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존’ 이라니요?
김창욱 (吾如茶經室 강주)
경남일보
http://www.gnnews.co.kr/news/oldArticleView.html?idxno=49102
승인 2003.05.13 21:05:09
여러 해 전에 가르친 제자로부터 석사학위 논문과 장문의 편지글 한 통을 받았습니다. 고맙고 대견하였습니다. 저런 선생님들이 있으니까 그래도 우리 교육은 아직 희망이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편지글을 다 읽고, 뿌듯한 마음으로 논문의 표지를 열었는데, 속표지에 큼지막하게 ‘오여선생님 혜존’이란 글이 한자로 적혀 있었습니다. ‘혜존(惠存)’이라, 언제부터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우리 사회에선 학술서적이나 문학작품 등 자기의 저작물을 다른 이에게 줄 때 ‘00 혜존’이라 쓰는 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혜존’이란 말은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는 말입니다. 근거가 없는 말일뿐만 아니라 이치에도 맞지 않는 말입니다. ‘혜존’이란, 글자그대로 풀이하면 ‘(귀한 것이니) 은혜롭게 잘 간직하라’는 뜻이 됩니다.
예(禮)란 무엇입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란,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것을 그 근본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혜존’은 나를 높이고 상대를 낮춘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대단히 무례(無禮)하고 비례(非禮)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쓰는 사람은 전혀 그런 의미로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혜존’은 역사성도 없는 말입니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선조들은 그런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감하(鑑下), 청람(淸覽), 일람(一覽) 등의 말을 썼을 뿐입니다. ‘감하’란 ‘거울같이 맑은 눈으로 쭉 살펴보시고 좋은 가르침을 내려 달라’는 뜻이니, 스승이나 윗사람에게 드릴 때 공손히 쓰는 말입니다. 그러나 좋은 말이라고 해서 아무한테나 써서는 안됩니다. 과공비례(過恭非禮)니, 지나친 공손은 또한 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또래나 조금 선배일 경우에는 ‘청람’이라 썼습니다. ‘맑은 눈으로 한번 읽어봐 주시라’는 뜻입니다. 아랫사람에게는 ‘일람’이라 쓰는 것이 무난합니다. 그저 ‘(별 것 아니지만) 한번 읽어봐 주렴’이란 뜻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겸손한 말입니까? 이처럼 말이나 글은 상대에 따라서, 또한 때와 장소에 따라서 다르게 써야 합니다.
단어 한마디 가지고 뭐 그리 호들갑을 떠느냐고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이나 글에는 그에 상응하는 기운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른 말에는 바른 기운이, 틀린 말에는 뒤틀린 기운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사용하면 더 큰 기운이 작용합니다. 이런 이치는 이미 우리의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증명된 일입니다.
‘감하’나 ‘청람’ 등 품위 있고 이치에도 맞는 말이 아무 불편 없이 오래 동안 쓰여지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누가, 어떤 의도로 예(禮)에도 맞지 않고 의미도 불분명한 ‘혜존’을 가지고 나와 널리 유포한 건지 참으로 희한한 일입니다.
이제부터라도 ‘혜존’이란 말은 쓰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특별히 전통적인 격식을 차려야 할 자리가 아니라면 아름다운 우리 글로 ‘00님께 드립니다’ 라고 쓰는 것이 훨씬 정겹고 편안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吾如茶經室 강주
첫댓글 雅鑑
雅鑑은 '고아(高雅)하신 당신(극존칭)의 작품을 거울삼아 간직하겠습니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받는 이를 높이는 말로는, 학형(學兄)이 있으며 극존칭으로는 '大雅, 大人, 雅兄'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