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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승원씨가 고향인 전남 장흥에 마련한 집필실 해산토굴에서 임방울의 판소리 춘향가를 들으며 북을 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
최재봉 기자의 그 작가, 그 공간 ② 한승원과 장흥의 ‘해산토굴’
소설가 한승원(72)이 고향 장흥으로 내려온 것은 1997년이었다. 1980년 1월 식솔을 이끌고 서울에 입성한 지 17년 만의 일. 햇수로 13년에 걸친 교직 생활을 마감하고 전업 작가로 살겠노라는 비장한 결심으로 올라갔던 서울이었다. 다행히도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베스트셀러가 된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비롯해 책들의 판매가 순조로웠다. 문학적으로 확고한 자기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도 얻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귀향을 택한 것이었다.
몸의 탈과 마음의 불안에
17년 서울살이 접고 귀향
자궁같은 만 보며 소설 써
“무엇보다 건강이 좋지 않았어요. 부정맥이 있었고 현기증도 심해서 조금만 걸어도 어지러워 주저앉아야 했습니다. 위산과다로 속도 쓰렸고 변비도 심했지요. 체중이 60㎏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살도 빠졌어요. 어쩐지 고향의 물을 마시면 그 모든 병이 나을 것 같더군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상식이나 출판기념회 같은 문단 행사에서 마주치는 선배들의 모습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 했다. 문청 시절 우러러보았던 선배들이 더이상 새 작품은 쓰지 못하면서 “초상집 개처럼” 비루하게 이 자리 저 자리 찾아다니는 게 남의 일로 보이지 않았다.
“문단에서도 권력에 따른 줄서기는 심각합니다. 저는 학교에 있으면서 문인 제자들을 양성한 것도 아닌데다, 신춘문예나 문학상 심사를 할 정도로 잘나가지도 않고, 잡지에 후배들 작품을 실어 줄 정도로 영향력이 있지도 않거든요. 나 같은 사람에게 서울은 있을 곳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가 보기에 몸의 탈과 마음의 불안은 둘이 아니었다. 서울이라는 이상한 도시의 속도를 따라잡느라 허우적거리며 달려온 결과였다. “모든 것은 탐욕에서 비롯된 것, 마음을 비우자”고 결심했다.
처음에는 천관산 아래 고향 마을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아서 포기하고 근처를 수배하던 끝에 지금의 자리를 찾았다. 안양면 사촌리 율산마을. 득량만과 그 너머 소록도가 내려다보이는, 높지 않은 언덕 위의 집이다. 척 보기에 절터였다. 자신의 호 ‘해산’(海山)에다 스님의 수행처를 일컫는 ‘토굴’을 더해 ‘해산토굴’이라 이름지었다.
“이름만 듣고 정말 굴을 파고 사는 걸로 오해하는 이도 있더군요. 부처님을 모셨느냐고 묻는가 하면 새우젓을 사겠다며 올라오는 이도 있었어요. 길 초입에 ‘한승원 창작실’이라 병기한 팻말을 세우고서야 그런 일들이 없어졌어요.”
해산토굴에서 그의 일과는 스님의 수행을 방불케 한다. 어둑살이 채 가시지 않은 여섯시쯤 기상해서는 요가 동작을 흉내낸 체조로 몸을 푼 다음 바닷가까지 40분 남짓 산책을 다녀온다.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글을 쓰기 위해서는 지구력이 필요한데, 걷기는 지구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아침을 먹은 뒤 12시 반까지 글을 쓰고서는 점심 뒤에 잠깐 낮잠을 잔다. 오후에는 거실에서 뒹굴며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다. 임방울의 소리를 즐기는데, 흥이 나면 북을 쳐 가며 소리를 따라 하기도 한다. 저녁에는 칼럼처럼 급한 원고가 있지 않으면 대체로 부인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며 소일한다. 9시 뉴스를 보면서 졸다가는 스포츠 뉴스가 끝날 때쯤 잠자리에 든다. 서울에서는 자주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이곳에서는 잠도 아주 잘 잔다.
단행본 3권 분량 원고 탈고
“도깨비에 영혼 저당 잡혀
글 쓰는 한 살아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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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승원의 집필실 해산토굴 초입에는 글쓰기를 위해 예고 없는 방문객은 출입을 삼가해 달라는 호소를 담은 비석이 서 있다. 신소영 기자 |
오전에 집중된 작업 시간이 많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하루 평균 원고지 10장 정도의 집필 리듬을 유지한다. 1년이면 웬만한 단행본 서너 권 분량을 쓰는 셈이다. 사실 그는 1968년 등단 이후 햇수로 44년 동안 소설과 산문, 동화를 포함해 80권을 훌쩍 넘는 책을 펴낸 대표적인 ‘다산’(多産) 작가에 속한다. 지난해 <보리 닷 되>와 <피플 붓다> 두 장편을 내놓은 데 이어 올 3월에 또 하나의 장편 <항항포포>를 출간한 뒤 그로서는 꽤 오랫동안 새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숨을 고르고 있는 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마냥 쉬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지금 적어도 단행본 세 권 분량의 원고를 탈고했거나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다. 영산강 유역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탐사한 책이 올해 안에 나올 예정이고, 명창 임방울을 주인공 삼은 소설 초고를 끝냈으며, 녹두장군 전봉준이 관군에 체포된 때부터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당하기까지를 다룬 소설 역시 거의 탈고했다.
“저는 책 읽기와 글쓰기에 미쳐 버렸다고 치부하고 삽니다. 제 안에는 시꺼먼 득량만 도깨비가 살고 있어요. 그 도깨비한테 영혼을 저당잡힌 대가로 소설에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제 또래 작가 거의가 붓을 거두었는데도 제가 지금처럼 부지런히 쓸 수 있는 것도 다 그 도깨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득량만 도깨비가 그의 영혼만 저당잡은 것은 아닌 것이, 장흥은 유난히 많은 문인들을 배출한 고장이다. 작고한 이청준을 비롯해 소설가 송기숙과 이승우, 시인 위선환·김영남·이대흠 등 돌올한 이름들이 한국 현대문학의 빛나는 성좌를 이루고 있다. 이런 풍부한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장흥은 2008년 정부로부터 ‘문학관광기행특구’로 지정받았다. 장흥군은 해산토굴 바로 아래에 ‘한승원 문학관’을 건립해 연간 1500명 안팎에 이르는 방문객들을 수용하고 있다. 편백나무 향이 은은한 이 건물 강당에서 한승원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문학세계에 대해 강연을 하곤 한다.
그가 아침마다 걸음을 놓는 득량만 바닷가에는 그의 시들을 새긴 시비 30기가 늘어선 ‘한승원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짠물과 민물의 드나듦을 관리하는 수문이 있다고 해서 여닫이해변으로 불리는 이 바닷가 산책로 역시 군에서 만들었다. 비에 새긴 글 가운데 그의 토굴 살이 한 장면을 보여주는 <어등>(漁燈)을 옮겨 적는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서재에서 글을 쓰다가 체증 같은 가슴 답답함 때문에 아아, 다들 자는데 나 홀로 이렇게 살아 어쩌겠다는 것인가, 하고 심호흡하며 응접실 유리창 앞에 선다. 수묵 빛 밤안개 자욱한 바다에 떠 깜박거리는 주꾸미 잡이 배의 등불. 하나 둘 셋… 아홉 열 열하나 열둘 열셋 열다섯. 어느 꼭두새벽 바다에서 그물 줄 당기다가 쓰러진 머시기네 어메 하늘나라로 떠났는데. 그래 그렇다. 산다는 것은 저렇게 깜깜한 밤을 반딧불로 비추면서 무엇인가를 잡는 것이다.”
때로 체증 같은 답답함에 시달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살아 있는 한 글을 쓰고, 글을 쓰는 한 살아 있을 것”이라는 각오를 매 순간 다지곤 한다. 해산토굴 마당 한켠에는 난데없는 상석이 하나 놓여 있는데, 한승원은 그것이 자신의 묘라고 했다.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를 하다가 쓰러지듯 이 자리에서 글을 쓰다가 스러지겠노라는 다짐인 셈이다.
“저 아래 득량만 바다를 보세요. ㄷ자처럼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게 자궁 모양을 하고 있지요? 노자가 말한 곡신(谷神)입니다. 우주 시원의 자궁 또는 뿌리 말이지요. 해산토굴이 저한테는 바로 그 곡신이요 다른 말로 현빈(玄牝)입니다. 왜냐? 여기서 날마다 새 작품을 생산하고 있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