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한국교회 위인들 [69]
남궁혁(南宮爀, 1882~1950)②
남궁혁은 1925년부터 평양신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며 성경 번역과 주석 편찬을 맡았고, <신학지남>을 발행했습니다. 한국인 첫 신학박사와 교수로서 박형룡, 송창근, 김재준 등의 인물들을 돕고 지원하기도 했으며, 한국교회에 한국인 신학자들이 이어지도록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1938년 신사참배 문제로 한국교회가 곤경에 처하게 되고, 신학교도 폐교되어 1939년에 가족과 함께 중국 상해로 망명해서 그곳에서 교포들을 위한 거류민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해방이 될 때까지 6년간 머물러 있었습니다. 해방 후에 한국에 돌아와서 미 군정의 요청으로 적산관리처장과 재무부 세관국장을 2년간 맡았고, 그 후에 1948년 폐교된 평양신학교를 이을 ‘남산장로교신학교’를 세울 준비를 하던 박형룡 박사가 남궁혁에게 교장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내가 한국교회의 분열을 책임질만한 인물이 되지 못하니 사양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신 한국교회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 한국기독교회협의회(KNCC)의 총무로 적극적인 활동을 했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서울 이남으로 내려갈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북한군의 가택 수색에 발각되어 8월 23일 연행되었고, 평양으로 강제 납북되었습니다. 그는 북한 정치보위부의 협박과 감언이설에도 그들 요구를 듣지 않았습니다. 공산당은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자진 월북했다고 방송하라고 강요했고, 남궁혁은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공산당의 정치 선전에 이용당하는 자가 되지 않으려고 모진 고문과 협박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금식하던 중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참고 문헌>
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재단 홈페이지(http://www.100thcouncil.com), “순교자 기념관”
김재현. 『한반도에 새겨진 십자가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