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을 만들어 섬기는 사람들
호세아서 2:14~20
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18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9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과 밀쳐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를 약 4:6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싫어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교만한 사람일까요?
사사기에서는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즉 자기 뜻대로 옳다고 여기는 것을 끝까지 우기고 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신을 만드는 사람, 즉 우상 숭배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 우주 만물에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사람의 지혜와 총명으로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 주셔야 이분의 속성을 알 수 있고 인격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은 이렇게 생각하고 행할 것이라고 상상을 하고 만들어 내고 있다면 이것처럼 어리석고 교만한 모습을 없을 것입니다. 신 5:8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시고 무엇에 의존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주 만물 가운데 존재하시고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믿고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고 있는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나타내시는 계시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나 이 겸손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겸손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골 2:18에서는 이것을 ‘꾸며낸 겸손’이라고 하였고 개역성경에서는 ‘일부러 겸손함’, NIV영어성경은 ‘false humility’라고 하였습니다. 약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낮추라’는 것은 남들에 비해서 자기가 우월한 위치에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겸손에 머물지 않고 절대적인 겸손을 이루시기를 원합니다. 이를 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천국에 합당한 본성적인 겸손을 이루기를 원하시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본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니고 있는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관념에서 벗어나 참 하나님의 지식을 얻고 겸손을 이루기 위하여 행하시는 과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광야의 과정에서 이뤄질 수 있습니다.
가나안 토착민이 섬겼던 최고의 신은 엘입니다. 엘의 배우자는 아세라이고 둘 사이에 태어난 신이 바알입니다. 바알에게도 배우자가 있었는데 아스다롯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여호와 신앙을 버리거나 병행하여 가나안의 토착 신이었던 바알과 아세라 등을 섬기게 된 배경은 종교적, 문화적, 생계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여호와는 광야와 이동, 그리고 전쟁의 신으로 강하게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이들의 주업은 농업과 정착 생활로 바뀌었습니다.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와 풍요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습니다. 당시 가나안 원주민들은 비와 폭풍을 주관하여 농사의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이 바로 ‘바알(Baal)’이라고 믿고 있었고, 이스라엘은 농사 기술을 배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종교적 관습까지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은 형상을 만드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반면 가나안 종교는 화려한 신상과 눈에 보이는 신전이 있어 시각적으로 훨씬 자극적이고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바알 종교는 땅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신전 창기들과 성적인 행위를 하는 의례(제사)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축제 문화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유혹으로 다가왔습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각 땅마다 그 땅을 지배하는 고유한 신이 있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유일신 사상이 완벽히 정착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광야에서는 우리 하나님이 최고였지만, 이 가나안 땅에 왔으니 이 땅의 주인인 바알과 아세라에게도 잘 보여야 농사가 잘된다는 혼합주의적(Syncretism)인 생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즉, 여호와를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라, 여호와도 섬기면서 바알도 함께 섬기는 방식을 택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뿌리 깊게 드리운 신을 만들어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호 2: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저들의 행위에 대하여 회개하도록 바벨론 포로를 상징하는 ‘거친 들’로 옮겨질 것을 예고 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저들이 회개하고 돌아 오도록 기다리고 계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거친 들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박힌 잘못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인식을 깨끗하게 정화하기 위하여 등장하는 것이 선지자를 통한 예언과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이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면이 마가복음 9:1~8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명 ‘변화산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12명의 제자 중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세 제자 앞에서 ‘변형’되십니다. ‘변형’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메테몰포데 μετεμορφώθη’인데, 영어로는 To transfigure 혹은 To transform으로 번역이 됩니다. 이 단어는 모습과 형태 혹은 모양이 본질적 변화를 불러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평소의 외형적인 모습이 완전히 영광스럽게 변화되었습니다. 그 변형의 모습을 막 9:3절은 “그 옷이 광재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장차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본질적으로 변화할 것에 대한 예표입니다. 예수님의 변형에 함께 있었던 인물은 모세와 엘리아입니다. 이들은 율법과 선지자의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려 변형하게 되어 본성이 겸손하도록 하는 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다스림을 통하여 이뤄 짐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어떻게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을 통하여 저들을 온전하게 회복하시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호 2:15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나라에서 그들의 기업인 포도원을 도로 받으며 아골 골짜기 같았던 황폐한 땅에서 소망의 문을 주시겠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성취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하여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43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노예로 지내다가 저들에게 땅이 생기고 자유가 주어질 것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현실로 이뤄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영원한 기업인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녀로 세우시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잠깐이면 사라질 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을 꿈꾸며 그것을 이루고자 한다면 나 스스로 신을 만들어 섬기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4대 독자를 둔 아버지가 교회에 등록하여 열심을 품고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또한, 예배 때마다 감사헌금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8개월 정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 어느 날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심방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를 대하는 태도가 냉랭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게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빌고 빌었는데 그것 하나 들어주지 못하는 하나님을 내가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불만을 토해냈습니다.
이분이 만들어 낸 신은 자기 열심으로 믿어 주고 자기의 돈을 바치면 소원을 이뤄주는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만들어 낸 신을 따랐는데 이것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 가차없이 믿음을 저버린 것입니다. 의외로 이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시는 하나님을 그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열심을 내면 이뤄진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만들어 낸 신을 섬기는 것이 우상 숭배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거짓 겸손입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돌이키게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전해지는 예언에는 장래에 소망이 있습니다. 잘못된 신앙을 버리고 돌이며 하나님께 나가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소망이 성취됩니다.
세 번째는 완벽한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호 2:16,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 되실 뿐 아니라 남편이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고 따르는 관계로의 변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예수님 안에 담긴 성령으로 이뤄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내 안에 오시면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는 영이 내 안에서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 주십니다. 내가 성령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고 그 의미를 알게 된다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믿어지고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이 날로 날로 커져 나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소망 중에 커지면 커질수록 세상의 것이 점차 작아집니다.
호 2:19,20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장가들어’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라스’ 는 단순한 재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간음했던 여자의 과거를 들추어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말합니다. 즉 이스라엘을 행음했던 불결한 여자로 생각하지 않고, 순수한 처녀로 인정하여 새로운 결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죄의 용서뿐만 아니라 신분의 회복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언은 세 번이나 반복되어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와 축복을 충분히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주신 목적은 예수님 안에 성령을 담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몸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내어주시고 그 안에 머물러 계신 성령을 믿음의 성도에게 주셔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영원한 사랑을 나누며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를 신을 만들어 섬기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내가 믿는 하나님을 오직 성경으로 통하여 나타나는 분이어야 합니다. 행여 내 생각과 내 판단으로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만들어 내지 마십시오! 내가 생각한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실망하고 하나님을 떠난다면 택하신 자녀는 광야의 거친 들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름을 받지 않은 사람은 버림을 받아 그의 잘못된 길을 가다 영원한 저주의 장소인 지옥으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내하면 내가 만들어 낸 신을 따른다는 것은 거짓 신이 마귀의 유혹에 빠졌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