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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국 격투기 - CHINA MMA SHOWDOWN 원문보기 글쓴이: 질주
# 1
산타의 시초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 그리고 소련(러시아)와의 연합 산하로
1924년 광주시 황포구 장주도에 설립된 육군사관학교(황포군관학교)에서 중공군의
교과 과목으로 탄생했다. 발생년도에 대해서는 (1924~1927)사이로 추정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1924년 말부터 소련의 지원이 시작된것으로 기록되어있어
(1924 말~1925 초)로 보고있다.
이 당시 산타,산수라는 표현등이 쓰이기 이전의 각가지 표기법들인
(마수/섬타/백타/뇌퇴/박격/대타/단병) 등의 통일화 이전의 명칭들이 쓰인것
이외에 이 시점으로부터 10년전인 1914년 '마량'의 <중화 신 군사술> 을 살펴봐야한다.
(사진 : 곽원갑)
1909년 곽원갑은 정무체육회설립과 더불어 "강국강종" 의 표어아래
서방의 격투술을 가장먼저 흡수해서 융합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또한 서방의 격투선수들과의 교류역시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
1914년 <중화 신 군사술(중화 신 무술)>이 발간되면서 서방의 격투무술과
군사훈련의 형식을 조합한 교재로써 전파되었다. 이 부분은 중국 무술인들
조차도 서방의 기술들을 빌려왔다라고 인정하는 부분이기에 학설의 대립은 없다.
이 중화 신 무술서는 군사 교재로도 활용되었고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1915년 4월, "전국교육연합회" 제1회 회의에서 중국의 학교등지에 필수교과로
넣기위한 연구가 시작되고 교육부에서는 각 학교마다 무술 교육을위한
방침을 수여하고 정식으로 입헌되었다.
또한 상해(정무체육회) 설립을 시작으로 북경(체육연구사), 텐진(중화무술회), 청도(무사관)등의
4개의 회가 설립되고 이 당시 무술의 연구에 대한 박차를 가했던 시절이기도해서, 출시되었던 각종
서적들은 현재 중국에서도 귀중한 무술서로 인정되어 보관되고있다.
(사진 : 1915년 상해 광동 소학교 무술교육)
(사진 : 군사교육)
또한 솔교의 기법(레슬링) 과 권술(복싱) 그리고 구기종목의 학과를 추가시킨부분을
정무회의 역사에서 찾아 볼 수있듯이 기존의 구법들을 타파하고 신법을 적용하여
문자 그대로의 "新" 의 형태를 추구했다는것 또한 알 수있다.
최초의 국술국고 서막의 취지역시도 기존의 전통 무술과 서방체육의 결합의
연장선상으로써 시험은 불가피했기에 고시 형태로써, 일종의 실험이었다.
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 1924년 육군사관학교가 설립되면서
당시의 교관들로 하여금 기존 무도의 전통적인 방법의 학문에 근거해서
스포츠 의학과 훈련 방법론등을 병합시켜 일본에 대응하기위한 백병전의 우위 선점과
국토방위의 수호를 위한 현대식 투기로써 완성되었으며
소련의 군사고문단으로부터 사관 생도들을 훈련시켰고 이들은 군벌을 타도하는
주력부대가 되기도 하였다.
소련과의 연합형세로 인해 중화 신 군사술의 체계가 최종적으로 완성된것으로 본다면
소련의 가세로 더욱더 구체화 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깊게 봐야할 점은
1. (중화 신 무술을 기반으로 육군사관학교의 연구과정이 진행되었는가)
2. (독자적인 사관학교의 연구단계에서 소련의 도움이 날개를 달아준것인가)
3. (중화 신 무술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쳤는가)
☞ (기존 4구역에서만 국한 되었는가)
4. (당시의 중화 신 무술서의 내용의 진보는 어디까지였는가)
등의 여러가지 물음에따라서 또다른 설들을 파생시킬 수있다.
이 부분을 좀더 들여다보면 애초에 중화 신 무술화 작업은
'나라가 강대해 지기위해서는 모든 국민들이 무술을 연마하지않으면 안된다' 라는
슬로건 아래 전국민 체육운동을 강조하며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사진 : 1928년 국술국고 산타시합)
또한 이 중화 신 무술의 기반이 어느정도 선까지 갖추어 졌는지가 관건이지만
중화 신 무술의 본 취지가 "강국강종"이라면 육군사관학교의 취지는 "국토수호"를
염두해두고 연구해서 만들어진것이기에 체육을 위한 체계로써, 전쟁을 위한 체계로써
서로가 조금은 다른 개념으로 명시되어있다는 것에도 주의해볼 필요가 있을것이다.
중국은 소련과 전략적인 동맹을 형성하여 전폭적인 지원을
요구 받고있던 연합국의 형세였기에 당시의 육군사관학교는 군 인사부의 규율
정치적인 사상주입 그리고 군사적인 교육을 확립하는데 있어 소련의 방법등을 활용하였고
미하일 마코비치 보로딘 수장 이외에 많은 소련의 군 수뇌부들은 군사 요원의 해당 분야,
정치적 순화 교육 그리고 군사훈련을 돕기 위하여 중국으로부터 초빙되었다.
(사진 : 육군사관학교의 정문)
(사진 : 사관학교의 전경)
(사진 : 수업시간)
(사진 : 사관 생도들을 검열하는 장개석)
소련은 러 일 전쟁(1904~1905) 에서 크게 패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CQC: 근접거리에서의 백병전 기술) 을 발전시키려 노력했고 이것은 훗날에
소연방(CPSU)의 공산당 지도력하에 1917년 10월, 그들의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오늘날 "삼보"라 불리우는 군 격투술의 교육과정으로써 시초가 되었다.
중국보다 앞선 군 격투술의 선진국으로써 소련 고문관의 지도 아래, 중국군은
(CQC)를 기본 바탕으로 하는 소련의 군사 격투술과 유사한 방법을 창조하는것에 주력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중국의 산타 교육과정은 크게 4가지로 분류되었다.
1. (Striking) 권, 장, 팔꿈치, 손가락, 박치기
2. (Kicking) 차기, 밟기 ,무릎치기
3. (Throw) 레슬링
4. (Seizing) 서브미션
위의 네 과목들이 정식 교과로 들어가게 되었고, 인민 해방군을 시초로
현재 중국 공안들의 필수교과로 실무교육을 받고있으며 산타 교범으로
출시되는 서적에도 예전 그대로 방식이 이어져 오고있다.
현재의 공안부의 산타는 독자적인 클럽을 형성해 선수들을 양성하고 있다.
그 당시에 산타의 제작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프로젝트 단계에서 중국보다 한발 앞서
군대의 격투술을 전문화시키려 노력한 소련은 중국 사관학교의 주체로써
매니지먼트였고 연구 단계에 있어서 어드바이스를 해주었기에 여러가지 학설등을 조합해보면
"소련의 CQC를 기반으로한 오늘날의 삼보가 지금의 산타를 좌우했을 것이다" 라는 설 에 무게가 실린다.
여기서 또 한가지 이 설에대하여 유추해볼 수있는것은 위의 언급된 부분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가세 이전단계에 이미 정무회를 시발점으로 서방의 격투문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병합하여 (서방체육서)를 하나의 것으로 만들어 보급화했던 그 단계와 시점에 있어서 보충이
되었을지 아니면 여전히 단계를 거치는 작업안에서 날개를 달아주었을지는 미지수 이다.
아쉽게도 그 당시의 서방체육의 도입된 이후의 자료들을 찾을 수가없어 확실하게 답을 내리기가
어렵다.
또 하나의 대립은
"중국의 교관들중 뛰어난 이가 재구성하거나 흡수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그것은 새로운 개척이 되었을것이다. 러시아의 격투 기숙사 학교등지에도
이미 예전부터 산타를 하나의 과목으로써 채택해 가르치는 곳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다른 하나의 설로 무에타이와의 패전 이후 중국인들의
이미테이션 작업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한국에서 쉽게 볼 수있는 쿵후 VS 무에타이의 58년 자료에서의 글을 인용해 보았다.
한국에서는 "마스" 웹사이트에서 이 글이 번역본으로 공개되었다.
이 글이 배포됨으로써 시작이 된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작성자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저자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기에 이 저자를 단서로 설의 실마리를 풀어보려한다.
(사진 : 쿵후 VS 무에타이의 작성자 28세 싱가폴 청년 웨인)
『산수가 우슈에 존재하는 이유중 하나는 수많은 쿵푸 파이터들이
무에타이 전사들에 의해서 지난 수십년 간 패배해왔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의 산수는 아마추어 무에타이의 약해진 버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청년의 발언은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에 대한 의견 표출이기에 그의 의사를 존중한다.
다만 이 저자역시도 산타의 역사에 대해서는
"브루스 리(이소룡)의 절권도와 솔각(중국식 레슬링)을 결합해서 만들어진것이 산타이다"
라는 다른 설도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에 후자의 주장이 먼저 한국에 도달했었다면 지금의 굳어진
전자의 설처럼 후자의 주장도 지금처럼 한국에서의 다툼이 있었을지가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또한 그 당시 한국에서의 산타라고하는 것의 정보는 (중국 프로 태권도,킥복싱)등으로
불리웠다는것이 한계였다는것을 감안한다면 산타의 정보화 부족으로인해 당시 중국무술에
흥미를 가지고 있던 싱가폴 청년의 주장만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는것이 당시 시대상으론
어쩔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무에타이와의 대전후 패배한것을 시작으로 이미테이션 작업화에대한 싱가폴청년의
주장에대한 근거에 대해서 막연하게 "패배" 라고하는 하나의 단서만 제공되기때문에
이 설을 주장한 가장 시초의 인물이 이 청년이라면 그 주장에 대한
근거를 명시하지 않는 한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작은 근거들을 만들어가 추려보았다.
우선 1921년 쿵후 VS 무에타이의 역사적 첫 대항전을 살펴보면 그 당시
태국에 살던 중국계 화교들을 거론한다. 현재에도 태국에 거주하는 중국계
화교인들은 타이인 다음으로 가장 많은 인구분포도를 보여주고있다.
또한 태국에서는 총리조차도 화교일 정도로 화교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몇 되지않는
나라이면서 가장 잘 융합되어 살아가고있는 국가이다.
이 것을 기반으로 그 당시의 태국에서는 이미 화교인들에게 무에타이란 그렇게
생소하지않은 무술이었을것이다. 1920년대에도 이미 화교 무에타이인으로써 지도자가
존재했고 또한 중국계 화교인들은 13세기부터 존재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사진 : 1910~20년대의 무에타이 경기)
그 당시의 화교들은 중국을 남하하여 태국에서의 새로운 문화에 정착하면서 빠르게
자리를 잡아나갔고 그 이후로 그들과 동화되어 살아가면서 다시금 중국으로의
왕래가 혹은 교류가 있었느냐가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1922년 복건출신의 무술가 뢰철호를 데려온 태국화교"
의 부분과 1920년대 가장 왕성하게 상인들의 교역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중국과 태국을 왕래하는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는것을 알 수있다.
실제적으로 왕래가 어려웠던 시기는 40년 후반 ~50년 초반이었고
전쟁으로인한 고충기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파생될 수 있는 설을 나누어 보면
1. (당시의 중국계 화교 무에타이인들이 왕래하며 중국 무술인들과의 교섭이 있었는가)
2. (그 패배의 파급효과는 어느정도였는가)
3. (시합이후에 어떠한 피드백이 되었는가)
로 나누어 볼 수있는것이 다른설과 마찬가지로 현재적 추론의 한계이다.
하지만 무에타이와 쿵푸권사들의 경기에서 패전 이후 산타의 탄생비화를
대입시키기에는 시대상의 오류와 기술적인 큰 차이가 있다.
1924년 태국에서의 춘철행사 시합을 마지막으로 결투가 종료되었던 시점에서,
무에타이조차도 서양의 퀸즈베리규정을 따르기전의 불완전한 체계를
모두 카피해서 중국의 무도가들이 단시간에 시스템의
뼈대부터 살을 붙였다고 가정할 수있을까.
또한 그 당시 각가지 서브미션과 레슬링기술이 태국에 존재했다는것을
입증하는 자료는 없다. 이부분에 대해서는 제왕회관 무에타이 관장님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연구과정에서도 무에타이, 무아이보의 시대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안중에 소련의 지원으로 시작된 CQC시스템을 기반으로한 군사교육등이
이루어지면서 오늘날의 무장경찰과 해방군들의 기초교육이 되고있는
인민 해방군으로부터 출발한 컴뱃 산타의 시초로써 지원된 모든 일들은 전쟁을 앞둔 상황보다
패배한 쿵후권사들 몇명을 위한 복수로 무에타이를 이기기위한 대대적인
국가 프로젝트로 봐야 하는 것일까.
선택은 여러분들의 자유일것이다. 어떤것을 생각하든 그 입장을 존중한다.
다만 산타에 대한 이해를 먼저 총체적으로 알고난뒤에 문제를 접하게되면
한가지의 시각으로 보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좀더 이해를 돕기위해 설명을 덧붙여
국토방위를 위한 수단으로써의 뼈대의 구조는 무에타이와 같지만
무에타이 특유, 직선형의 날카롭고 강력한 4타 (펀치,킥,무릎,팔꿈치)가 주축이
된것과는 다르게
산타에서는 복선의 타격이 주축이 되고 사이드킥을 주로 다용하거나
타격보다도 솔교,솔각의 기법이 중요시 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문화의 차이'로 좁혀가는 것이 이해가 쉬울것이다.
일본의 예로 그 시대상에서의 전투는 일대일의 전투로 무사도정신을 추앙하는,
서로가 서로를 자칭한 싸움이 주가 되었다.
18세기, 함부로 검을 사용할 수 없게 법이라는 것이 적용됨에따라 검에서 손으로
바뀌는 호신술, 즉 유술이라는 것이 이 시기에 더욱 발달되어 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중국같은 큰 대륙에서는 집단에서의 전투가 주력시 되었기에
병기의 세부적인 분화가 일찍이 이루어졌고 근접에서 타격보다도 상대를 거친 땅바닥에
내던지는 것을 더 효율적이라고 보았다.
상대를 조르거나 꺽을경우 뒤에서 칼로 혹은 (어떤것으로든)당할 수있는 확율이 많다고
생각을 했기때문에 중국의 금나(관절기)의 비의존성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병장기들과
솔교의 기법을 더욱더 효율적으로 강구해서 발전시켰다는것을 알 수있다.
(사진 : 1907년 강도관의 가노 고지로와 그의 제자들)
또한 생활상의 문화적 차이에 있어서도 일본식의 다다미문화, 의류 문화,
무릎을 꿇는 정좌의 문화가 일본유술의 큰 범주안에 속해있다고 일컬어질만큼
정좌자세로부터 상대를 무너뜨리거나 혹은 넘긴뒤에 굳히는것이
한 동작으로 이루어져 파생하고 있는 유술은 이런 정좌자세에서도 공격하여
쓰러뜨릴 수있는 필승패턴의 개념을 확고히 가지고 있었다.
상대를 눕힌뒤 굳히고 조이는 것이야 말로 더없는 최강의 기술이라고
생각을 했던것이고 일본의 무술가들도 일본식 다다미 문화가 유술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한다. 반면 중국은 의자의 문화인 만큼
정좌는 죄인이 앉게하는 자세이고 무릎을 꿇는 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옛부터 의자라고 하는 물건을 사용했고 원래의 민족 습관으로부터의
배경으로 기법이 고안 되어간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또한 일본과는 달리 단단한 흙이나 돌계층같은 곳에 던지고 쓰러뜨리면 그만큼
데미지는 크게 적용되며, 그렇게 쓰러진 상대를 누르거나 조이거나
꺽기보다는 선채로 밟아 타격하는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보았고
또한 인간의 전투본능은 타격이라는 생각을 했기때문에 솔교의 기법안에서도
솔타(던지고 치고 차는) 현대의 산타의 룰과 흡사한 개념이 먼저 뿌리를 내린것이다.
일본이 넘어뜨리고 굳히는것을 최고의 근접전투술로 보았다면 중국은 상대를 던져
땅으로 내치는것을 가장 최고의 근접 기술로 보았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 역사의 흐름을 이어오면서 현재의 솔교 경기들도 입식에서의
그래플링이 주가되고 그라운드는 대부분 적용되지 않는다.
비단 솔교의 경기뿐만 아니라 산타의 경기중에서도
연타 (3회이상 콤비네이션의 금지) 와 (안면의 연타금지)가 존재했었기에
사실상 솔교의 기법에 의존되어 현재의 경기등에도 영향을 주게되었다. (타격3 / 솔교7의 비율)
현대의 산타만을 비교대상으로 보기에는 각기 다른 지역에서
문파별로 파생 되어온 개성과 스타일이 다르게 진보되어 여러종의 많은 산타가
분포 되어있기에 어느하나만을 가지고 비교하는것은 부족할 것이다.
또한 각 나라마다 문화와 시대성의 차이, 그리고 역사의 흐름속에 전쟁의 과도기등을
겪어오면서 조그마한것들이 하나씩 모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것을
알 수있다.
(사진 : 프랑스의 격투기 사바테)
프랑스의 국기 격투기인 사바테가 슈즈를 신고 경기를 진행하는 이유중 하나에도
전쟁이라고하는 역사적인 흐름안에서 당시 군인들의 부츠 앞 모서리에 나이프를 꼽아
격투술을 숙지해 적을 상대했던 전례가 있었다는것을 알 수있기 때문이다.
(2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