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시련이 닥쳐 슬픔과 고통 중에 있을 때에는 한치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원망과 분노, 답답함과 쓰라린 고통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더구나 그 시련이 오래 지속되거나 반복될 양이면 이내 낙담하며 절규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우리 인생에는 즐겁고 기쁜 일은 몇 번 안 되고, 힘들고 슬픈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때는 한 순간이고 대부분이 불안과 근심의 숲을 끊임없이 헤쳐 나가야 하는 고된 시간들입니다.
실제로 오늘도 대학입학과 취업을 위해서 밤낮으로 애를 쓰며 하루를 보낸 이들이 있습니다.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 힘겹게 분투하며 지친 하루를 보낸 이들이 있습니다. 상실과 상처와 막막함을 홀로 감내하며 힘겨운 하루를 보낸 이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뻐하고 있는데 세상 어느 한 곳에서 울며 애통해하는 그 누군가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한 번에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는데, 누군가는 셀 수 없을 만큼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아직 작은 결실도 얻지 못해 포기의 유혹에 늘 시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여 한 밤중에 엄습해 오는 고통과 대항하며 심신이 모두 지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절망과 희망이 하루에도 수 천만번 마음에서 오가듯, 하느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자신을 원망하기를 수 천만번 합니다. 지금도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아니 우리 자신은 긴 절망과 고통과 슬픔과 시련의 터널을 그렇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듣습니다. ‘다시 조금만 더!’
목적과 이유 없이, 수고와 희망 없이 견디는 이에게는 그저 일시적인 위로일 뿐인 그 한 마디이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그 목적과 이유를 찾고, 희망을 걸고 있기에 ‘다시 조금만 더’라는 이 한 마디에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1코린 9,25-26)”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에서 복음을 전하는 데에 전념합니다. 그야말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와 모독’뿐이었습니다.(사도18,6) 열심의 결과가 그러하였다면 우리들은 그 즉시 낙담하거나 분노하며 포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훌훌 털고 일어나 가야할 길을 갔고, 해야 할 일을 위해 ‘다시 조금 더’ 힘을 내어 복음 선포의 길을 떠납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기쁨이나 만족이 아니라 영원하고 참된 것을 위해 걸어갔고 일했습니다. 사도의 목표와 희망은 위대했고 또한 영원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런 사도에게 희망과 기쁨을 보여주시고 또한 안겨주셨습니다. “회당장 크리스포스는 온 집안과 함께 주님을 믿게 되었다. 코린토 사람들 가운데에서 바오로의 설교를 들은 다른 많은 사람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사도 18,8)”
‘다시 조금만 더!’ 주님은 오늘 이 말씀으로 지치고 낙담했던 우리를 위로하시고,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하시며 불멸의 희망을 안겨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사도들과 같이 주님이 이루어 주실 위대하고 영원한 목표와 희망을 품고, 조금만 더 힘을 내어 복음말씀이 일러주는 그 위대하고 참된 길을 걸어가도록 합시다. 그 길에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며, 그 길의 끝에서는 믿음의 완성자이시자 우리들의 전부가 되어주실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쁨의 상으로 맞이하고 계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