일을 조사하고 있었기에 공이 도착하여 세자를 알현하고자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대신 이하로 구금되어 있는 자가 많았다. 각자 재물을 기부하고 화를 늦추고자 하였으나 공만 홀로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필시 죽음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세자의 스승이 뇌물을 쓰는 것이 나로부터 시작될 수는 없다. 냉산(冷山)과 북해(北海)는 본디 달게 여겼던 바이다.” 하였다. 뒤에 제공들이 모두 돌아왔으나 공만 홀로 가장 오랫동안 구금되어 있었다. 12월에 풀려나 우리나라로 돌아왔지만 서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계미년(1643, 인조21)에 참찬에 배수되었다.
갑신년(1644)에 우상 이경여(李敬輿)가 심양에 들어갔다가 금고(禁錮)된 여러 사람들을 멋대로 서용했다는 이유로 구금되었다. 이에 공이 파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는데 세 번 소장을 올린 뒤에야 해면(解免)될 수 있었다. 이식, 이명한(李明漢)과 함께 《선조실록(宣祖實錄)》을 개수하였다. 세자가 금고된 여러 신하들을 등용할 것을 청하였는데 을유년(1645) 봄에 사신이 와서 비로소 서용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대사헌에 배수되었다. 4월에 이조 판서에 배수되어 전형에 공정함을 다하고 요행과 남발을 막았으며 능력이 있는데도 적체되어 있는 자들을 발탁하였다. 두루 인재를 찾아내어 이름을 명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결원이 생기는 대로 보충하였으며, 초야에 숨어 있는 인재에게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였으니, 이를테면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권시(權諰), 이유태(李惟泰) 등의 사람들이 비로소 현직(顯職)에 오를 수 있는 길이 열렸던 것은 실로 공이 전형을 맡고 있던 때의 일이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졸하게 되어 군신(群臣)이 입는 복(服)을 논의하였는데 결말이 나지 않았다. 이에 공이 이식, 이목(李楘)과 함께 상소하여 백포(白袍)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졸곡(卒哭) 뒤에 복을 벗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에 승진하여 우상에 배수되었다.
10월에 뇌변(雷變)이 생기자 면직을 청하면서 덕을 닦아 재이(災異)를 막을 것이며, 자주 공경 이하 신료들을 인견(引見)하여 정사의 득실을 묻고 인물의 현사(賢邪)를 살필 것이며, 김집(金集) 등을 예로써 부를 것이며, 유백증(兪伯曾), 홍무적(洪茂績) 등을 언관(言官)으로 등용할 것을 진달하고, 또 옛날 잠계(箴戒)의 말과 《주례(周禮)》의 12가지 황정(荒政)과 유향(劉向)의 육정(六正)과 육사(六邪)를 써서 좌우에 걸어 두고, 아울러 내외의 관서와 군읍(郡邑)도 벽에 걸어 두고서 출입할 때에 이를 보고 반성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이해에 한발로 기근이 들었는데 공이 진휼하는 일을 전적으로 맡아 구제해 살린 사람이 많았다. 진휼을 마치고도 남은 곡식이 많자 기내(畿內)에 나누어 주어 조적(糶糴)에 보태게 하였고, 또 수시로 곡식을 비축해서 수재(水災)와 한재(旱災)에 대비하게 하였으니, 상평법(常平法)은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병술년(1646, 인조24) 봄에 강씨(姜氏)의 옥(獄)이 일어나자 공이 대신들과 함께 쟁론하였다. 성상이 매우 진노하여 심지어 공과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을 거론하여 이르기를, “두 사람을 내가 매우 후하게 대하였다. 그러니 나를 이렇게까지 저버릴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였다. 강문성(姜文星) 등이 옥에 갇히게 되자 공은 아뢰기를, “발고한 자도 없고 공사(供辭)에 관련된 것도 아니니, 이런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3월에 사신으로서 연경(燕京)에 가게 되어 재상에서 해면되었다. 6월에 돌아왔다.
정해년(1647) 2월에 좌상에 배수되었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면직을 청하고 인하여 하정(下情)이 통하게 하며, 언로(言路)를 열며, 백성의 고통을 보살필 것을 청하였다. 8월에 병이 심해 면직되었다.
무자년(1648) 여름에 다시 좌상이 되었다. 당시 상이 춘추가 높아 편찮으신 때가 많았으므로 군신들이 진현(進見)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공은 전후로, 신하들을 인견하여 자문을 구할 것을 청하였고, 또 한나라 문제(文帝)와 당나라 태종(太宗)의 일 및 〈우서(虞書)〉의 몇 장(章)을 취해 〈무일편(無逸篇)〉과 함께 한 책으로 엮어 올리고 한가할 때에 이를 보고 성찰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이어 바람이 맑고 날씨가 화창한 날에 자주 유신(儒臣)을 불러 경사(經史)를 논하고 왕정(王政)에 대해 토론할 것을 청하였다. 겨울에 입대(入對)하여 재이에 대해 극언하였고, 관학(館學)의 교육이 무너졌으니 의당 사업(司業)을 두어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선우협(鮮于浹)이 경학에 대한 조예가 깊고 행실이 독실하다고 천거하였고, 또 교관을 선발하여 동몽(童蒙)을 가르치며, 향약(鄕約)을 정비해 시행하여 속습(俗習)을 바로잡으며, 중앙과 지방의 관원을 소견(召見)하여 폐막(弊瘼)을 물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공은 항상 교육이 무너지고 습속이 경박한 것을 근심하여 진작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사람들과 의논하여 여씨 향약(呂氏鄕約)을 정비하여 조목을 간략하게 한 뒤에 중외에 배포하고 예조와 관찰사로 하여금 주관하여 시행하게 하였는데 공이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이 법이 폐기되었다. 박서(朴遾)가 상의 뜻을 거슬러 좌천되자, 공은 대간(臺諫)을 너그럽게 대하고 총명을 아랫사람을 의심하는 데에 쓰지 말 것을 청하였고, 또 “김집, 송시열 등을 지성으로 부른다면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고, 또 “송나라 효종(孝宗)은 비빈(妃嬪)에게 주옥(珠玉)을 차지 못하게 하였고, 최유원(崔有源)은 집의(執義)가 되어 임해군(臨海君)의 말안장을 불태웠습니다. 사치를 없애는 것을 궁금(宮禁)으로부터 하고 법을 시행하는 것을 근귀(近貴)로부터 한다면 기강이 세워지지 않음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기축년(1649, 인조27) 2월에 입대하여 “민생이 날로 곤고해지고 있으니, 신하들로 하여금 정사의 잘못을 다 말하게 하고 이를 성심으로 개납(開納)해야 합니다.”라고 아뢰었고, 또 “직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경여, 홍무적 같은 이는 결단코 다른 뜻이 없고 이응시(李應蓍), 심노(沈)는 죄를 받은 지 이미 오래이니, 모두 수록하소서.” 하였고, 또 아뢰기를, “근귀(近貴)가 사사로이 산택(山澤)을 점유하여 백성이 생업을 잃게 만들었으니, 모두 혁파해야 합니다.” 하였다. 여름에 세손을 책봉하였다. 공은 아뢰기를,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불러 세자를 보도(輔導)하는 책임을 맡겨야 합니다.” 하였고, 또 자모산성(慈母山城)을 수리하고 강도(江都)에 봉수(烽燧)를 설치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매우 옳게 여겼다.
5월에 인조(仁祖)가 승하하자 초종(初終), 역복(易服), 복(復), 습(襲)을 한결같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대로 하였는데 차분하고 신중히 하여 창졸간에도 예법을 잃지 않았다. 세자가 공제(公除) 뒤에 왕위를 이어받으려고 하였는데 공이 군신들을 거느리고 누차 즉위할 것을 권하니, 세자가 비로소 마지못해 따랐다. 당시 김상헌이 들어와 임종하였는데 성빈(成殯)한 뒤에 돌아가려고 하자 공이 아뢰어 머물러 있게 하고 김집, 송준길, 송시열, 권시, 이유태 등을 일소(馹召)하게 하니, 사방의 명사(名士)가 모두 조정에 모이게 되었다. 대행왕(大行王)의 행장을 지어 안마(鞍馬)를 하사받았다. 산릉의 퇴광(退壙)을 덮는 개석(蓋石)이 너무 크자 쪼개어 둘로 나눌 것을 청하고 여련(轝輦)에 비단을 사용하지 말아 선왕의 검소함이 빛나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김집이 《상례고금이동의(喪禮古今異同議)》를 올렸는데 공이 그 가부를 분변하여 올렸다.
6월에 청대하였는데 상이 최복(衰服)을 입고 인견하였다. 공은 명종(明宗)이 즉위하여 바로 경연을 열고 이언적(李彦迪)이 맨 먼저 학문을 권한 것을 인용하여, 신료들을 인견하여 학문을 강론하고 또 성심으로 어진 자를 임용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장릉(長陵 인조의 능호)을 정할 때에 이견이 있어 조익(趙翼)이 널리 의견을 물을 것을 청하였는데 공이 불가하다고 말하니, 부의(浮議)가 마침내 가라앉았다. 8월에 영상에 올랐다. 좌의정 김상헌에게 양보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반곡(反哭)할 때 성문(城門)과 교량(橋梁)에 제사하는 것을 정지하게 하여 전례(典例)를 바로잡았다. 김상헌이 이조 판서 심액(沈詻)의 일을 논하여 대간이 들고일어나자 상이 언관을 견책하려 하였고 교리 김홍욱(金弘郁)이 만사(挽詞)로 인해 장차 죄를 받게 되었다. 공이 이들을 위해 말을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10월에 입대하였는데 상이 재이를 걱정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비단 재이만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고 교화도 밝지 못합니다. 허조(許稠)는 세종에게 상하의 분별을 엄격히 할 것을 권하였고 선조(先朝) 때에는 정엽(鄭曄)과 김육(金堉)에게 대사성을 겸하게 하여 공효를 이룰 책임을 맡겼습니다.” 하였고, 또 상벌이 제대로 시행되어야 인심이 열복한다고 말하고, 이어 왕숙문(王叔文)의 일을 언급하였으니, 당시 김자점(金自點)이 막 실각하여 그의 동당들이 죄를 입은 것이 혹 지나쳤기 때문이었다. 산릉의 역사(役事)가 끝나 해면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당시 우상 김육이 대동법의 시행을 청하였고 좌상 조익이 강경(講經)의 방법을 바꾸기를 청하였는데 공이 아뢰기를, “대동법은 우선 호서(湖西)에서 시험해 보는 것이 마땅하고 강경하는 방법에 관한 의견은 그 뜻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좋은 의견이라고 하였다. 공은 아뢰기를, “헌부와 은대는 백사(百司)의 강기(綱紀)이니, 승지를 구임(久任)시키고 대관(臺官)을 엄선하여 백사로 하여금 직무에 부지런히 힘쓰게 하소서.” 하였고, 또 학문은 이치를 밝혀야 하고 정치는 대체(大體)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덕을 닦고 형벌을 줄이는 것을 그 조목으로 열거하였다.
경인년(1650, 효종1) 2월에 청사(淸使) 6명이 나왔다. 상이 새로 즉위하여 마음을 다잡고 발분하였으므로 청인이 우리를 의심하였다. 사신이 나온다는 소식이 이르자 조야의 인심이 흉흉하였다. 이에 공이 가서 돌아가는 상황을 살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공이 가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했다. 그러자 공이 아뢰기를,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던지는 것은 신하의 도리입니다.” 하여 그 말이 매우 격절하니, 상이 마침내 허락하였다. 공이 이경여(李敬輿)를 기복(起復)시켜 국사(國事)를 논의하고 또 정태화(鄭太和)를 집으로 찾아가 자문할 것을 청하니, 상이 좋은 의견이라고 하였다. 공이 만상(灣上)에 이르렀을 때에 청사가 막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는데 공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공갈하는 소리가 다소 줄어들었다. 공은 조정에 치문(馳聞)하고 그날로 돌아왔다. 이 사행을 처음에는 대부분 위태롭게 여겼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는 인심이 다소 안정되었다. 상 또한 기뻐하여 대신으로 하여금 모두 대궐에 모여 공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게 하였고, 공이 들어오자 즉시 인대(引對)하고 황감(黃柑)을 하사하였다.
청사가 서울에 이르렀을 때에 두 통의 글을 가져왔는데 하나는 구왕(九王)의 글이고 하나는 황제의 칙서(勅書)로, 왜(倭)를 빌미로 성지(城池)의 수리를 청한 일을 책망하는 것이었다. 인조 말엽에 동래 부사(東萊府使) 노협(盧協)과 경상 감사 이만(李曼)이 왜의 정세를 아뢴 일이 있었다. 그 뒤에 사신이 갔을 때 성지와 갑병을 수선하여 남쪽 왜구에 대비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청하여 청인의 의심을 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를 트집 잡아 이 일을 맡았던 당사자를 저들 뜻대로 하고자 하였다. 공이 만상에 있을 때에 역관 이형장(李馨長)이 당사자는 어떤 화를 입을지 예측할 수 없다고 은밀히 고하였으나 공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는데 돌아온 뒤에는 조당(朝堂)에서 유숙하면서 제공(諸公)과 함께 전석(前席)에 출입하여 은밀히 대응책을 강구하였다.
청사가 공경(公卿)과 양사(兩司)의 관원을 모아 놓고 뜰에서 몇 가지 일을 질책하였는데, 걸핏하면 상에게 그 책임을 돌리는 말을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잘못은 신에게 있습니다. 왕께서는 모릅니다.” 하였다. 표문(表文)을 누가 지었느냐고 힐문하였는데 조경(趙絅)이 묘당의 지휘를 받았다고 대답하니, 공은 말하기를, “내가 수상(首相)이니, 모든 일이 내 책임입니다.” 하였다. 맨 나중에 노협과 이만에게 왜의 정세가 수상하다고 보고한 일을 힐난하였는데 모두 끝까지 숨기고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으니, 청사가 크게 노하였다. 이에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왜는 참으로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이 사람들이 겁에 질려 잘못 대답한 것입니다.” 하였다. 청사가 목청을 높여 말하기를, “누가 주문(奏文)을 지었습니까? 필시 왕께서 지었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 일을 한 사람은 나입니다.” 하였다. 역관 정명수(鄭命壽)가 말하기를, “공이 홀로 했습니까?” 하니, 공이 그렇다고 말하였다. 몇 번을 물어도 같은 말을 하니, 정명수가 큰소리로 묻기를, “영상께서 혼자 하시고 나머지는 간여하지 않았습니까?”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침묵하였는데 이기조(李基祚)가 홀로 말하기를, “이 일을 어찌 수상 혼자서 했겠습니까. 우리들이 모두 참여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조경 및 이만과 노협은 물러가게 하고 공만 남게 하여 기망한 잘못을 추궁하고 한참 있다가 내보냈다. 이날 모두 화가 경각에 달려 있다고 여겨 두려움에 사색이 되었고 공의 가인(家人)이 흉구(凶具 관(棺))를 가지고 밖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공이 유독 편안하고 한가로운 태도로 거침없이 응대하니, 이를 본 사람들치고 놀라지 않은 자가 없었고, 청인도 서로 눈짓하며 동국(東國)에는 이상(李相) 한 사람밖에 없다고 하였다. 상이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영상이 나라를 위해 일신을 잊는 것이 본디 이와 같다. 이기조는 아예 참여도 하지 않았는데 홀로 능히 대답하였으니, 빛나는 일이었다.” 하니, 여러 사람들이 부끄러워하였다. 공이 즉시 법리(法吏)에게 나아가 대죄하니, 상이 위로하여 유시하기를, “경의 충성은 신명에게 질정할 수 있으니, 마음을 편히 갖고 염려하지 말라.” 하였고, 밤에 천금을 내어 공을 위해 주선하는 데에 쓰게 하였다. 이튿날 어가가 임하자 청인들이 관사(館使)를 시켜 공과 조경이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상이 반복하여 극력 공을 위해 변호하니, 마침내 돌아가 황상에게 여쭐 것이라고 말하고 우선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위리(圍籬)하게 하였다. 상이 공에게 수찰(手札)을 내려 이르기를, “머지않아 다시 만날 것이니, 자중 자애해야 한다.” 하였다. 종실의 딸을 의순공주(義順公主)로 호칭하고 구왕(九王)에게 보냈다. 원두표(元斗杓)와 신익전(申翊全)이 호송하여 연경에 이르니, 구왕이 기뻐하면서도 공 등은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이시백(李時白)을 보내려고 하였는데 그때 마침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연경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그 마음이 또한 깊이 노여워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다.
가을에 청사가 또 이르자 상이 교외에 나가 위로하고 자주 공을 위해 말을 하였고, 연양군(延陽君) 이시백 대신에 인평대군을 보내고 이기조를 부사로 삼았으며, 위리를 제거하고 공을 위문하였다. 인평대군이 연경에 도착하자 청나라가 여러 사람을 연경으로 데려가 다시 조사하려고 하였는데 사신이 극력 청하자 비로소 방귀전리(放歸田里)하는 것을 들어주고 서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경여 역시 금고되었으나 이만, 노협만은 곧이 대답하였다고 하여 용서를 받았다. 상이 사람을 보내 공에게 황감을 하사하고 임금의 뜻을 전하게 하였다.
신묘년(1651, 효종2) 2월에 공이 도성 밖에 이르니, 근시로 하여금 맞이하여 위로하게 하고 이튿날 소견하였으며, 월봉(月俸)을 하사하였다. 공은 백마산성에 있을 적에 위화(危禍)가 코앞에 닥쳤으나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기색이 없었고 오직 경서를 음미하고 〈자경시(自警詩)〉와 〈자경잠(自警箴)〉, 〈주일잠(主一箴)〉을 지었다. 때로 용주(龍洲 조경(趙絅))와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주고받거나 혹 짚신에 지팡이를 짚고 골짜기를 찾기도 하였다. 돌아온 뒤에는 대부분 교외의 강가에 머물면서 이따금 친구들과 더불어 술잔을 대하고 시를 읊었다. 가을에 관동(關東)의 바닷가 고을을 유람하였는데 상이 역말을 타는 것을 허락하였다. 겨울에 돌아와 상소로 조석윤(趙錫胤), 유철(兪㯙), 이경억(李慶億) 등의 일을 논하였다.
임진년(1652, 효종3) 봄에 또 죄수에 대해 논의하면서 그 죄가 죽일 정도는 아니라고 하여 상의 뜻을 거슬렀는데 덕을 숭상하고 형벌을 느슨히 해야 한다고 상소로 진달하니, 마침내 상의 노여움이 풀렸다. 가을에 영돈녕부사에 배수되었는데 두 차례 사직하고서야 윤허를 받았다.
계사년(1653) 봄에 성지(聖旨)에 응하여 차자로 16개 조목을 아뢰니, 모두 논의해서 시행하게 하였다. 특별히 영돈녕부사에 배수되었다.
갑오년(1654) 봄에 효심을 미루어 인정(仁政)을 베풀며, 검소함을 숭상하여 사치함을 제거할 것을 차자로 청하니, 이튿날 상이 인대(引對)하여 온화하고 간곡한 말씀을 내렸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재이가 자주 생기니, 덕을 닦아 하늘의 노여움을 풀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조석윤과 박장원(朴長遠)이 서원리(徐元履)를 논핵하다가 견책을 받자 공이 쟁론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3월에 상이 친히 교외에서 열무(閱武)하였는데 교리 남용익(南龍翼)이 나아와 간쟁하니 상이 노하였다. 이에 정언 유창(兪瑒), 승지 윤득열(尹得說), 대사간 민응협(閔應協)이 이를 쟁집하자 상이 더욱 노하였는데 공이 극력 아뢴 뒤에야 상의 노여움이 풀릴 수 있었다. 여름에 수재가 나자 차자를 올려 군비보다 백성이 우선이니 지엽이 근본을 해치게 하지 말 것이며, 시녀(侍女)를 선발하는 것을 혁파하고 내공(內貢) 및 토목(土木)과 비단의 직조(織造)를 정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말한 것이 대부분 시행되었다. 가을에 청인이 공이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것에 대해 화를 내자 해면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으며 월봉(越俸)을 그대로 지급받았다. 9월에 남쪽 지방을 유람하였다. 돌아와 백성의 폐막을 진달하니, 상이 시행을 허락하였다. 당시 의견을 낸 자의 말을 써서 무비(武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공이 아뢰기를, “백성이 원망하고 하늘이 노여워하니, 길게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아 환난을 초래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12월에 북사(北使)가 이르러 더욱 심하게 책망하였다. 당시 공의 아들이 안협(安峽)의 수령으로 있었으므로 공이 그곳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였고 동교(東郊)에서 주찬(酒饌)과 약물(藥物)을 하사하였다. 고을에 이른 지 두 달 만에 철원(鐵原)으로 옮겼고, 청평(淸平)과 소양(昭陽)을 유람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공이 돌아오기를 재촉하였다.
을미년(1655, 효종6) 여름에 경사에 이르러 분수에 맞게 한가롭게 지낼 수 있도록 해 주기를 청하니, 매우 간곡하게 위로하고 권면하였고 심지어 월봉을 지급하게 하였다. 이튿날 상이 소견(召見)하여 술을 하사하였다. 공이 백성의 폐막을 진달하니, 상이 시행을 허락하였다. 공이 상과 대면한 자리에서 벼슬에서 물러나 지낼 것을 청하고 월봉을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7월에 가뭄이 들자 공이 아뢰기를, “대신을 공경하고 덕교(德敎)를 우선하소서. 김홍욱(金弘郁)의 친속(親屬)은 금고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는데, 상이 대부분 따랐다. 호당(湖堂)을 선발할 때 공에게 가서 논의하도록 명하였다.
병신년(1656) 5월에 유철(兪㯙)이 일을 논하다가 국문을 당하게 되자 공은 울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소장을 작성하였다. 당시에 상이 매우 노하였으나 공의 소장이 들어가고 이어 여러 대신이 말을 하였으므로 유철이 감사(減死)될 수 있었다. 한재로 인하여 죄수를 소결(疏決)하라는 명이 내렸다. 공이 입시하여 이징(李澂)과 이숙(李潚) 및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셋째 아들을 석방할 것을 건의하고, 공이 또 유철의 죄를 감면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정유년(1657)에 재이로 인하여 궁금(宮禁)을 엄격히 하고 사치를 제거할 것이며, 포흠을 견면(蠲免)하고 원옥(寃獄)을 바로잡을 것이며, 풍교(風敎)를 돈독히 하고 형벌을 줄일 것이며, 경계하는 글을 지어 중외(中外)에 반포할 것을 청하였고, 또 아뢰기를, “눈앞의 이익을 도모하거나 상규(常規)에 구애되지 말고 분발해서 큰일을 하소서.” 하였는데, 모두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겨울에 입대하였는데 상이 호남에 대동법을 시행하는 것에 대해 묻자, 세입(歲入)을 계산하고 물가를 헤아려 가부를 정해야 한다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무술년(1658, 효종9) 여름에 특별히 다시 중추부에 배수되었다. 입대하여 아뢰기를, “말이 과격한 자를 포용해야 너그럽게 포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북(西北)은 풍속이 비루하고 경박하여 골육끼리 서로 해치니, 북병사(北兵使) 및 강계(江界), 만포(滿浦)의 수령을 문사(文士)를 섞어서 써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에 입대하였는데 상의 말이 교화에 미치자, 궁행(躬行)할 것이며 또 종백(宗伯), 도헌(都憲), 경조윤(京兆尹), 방백(方伯)에게 풍교의 책임을 맡기고 대사성을 선발하여 선(善)을 장려할 것을 청하였다. 11월에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기해년(1659) 봄에 입대하여 아뢰기를, “진대(賑貸)하는 일을 조정에서 총괄하여 도신과 수령을 선택하여 위임할 것이며, 군사의 정원을 줄여 고아와 과부로 하여금 원망이 없게 하소서.” 하였다. 5월에 효종이 승하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을 복(服)을 논의하였다. 예관(禮官)이 ‘아들의 상에는 기년복(朞年服)을 입는다.’라는 것을 원용하였는데, 혹자는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말하고 송시열 등은 기년복을 주장하면서 가공언(賈公彦)의 사종설(四種說)을 인용하였다. 공은 오늘날의 예법으로 볼 때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의 의견도 같았고 심지원(沈之源), 이시백(李時白), 이후원(李厚源), 원두표(元斗杓)가 연명(聯名)으로 헌의(獻議)하니, 세자가 따랐다. 언관이 군신(群臣)은 질장(絰杖)의 복제를 쓰기를 청하자 공이 이르기를, “옛 제도를 바꾸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고, 계빈(啓殯) 때에 언관이 또 새삼 최복(衰服)을 입어야 한다고 말하자 공이 말하기를, “주자(朱子) 때와는 경우가 다르니, 중간에 바꾸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하면서 반복하여 진변(陳辨)하니,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행장을 지어 올려 안마를 하사받았다. 산릉(山陵)을 수원(水原)으로 정했으나 민가를 많이 헐어야 하겠기에 다시 건원릉(健元陵) 안으로 정하였는데 상의 뜻은 수원에 있었다. 이에 공이 세 차례 상차하여 쟁론하니, 마침내 상이 따랐다. 여름에 경성 판관(鏡城判官) 홍여하(洪汝河)가 상소로 이후원을 비난하여 여러 신하들이 홍여하를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공이 불가하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이해에 북로(北路)에 기근이 들고 겨울에 우레가 치자 공이 아뢰기를, “은혜를 베풀어 창고를 열어 구휼하고 역을 견면해 주되 유사에게 이끌리지 말고 전해 내려오는 규례에 구애되지 마소서.” 하였다.
경자년(1660, 현종1) 봄에 강원도 백성들이 굶주리자 또 창고를 열어 구휼하기를 청하고 박장원이 충직하고 신실하여 이 일을 맡길 만하다고 하였는데 모두 가납하였다. 당로자가 유계(兪棨)를 춘추(春秋)의 직임에서 해임시키고 그 아들 유명윤(兪命胤)을 사관(史官)에 앉히고자 하였는데 공이 불가하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공이 내국(內局)을 맡았을 때 양전(兩殿)의 병이 회복되었으므로 안마를 하사받고 자제가 벼슬을 받았다. 《효종실록(孝宗實錄)》을 찬수할 때에 공에게 총재(摠裁)하도록 명하였다. 가을에 크게 흉황이 들자 또 진대(賑貸)한 것을 견면해 주고 재용을 아끼며 형벌을 느슨히 할 것을 청하였다. 송도(松都)에 옥사(獄事)가 생겨 유생이 장사치와 함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유수 남노성(南老星)이 유생을 끝까지 다스리자 공이 유생을 두둔하였는데 남노성이 화가 나서 공이 뇌물을 받았다고 무고하고 눈먼 점쟁이를 보내 서울에서 중상하는 말을 퍼뜨리게 하였다. 공이 소장을 올리고 교외로 나가니, 이민적(李敏迪) 등이 남노성이 원로를 무고하여 비방하였다고 말하였다. 이에 박세모(朴世模) 등이 남노성을 논핵하였다. 상이 누차 승지를 보내어 타이르니, 공이 마침내 들어와 사례하였다.
신축년(1661) 여름에 참찬 송준길이 윤선도(尹善道)의 유배지를 가까운 곳으로 옮길 것을 청하였는데 공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7월에 실록을 편수하는 일이 끝났는데 공이 한재(旱災)를 이유로 세초연(洗草宴)을 그만두기를 청하였다. 장령 허목(許穆)이 일찌감치 국본(國本)을 정할 것을 청하였는데 공이 아뢰기를, “원자(元子)가 탄생하여 태묘(太廟)에 고하고 사면(赦免)을 반포하였으니, 이것으로 국본은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하니, 영상 정태화도 공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그리하여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임인년(1662, 현종3) 봄에 호남 진휼어사(湖南賑恤御史)가 세금을 납부하는 기한을 미루고 가을에 신곡으로 받기를 청하자, 공이 들어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아뢰기를, “혹자는 이를 폐습이라고 하고 백성들에게 칭찬을 구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백성을 구휼하는 것을 두고 백성들에게 칭찬을 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학대하는 데에 이르고야 말 것입니다.” 하고, 이어 선조(先朝) 때에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다〔爲國爲民〕’라는 논의가 있었음을 거론하였다. 공이 일찍이 진언하기를, “원칙을 어겨가며 칭찬을 구하는 것은 진실로 가증스러운 일이지만 원칙을 어겨가며 백성을 학대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더구나 백성을 위하는 것이 바로 나라를 위하는 것이니, 어찌 둘로 나눌 수 있겠습니까. 이 논의가 만약 시행된다면 백성들이 그 명령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인조가 매우 옳게 여겼고, 효종 때에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세 번째로 상을 위해 말씀드린 것이다. 여름에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였는데 공을 침해하는 말이 있었다. 이에 공이 물러나기를 청한 다음 교외로 나갔는데 상이 누차 면유(勉諭)하여 마침내 돌아왔다. 서공(徐公)이 뒤에 스스로 후회하고 공에게 와서 사죄하여 교분이 더욱 깊어졌으니, 이는 자기를 용납한 공의 아량에 심복한 것이다.
계묘년(1663)에 인종(仁宗)을 영녕전(永寧殿)으로 조천(祧遷)하게 되었다. 묘실(廟室)이 협소하여 개수하려고 하였는데 공이 그 일을 총괄하였다. 상이 좌우의 익실(翼室)을 크게 늘려 정전(正殿)처럼 하고자 하였는데 공이 불가함을 극력 말하여 일이 중지될 수 있었다. 기내(畿內)를 양전(量田)하였는데 군현(郡縣)의 전지(田地)가 축소되었다고 하여 수령들이 형장(刑杖)을 받게 되었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그 등급을 내리고서 많은 전결을 요구하는 것은 균전(均田)의 본뜻이 아니고, 수령에 대해서는 형장을 가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갑진년(1664, 현종5)에 공의 나이가 일흔이었다. 치사(致仕)를 청하는 소장을 일곱 차례 올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 입대하여 다시 간곡히 청하였는데도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겨울에 인대(引對)하는 자리에서 말이 교화에 미치게 되자 정태화가, 공이 지위에 있으면서 시행한 것이 자못 많으니 공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이튿날 종백이 공에게 와서 상의하고 중외에 반포하였으니, 그 규모와 절목(節目)은 기축년(1649, 효종 즉위년)의 것과 같았다. 재이로 인해 입현(入見)하여 여러 사람의 말을 채납할 것이며, 공주의 사치스러운 집을 훼철할 것이며, 상방(尙方)의 직조(織造)를 그만두고 내옥(內獄)의 죄수를 석방할 것이며, 박장원을 수용(收用)할 것을 청하였다.
을사년(1665) 가을에 상이 온천에 행행하였을 때에 공이 유도(留都)의 책임을 맡았다. 어가가 돌아왔을 때에 다시 안마를 하사받고 자제가 벼슬을 받았다. 겨울에 재이로 인해 경계하도록 진달하였는데 모두 여덟 가지 일이었다.
병오년(1666) 봄에 또 네 가지 일을 말하였다. 3월에 상이 온천에 행행하였을 때에 공이 유도하였고 은사(恩賜)가 이전과 같았다.
정미년(1667) 봄에 조성보(趙聖輔)와 이후(李垕)가 찬축(竄逐)되고, 승지가 법리(法吏)에게 심문을 받아 하옥되었고 이숙(李䎘) 등 7인이 또 견책을 받았다. 이에 공이 간쟁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4월에 청대(請對)하여 다시 이를 말하였고, 이어 홍만용(洪萬容)과 남이성(南二星)을 좌천한 것은 잘못 죄준 것임을 언급하여 두 사람이 좌천되지 않게 되었다. 상이 온천에 행행하였을 때에 공이 또다시 유도하였다. 행재소에 있던 대신이 다시 찬축된 여러 사람들을 언급하였는데 상이 공의 말을 생각하고 양이(量移)를 허락하였다.
무신년(1668)에 재이로 인해 여섯 가지 경계할 일을 아뢰었는데, 성학(聖學), 교화, 형옥, 수령, 부역(賦役), 사치에 관한 것이었다. 봄에 미백(米帛)을 하사하자 공이 사양하고 이어 창고를 열어 기근을 구제할 것을 청하였다. 8월에 상이 온천에 행행하였을 때 공이 또다시 유도하였다. 10월에 공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도록 명하자 누차 사양하였지만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 기로연(耆老宴)을 설행하려고 하자 또 극력 사양하였다. 그러나 종당엔 유사가 예를 갖추어 궤장을 가져오고 음악을 하사하였으며, 내선온(內宣醞)과 외선온(外宣醞)을 베풀었다.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 이후 5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으므로 온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 감탄하였다.
기유년(1669, 현종10) 3월에 상이 온천에 행행하면서 공이 늙었다 하여 유도의 임무를 맡기지 않았다. 공은 차자로 서둘러 환가(還駕)할 것을 청하고, 이어 아뢰기를, “평소 조정에는 떠나가는 사람이 줄을 잇고 오늘날 행재소에는 달려가 문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만해하는 성색(聲色)이 사람을 천리 밖에서 막는 법이니, 오늘날도 이에 가까운 것입니까. 전하께서 유념하셔야 할 바입니다.” 하니, 가납하였다. 이에 앞서, 송시열이 천하의 중망을 받고 있었기에 공이 인조조(仁祖朝) 때에 누차 천거하였고, 송시열이 서울에 이르러 포의(布衣)에 짚신 차림으로 문에 이르자 공은 대등하게 보아 예를 다하였으며, 효종 초에 또 맨 먼저 그를 부를 것을 청하였다. 그래서 송시열이 명망과 지위가 이미 높아진 뒤에도 공을 존경하고 숭앙하였으니, 이는 서독(書牘)에 드러나 있다. 그런데 공의 차자를 보고는 노하여 공을 추하게 비방하니, 공이 놀라 차자로 진달하기를, “송시열이 상소로 신을 배척하니, 신은 매우 부끄럽습니다. 신이 짧은 차자에서 아뢴 내용을 감히 자세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위로하고 타일렀다. 회천(懷川 송시열)은 유림의 영수였으므로 그의 언론과 시비를 감히 논하는 자가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 문하의 선비조차도 모두 의아해하였고 동춘(同春) 역시 공을 만났을 때에 놀라워하고 탄식하였다. 공이 기해예송(己亥禮訟) 때 사종설(四種說)을 따르지 않았고, 회천이 영릉(寧陵)의 지문(誌文)을 지으면서 《시경》의 〈비풍(匪風)〉 편과 〈하천(下泉)〉 편을 인용하였는데 공이 그 말이 너무 노골적이라고 하여 산정(刪定)할 것을 청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춘의 말로 인해 윤선도의 위리(圍籬)를 철거하기를 청하였고, 회천이 공의 집안과 혼인하고자 하였으나 또 뜻대로 되지 않았으므로 의심과 노여움을 쌓은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러나 공은 담담하게 마음에 담아두지 않아 평소 그의 장단(長短)에 대해 거론한 적이 없었다.
여름에 병이 심해져 세 차례 상소하여 해면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강가에 나가 거주하자 근시(近侍)가 와서 면유(勉諭)하였고, 7월에 비로소 돌아오니 또 근시를 보내어 면유하였다. 당시 신덕왕후(神德王后 태조의 둘째 비 강씨(康氏))를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공이 백료를 거느리고 한 달이 넘게 정청(庭請)한 뒤에야 상이 비로소 따랐는데 의식과 예법이 대부분 공에게서 나왔다. 공과 부인이 모두 80세 가까운 나이에도 무양(無恙)하였다. 경술년(1670, 현종11) 정월 합근례(合巹禮)를 치른 지 60년이 되는 날에 자손이 축수(祝壽)하여 술을 올렸는데, 이때 학발(鶴髮)의 양친이 마주한 상태에서 술잔을 교대로 올리니, 구경하는 자들이 부러움에 탄식하였다. 김징(金澄)이 이은상(李殷相)과 오정위(吳挺緯)의 죄를 탄핵하였는데 공이 두 사람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하자 김징이 상소를 올려 공을 비난하였다. 그런데 뒤에 김징이 장오(贓汚)에 걸려 하옥되자 공은 아뢰기를, “김징이 어미를 위해 축수한 것이니, 그 죄를 용서할 만합니다.” 하였고, 김징이 형신(刑訊)을 받게 되자 공이 또 불가하다고 말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신해년(1671) 봄에 장령 조세환(趙世煥)이 일을 논하다가 죄를 받게 되자 공은 병중에 상차하여 간쟁하였다. 9월에 병이 위독해져 24일에 정침(正寢)에서 졸하니, 향년 77세였다. 이날 백기(白氣)가 정침의 지붕 위에서 일어나 한참 있다가 사라졌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매우 슬퍼해 마지않았고, 조제(弔祭)와 치부(致賻)를 모두 전례(典禮)보다 넉넉하게 하였다. 경대부로부터 소민(小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와서 조문하였고 지방에서 벼슬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의를 보내왔으며, 유사(有司)는 예법대로 제반 장례 절차를 마련하였다. 11월에 광주(廣州) 서쪽 낙생면(樂生面)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공은 용모가 수려하고 헌걸찼으며 천품이 어질고 너그러웠다. 자애롭고 정직하며 화락하고 평이하였으며, 평온하고 조용하며 맑고 담박하여 일찍이 모나게 행동하지도 괴팍하게 굴지도 않았으며 겉을 꾸미거나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다. 충후하고 화순한 성품이 얼굴에 환하게 드러나고 노여움과 사나움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으나 바라보면 위엄이 있어 사람들이 감히 쉽게 대하지 못하였다. 어버이를 섬길 때에는 효성이 지극하였다. 양친이 고령이 되도록 무양하였는데 공이 시중들고 말하고 웃을 때에 모두 지극한 사랑을 드러내었다. 어버이가 아플 때에는 밤중에도 의관을 벗지 않았고 상을 당해서는 매우 슬퍼하였고 장례 및 제사에 정성과 예를 다하여 전후 6년 동안 거의 죽게 될 만큼 몸이 수척해졌다. 삭망(朔望) 때에는 사당에 참배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기일에는 마치 초상이 났을 때처럼 슬퍼하여 그달이 다 갈 때까지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묘소에 올라갈 때마다 목 놓아 통곡하였다. 조상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 위답(位沓)을 마련하였으며, 묘역을 수리하고 묘지기를 두었다. 비록 외가라 하더라도 그 제사를 챙겨서 주관하였다. 모든 제사에 있어 늙어서도 목욕재계하는 것을 폐하지 않았고 자손에게 감히 태만히 하지 말도록 경계하였으며, 혹 자신이 제사에 참여하지 못할 때에도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고서 공경을 다하였다. 장형(長兄)을 섬기기를 엄부(嚴父)를 섬기듯이 하였고, 중형(仲兄)이 일찍 죽어 후사도 없이 늙어가는 형수에게 의복과 봉양을 떨어지거나 모자라지 않게끔 하였으며, 생신과 명절에는 음식을 장만하고 술잔을 올렸다. 자손을 가르칠 때에 먼저 《소학》을 가르친 다음에야 다른 책을 가르쳤다. 평소 자손이 조정의 일을 언급하고 남의 장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오직 몸을 검칙(檢飭)하고 행실을 닦도록 하였다. 여러 친족들이 대부분 가난하였는데 반드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고 병이 들었을 때에는 의약으로 구제하였으며 혼인과 상사에 힘을 다해 두루 보살피고 몸소 먼저 찾아가서 위문하니, 젊은 사람들이 감히 공보다 뒤처져 있을 수가 없었고 내외의 종족이 모두 우러러 의지하였다. 그리고 또 마을 사람들과 동계(洞契)를 조직하여 간략하게 몇 가지 조목을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공은 급제하면서부터 명성이 선배를 능가하였는데 20년 만에 드디어 삼정승의 반열에 올라 위로는 임금의 관심과 사랑이 깊고 아래로는 조야(朝野)가 앙모하였다. 효종조에 이르러서는 더욱 전적으로 위임하였고 공도 또한 정성을 다하였는데 갑자기 경인년(1650, 효종1)의 일이 있게 되었다. 비록 강대한 이웃나라의 압력을 받았으나 은례(恩禮)의 융숭함은 다른 정승으로서는 바랄 수 없는 것이었으니,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공에게 자문을 구하였고 공을 말할 때에 원로로 일컬었다. 이에 공은 매양 경전을 인용하고 의리에 근거하여 넌지시 간하고 분명하게 논의하되 반드시 인후(仁厚)와 측달(惻怛)을 위주로 하여 간혹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니, 상이 번번이 태도를 바꾸었다. 재이를 경계하여 구언(求言)하면 반드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희로(喜怒)를 삼가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며, 절검(節儉)을 숭상하고 형옥을 신중히 할 것을 말하였는데 간곡하게 되풀이하여 하는 말이 모두 정성스러웠으므로 상이 마음을 비우고 모두 가납하였다. 10년 동안에 제우(際遇)가 한결같았는데 현종조에 이르러서는 지위와 명망이 더욱 커지고 중외가 크게 의지하여 먼 시골의 아녀자도 백헌(白軒)이란 이름을 욀 수 있었다. 조정의 대우가 이미 남달랐고 공도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반드시 정성을 다하니, 상이 공의 지성을 알고 고령이 되었음에도 대사를 공에게 물었고 존경과 예우가 한결같았다. 금상(今上 숙종(肅宗))이 어렸을 때에 공의 명망과 덕행을 듣고 한번 만나보고자 하니, 현종이 특별히 들어와 알현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공은 한결같이 부지런하고 삼가서 조정에 나아갈 때에 반드시 먼저 나아갔으며, 명을 받고 기우제를 지낼 때에 반드시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하였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공복(公服)을 벗지 않고 뜰에 부복해 있다가 비가 내린 뒤에야 일어났다. 공이 기도하여 비가 오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가뭄을 만나 공이 기우제를 지낸다는 소식을 들으면 도성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제 비가 내릴 것이다.” 하였다. 평소 조정에 훌륭한 정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고, 재이가 생기거나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근심이 얼굴에 드러났다. 봉사(封事)를 올리는 일이 있으면 조복(朝服) 차림으로 절하고 보냈고 비답을 받을 때에도 그렇게 하였다. 어가가 거둥하는데 호종(扈從)하지 못하면 반드시 엎드린 채 어가를 기다렸고, 하사품은 비록 작은 물건일지라도 조복 차림으로 뜰에서 받았고 사당에 올릴 만한 것이면 사당에 올렸다. 자신의 처신과 남을 대함에 있어 한결같이 정성스럽게 하고 구차하게 하지 않았다. 공은 늘 말하기를, “선비는 정직과 충후를 근본으로 삼으니, 정직하되 충후하지 않으면 각박하고 충후하되 정직하지 않으면 나약하다.” 하였다. 인물을 논할 때에 장점은 거론하고 단점은 덮어주었으며, 글을 볼 때에 대의를 구하고 미세한 부분은 무시하였다. 죄수를 논하여 언의(讞議)할 때에 살리기를 우선하고 죽이기를 뒤로 하였으며 억울한 죄는 반드시 신구(伸救)하고자 하였으니,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기를 좋아한 것은 천성이 그러하였다.
조정에서 벼슬할 때에 대체(大體)를 견지하는 데에 힘썼으며, 남을 위해 일을 꾀할 때에는 매우 주도면밀하게 하였으며, 특히 친구에 대한 우정이 독실하여 상사(喪事)와 병환에 위로하고 그 자손을 보살펴 주었으며, 종 같은 하천(下賤)에게도 살 자리를 잃는 일이 없게끔 하였으며, 곤충이나 초목도 차마 밟거나 꺾지 않았다. 이 때문에 어질건 어리석건, 귀하건 천하건 간에 모두 진심으로 감복하여 어진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그렇지만 체모와 위엄은 매우 엄절하였으며 규모와 법도는 그 지킴이 매우 확고하였다. 대사(大事)에 임하여 대의(大疑)를 결단할 때에는 반드시 고의(古誼)에 의거하였으며, 늙어서도 걸음걸이가 흐트러지지 않고 의용(儀容)이 단정하고 엄숙하여 조회 때마다 행동거지가 법도에 맞으니, 백료들이 매우 공경하였다.
공은 평소 몸가짐을 반드시 《소학》의 가르침대로 하였고 《논어》에서 득력(得力)한 것이 더욱 많았다. 늙어서는 서안(書案)에 항상 《근사록(近思錄)》과 《주서(朱書)》를 놓아두었으며, 늘 “장중하고 공경하면 날로 강해지고, 안락하고 방사(放肆)하면 날로 구차해진다.〔莊敬日强 安肆日偸〕”는 말을 암송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으며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큰 추위와 한더위에도 법도를 잃지 않았다. 의복은 누추하고 음식은 담박하였으며, 사는 집이 협소하고 누추하였으나 늘리거나 치장하는 일이 없었다. 공은 평소 좋아하거나 즐기는 취미가 없었다. 혹자가 공도 몹시 좋아하는 것이 있느냐고 묻자 말하기를, “없습니다. 오직 문자를 즐길 뿐이니, 취미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였다. 성색(聲色)을 깊이 경계하고 천하고 상스러운 것을 끊었으며, 술잔을 잡고 시를 읊조릴 때에 간혹 담소와 해학을 섞기도 하여 풍류가 넘치고 화기(和氣)가 사람들에게 미쳤지만 법도에 어긋나지는 않았다. 천성적으로 독서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니, 나이 일흔에도 일과를 세워 놓고 《호씨춘추(胡氏春秋)》를 익혔다. 한 창려(韓昌黎 한유(韓愈))의 문장을 좋아하고 두보(杜甫)의 시를 애호하였으며 노장(老莊) 등의 이단은 읽지 않았다.
공은 젊어서 조찬한(趙纘韓)에게서 고문(古文)을 배웠다. 문장의 원천이 무궁무진하여 붓을 잡는 즉시 글이 이루어졌는데 문사가 현란하고 농염하였으며, 허탄하고 기이하며 난삽한 글을 짓지 않았다. 연치와 덕망이 이미 높은 데다 문장은 더욱 세상의 추중을 받았으므로 비갈(碑碣)과 행장, 제영(題詠)과 기발(記跋)을 부탁하는 글이 상자에 가득 차 넘쳤는데 게을리 하지 않고 지어주었다. 누차 과거 시험을 관장하였는데 뽑은 자들이 대부분 이름이 난 사람이었고 공경(公卿)이 되거나 저명하게 된 사람이 매우 많았다. 필법은 유려하고 아름다웠는데 글씨를 구하러 오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 지은 시문이 매우 많았으나 대부분 산일(散逸)되고 간행된 것이 50권뿐이다.
금상(今上) 경신년(1680, 숙종6)에 김석주(金錫冑), 김수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 등이 상에게 아뢰어 공의 손자 우성(羽成)을 발탁하여 6품관에 제수하게 하여 제사가 끊기지 않도록 하였다. 부인 전주 유씨(全州柳氏)는 관찰사 색(穡)의 따님으로 성품이 자애롭고 몸가짐이 단정하고 맑아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는데 공이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갑인년(1674, 숙종 즉위년) 9월 14일에 졸하여 공의 무덤에 부좌(祔左)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세 임금을 섬긴 나라의 원로요 / 三朝元老
한 시대의 지성스러운 신하였으니 / 一代忱臣
나라를 위해 집안일은 잊었고 / 國忘其家
임금을 위해 일신은 내팽개쳤네 / 主不顧身
붉디붉은 정성은 하늘의 해처럼 빛나고 / 丹誠炳日
깨끗한 절개는 서릿발처럼 매서웠으므로 / 素節凌霜
험하고 어려운 일을 / 險阻艱難
또한 두루 겪었다네 / 亦旣備嘗
지극한 믿음은 신뢰를 사 / 至信所孚
돈어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고 / 能感豚魚
덕이 온전하고 행실이 높아 / 德全行高
사책에 누차 기록되었네 / 彤管屢書
함부로 거짓말을 하고 멋대로 속이는 것은 / 恣僞肆誕
어느 세상에나 이름난 사람이 있는 법 / 世有聞人
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판이한지라 / 梟鳳殊性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네 / 載怒載嗔
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 / 不善者惡
군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 / 君子何病
나의 명문을 빗돌에 새기노니 / 我銘載石
사람들이여 와서 공경할지어다 / 人其來敬
[주1]구천(句踐)은……않고 : 오나라 부차(夫差)에게 패한 월나라 왕 구천(句踐)이 오왕에게 화의를 청하면서 신첩(臣妾)이 되겠다고 애걸하였다. 《史記 卷41 越王句踐世家》
[주2]부끄럽게도……저버렸도다 : 임금의 공덕을 찬양해 오계(浯溪)의 바위에 새겼던 원결(元結)처럼 하지는 못하고 도리어 임금이 청나라에 항복한 사실을 비문으로 짓게 된 것이 부끄럽다는 말이다. 당나라 안사(安史)의 난이 평정된 뒤에 원결이 〈대당중흥송(大唐中興頌)〉을 짓고 안진경(顔眞卿)이 글씨를 써서 오계의 절벽에 새겨 숙종(肅宗)의 공덕을 찬양하였다. 《古文眞寶大全 卷2 大唐中興頌》
[주3]냉산(冷山)과……바이다 : 소무(蘇武)가 북해에 19년 동안 잡혀 있었고 홍호(洪晧)가 냉산에 15년 동안 억류되어 있었듯이 자신도 충절을 위해서라면 오랑캐 땅에 억류되는 것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소무는 한나라 무제(武帝) 때의 중랑장(中郞將)으로 흉노(匈奴)에 사신 갔다가 북해 가에 억류되었다. 흉노가 그에게 음식도 주지 않으므로 들쥐를 잡아먹고 풀 열매를 따 먹으며 갖은 고생을 하다가 억류된 지 19년 만에 한나라로 돌아왔다. 홍호는 남송(南宋) 고종(高宗) 때의 충신으로 금나라에 사신 갔다가 냉산에 억류되었다.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들의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절조를 지키다가 억류된 지 15년 만에 송나라로 돌아오니, 당시 사람들이 그의 충절을 소무에 비교하였다. 《漢書 卷54 蘇武傳》《宋史 卷473 洪皓列傳》
[주4]주례(周禮)의 12가지 황정(荒政) : 흉년이 들었을 때 시행하는 12가지 조항의 구황(救荒) 정사로, 첫째 곡식 종자와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散利〕, 둘째 조세를 적게 거두는 것〔薄征〕, 셋째 형벌을 완화하는 것〔緩刑〕, 넷째 요역(繇役)을 없애는 것〔弛力〕, 다섯째 금령(禁令)을 폐지하는 것〔舍禁〕, 여섯째 관시(關市)를 기찰(譏察)하지 않는 것〔去幾〕, 일곱째 길례(吉禮)를 줄여서 하는 것〔眚禮〕, 여덟째 상례를 간략하게 치르는 것〔殺哀〕, 아홉째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것〔蕃樂〕, 열째 혼인할 때 예의 일부를 생략하고 치르도록 하는 것〔多昏〕, 열한째 모든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索鬼神〕, 열두째 형벌을 엄하게 하여 도적을 제거하는 것〔除盜賊〕을 말한다. 《周禮 地官 大司徒》
[주5]유향(劉向)의 육정(六正)과 육사(六邪) : 유향이 《설원(說苑)》〈신술(臣術)〉에서 분류한 정도(正道)를 밟는 6가지 유형의 신하와 사술(邪術)을 쓰는 6가지 유형의 신하를 말한다. 육정은 성신(聖臣), 양신(良臣), 충신(忠臣), 지신(智臣), 정신(貞臣), 직신(直臣)이고, 육사는 구신(具臣), 유신(諛臣), 간신(姦臣), 참신(讒臣), 적신(賊臣), 망국신(亡國臣)이다.
[주6]왕숙문(王叔文) : 당나라 순종(順宗) 때 사람으로 순종이 무능하자 왕비(王丕) 등과 동당이 되어 국권을 농락하였는데 결국 태자가 국사를 대리할 때 사사(賜死)되었다. 《舊唐書 卷135 王叔文列傳》
[주7]송시열……인용하였다 : 《의례주소(儀禮注疏)》 권29〈상복(喪服) 부위장자조(父爲長子條)〉에서 가공언(賈公彦)은 “비록 승중(承重)하였다 하더라도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것이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정체(正體)이나 전중(傳重)하지 못한 것이니 적자(嫡子)가 폐질(廢疾)이 있어 종묘의 주사(主祀)를 감당하지 못함을 이르고, 둘째는 전중하였으나 정체가 아닌 것이니 서손(庶孫)이 후사가 된 것이 그것이고, 셋째는 체(體)이기는 하나 정(正)이 아닌 것이니 서자(庶子)를 세워 후사가 된 것이 그것이고, 넷째는 정통이기는 하나 체가 아닌 것이니 적손(適孫)을 세워 후사로 삼은 것이 그것이다.” 하였는데, 송시열은 효종의 경우는 서자가 뒤를 이은 것이므로 자의대비가 삼년복을 입지 못하고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성무, 조선시대당쟁사1, 동방미디어, 2001, 267~269쪽》
[주8]선조(先朝)……논의 : 인조 때에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자를 두고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고 하고 조세를 감면해 주는 자를 두고 백성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는 논의가 있었는데 진신들 사이에서도 이런 말을 하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白軒集 附錄 卷1 白軒先生年譜, 韓國文集叢刊 96輯》
[주9]장중하고……구차해진다 : 《예기(禮記)》〈표기(表記)〉에 보인다.
領議政白軒李公神道碑銘
詩曰。雖無老成人。尙有典刑。典刑有無。治亂存亡係焉。老成。又典刑所自出。老成今不可復見。幸其典刑之猶在。所以能保我子孫黎民。嗚呼。老成之於有國也。其係之者亦重矣。書曰。無侮老成人。老成之重如此。有侮之者。則天下之不祥。莫大焉。敢於爲不祥者。亦必有不祥之報報焉。此天之道也。可不懼乎。公諱景奭。字尙輔。號白軒。定宗第十子德泉君厚生六代孫也。曾祖咸豐君諱繼壽。大父贈左贊成諱秀光。父同中樞贈領議政諱惟侃。母開城高氏。大護軍漢良女。公生宣祖二十八年乙未十一月十八日。幼學於兄孝敏公。每映窓讀書。家貧歲饑。嘗朝出忍飢晏歸。見大夫人對食。少隱以待食畢。其誠孝如此。年十三。尊公爲開城都事。淸陰爲經歷。深奇公曰。非吾輩所及。光海五年。成進士。癸亥仁祖反正。登第補槐院。入史局爲檢閱,奉敎。甲子。移注書。李适叛。上南幸。百官逃竄。從駕者。承旨韓孝仲。公與內官二人而已。江津無船。夜黑如漆。孝敏公帥湖南未赴。在南岸搜一船。迎駕旣渡。上坐繩床達明。公兄弟侍立不離左右。徒步隨駕達公州。駕還。遷典籍歷正言。爲修撰。乙丑。爲正言。請値開筵得面啓。兩司入筵中。始此。歷獻納,副校理。丙寅秋。遷吏郞。賜暇讀書。登重試第一。丁卯。淸兵入。體察使張晩辟公隨師西出。因督餫關東。三月還行朝。始師出無見兵。又大雨。群議欲少留。公謂朝廷必以行三日。不渡臨津爲罪。不如且進翌日得報。果如公言。歷修撰,直講。有金垣者爲人所嗾。疏誣名流。公亦與不安。屛鄕庄數月還。戊辰。拜吏郞。昇平欲用敗弁李一元爲西邊守。公曰。敵必謂我無人。乃止。孝立獄起。爲問事郞。進通政。秋。拜承旨。轉左副。鍾城土民朴仲男投虜。己巳春。與虜使來。將賜坐殿上。公爭之。賜茶亦後。仲男氣挫。三月。廷試第二選。書堂特命仍帶秋乞養。出牧楊州。庚午秋。親病歸在楊。盡蠲積逋。吏諫不從。果坐格久散。辛未。爲衛將。例乘肩輿。公獨步行。壬申春。還銀臺。賜柑遺親。公感激賦詩。薦紳傳和。四月。進右承旨。公久居喉舌。封內旨多所匡益。夏。章陵追崇。進嘉善。尊公長公已躋二品。父子兄弟。並居宰列。人榮之。六月。遭內艱。甲戌。又遭外艱。丙子。制除。連拜副學都憲。是春。淸人稱號使來。時議欲斬使絶。和使跳去。朝野洶洶。公白上曰。不顧時勢。橫挑強寇。其來必矣。不可不深思。權儆已坐贓當斬。公論其冤免死。十二月。淸兵大擧入。上將幸江都。出南門。敵騎已迫沙嶺。公急詣駕前。上御門樓。進公問。公言事急。宜走保南漢。上問金瑬。瑬請幸江都。公固爭。上從公。公請遣將前拒敵兵。又從之。時倉卒。公步趨南漢。拜副學。旣受圍。請三司名流皆爲督戰。御史編行伍警晝宵。上沈思稱善。天大雨雪。士卒暴露。公又請令大小官解衣分兵士。張覆師人如挾纊。公與石門,東岳,谿谷。居開元寺。公夜輒一再起。步詣行宮問起居。退則相携痛哭。各勉忠義。及上出城。涕淚汪汪不禁。上愍之。使無隨行。丁丑正月。扈還。拜知申。移副學,都憲。還知申。將改題廟主。疑所就。公請就廟內行之。又請視事接下宜頻。諸司逐日開坐。無使郡邑吏役。久滯京邸。皆從之。歷副學,大憲,工參。還副學。上箚陳戒六七事。又言尹煌斥和。編管宜釋。皆嘉納。時淸人立三田碑。徵其文。上命張維,趙希逸撰進。並不滿彼意。咆喝益急。上乃面命公曰。句踐不恥臣妾。以圖自強。今日唯適彼意。無或層激。公僶勉承命。貽書石門曰悔學文字。又有詩愧負浯溪百丈崖。公意可見。戊寅。箚請紓民力。修江都無發南民。築南漢無闊大。收布運米。皆可矜察。拜大提學。七月。拜吏參。因講請敬天怒消民怨蠲征役。皆嘉納。是日。講詩至樂只君子。殿天子之邦。上太息泣下。公與李公時白皆流涕。觀者莫不感動。時柳碩,朴啓榮,李烓等。齮齕淸陰。上素不快。桐溪,淸陰。頗入其說。公言尙憲,蘊不可罪。勿偏蔽。辭褫亞銓。己卯春。進吏判。庚辰春。進祕疏。時遣僧獨步入中國。公與完城密議。公引獨步入密室。涕泣送之。三月。辭解文衡。淸人詰代質。公亦奪官。冬。特敍。與李植議撰國書。拜都憲。時趙錫胤論事罷。許啓等欲緩淸陰入瀋被罪。公言二事。卽從之。辛巳春。拜右參贊。還大憲。夏旱。以平讞失宜。冤鬱莫伸爲言。上召見。放死囚四人。旱甚。又請疏釋。申中外毋濫刑獄。罷內獄。捐內貢。停造第。接臣僚。訪民隱。通上下情。無忘南漢益戒謹。嘉納。秋。守貳師赴瀋。上引見。勖以善導。公到瀋。請日開書筵。令賓客迭講。隨事切諫。世子亦敬禮之。嘗密進書。極論闕失。毀草不傳。淸人憚餼牽。使諸質白耕而食。督入農丁。公力爭不可曰。吾受任來。苟便於國。敢顧身。淸人亦不敢強。又詰責多端。彌縫非一。淸陰與朴潢,曹漢英久被幽辱。公入瀋三日。密白世子圖緩。世子與公謀。行賂用事。淸主召問世子。許遣還。令貳師同出。諸公之卒無事。皆公力。人無知者。壬午三月。更入瀋。夏還朝。七月復入。先是。漢船到宣川。方伯鄭太和縱歸。淸人後覺。遣公覈問。八月東還。馳聞其狀。朝廷使公留査無入京。只罷監司沈演,兵使金應海。促公還報。公不得已。九月。還入瀋以告淸人怒。欲廣致邊守及將領於瀋參詰。公力辨。但令宣川守就對。淸人又謂公中途徑返數來詰。公恐朝廷受責。不自明其實。淸主乃謂不傳命不見王而還。鎖之東館。已而。送鳳凰城。與諸人同拘幽。時世子隨淸將。先至鳳凰城査其事。公至欲謁世子。不許。時大臣以下被拘者多。各捐貲緩禍。公獨不肯曰。必不至死。宮師用金。自我始不可。冷山北海。固所甘心。後諸公盡還公獨被拘最久十二月。放之東歸。令不得收敍癸未。拜參贊。甲申。李右相敬輿入瀋。以擅用諸錮被拘。公乞罷三疏得解。同李植,李明漢改修宣祖實錄。世子請用被錮諸臣。乙酉春。使來始許甄收。拜大憲。四月。拜吏判。盡公正。戒僥濫。拔淹滯。詢訪人才。疏名爲簿。隨缺補擬。巖穴幽隱必致意。如兩宋,權諰,李惟泰諸人。始通顯路。實在公時。昭顯卒。議群臣服未決。公與李植,李楘。疏請白袍烏帽。卒哭而除。從之。九月。進拜右相。十月雷變乞免。陳修德弭災數。引公卿以下。詢得失察賢耶。禮招金集等。用兪伯曾,洪茂績等言地。又請書古箴戒辭。周禮十二荒政。劉向六正六耶。揭左右並內外省署郡邑廳壁。使出入觀省。嘉納。是年饑旱。公專管賑事。多所濟活。賑畢。尙多餘穀。分畿內補糶糴。又隨時積著備水旱。常平法始此。丙戌春。姜氏獄起。公與諸大臣爭論。天威震疊。至擧公及白江曰。二人吾待之甚厚。豈意負我至此。姜文星等就獄。公言旣無告者。又非辭連。不當開此路。三月。使燕解相。六月還。丁亥二月。拜左相。夏旱乞免。因請通下情。開言路。恤民隱。八月。病甚免。戊子夏。還左相。時上春秋高。違豫多。群臣罕進見。公前後請引接咨詢。又取漢文唐宗事及虞書數章與無逸爲一編投進。請燕處觀省。因乞風日淸和時。數召儒臣。論經史商政治。冬入對。極言災異及館學敎廢。宜設司業。薦鮮于浹窮經篤行。又請擇敎官訓童蒙。申鄕約正俗習。召見內外官詢弊瘼。嘉納。公常憂敎弛俗偸。有意振勵。至是。議擧呂氏鄕約。簡條目布中外。令禮曹觀察主行。公去位而法廢。朴遾忤旨斥補。公請優臺諫。不宜用聰明疑下。又言金集,宋時烈等。至誠招之。安得不來。又言宋孝宗去妃嬪珠玉。崔有源爲執義。焚臨海君馬鞍。去奢自宮禁。行法自貴近。紀綱不憂不立。己丑二月入對。言民生日困。宜使諸臣盡言闕失。誠心開納。又言宜受直言。如李敬輿,洪茂績。斷無他意。李應蓍,沈被罪旣久。皆請收錄。又言貴近私占山澤。致民失業。宜盡革罷。夏。冊世孫。公言金集,宋浚吉,宋時烈宜召責以輔導。又請修繕慈母城。江都設烽燧。上深然之。五月。仁祖薨。初終易服及復襲。一依五禮儀。從容審愼。不失倉卒。世子欲公除後嗣位。公率群臣屢勸進。始勉從。時金尙憲入臨。旣殯將歸。公啓留。馹召金集,宋浚吉,宋時烈,權諰,李惟泰等。四方名士。咸集朝廷。撰大行行狀。賜鞍馬。山陵退壙蓋石體大。請剖爲二。轝輦勿用錦綵。昭先王儉。金集進喪禮。古今異同。公辨其可否以上。六月請對。上衰服臨見。引明宗卽位開筵。李彥迪首勸學。請引接講論。又任賢以誠。嘉納。長陵有異議。趙翼請博詢。公言不可。浮議乃定。八月。進領相。讓左議政金尙憲。不許。反哭。停城門橋梁祭。正典禮。金尙憲論吏判沈詻事。臺議多岐。上欲譴言者。校理金弘郁坐挽詞將被罪。公爲言。皆從。十月入對。上憂災異。公言不獨天災。敎化不明。許稠勸世宗嚴上下分。先朝鄭曄,金堉兼大成。責成效。又言賞罰得中。人心悅服。因及王叔文事。時自點新敗。黨附被罪或過。故山陵畢。乞解不許。時右相堉。請行大同。左相翼。請變講法。公言大同宜先試湖西。講法。意非不好。行之難。上稱善。公言烏府銀臺百司綱紀。宜久承旨。擇臺官使百司勤職。又言學要明理。治要識體。修德省刑。列爲其目。庚寅二月。淸使六輩來。上新卽位。慨然奮發。淸人疑我。客聲旣至。朝野洶洶。請往察事機。上難公行。公言見危授命。人臣之節。辭甚激切。乃許。請起李敬輿議國事。又詢鄭太和於家。上稱善。公至灣上。淸使始東渡。聞公來。咆咻少止。公馳聞。卽日東歸。是行。初多危之。聞此。人情少安。上亦喜。使大臣皆會闕。待公入。卽引對賜柑。淸使至京。齎書二道。一九王書。一皇勅。責我挾倭請修繕。仁祖末。東萊府使盧協。慶尙監司李㬅啓倭情。後因使請修繕城池甲兵備南寇。見疑淸人。至是執此。欲甘心當事。公在灣上。譯官李馨長密言當者禍不測。公不爲動。旣還宿留朝堂。與諸公出入。密講所對。淸使集公卿兩司。庭詰數事。語輒歸責于上。公對曰。過在臣。王不知也。詰作表誰。趙絅對受廟堂指。公曰。吾爲首相。事皆吾責。末後詰倭情于盧協,李㬅。皆抵諱不以實對。淸使大怒。公徐曰。倭誠叵測。此輩恇怯失對耳。淸使厲聲曰。誰爲奏。必王爲之。公曰。爲此者我。鄭譯曰。公獨爲耶。曰。然。屢問無異辭。命壽高聲問領相獨爲。餘不與耶。衆默然。獨李基祚曰。此豈首相獨爲。吾輩皆與。於是退絅及㬅,協。獨留公責欺罔。良久出。是日。皆謂禍在呼吸。惴惴無人色。公家人以凶具待外。公獨安閑。應對如響。觀者無不竦然。淸人亦相目東國唯李相一人。上聞曰。領相爲國忘身。固自如此。李基祚初不與。獨能對爲有光。諸人慙公。卽就吏待罪。上慰諭曰。卿忠質神明。安心勿慮。夜出千金。求爲公地。明日駕臨。使館使言公及趙絅當死。上反覆力爲之解。乃言歸稟皇上。姑栫棘白馬。上賜公手札。相見有日。宜自愛。號宗室女義順公主遺九王。元斗杓,申翊全送至燕。九王喜。猶不赦公等。將復遣李時白。會麟坪從燕歸。言其意亦不深怒。秋。淸使又至。上郊勞。數爲言遣麟坪代延陽。李基祚爲副。撤籬勞問公。麟坪旣至。淸欲致諸人於燕。更覈。使臣力乞。始聽歸田里不得用。李敬輿亦被錮。獨㬅,協爲直。上遣使賜柑宣意。辛卯二月。至都外。近侍迎勞。明日召見。賜月俸。公在白馬。危禍日迫。色無怨悔。唯玩讀經
史。著自警詩自警主一箴。時與龍洲。杯酒酬和。或杖屨巖壑。旣還。多居江郊。時從知舊觴詠。秋。游關東濱海諸郡。上許乘驛。冬。還疏論趙錫胤,兪㯙,李愛億事。壬辰春。又議囚罪不至死忤旨。疏陳尙德緩刑。乃解。秋。拜領敦寧。再辭得許。癸巳春。應旨上箚十六條。皆令議行。特拜領敦寧。甲午春。箚請推孝施仁。尙儉去侈。明日引對。溫諭懇惻。公言災異屢見。宜修德回天。嘉納。趙錫胤,朴長遠論徐元履被譴。公爭之。不從。三月。親郊閱。校理南龍翼進諫。上怒。正言兪瑒。承旨尹得說。大諫閔應協。爭之。上益怒。公力言得解。夏。有水進箚。請先民後兵。毋以末害本。罷選女停內貢及土木織造。所言多行。秋。淸人怒。公住京乞解。得許。因與月俸。九月。南游。還陳民瘼。許施。時用議者言。垂意武事。公言民怨天怒。宜長慮。却顧無招患。嘉納。十二月。北使至。譙讓益急。時公之子爲邑安峽。聽公往從。賜酒饌藥物于東郊。至縣二月。徙鐵原。游淸平昭陽。俄促公還。乙未夏。至京。乞隨分閑住勞勉甚。至與月俸。明日召見賜酒。陳民瘼。許施。公面乞退處。辭月俸。不許。七月旱。言敬大臣先德敎。金弘郁親屬不宜錮。多從之。選湖堂。命就公議。丙申五月。兪㯙言事被鞫。公涕泣不寐。秉燭草疏。時上盛怒。疏入。繼有諸大臣言。㯙得減死。因旱疏決命。公入侍。議釋澂潚及昭顯第三子。公又請減兪㯙罪。從之。丁酉。因災。請嚴宮禁。去奢侈。蠲逋欠。平冤獄。敦風敎。省刑罰。作戒文告中外。又言無規近利。勿拘常規。奮發有爲。皆優批。冬。入對。上詢湖南大同。請算歲入。量物價。定可否。從之。戊戌夏。特還西樞。入對言。言過者容之。乃可謂優容。西北風俗鄙夷。骨肉相殘害。請北兵使及江界滿浦間用文士。從之。十月。入對。上語及敎化。請躬行。又責宗伯,都憲,京尹,方伯以風敎。選大司成。奬善。十一月。爲領敦寧。己亥春。入對言。賑事。朝廷摠其綱。擇委道臣守令。減兵額。使孤寡無怨。五月。孝宗昇遐。議慈懿服。禮官引子朞。或言當三年。宋時烈等主朞。引賈公彥四種。公以時制當朞。領相鄭太和意同。沈之源,李時白,李厚源,元斗杓聯名獻議。世子從之。言者請群臣絰杖。公謂改舊制不可。及啓殯。言者又請追服衰。公言與朱子時不同。中改未當。反覆陳辨。事遂寢。撰進行狀。賜鞍馬。山陵卜水原。民家多毀。又卜健元陵內。而上意在水原。三箚爭之。乃從。夏。鏡城判官洪汝河疏詆李厚源。諸臣請罪汝河。公以爲不可。從之。是年。北路饑。冬雷。公言推恩施惠。發倉蠲役。無牽有司。無拘流例。庚子春。東民饑。又請發倉。朴長遠忠信可委。皆納。當事欲解兪棨。春秋子命胤處史官。公謂不可。上從之。公管內局。兩殿疾平。賜鞍馬。官子弟。修孝宗實錄。命公摠裁。秋大侵。又請蠲貸節用緩刑。松都有獄。儒生與賈人牽引連逮。留守南老星窮治儒生。公爲言老星恚。誣公受賂。遣瞽卜流謗都下。公上章出郊。李敏迪等言老星誣詆元老。於是朴世模等。劾老星。上屢遣承旨諭。公乃入謝。辛丑夏。參贊宋浚吉。請移尹善道近地。公言宜納。七月。史畢。公以災旱乞停宴。掌令許穆請早定國本。公言元子生。告廟頒赦。是國本已定。領相鄭太和亦從公。事遂寢。壬寅春。湖南賑恤御史。淸退稅換租。公言宜從曰。或以此爲弊。習爲要民。以恤民爲要民。必至刻民而虐用。因擧先朝有爲國爲民之說。嘗進言違道干譽。固可惡也。視違道虐民則有間。況爲民便是爲國。豈可分而爲二。此說若行。民不堪命矣。仁祖深然之。及孝宗時。亦嘗言。至是三爲上言之。夏。徐必遠上疏。語侵公。公乞退。因出郊。屢勉諭乃還。徐公後自悔造謝。交益深。蓋服公雅量容己。癸卯。仁宗當祧永寧殿。制狹將改。公領其事。上欲增大左右翼室。倣正殿。公力言不可。事得已。畿內量田。郡縣坐田縮。當受杖。公言下其等而責多。非均田意。且長民。官不宜杖。甲辰。公年七十。乞致仕疏七上不許。入對申懇。猶不許。冬。因對語及敎化。鄭太和言公居位頗有設施。宜委之。明日。宗伯就公議。頒布中外。其規模節目。與己丑同。因災入見。請採群言。毀主第之奢者。停尙方織造。釋內獄囚。收用朴長遠。乙巳秋。幸溫泉。公任居留。駕還。復賜鞍馬。官子弟。冬。因災陳戒。凡八事。丙午春。又言四事。三月。幸溫泉。公留都。恩賜視前。丁未春。趙聖輔,李垕竄逐。承旨下吏。李䎘等七人又被譴。公諫不從。四月。請對復言。仍及洪萬容,南二星斥補非罪。二人得不斥。幸溫泉。公又留都。行朝大臣。復及諸竄。上念公言許量移。戊申。因災陳六戒。聖學敎化刑獄守令賦役奢侈。春。賜米帛。公辭。因請發倉濟饑。八月。幸溫泉公。又居留。十月。賜公几杖。屢辭不許。將設耆老宴。又力辭。有司具禮。致几杖賜樂。宣內外醞。完平後五十年始有。一世聳歎。己酉三月。將幸溫泉。爲公老不任居留。箚請早回鑾。仍言平昔朝端。納履相繼。今日帳殿。未有奔問。聲色。拒人千里。今亦近之耶。殿下所當念。嘉納。初宋時烈名重一世。公在仁祖朝屢薦。時烈至京。布衣草屨造門。公以均敵盡禮。孝宗初。又首乞招徠。時烈名位旣崇。敬重尊尙。見於書牘。得公箚而怒。醜詆公。公瞿然陳箚曰。宋時烈疏斥臣。臣甚愧怍。臣短箚所言。不敢不審。上慰諭之。懷川。領袖儒林。言論是非。無敢議。至是。雖其門士。皆疑之。同春亦對公駭歎。蓋公己亥議禮。不從四種說。懷川撰寧陵誌。引匪風下泉。公以語太露。請删定。又因同春言。請撤尹善道圍籬。懷川欲結婚公家。又不諧。故積疑蓄怒非一日。公坦然不置懷。平居。未嘗擧其長短。夏。疾甚。三章乞解。不許。出居江上。近侍臨諭。七月。始還。又遣近侍諭意。時有神德祔廟議。率百僚廷請。閱月始從。儀度多出於公。公與夫人俱大耋無恙。庚戌正月合卺回日。子孫進壽。鶴髮相對。杯觴迭獻。觀者艶歎。金澄劾李殷相,吳挺緯罪。公言其當寬。澄疏侵公。後澄坐贓下獄。公言澄爲母壽。罪可恕。當受訊。又言其不可。從之。辛亥春。掌令趙世煥言事被罪。公病中箚諫。九月。疾劇。二十四日。卒于正寢。壽七十七。曰氣起寢屋。久乃滅。訃聞。震悼不已。弔祭賵賻。皆優典。卿大夫至小民。咸相弔。有官於外者。率致賻襚。有司以禮治具。十一月。葬廣州西樂生負壬之原。從先兆。公容貌秀偉。天資仁恕。子諒愷悌。恬靜淸修。未嘗爲崖異詭激。矯飾矜詡。忠厚和順。粹於面目。忿厲嚴猛。不見容色。望之儼然。人不敢狎。事親有至性。兩尊人大耋無恙。周旋言笑。皆形至愛。親疾夜不解衣。及喪哀慼。葬祭誠禮殫盡。前後六載。毀幾滅性。朔望參拜流涕。諱日哀臨。若在袒括。盡月不與宴樂。每上墓。失聲號慟。爲先祖建祠具田。修墳壟置守塚。雖外家。亦經紀其祀。凡祭。老不廢澡浴。戒子孫罔敢怠。或身不與祭。聞鷄盥濯。衣冠致敬。事長公如嚴父。仲兄早沒。嫂老無嗣。衣服奉養。不使乏闕。壽辰令節。具饌進觴。敎子孫先小學。後及他書。平居。不許語朝政說人長短。唯勑身修行。諸族多貧窶。必使有以資活。疾病濟其醫藥。昏喪極力周恤。身先臨問。幼少無敢後。內外宗族。莫不依仰。又與隣里修約。略爲條目。至今守之。公自釋褐。聲掩前輩。二十年間。遂登台鼎。上而人主眷注。下而朝野想望。及至孝宗委任益專。公又殫竭忱誠。而遽有庚寅之事。雖迫於強隣。恩禮之隆。他相莫望。事大小咨詢。言稱元老。公每引經據義。幾諫明議。必主乎仁厚惻怛。或至流涕。上輒動容。儆災求言。必以敬天愛民。戒喜怒。納諫諍。崇節儉。恤刑獄爲言。反覆諄切。言無不誠。上皆虛心嘉納。十年間。際遇如一日。及顯宗世。位望益隆。中外倚重。遐鄕婦孺。能誦白軒。朝廷待遇旣異。公亦巨細必盡。上知至誠。及耋老。就問大事。尊禮無二。今上沖年。聞公名德。求一識。特許入見。公勤謹不懈。趨朝必先受命。禱雨必敬必誠。歸不解公服。伏於庭中。待雨乃起。公禱未嘗不雨。遇旱而聞公禱雨。都人皆喜曰。今當得雨。平居。聞朝有美政。喜不能寐。災異闕失。憂形于色。有封事朝服。拜送。受批亦然。駕動不得從。必伏而俟。有賜雖微物。朝服庭受。可薦薦之。行己接物。一於誠而不苟。常曰。士以正直忠厚爲本。正直不忠厚則刻。忠厚不正直則懦。論人擧長置短。看文求大略細。論囚讞議。先生後死。幽枉必欲伸。愛人好生。天性然也。立朝務持大體。至爲人謀事。纖悉周密。尤篤親舊。軫其喪病。恤其子孫。僕隷下賤。毋使失所。見蟲草木。不忍傷害。由是賢愚貴賤。心悅誠服。稱爲仁人。然體貌等威。截然而嚴。規模法度。確乎其守。臨大事決大疑。必傅古誼。老而步履不愆。容儀莊肅。每會朝。進止循度。百僚竦敬。平生律己。必準小學。於論語。得力尤多。旣老。案常置近思錄朱書。每誦。莊敬日強。安肆日偸。早起夜寢。端坐終日。大寒盛暑。不變常節。服陋食淡。居第狹陋。無所增飾。平生無玩好嗜欲。或問公亦有癖乎。曰無。唯嗜好文字。謂癖亦可。深戒聲色絶鄙俚。把杯吟詩。間以談謔。風流溢發。和氣襲人而儀度不爽。性喜讀書。手不釋卷。七十有程課習胡傳。喜昌黎愛杜詩。唯不讀老莊異端。少從趙纘韓。受古文。詞源滂沛。操筆立就。絢爛濃艶。不作詭奇劖晝之辭。年德旣高。文章益重於世。碑版誌狀題詠記跋之謁。盈箱溢篋。揮灑不倦。屢掌試。所取多知名。爲公卿聞人者甚衆。筆法翩翩有姿媚。求者不絶。詩文甚富。散軼居多。刊行五十卷。今上庚申。金錫胄,金壽恒,閔鼎重等。爲上言擢授孫羽成六品官。使無廢祀。夫人全州柳氏。觀察使穡女。慈惠莊淑。治家有法。公敬重之。卒以甲寅九月十四日。祔公墓左。銘曰。
三朝元老。一代忱臣。國忘其家。主不顧身。丹誠炳日。素節凌霜。險阻艱難。亦旣備嘗。至信所孚。能感豚魚。德全行高。彤管屢書。恣僞肆誕。世有聞人。梟鳳殊性。載怒載嗔。不善者惡。君子何病。我銘載石。人其來敬。

첫댓글 내용이 참 좋습니다. 기념사업회 회장이신 이용규 회장님 흐뭇하실거예요. 조완희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장달수 선생님께서는 장동수 선생님의 육촌아우라고 하시네요. 영남 인동장씨의 학맥을 유지하시는 분이군요.
허선생님은 재작년 고려대에서 여헌 학술발표를 미치고 식사 자리에서 옆에 같이 대화를 나누며 여헌학의 새로운 방향에 대해 이야기 하던 기억이 납니다
이경석 선생의 백헌집 국역이 이루어져서 프레스센터에서 출판기념회를 했는데 가격이 있어서 구입하시는 독자가 적은 기억입니다.연구자들에게는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했으면 합니다.그리고 역사인물을 연구하는 분들에게는 귀중한 자료이지요. 우리 서울문화사학회 봉익동 사무실에는 한 질이 있더라고요. 연구를 위한 자료로 쓰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삼전도비문을 쓰시고 후손들에게 벼슬을 하지말라는 유언을 남기신 휘 오준 선조님은 지금 파주휴전선안 적성에 비문에 음기없이 모셔있고 휘 오단 선조님은 공주에 모셔계시고 휘 오정위 선조님은 묘는 한에 있고 아차산에 단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좋은 자료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