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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보 네리 성인은 1515년 이탈리아의 중부 도시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때 사업가의 꿈을 꾸었으나 수도 생활을 바라며 로마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젊은이들을 위한 활동을 많이 펼친 필립보 네리는 서른여섯 살에 사제가 되어 영성 지도자와 고해 신부로 활동하면서 많은 이에게 존경을 받았다. 동료 사제들과 함께 오라토리오 수도회를 설립한 그는 1595년 선종하였고, 1622년 시성되었다.
입당송 로마 5,5; 8,11 참조
우리 안에 사시는 성령이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셨네. 알렐루야.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께 충실한 종들을 성덕의 영광으로 끊임없이 들어 높이시니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복된 필립보의 마음을 신비롭게 채우신 그 성령의 불꽃으로
저희 마음도 불타오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예수는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25,13ㄴ-21
그 무렵 13 아그리파스 임금과 베르니케가 카이사리아에 도착하여
페스투스에게 인사하였다.
14 그들이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내자
페스투스가 바오로의 사건을 꺼내어 임금에게 이야기하였다.
“펠릭스가 버려두고 간 수인이 하나 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갔더니 수석 사제들과 유다인들의 원로들이
그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면서 유죄 판결을 요청하였습니다.
16 그러나 나는 고발을 당한 자가 고발한 자와 대면하여
고발 내용에 관한 변호의 기회를 가지기도 전에
사람을 내주는 것은 로마인들의 관례가 아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17 그래서 그들이 이곳으로 함께 오자,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다음 날로 재판정에 앉아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18 그런데 고발한 자들이 그를 둘러섰지만
내가 짐작한 범법 사실은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19 바오로와 다투는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와 관련되고,
또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
20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 몰라서,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
그곳에서 이 사건에 관하여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21 바오로는 그대로 갇혀 있다가 폐하의 판결을 받겠다고 상소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황제께 보낼 때까지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시편 103(102),1-2.11-12.19와 20ㄱㄴㄹ(◎ 19ㄱ)
◎ 주님은 당신 어좌를 하늘에 세우셨네.
또는
◎ 알렐루야.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
○ 주님은 당신 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당신 왕권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네.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의 모든 천사들아, 그분 말씀을 따르는 힘센 용사들아. ◎
복음 환호송요한 14,26
◎ 알렐루야.
○ 성령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시리라.
◎ 알렐루야.
복음<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15-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필리 4,4-9)와 복음(요한 17,20-26)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 기도
주님,
찬미의 제사를 주님께 봉헌하며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도 복된 필립보를 본받아 언제나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기꺼이 이웃에게 봉사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또는>
<주님 승천 감사송 1 : 승천의 신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광의 임금님이신 주 예수님께서는 죄와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로서
(오늘) 천사들이 우러러보는 가운데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으며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 세상의 심판자,
하늘과 땅의 주님이 되셨나이다.
저희 머리요 으뜸으로 앞서가심은
비천한 인간의 신분을 떠나시려 함이 아니라
당신 지체인 저희도 희망을 안고 뒤따르게 하심이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5,9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거룩한 잔치에서 천상 진미로 저희를 기르시니
저희가 복된 필립보를 본받아
참생명을 주는 이 양식을 언제나 갈망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다시 예전 삶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는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 물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 부르신 것은 부르심 때와 이번뿐입니다(1,42; 21,15-17 참조). 베드로가 당신을 뜨거운 마음으로 따라나서던 그 첫 순간을 기억하기 바라셨나 봅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26,33) 하며 믿음을 과시하던 일이 떠올라서였을까요? 담담한 그의 대답은 지난날의 교만에 대한 후회가 엿보입니다.
세 번째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그분을 세 번이나 배신한 자신에게 깊은 원망과 슬픔을 느꼈을 테지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주님의 손에 맡겨 드립니다. 세 번이나 사랑을 서약하고 새롭게 태어나 이제 제힘만으로 당신을 따를 수 없음을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목자의 사명을 맡기시고 당신 뒤를 따르는 ‘수난과 영광의 길’을 예고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의 살해 위협과(사도 25,3 참조) 모함 속에도 마지막 증언과 순교를 위하여 로마로 향하는 바오로의 모습은(제1독서 참조), 베드로에게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불편한 일상에 끌려다니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베드로처럼 우리의 사랑을 주님께 아룁시다. 마음의 상처와 불편함을 딛고 증언과 순교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한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자신 있게 답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어서 베드로에게 사명이 주어집니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이 같은 대화는 세 차례 반복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서는 흔히 아가페의 사랑을 뜻하는 ‘아가파오’(사랑하다) 동사가 쓰이는데, 베드로의 응답에서는 우애 또는 인간적 친밀함과 더 연결되는 ‘필레오’(사랑하다, 좋아하다, 친구가 되다) 동사가 쓰인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에서는 예수님께서도 ‘필레오’로 물으시고, 베드로는 여전히 같은 단어로 응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눈높이를 맞추신 듯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를 향한 사랑과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이렇게 다른가 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베드로의 사랑 고백으로 연결되고, 이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베드로에게 주어진 사명, 곧 ‘예수님의 어린양들을 잘 돌보는 것’에 이어집니다. 이처럼 주님에 대한 사랑은 주님의 양들인 형제들을 보살피고 섬기며 그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데에서 완성됩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형제들에 대한 사랑과 연결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결코 나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가장 완전히 드러납니다. 베드로도,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아프리카 우간다의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도 그것을 몸소 증언하였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시어 살아 계시는 예수님과 언제나 함께 있음을 깨닫는다면, 세상의 미움과 박해, 시련과 고통, 그리고 죽음까지 그 어떠한 것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기신 구원자이시며 주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될 것입니다.(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주님께서 ‘베드로를 특별한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신 것은 그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반석이 되라는 사명에 대한 확증’이며,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주님의 파견 사명으로 베드로는 교회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고 하십니다(『나자렛 예수』 1권 참조).
사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사제품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양들을 돌보시고자 “나의 양을 사랑하겠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점입니다. 사목의 대상을 사랑하는 데 필요한 것은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 ‘주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연결이 없다면,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양을 돌보되 “삯꾼”(요한 10,12)에 지나지 않으며 “착한 목자”(요한 10,11)는 될 수 없습니다.
사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라는 사실은 사목자뿐 아니라 교우들에게도 해당합니다. 성당에 다니는 이유가 ‘주님을 믿으려고’라고 말하면서, 주님보다는 성직자나 수도자 또는 신자들을 보고 쉽게 낙담하거나 슬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따르다가도 뒤돌아 섰다가 회개하며 다시 주님께 돌아오기를 반복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어보셨듯이 우리에게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까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주님을, 주님만을 사랑하고 바라보는 것도 하느님의 은총입니다.(신우식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십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세 번이나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것에 대한 앙갚음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앙갚음하셨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신 배경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사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시자 베드로가 슬퍼하였다는 것은, 자신이 부인하였던 사실을 떠올리며 회개하였음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사랑을 의심하셨다기보다는, 당신을 향한 사랑을 굳건하게 하시며, 확고한 다짐을 받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서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시고 나면 베드로가 대신 당신 양들의 목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목자 없이 남겨질 어린양들에게 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양들을 바라보고, 양들의 얼굴에서 주님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어야,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양들을 돌보는 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양들을 돌보는 일은 단순히 성직자나 수도자들만의 몫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를 앞세우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주님의 양들을 돌보라고, 우리를 공동체에 그리고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굳건히 하고 주님의 양을 돌보려고 떠나는 그런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사랑한다.”라는 고백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가족이나 연인 사이에도 계속해서 사랑을 고백해야 하고, 애정 표현을 주고받은 만큼 그 사랑은 더욱 커지며, 또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로부터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을 받으면, 그 의미가 다릅니다. 한두 차례 사랑을 확인하는 차원에서는 기분 좋은 일이겠지만, 그 이상 반복되면, 이 질문은 사랑에 대해 의심하는 것이거나, 정반대로 그 사랑이 의미하는 차원 높은 책임을 다지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을 넘어서는 행동과 그에 맞갖은 책임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그만큼 당신의 양들을 돌보는 그의 책임이 크고 막중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당연히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이고, 이후에 교회를 책임지며 천국 문을 여는 열쇠를 맡게 될 사람이므로, 예수님에 대한 더 큰 사랑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사랑은 너무나 미약하기만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질문에 세 번이나 사랑한다고 대답하지만, 이 세 번의 대답은 오히려 이전에 있었던 세 번의 배반을 떠올리게 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소명이 자기의 사랑이나 업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이런 보잘것없는 사랑이 오히려 나의 미약한 신앙에 큰 위로가 됩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 복음은 베드로 사도와 예수님의 특별한 관계를 드러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 사도는 다른 사도들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도록 요청받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베드로 사도는 ‘예’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교회의 어린양들, 곧 신자들을 돌보라고 하십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두 번 더 하시면서 교회의 양들, 곧 주교와 신부들을 돌보도록 당부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한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당신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에게 지극한 사랑을 드러내시며 그 잘못을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더 큰 사명을 주십니다.
스승을 배반하고 자책감에 빠진 한 인간에게 애정을 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이 애정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내면 깊은 곳에 당신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키신 것처럼, 우리가 잘못하여 실망하고 낙담할 때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신 착한 목자의 사랑은 우리 모두에게 한없이 주어지는 아버지의 선물입니다.
‘양치기’는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사랑, 곧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분을 통해 보여 주신 사랑으로 신자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한 사랑을 지니지 못한 목자는 ‘이리’에 불과합니다.
새 사제였을 때 우연히 동창 신부들에게 다음과 같은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가장 보람된 것은 무엇인가?’ ‘사제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인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미사 봉헌 때, 신자들이 강론을 마음 깊이 새길 때, 교리를 가르칠 때, 고해성사를 줄 때 ……. 그런데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는 두 번째 질문에도 앞의 대답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나약한 인간임에도 미사를 드린다는 것, 강론을 매일같이 준비해야 한다는 것, 교리를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것, 두세 시간씩 앉아서 고해성사를 주는 것 등이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가장 보람된 것이 가장 힘든 것이고, 또한 가장 힘든 것이 가장 보람된 것이라는 사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인지 그렇지 않는 일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떤 일이든 보람과 수고가 다 함께 따른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그렇지 않는 것인지가 중요하다. 사제의 본질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데가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데에 있다.’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년에 자신의 뜻보다는 예수님의 뜻을 더 중히 여겨, 다른 이들에게 끌려가 당한 온갖 수난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세 번이나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을까요? 베드로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의 고백을 세 번씩이나 듣고 싶어 하신 이유는 무엇인지요?
어떤 이는 대답하기를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배반을 했기 때문에 다시 세 번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여 그것을 되갚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지나간 잘못을 꼭 짚고 넘어가시는 분 같지는 않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눈물을 흘릴 때 인간의 나약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그 순간 이미 그의 잘못은 기억도 하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보다도 예수님의 양들을 향한 사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게 하시는 것은, 베드로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새기시려는 것입니다. 그것의 목적은 바로 예수님 당신 양들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양들을 잘 돌볼 수 없습니다. 그 양들은 ‘자신들의 양 떼’가 아니라 ‘예수님의 양 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돌보아야 할 양 떼는 사목자에게는 본당 신자들이지만, 일반 신자들에게는 신앙적으로 좀 더 못한 처지의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빈 마음으로 주님의 양 떼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사랑’을 다짐하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길 잃은 양’과 같은 당신의 백성을 이토록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목자의 마음으로 세상에서 주님의 양들을 사랑하고 돌볼 때 비로소 베드로의 고백은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몸의 구조는 보통, 음식을 오전에는 몸 밖으로 내어 보내고, 오후에는 섭취하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갈수록 섭취가 많아지는 현실입니다. 자연히 배설에 신경 쓰는 사회로 바뀌고 있습니다. 배설을 잘해야 몸도 건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지 않은 것을 버릴수록 견실해지고, 끊을수록 강인해집니다.
‘상투스’(sanctus)는 라틴 말로 ‘거룩하다’라는 뜻입니다. 어원은 ‘끊다’라는 동사입니다. 끊고 절제해야 거룩해진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나무를 분재하는 곳을 가 보면, 연한 가지를 철사로 묶어 두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제멋대로 자라는 것을 막는 것이지요. 절제된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십니다. 그만큼 사랑이 어렵다는 가르침입니다. 스승님께서는 베드로를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격정적인 성격을 잘 아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성격을 죽이라는 당부입니다. 맡겨진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삶’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원하지 않는 곳으로도 가야 한다.’ 베드로의 삶이 그렇게 바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이 들면 누구나 자기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 삶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노년이 됩니다.
사랑으로 받아 준다는 것은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착하고 편안한 사람을 받아 주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까다롭고 귀찮은 사람을 애정으로 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지도자의 참모습은 그때 드러납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질문하실 때마다 주님께서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입니다. 베드로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내 자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단체를 맡고 있는 사람은 ‘주님 사랑’을 어떤 형태로든 지녀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단체를 맡고 있더라도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합니다. 날카로운 지적은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대하는 마음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힘들어하는 분이 계십니다. 고인이 계속 생각나면서 지금 함께하지 못함이 너무 슬프다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세상에 홀로 버려졌다는 생각에 생활 자체가 점점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혼자일 때 편안한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받았을까요? 대부분 남을 통해 받습니다. 그래서 생(生)의 철학자라는 호칭을 받는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원래 오직 자기 자신과 완전히 융화할 수 있다. 친구와도 애인과도 완전히 융화될 수는 없다. 개성이나 기분이 다르다는 사소한 차이 때문에 언제나 불협화음이 일어난다. 그 때문에 진정한 평화이자 완전한 내면의 평정, 즉 건강 다음으로 이 지상에서 가장 중요한 재화는 고독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으며, 철저한 은둔 상태에서만 지속적인 평정을 가질 수 있다.”
함께하지 못함 자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 함께해도 불행하다고 말할 사람입니다. 혼자라는 상태에서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만이 함께일 때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처지가 갑자기 180도 바뀔 수 있을까요? 그렇게 바뀌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허황한 망상가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지금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변화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혼자 있는 고독이 두렵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지금을 행복의 길로 연결해주는 순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모두 다락방에 숨어서 벌벌 떨었습니다. 예수님의 부재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첫 마디가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묻습니다. 그리고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나를 따라라.” 였습니다. 언제나 함께하시는 주님이지만, 직접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지금을 받아들이면서 행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지금의 내 모습이 행복을 만듭니다. 어떤 특별한 상황이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의 내 모습을 어린양을 돌보는 사랑의 삶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결국 남는 건 사랑이야. 다른 이야기들은 희미해지고 흩어지더라(정세랑).
오늘을 철저히 살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겠나이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재활용 물품을 가지러 갔을 때였습니다. 저와 다른 형제가 트럭을 몰고 갔습니다. 저는 아파트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열심히 건진 물건들을 나르고 있는데, 그 형제는 식곤증이 몰려왔는지, 신나게 떠들다가, 세상 편한 얼굴로 남의 집 거실에 누워 세상 편히 자고 있었습니다. 코까지 골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씩씩대는 제가 영과 지혜로 충만하신 자매님께서 충격적인 말씀을 제게 해 주셨습니다.
“저 신부님이 신부님보다 훨씬 하늘나라에 가까이 계시네요.”
오늘 우리는 기쁨의 사도 필립보 네리(1515-1595) 신부님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필립보는 필립비서 4장 4절을 평생에 걸친 좌우명으로 삼으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얼마나 마음이 관대하고 착하던지 당시 로마시민으로서 필립보 부오노(Fillippo Buono-선량한 필립보)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답니다.
필립보의 탁월한 인품과 쾌활한 성격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게 했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그를 죽기 살기로 좋아하고 따랐답니다. 그는 오랜 세월을 아이들과 어울려 정신없이 놀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많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정신이 하나도 없는 필립보에게 물었습니다.
“아이들이 잠시도 쉬지 않고 이렇게 지독하게 떠들어 대는데 괜찮습니까?”필립보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아닙니다. 아이들이 죄만 짓지 않는다면 제 등 위에서 장작을 패도 괜찮습니다.”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여 사제가 되기에 충분한 지적 능력과 자격을 갖춘 필립보였지만 겸손한 마음에 사제의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 후 13년간 평신도 사도로서 기도와 사도직에 적극 뛰어들었습니다.
영적으로 탁월했고, 덕스러웠던 필립보를 눈여겨본 고해 사제는 그에게 늦었지만 사제의 길을 가도록 권했습니다. 1551년 36세의 나이에 사제로 서품된 필립보는 사제가 된 후에도 언제나 겸손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했습니다. 뛰어난 유머감각으로 사람들에게 늘 기쁨을 선사했습니다.
이렇게 영성적이고 친절한 사람, 재미있으면서도 깊이가 있는 사람이었던 필립보였기에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들끓었습니다. 필리보는 당대 지위고하, 남녀를 불문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레오 11세 교황님께서는 필립보와 이야기하는 것을 생의 가장 큰 낙으로 삼으셨답니다. 클레멘스 13세 교황님이나 그레고리오 14세 교황님께서는 필립보로부터 받은 가르침과 교훈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셨습니다. 가롤로 보로메오와 이냐시오 성인도 필립보와 친밀한 우정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임종 직전 병상에 누운 필립보는 벽에 걸린 십자고상을 손짓하며 이렇게 말하곤 했답니다.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저처럼 고통을 참으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이 미천한 저는 이런 호화스러운 자리 위에서 친절한 사람들의 간호를 받으며 쉬고 있습니다. 얼마나 염치없는 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것을 원하는 사람은 진정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오늘을 철저히 살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겠나이다.”
반려동물 사랑의 위험성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 양 떼를 잘 돌보라고 하십니다. 양은 인간보다 낮은 수준의 동물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양은 잡아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양들을 아무렇게나 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중해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에덴 동산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이 만드신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라 하신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듭니다. 우리가 사랑을 증가 시키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인간을 먼저 사랑하려 노력하는 것이 맞을까요, 아니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려는 것이 옳을까요?
요한 사도는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도 사랑하게 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순서는 언제나 하느님 사랑이 먼저입니다. 요한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라고 하고 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1요한 4,21)라고도 합니다. 곧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사랑의 지름길이라기보다는 하느님 사랑의 증거로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부모를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나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며 누군가를 사랑하려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야 이웃을 사랑하게 되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이웃을 존중하지 못합니다.
리오나 헬름슬리(Leona Helmsley)는 압제적인 보스로서 악명 높은 미국 여성 사업가였습니다. 그녀는 연방 소득세 탈세 및 기타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비열한 여왕”으로 불렸습니다. 그녀는 자기 손자 둘에게는 한 푼도 유산을 주지 않았음에도 자기 반려견 트러블에게는 140억 원을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그녀가 말년에 외로울 때 자신을 위로해 고마운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요즘 반려견에 대한 인기가 매우 높습니다. 호텔도 반려견을 데리고 있을 수 있는 방을 따로 만들어야 장사가 될 정도입니다. 그리고 반려동물을 위해 소비하는 돈의 액수도 엄청납니다. 반려동물을 키우면 자녀에게도 정신적으로 도움이 되고 또 여러 이유로 이득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녀를 낳지 않으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반려동물에 집착하는 것을 보면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리오나 헬름슬리는 세금을 내지 않아서 감옥을 들락거려야 했고 자기 사람들에게는 매우 가혹하게 행동했습니다. 조금의 실수를 하더라도 바로 직원을 해고하였고 직장을 잃고 싶지 않다면 엎드려서 구걸하라고 시켰습니다. 작업을 끝낸 인부들에게 일을 마음에 안 들게 했다고 대금을 내지 않았고, 이 외에도 가족에게도 가혹했다고 합니다.
반려견에게는 그렇게 잘하면서 가족이나 사람들에게는 왜 그렇게 매몰찰까요? 어쩔 수 없습니다. 부모를 사랑해야 형제들이 반려동물보다 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들의 가치가 반려동물보다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리오나 헬름슬리는 16세에 학교를 가만두고 독립하여 자신의 이름을 몇 번이고 바꾸었습니다. 부모에 대해 알려진 바는 얼마 없지만 부모가 준 이름을 바꾸려 한 것은 부모와 인연을 끊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형제도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엔 더 심해져서 손주들보다 개가 더 사랑스럽게 된 것입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로, 어떤 사람은 반려동물에게는 한 달에 100만 원 이상을 쓰면서 형제가 홀어머니를 모시는데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한 푼도 보태주지 않습니다. 어머니보다 개가 더 소중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녀를 낳기보다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반려동물을 키우고 사랑하는 이들로서는 화가 날 말 같지만, 자칫 우리가 사람에게 신경 쓰는 것보다 동물에게 더 신경 쓰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의 자녀들은 인간들입니다. 단돈 몇 푼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음을 알면서도 반려동물에게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면 당연히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아끼시는 인간을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쏟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은 반려동물을 키우고 또 가장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어쩌면 이것이 당신을 사랑하면 당신 양 떼를 잘 돌보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상관없이 살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