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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17일 목요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제1독서 : 묵시 5,1-10
복 음 : 루카 19,41-44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42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은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쓸데없는 생각은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키 작은 자기 모습에 늘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키가 작고, 친척들도 키 큰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키 큰 것이 정상일까요? 키 작은 것이 정상일까요?
‘왜 키가 크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이 사람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스스로 변화될 수 있는 생각이 필요합니다.
미래의 자기 모습을 희망하며 지금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생각이란 말과 행동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제가 입고 있는 수단에는 많은 단추가 있습니다. 총 22개의 단추를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단추를 잘못 채우면 어떻게 될까요?
맨 마지막에 하나가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채웠던 단추를 모두 풀어서 다시 처음부터 잘 채워야 합니다.
생각 역시 말과 행동을 하기 전이 첫 번째 단추를 채우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이 잘한 생각일까요?
말과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생각이 아닌,
제대로 된 특히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도성을 보고 우십니다.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단순히 성전의 웅장한 규모에 감탄하셔서 우신 것일까요?
아니면 슬픔을 가져다주는 어떤 특별한 상황이 있었던 것일까요?
성전이 아닌 당신을 향한 유다인의 모습을 보시고 우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구원의 왕이고 평화를 가져다줄 임금이십니다.
그러나 유다인은 이런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구원의 역사에서 구원의 때를 알아보지 못하고,
구원을 가져다주는 그들의 왕을 배척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된 것입니다.
이런 도시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잘못된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구원의 길로 가지 못하는 자녀들의 모습이 너무나 아쉬웠던 것입니다.
말과 행동의 첫 번째 단추인 ‘생각’을 제대로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도록
쓸데없는 생각이 아닌, 제대로 된 생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더는 주님께 슬픔을 드리는 우리가 아닌,
이제는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찬미의 여정
-슬픔은 기쁨의 찬미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은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입니다.
그날 성인들의 행적은 꼭 챙겨보고 싶습니다. 똑같은 성인은 없습니다.
각자 고유한 삶의 제자리에서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 사랑과 믿음에 항구했던 성인들입니다.
기념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 성인의 될 것을 바라는 주님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좌표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삶의 허무와 무의미에 대한 답이 바로 성인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성인답게 살아가는 것이 참된, 진정 살아있는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영원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는 성인들입니다.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가 아닌 어떻게 참으로 살았느냐가 관건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녀 엘리사벳은 고작 만 24세 살았습니다.
성인들의 축일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生沒 연대를 살펴보며 꼭 제 나이와 비교해 보곤 합니다.
저는 무려 성녀보다 세 배 이상을 살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비교가 더욱 분발하여 살게 하는 동기가 됩니다.
엘리사벳 성녀의 생애를 대략 읽어보니 참으로 기구하고 불우한 삶이었습니다.
공주로 태어났지만, 고작 4세 어린 나이에 정략결혼으로 튀링겐의 궁정으로 보내졌고,
결혼하기로 되어 있던 헤르만이 죽자 헤르만 1세는 둘째 아들 루드비히와 약혼시켰고,
헤르만1세가 죽자 왕에 즉위한 루드비히는 성녀 엘리사벳과 결혼하니
이때 신랑의 나이는 21살, 성녀의 나이는 14살입니다.
이어 남편인 루드비히가 십자군에 가담하여 출정했다가 전염병으로 죽자,
성녀의 두 자녀는 다른 곳으로 보내지고
성녀는 자신의 유산인 헤센의 마르무르크 성에서 쫓겨납니다.
성녀는 그동안 작은형제회 독일의 첫 회원인 로데거의 영적지도를 받다가
이제부터는 콘라트의 영적지도를 받으면서 작은형제회의 제3 회원이 됩니다.
그 이후 성녀의 삶에 대한 감동적인 묘사입니다.
‘성녀는 유산을 정리하여 프란치스코의 자선병원을 세우고
스스로 병든자, 특히 가장 혐오스러운 병에 걸린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성녀는 콘라트의 영적지도를 받으며 성덕을 위한 자아 포기의 길에 헌신하였고,
누구나 놀랄 정도로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살았으며 깊은 사랑으로 모든 이들을 감싸 주었다.
성녀는 선종 4년 전 자신을 쫓아냈던 시동생으로부터 마르부르크 성으로 돌아갈 허가를 받았고,
자신의 아들에게도 백작을 승계시킬 수 있었다.’
새삼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삶에서 하느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읽습니다.
성녀 엘리사벳은 독일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성녀가 되었고,
불과 24년밖에 살지 못하고 1231년 11월17일 마르부르크에서 선종했지만,
오늘날 작은형제회 재속 제3 회원의 수호성인으로 높은 공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선종 다음 해 성녀의 영적지도 신부였던 콘라트는
자신이 쓴 편지에서 성녀의 영적 풍요로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이 여인만큼 관상에 깊이 젖어 들어간 이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수사들과 수녀들이 여러 번 목격했듯이 그녀가 기도의 은밀함에서 나올 때
그 얼굴은 광채로 빛났고 그 눈에서 태양 같은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성녀는 선종 후 자신이 세운 성 프란치스코 병원 성당에 묻혔고,
그의 무덤을 찾는 순례자가 늘어나고 무덤에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면서
성녀에 대한 시성 절차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선종 4년 후 1235년 5월 28일 성령강림 대축일에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성녀를 성대히 성인품에 올립니다.
참으로 기구하고 불우한 환경에서도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 헌신했던 성녀를
하느님께서도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새삼 성녀의 기구하고 불우했던 파란만장의 삶을 공부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인생임을, 결코 절망하여 자포자기 해서는 안 되는 인생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미와 감사의 삶뿐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 행복기도 중 한 단락을 다시 나눕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 중에
주님을 만나니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파스카의 하루이옵니다.”
그대로 엘리사벳 성녀의 삶도 이러했을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찬미의 수도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찬미의 삶이 어둠을 빛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꿔 파스카 신비의 삶을 살게 합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찬미의 여정입니다.
주님을 찬미할 때 슬픔은 기쁨의 찬미로 바뀝니다.
성서에서 ‘웃었다’, ‘울었다’라는 말마디는 찾아보기 어려운데
울었다는 표현이 오늘 복음과 독서에 나오니 참 반갑습니다.
오늘 묵시록에서 요한은 일곱 번 봉인된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보기에 합당하다고 인정된 이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슬피 울었고 이어지는 천상 원로의 위로입니다.
“울지 마라.
보라,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받으시자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는 엎드려 새노래를 부릅니다.
“어린양”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가 되시었으니
그대로 파스카의 신비가 실현된 것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새노래는 우리가 평생 매주 화요일 저녁 성무일도 때마다 바치는 찬미가입니다.
“당신은 두루마리를 받으실 자격이 있사옵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나이다.
당신은 죽음을 당하셨고, 당신 피로 값을 치루어,
모든 민족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셔서 하느님께 바치셨나이다.
당신은 우리로 하여금 한 왕국을 이루어,
우리 하느님을 섬기는 제관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는 땅 위에서 다스리나이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권능과 부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자격이 있나이다.”(묵시5,9-10)
강론을 쓰면서 이렇게 묵시록 찬미가를 깊이 공부하기는 생전 처음입니다.
이 새 노래보다 파스카의 신비를 잘 요약한 찬미가도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이런 파스카 어린양의 미사은총이
우리를 찬미의 사람으로, 기쁨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새삼 미사 시 어린양이신 주님 성체를 모시기 전
다음 사제의 초대 말씀이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보라, 천주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참으로 이색적입니다.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며 우시는 예수님입니다.
도대체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웃음이나 울음은 볼 수 없었는데
여기서 유일하게 예수님의 울음을 만납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에서는 애제자 요한이 슬피 울었는데,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크게 우시며 탄식하듯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아,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이어지는 예루살렘이 초토화될 재난의 예고입니다.
바로 재난의 원인을 복음 말미에서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의인화된 예루살렘이 상징하는바,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오늘 지금 바로 여기서부터 슬픔으로 울으시는 주님께서 기쁨으로 웃으시도록,
평화의 주님을 모시고,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의 주님을 모시고 우
리 모두 찬미와 감사의 삶을, 영적승리의 파스카 신비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화답송 후렴 시편 149장 ‘기뻐하라 이스라엘’ 첫 구절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노래하라, 새로운 노래.
성도들의 모임에 그 찬송 울리어라.”(시편149,1).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예전에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피라미드, 만리장성, 콜로세움, 마추피추, 소피아 성당, 페트라, 공중정원’과 같은 것들입니다.
저는 공중정원은 못 보았지만 다른 것들은 볼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건축물들입니다.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사람의 힘으로 세웠다는 점에서 놀라운 건축물입니다.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무덤을 만들면서 많은 일자리를 창출했다고 합니다.
만리장성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책입니다.
만리장성은 이민족의 침입을 막아내는 성이 되었습니다.
콜로세움은 로마의 시민들을 위한 경기장입니다.
그곳에서 검투사들의 대결이 있었고, 신앙인들이 순교로 신앙을 증거 했습니다.
마추피추는 산 위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놀라운 건축 기술을 볼 수 있습니다.
소피아 성당은 지금은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지만,
가톨릭으로 개종한 로마의 황제가 세운 동방교회의 성당입니다.
페트라는 신전인데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배경으로 나와서 유명해졌습니다.
공중정원은 사막에 세워진 정원입니다. 기록은 있지만 유물로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인류의 지성과 문화가 어우러져서 만든 건축물들입니다.
요즘 우리는 독서에서 ‘요한 묵시록’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묵시록은 다른 성경과는 달리 상징과 숫자가 많이 등장합니다.
요한묵시록은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서 무서운 심판의 책이 되기도 하고,
새로운 희망을 기다리는 책이 되기도 합니다.
요한묵시록은 사이비 종교들에 의해 이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은 요한묵시록이 어떤 책이고, 쓰여진 목적은 무엇인지
한재호 신부님의 강의를 중심으로 함께 알아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알려주신 계시’(묵시 1,1)가 요한묵시록인데,
그 계시의 내용이 마치 재앙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요한묵시록은 무서운 심판과도 같은 일들을 묘사하고 있고,
또 그 일들이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하니 두려운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요한묵시록은 축복의 책이기도 합니다.
요한묵시록 전체에서 ‘행복합니다(makarios)’라는 말이
일곱 번 나오는 것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1,3; 14,13; 16,15; 19,9; 20,6; 22,7; 22,14).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요한묵시록의 저자는 이 책이 ‘재앙의 책’이 아니라
축복으로 가득한 ‘행복의 책’임을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는 이들에게는 이 책이 축복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맞서 대적하려는 이들에게는 이 책의 내용이 심판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느님을 충실히 믿고 따르려는 마음만 있다면 요한묵시록을 두고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레사케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성경은 종말에 관해서 상징적으로 언급한다는 사실을 오늘날 성서학계에서는 밝혀냈다.
성경은 최종 미래를 미리 알고 알리는 점쟁이가 아니다.
종말에 관한 말은 시간상으로 역사의 종말에 관해서 정보를 제공한다고 할 수 없다.
종말 언사는 현실적인 체험에서 나온 것이니, 곧 현재의 체험을 최종 미래에로 투사한 것이다.”
이 말을 쉽게 표현하면 요한묵시록 역시 상징적인 여러 표현을 통해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묵시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던져주는 의미가 상당히 큽니다.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듯 보이는 오늘날 세계 속에서
수많은 신앙인들이 유혹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무력하게 보이시는 하느님, 악이 자행되는 상황을 보고도
모른체하시는 것만 같은 하느님을 항구하게 믿기란 쉽지 않습니다.
요한묵시록 안에 담긴 묵시주의적 메시지는
이런 우리에게 신앙의 새로운 눈과 결단력 있는 용기를 지니게 합니다.
요한묵시록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첫째, 세상을 살다 보면 하느님께서 무력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이다.
둘째,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관점과는 다르게 세상과 역사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그래서 지금 당장에는 고난과 죽음의 연속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지상의 권력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고, 따라서 박해도 사라지게 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 하느님께서 지니신 관점 안에서 세상과 역사를 보면
그분이야말로 참된 주권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결정적인 때에 하느님께서는 이를 드러내실 것이고 그때가 바로 역사의 종말이 오는 때다.
물론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주권이 하느님께 있기에 현실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새롭게 해야 한다.
미래에 대한 더 큰 통찰이 있을 때 현재를 살아가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처럼
묵시주의는 하느님의 관점으로, 역사의 마지막이라는 시점으로 현재를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러한 초대에 우리가 진지하게 임할 때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신앙적 자세를 보다 올바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요한묵시록을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일어난
세상의 종말에 대해 정보를 일러주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박해를 받는 신자들에게 머나먼 미래에 벌어질 일에 대한 정보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요한묵시록은 당시의 신자들에게 박해의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며,
그 메시지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점차 심해지는 박해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기 시작하고 신앙적인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신자들은 하느님이 도대체 계시는지,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보고만 계시는지 물음을 던졌던 것입니다.
로마의 평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화(팍스 크리스티아나)!’가 우리가 외쳐야 할 구호라고 전합니다.
그리하여 로마의 군사력과 경제력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분께서 보여주신 희생적인 사랑에 순종하라고 권고합니다.
이러한 삶은 잠시 시련을 주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감수해야 할 테지만,
결국 하느님께서 최종적인 승리를 일으키시는 분임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친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요한묵시록이 당시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메시지입니다.
(더 자세한 것은 굿뉴스 성경자료실 요한묵시록 둘러보기를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있다면 세상의 종말도
우리를 하느님과 맺어진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있다면 지금 이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실을 모르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눈물을 닦아드리자.
반영억 라파엘 신부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비시는 분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며 청한다고 하지만 그분은 우리 모두의 구원을 바라고 계시며
그 범주에서 벗어날 것을 염려해 우리를 위해 빌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바라시는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뜻 안에 머물지 않고 있으니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십니다.
부모가 자식을 염려하는 애끊는 바로 그 마음입니다.
예루살렘도성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아프셨습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길을 걸어야 할 사람들, 평화를 갈망해야 할 사람들이
그 본연의 것에는 관심이 없고, 적개심과 더불어 죽음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평화의 길을 걸었으면 좋으련만!
그들의 완고한 마음, 교만과 아집은 자신의 삶을 돌이킬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멸망의 길을 자초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라자로의 무덤에서(요한 11,35). 눈물을 보이셨고,
오늘, 불신앙 때문에 우셨고(루카19,41) 겟세마니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히브5,7) 우셨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완고함 때문에 우십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소리에 우십니다.
평화를 말하면서도 정작 평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잇속을 차리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자니 눈물이 납니다.
이기심으로 가득 차서 주님을 생각할 틈이 없으니 참된 평화는 영영 멀기만 합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먼저 마음의 무질서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해 주신다.”는 약속을 믿는 이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마음의 고요를 누립니다.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구애 없이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것을 기뻐합니다.
그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주님의 참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 평화를 일찍 알았더라면 그렇게 사사건건 마음의 혼돈을 가져오지는 않았을 텐데 ….
주님께 대한 믿음은 모든 것을 이겨내게 하고 또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미움은 미움을 낳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고
마침내 구원을 갈망하며, 구원을 살게 됩니다.
주님의 눈물을 씻게 됩니다.
참으로 올바르게 주님을 믿는 이에게는 참 평화가 있습니다.
참다운 평화는 예수님에게서만이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면 멸망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서 평화를 갈망합니다.
재물이나 명예, 건강, 외모, 자식 등이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전력투구하며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영원하지 않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합니다.
결국, 그것이 참 평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그것을 믿는 이는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찾지 말고 한 번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근본에로 돌아가서 믿음으로 주님의 눈물을 씻겨드리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주님의 눈에서 눈물을 그치게 해드리고
웃음꽃이 피게 할 수 있는 새 삶이 지금 여기서 시작되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네가 평화를 가져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신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참 행복에 대해 당신이 가르치신 것을 몸소 증언하신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마태 5,5)
그분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하셨다.
그분은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
그분은 “우리의 평화”이시며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신”(에페 2,14-15),
그래서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신 분이시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마태 5,10)
그분은 우리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분만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은 사람은 없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말씀하신 모든 참된 행복을 몸소 보여주셨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1)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신 것이다.
그분은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42절)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44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장차 일어날 일을 미리 내다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복음사가들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두고 하신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버릴 것이다.”(43-44절)
이 일은 말씀하신 지 40년 후 서기 70년에 그렇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루카 21,23-24)
또한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루카 21,20) 하셨다.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도 예루살렘과 똑같은 운명에 떨어지고 만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그분의 뜻을 실천하려 노력하여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를 당신의 사랑으로 초대하신다.
이 순간은 우리에게는 참으로 은총의 순간이 된다.
이 초대에 올바르게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본 모습이며,
그리스도를 맞이하고 그분을 닮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매 순간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그분께 문을 열어드려
우리에게 오실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시며 우시며 말씀하셨다.”(루카 19,41)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마치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범죄를 두고 울었던 것처럼(1열왕 8,11),
예레미아가 유다의 유배를 두고 세 번이나 울었던 것처럼(예레 9,1;13,17;14,17) 우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두고 전에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루카 13,34)하시고
탄식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또한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리아 앞에서도 우신 적이 있습니다(요한 11,3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식을 올리셨습니다.”(히브 5,7)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우는 사람들!”(마태 5,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 19,42) 하고 탄식하시며,
당신께서 우시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4)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지 못함에 대해 우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간다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에 가슴이 미어지셨습니다.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지만,
그들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당신과 ‘당신이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파괴에 대해서
세 번씩이나 예고(루카 19,43-44; 21,20-24; 23,28-31)하시고,
그것을 종말을 예시하는 역사적 심판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예수님의 울음과 말씀은 단순한 탄식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적 경고요, 회개의 결단의 촉구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당신의 눈물로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도 세상을 보고 울 줄을 알고 아파할 줄을 알라는 것이요,
또한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으라는 말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2013년 람페두사 난민 방문미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함께 슬퍼하는 울음과 연민의 경험을 상실한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무관심의 세계화는 우리에게서 우는 능력을 빼앗아갔습니다.
... 누가 울고 있습니까?
누가 오늘 이 세상에서 울고 있습니까?”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의 뜻을 외면하여, 또다시 당신을 울리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드리고, 당신의 눈에 웃음을 꽃피워 드리게 하소서!
<오늘의 말 · 샘 기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고 우시며”(루카 19,41)
주님!
도시를 보고, 세상을 보고, 비난할 줄은 알아도 울 줄은 몰랐습니다.
세상의 아픔과 슬픔을 보고, 범죄와 불의를 보고, 울지도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무관심과 패배의식에 갇혀 당신의 뜻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안정과 편리를 도모하며 이기심과 타협했습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에 눈물을 주소서.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울 수 있는 사랑의 눈물을 주소서.
우는 이들과 함께 울며 당신의 눈물을 닦아드릴 수 있게 하소서.
아멘.
도미누스 플레빗(Dominus Flevit)
박상대 마르코 신부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금화를 맡긴 종들의 비유’ 말씀을 마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고 했다.(28절)
이로써 루카복음이 보도하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9,51-19,28)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활동기(19,29-24,53)가 시작될 것이고,
이로써 예수님의 공생활도 끝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는 聖都 예루살렘을 향한 성대한 入城과 함께 시작된다.(19,29-40)
우선 예루살렘 동쪽 올리브산 너머에 있는베파게와 베다니아 근처에 도착하신 예수께서는
나귀를 타고 제자들과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올리브산을 넘어
예루살렘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중턱에 이르러 행렬을 멈추셨다.
여기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예루살렘을 향한 불행을 예고하신다.
바로 이곳, 올리브산 정상에서 가파른 경사를 따라 키드론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예루살렘 聖都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에
‘도미누스 플레빗’(Dominus Flevit, 주님께서 우셨다!)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전 하나가 세워져 있다.
우리에게는 ‘눈물성전’으로 알려져 있다.
5세기부터 수도원이 있었던 이 자리에 세워진 ‘눈물성전’은
1955년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토니오 바루치가 설계하여 완공한 것으로서
성전 지붕을 눈물방울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실제로 성지순례를 가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코스를 걸어보면 萬感이 교차한다.
베파게에서 올리브 산 정상에 이르는 코스를 걸으면서 묵상하면
군중들의 열광적인 환호가 시끄럽게 들린다.
그러나 정상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도와 성전이 한눈에 들어오면
갑자기 고요해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비탈길을 내려와 눈물성전에 이르면, 당시 예수님의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되고 만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마태 21,1-9; 마르 11,10; 루카 19,29-40)과
성전정화 사건(마태 21,12-17; 마르 11,15-19; 루카 19,45-48; 요한 2,13-17) 사이에 삽입되어,
눈물과 한탄으로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내용의 오늘 복음은 루카만이 전하는 고유사료이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의 울음에 관한 보도는 모두 세 곳인데,
라자로의 죽음을 향한 울음(요한 11,35), 하느님께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심(히브 5,7),
그리고 오늘 복음의 예루살렘을 향한 울음이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42절)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비통한 눈물과 한탄은 그분의 착잡한 심정을 헤아리기에 충분하다.
아직도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하고 ‘요란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
그리고 그 성도를 대표하는 무리들.
예수를 반대하는 예루살렘 성도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메시아의 영광은 없다.
기적의 시간도 모두 끝이 났고, 평화의 날들도 모두 지나갔다.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때마저 놓치고 말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전쟁과 멸망과 심판이다.
실제로 기원후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은 로마제국의 군대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다.
울법에의 충성이 예수께 대한 믿음과 회개를 대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율법만능주의가 그 믿음을 방해하였다.
예수님의 비통한 눈물과 진정 평화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