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일의 <전방위 시뿌리는 사람>에서 모셔온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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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죽
이창수
마루 끝에 앉은 외할머니께서
늙으면 죽어야 한다고 했다
늙으면 죽어야죠!
외할머니의 지당하신 말씀에 맞장구쳤다
그날 저녁 외할머니는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고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어머니의 부지깽이를 피해 마루 밑에 숨었다
외할머니의 지당한 말씀에 대한 대꾸가
빨간 불꽃이 살아 있는
부지깽이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그날 저녁 호박죽 한 그릇을 다 드시고도
입맛이 없다는 외할머니에게
한 그릇 더 드시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귓속에서 운다』, 실천문학,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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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수 | 1970년 전남 보성 출생. 2000년 『시안』으로 등단. 광주대와 중앙대 문예창작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시집 『물오리 사냥』 『횡천』 『너의 눈동자엔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굽은 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외.
첫댓글 그리스의 희극에 등장하는 인물로 '에이런'과 '알라존'이 있습니다. '에이런'은 재치있고 지혜 혹은 꾀가 많습니다. '에이런'은 어리석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알라존'에게 처음엔 대체로 지는 것 같으나 최종적으로는 승리를 거두는 인물 유형이에요. 알고 있으나 모른척 하기도 하여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의미하는 '아이러니'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오래 전 애니메이션인 <톰과 제리>에서 톰(고양이)은 알라존, 제리(쥐)는 알라존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환기해 보세요. 톰의 괴롭힘에 당할 만큼 당하다가 그 몇 배로 복수하는 반전이 <톰과 제리>의 매력이었지요.
시적 장치에서도 '에이런'과 '알라존'이 공공연히 활용되곤 합니다. 시적 화자를 어린 아이나 무지한 존재인 '알라존'으로 내세워 "나는 모른다"로 일관하지만, 이 모든 것을 아는 시인은 시치미를 떼고, 이 시를 읽은 독자는 '에이런'의 지혜를 간파한 시적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시적 장치의 의도된 오묘함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