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1262호 하나님을 슬프시게 할 것인가, 기쁘시게 할 것인가? (엡5:1~10)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기쁘시게 하고 싶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을 겁니다. 그 방법을 잘 모를 뿐이지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마음은 우리에게 다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8~9). 하나님과의 동행(同行), 이것이 하나님을 제일 기쁘시게 하는 방법입니다.
제가 목회 40년을 지나오면서 제일 가슴이 아플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내가 기른 제자, 내가 기름 부은 장로가 저를 배신하고 떠나갈 때입니다. ‘아버지, 아버지’ 하던 자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등을 돌리고 떠나갈 때 마음이 정말 많이 아팠습니다. 제가 단에서 ‘오는 사람에게도 카펫 깔아주고, 가는 사람에게도 카펫 깔아준다.’ 하니까, ‘눈 같은 사람이 떠나도 나는 눈 하나 꿈쩍 안 한다.’ 하니까 제가 성도들이 떠나도, 제자들이 떠나도 무덤덤한 사람처럼 느끼셨다면 오해입니다. 표현을 안 할 뿐이지, 정말 가슴이 아프고, 무너집니다. 가끔 일기장을 뒤지다가 그들의 이름이 나오면 여전히 가슴이 아리고,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배반할 때 하나님의 마음이 무너지고, 한없이 슬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고 했던 루시퍼로 인해서 그러셨고, 늘 하나님과 함께 거닐던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아 배반할 때 그러셨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보시고 물로 쓸어버릴 때 하나님이 통쾌하셨을까요? 아니요, 하나님이 한탄하셨습니다(창6:7). 한탄(恨歎)하는 게 뭡니까? 속이 상해서 한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그만큼 슬퍼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틈만 나면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은 한탄하셨고, 초대 이스라엘 왕인 사울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등질 때도 그를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며 한탄하셨습니다(삼상15:11). 얼마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들이 하나님을 배척하고 떠났으면 하나님에게 ‘또 나를 떠나면 어쩌지?’ 하는 트라우마가 생기셨겠습니까.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신8:14).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는 제가 시간을 쪼개어 찾아뵙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좋아하셨습니다. 제가 일이 있어서 일어나려고 하면 ‘벌써 가냐?’ 그러시면서 아쉬워했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뭘 해줘서가 아니라 그냥 함께 있는 걸로 기뻐합니다. 자식들이 속을 썩이고, 이런저런 일로 근심을 쉬 없이 안기지만, 그래도 함께 있으면 흐뭇하고, 행복하고, 기뻐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지금 저와 함께하는 주의 종들, 장로들은 제 속을 한 번도 안 썩였을까요? 다 제 맘에 쏙 들겠습니까? 그럴 리가요. 그럼에도 그들을 생각하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기쁜 것은 지금도 저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그러십니다. 우리 인간을 만든 창조주요,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자이신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엄청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갈 때까지 그분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너무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뭘 해서 기쁜 게 아니라 그냥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너무 기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친들, 하나님이 자랑하는 믿음의 영웅들이 적혀 있습니다. 노아,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 이들은 실수 한 번도 안 하고, 이들은 죄 하나도 안 짓고 살아서 하나님이 자랑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속도 썩이고, 죄도 지었지만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그 안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고, 하나님을 물고 늘어진 자들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중에서 ‘에녹’이란 사람은 딱히 한 일이나 업적에 대해 적혀 있지 않은데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유인즉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입니다(히11:5).
여러분,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택하신 첫 번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막3:14). 함께 하시려고 택하셨습니다. 우리 생각에 먼저는 ‘전도하려고’ 택했다 생각하겠지만, 그 중요한 이유보다도 우선되는 것이 자기와 함께 있게 하려고 택하셨다 했습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는 걸 원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뭐라고, 우리가 뭐가 그렇게 이쁘다고 하나님이 그러시는지….
우리와 함께하고프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이는 ‘제발 떨어지지 말라. 나와 함께 하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도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며,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6~18) 하심으로,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와 늘 함께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너희도 가려느냐”(요6:67), 이 말씀은 예수님이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5)라고 말씀하시자 예수를 따르던 많은 무리와 제자들이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냐?’ 하며 떠났을 때 남은 열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물으신 말씀입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6:68)라고 답합니다.
사실 열두 제자도 주님이 하신 말씀을 진정 다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들은 믿음으로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되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했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가장 믿었던 베드로도 대제사장 뜰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얼마나 슬프셨을까요? 어쩌면 로마 병정들이 때리는 살이 패는 채찍보다 제자들의 배신이 더 아프고 슬펐을지 모릅니다.
여러분, 나 때문에 주님이 슬퍼하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나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게 해야 합니다. 대단한 일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주님과 함께 가면, 주님과 함께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그분이 그것으로 기뻐하시고, 그 기쁨이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우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저 같은 것이 감히 주님과 동행하다니요?’ 하십니까? 괜찮습니다. 아직 부족해도, 향기 나는 삶이 아니래도 좋습니다. 실한 열매가 없어도, 극상품 열매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일단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주님으로 인해 점차 변화될 것이고, 주님을 닮아 향기 나는 삶, 극상품의 삶이 될 것입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이 없어지고,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 대신 감사하는 말을 하게 되고, 우상 숭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엡5:3~5).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갈5:22~23).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부디 주님과 동행하시어 주님의 기쁨 덩어리가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부모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큰 효도이다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는 자가 되자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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