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꿈꾸는 여성결사대-추르찬드푸르 최전선에서 만난 여성들
동북인도 폭동지역에서 돌아온 지도 어언 20여일이 지났다. 20여일이면 현장에서 받은 충격이 충분히 잊혀질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금번의 경험은 잊혀지지 않고 갈수록 선명하고 생생하게 클로즈업 되어서 나로 하여금 액션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다수 부족민들이 소수 부족민들의 땅, 경작지와 거주지를 힘으로 약탈하고자 일으킨 폭동이 너무도 인간의 악랄함과 비열함 그리고 탐욕과 오만을 리얼하게 보여주었다. 침략자들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지내는데 당한 자들은 말로 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 고통과 절망에 직면해 있다. 며칠 머물면서 소수자, 약자, 당한 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문제에 빠져들었다.
단절된 도로망, 붕괴된 의료 시스템, 무너진 교육 시스템, 공산품 가격의 폭등, 농산품 가격의 폭락, 일터를 잃은 실업자들과 생계 위기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 파괴된 마을, 불에 타서 사라진 교회의 잔해들, 가난한 거리의 침울한 난민캠프, 산속 오지로 들어간 난민들, 희생자들이 묻힌 순교자의 묘원, 폭동으로 자녀를 잃은 부모님들, 시민방위군으로 일하다가 사고로 불구가 된 사람, 최전선을 지키는 시민방위군들 그리고 "여성결사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파도처럼 밀려갔다.
특별히 "여성결사대" 이야기는 처음부터 격렬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여성들 스스로가 조상들이 물려준 땅, 자신들의 삶의 터전과 짓밟힌 존엄과 평화 지키고자 떨쳐 일어난 것이다.
최전선에 근무하는 시민방위군은 남성들의 몫이었다. 14개 소수 부족민들 대표가 모여서 모든 가정에서 19세에서 40여 세에 이르는 남성을 1명씩 무조건 의무병으로 차출하기로 결정하였다. 여성들만 있는 가정은 남성 의무병 1명을 부양할 수 있는 경비를 내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바로 시민방위군이 형성되어 동서로 100km에 걸쳐있는 전선에 방위군들이 투입되었다.
처음에 여성들은 시민방위군을 방문하여 말씀과 기도로 격려하며 식당 봉사를 해주었다. 그리고
방위군으로 나간 가정들을 방문하여 모자라는 일손을 보태거나 식량을 구호하였다. 그러는 중에 평화의 소중함을 절절하게 깨달은 여성들이 추르찬드푸르에서 임팔로 가는 대로에 있는 최전선 투이봉에 모여서 기도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폭력사태가 끝나고 평화가 오는 날까지 평화 릴레이 기도를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시민방위군처럼 조직을 결성하지 않고 영적인 자율성에 맡기기로 하였다.
각 지역의 교회 여성들이 자기 마을에게 할당된 최전선에서 방위군으로 수고하는 청장년 남성들을 찾아가 격려하며 한편으로 최전선의 중심지에 해당되는 곳에 모여 금식, 철야기도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특별히 누가 제창하지 않았지만 임팔로 가는 대로 버퍼존 앞의 바리케이드 앞에 천막을 쳤다. 그리고 24시간 릴레이 기도로 불침번을 서기 시작하였다.
여기까지는 한국에 있을 때에도 몇 사람들을 통해서 익히 들은 이야기다.
드디어 임팔공항으로 떠나기 하루 전 날, 절박한 마음으로 폭동 희생자들의 기념 묘지, 폐허가 된 마을과 파괴당한 교회 건물을 보게 해달라고 초청자인 실맛학장에게 간청하였다. 그리고 큰 문제가 없으면 버퍼존 바로 앞의 최전선 초소들과 근무하는 시민방위군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안내를 부탁하였다.
학장을 비롯한 우리 일행들은 버퍼존 일대에 있는 폭동으로 폐허가 된 마을들을 돌아보았다.
널부러진 십자가와 강대상이 피 흘린 채 신음하고 있었다. 버퍼존 일대의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이 충격으로 말을 잊은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원만한 곡선을 그으며 달리는 산과 산 사이에 둥지를 튼 고즈넉한 들판, 들판을 가로 지르며 흐르는 실개천이 학살의 기억으로 부대끼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최전선의 초소는 널판지로 만든 서너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앞으로 덧대어 지은 더 작은 공간에는 두어 명이 앉아서 쉴 수 있는 선술집 의자가 놓여있었다.
초소라고 해봤자 방공호도 망원경도 없고 작은 기관총 몇 자루가 다 였다. 이런 열악한 상태에서 시민방위군들이 평화유지를 감당하는 것 자체가 기적처럼 보였다. 사랑하는 가족과 마을과 조상의 땅을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희생을 각오한 용기가 그들의 비장의 무기라고 아니할 수가 없었다.
메조리티들의 부당하고 악랄한 폭동으로 부터 약자인 자신들의 생명의 존엄과 인권을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결연한 자세와 태도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강자들의 횡포와 폭력에 짓밟히는 소수부족민들의 아픔과 슬픔에 가슴이 저릿저릿 아렸다. 하늘을 향해 읍소하며 천군천사가 시민방위군들과 함께 하길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어디선가 만나게 될 것이라고 크게 기대했던 여성들의 기도모임은 끝내 보지 못하였다. 아쉬움으로 어느 분께 여성들의 기도 모임에 대하여 물었다.
" 최전선에서 여성들의 기도 모임이요? 지금은 대부분의 여성들이 각자 교회에서 아침 10시에 모여요. 그러나 누구든 최전선에서 기도하고 싶으면 그리로 갑니다."
추르찬드푸르로 떠나는 날, 임팔공항에서 나를 픽업해준 꼼씨가 나를 데리러 왔다.
우리는 순식간에 메조리티에 맞서 대항하고 있는 작은 도시, 추르찬드푸르를 벗어났다. 꼼씨가 말했다.
"버퍼존에서 추르찬드푸르까지 20km 정도 밖에 안되는데 사람들이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사는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가 코앞에 적을 두고 잠을 잘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하고
최전선 초소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시민방위군들의 희생때문이기도 해요."
우리 차는 소수부족민들이 지키고 있는 초소 4개를 지났다. 꼼씨는 인도정부군이 바리케이드를 친 우측 초소 앞에 차를 세웠다.
나는 군인들과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푹숙였다. 꼼씨가 통과 허가를 받고 돌아왔을 때 조심스럽게 머리를 들어서 바리케이드 좌측 천막 안에 앉아있는 여성들을 바라보았다. '아! 이들이 최전선 초소에서 기도하는 바로 그 여성들이구나.' 하는 직감이 왔다. 반가운 마음에 차문을 열고 내리려하였다. 그러나 바로 앞에 총을 들고 서있는 정부군의 위세에 주눅이 들어서 주저앉았다. 가만히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었다가 우리 차를 주시하는 군인들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사진 찍는 것도 포기하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꼼씨에게 물었다.
"꼼선생님~저 여성분들은 모여서 기도회를 하는 거지요?"
"예, 그래요. 날마다 기도회를 가집니다. 그러나 저분들은 결사대 입니다."
"기도 모임이라고 하던데 결사대라니요? 거참!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은 여성들이 무슨 결사대라고요? 어떻게요?"
"만약에 버퍼존이 뚫려서 적들이 총칼을 들고 우리쪽 최전선으로 들어서면 저분들이 자신들의 몸을 던져서 죽음으로 적의 진로를 막아 공격을 지연시키는 거지요. 한마디로 추르찬드푸르를 지키기 위하여 총알받이가 되는 겁니다."
총알받이 라는 말에 온 몸이 떨렸다. 나는 분노로 부르르 떨었다.
"말도 안돼요. 누가 이런 죽음을 강요하는 결사대를 만든 거요."
"아무도 만들지 않았어요. 그런 생각을 가진 여성들이 스스로 모여서 버퍼존 앞에 천막을 친거지요."
"아무도 만들지 않았다고요?여성들 스스로가 만들었다고요? 말도 안돼요. 누가 죽기를 자원할 수 있단 말이요. "
나는 숨을 크게 들이 쉬고 눈을 감았다. 여성들이 자기 동족들을 위하여 미리암, 에스더, 드보라가 되기를 자원했다는 말인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래 동족을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잔 다르크처럼 소명을 받았으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 있어! 우리도 삼일만세시위 때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죽음을 각오하였던가? 나는 말소리를 낮추었다.
"결사대가 언제 만들어졌나요? 누가 결사대에 가입하나요?"
"처음에 여성들은 기도하고 시민방위군 뒷바라지를 해주었어요. 그러던 여성들이 수많은 죽음과 약탈과 방화를 겪으면서 버퍼존이 뚫리면 다 죽게 된다는 사실을 몸소 깨닫게 된요. 그런 위기의식을 느낀 여성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24시간 릴레이 기도를 하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평화불침번이 된 거지요.
결사대에는 가입도 없고 탈퇴도 없어요. 그런 마음을 가진 여성들이 자기 형편에 따라 모이고 형편에 따라 돌아가요. 그래도 모이는 인원이 항상 삼사십명이 넘습니다. 이 여성 초소는 24시간 가동 됩니다."
나는 눈물이 앞을 가려서 말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버퍼존이 뚫려서 적들이 쳐들어 오면 후손들을 위해, 부족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몸을 던지겠다는 어머니의 숭고한 마음에 전율하였다. 부족공동체를 위해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한 어머니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아! 부족의 십자가를 지는 위대한 어머니시여!
방문 일정 속에서 가장 큰 충격과 감동이 된 "결사대!"는 지금도 나를 격동시키고 있다.
생명을 걸고 평화를 지키려는 거룩한 어머니가 아직도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꿈같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결사대' 이야기를 두 번 했는데 두 번 다 눈물이 앞서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그 땅에 평화가 오는 날,
차분히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평화가 '결사대'와 '시민방위군'에게 충만하길 빈다.
2024년 9월 18일 목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