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우리를 간곡하게 부르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아니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부르신다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다. 물론 거기에 대한 질문에는 일언반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에 대한 내용의 구절들이 성경 안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부르심에 대한 이유와 목적에 따른 행동요구사항을 올바르게 안다면 그 부르심에 합당한 행동을 하나님 앞에 보여줘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부르심에 합당한 행동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신앙생활 속에서 고난 받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분들이 꽤 많이 있다는 것이다.
부르심에 따른 반응으로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아야 하며 십자가를 또 다시 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죄인에서 의인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구원을 베푸신 것인데 구원의 효과가 나타나게 하는 것은 삶의 자리에서 구원의 능력이 줄줄 흐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구원의 능력이 넘쳐하는 것일까? 찬송가 구절처럼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가 많은 간증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주님께서 어떻게 해 주신 결과물에만 치중되어 있다면 아직도 미숙한 신앙상태라는 것이다. 부르심에 효과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연합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와 목적이 연합이며 순종의 능력도 연합의 결과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5장에“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라는 문장은 요한복음의 핵심적인 주제로서 어떤 상태가 되어야 만이 이렇게 되는 것일까를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절만 인용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연합의 뿌리는 에베소서 1장에 근거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은사가 난무한 고린도교회에서 성도들이 달라지지 않고 죄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오랫동안 고민해 왔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은사가 없거나 영성이 없어서 교회의 쇠퇴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한국교회가 과거 고린도교회와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은사가 넘쳐나고 영성이 뛰어났지만 썩어져가는 교회의 부패를 막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신학교 교수가 잘못 가르치거나 교과서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다. 전혀 체험이 없는 상태에서 이론만 강조하고 있는 것일 뿐, 연합의 지혜가 없다는 것이다.
부르심에 따른 완벽한 연합의 모습은 무엇일까? 연합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연합은 예수 믿을 때나 믿고 난 뒤에 이루어지기 위한 계획이 아니다. 처음부터 작정되어진 것으로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창세전에 예정되어졌다는 것은 우리 주님과 창세전부터 연합되어진 상태를 다시 회복하는 단계를 의미하고 있다.
1장을 다시 재론할 수 없지만 우리 주님과 함께 연합되어진 창세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현재의 순간에도 사건화가 되어 말씀이 육신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말씀이 외적인 현상에서 내적 현상에 이르기까지 성취되어진다는 것이다. 즉 주님과 연합이 되지 않고서는 말씀의 깨달음도 없지만 내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합이 이루어진 상태에서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되며 일부러 고난을 자초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다. 완벽한 연합은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의 형태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서 거한 척만 해가지고는 말씀의 줄기를 잡고 주님에게 아무리 졸라도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합되어진다는 것은 새사람이 된다는 것이며 생명이 나타난다는 것이고 빛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빛을 발하라는 말씀이나 세상의 빛이 되라는 말씀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의로운 삶이 추구하는 것인데 주님께로부터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상태가 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진정 주님께로부터 책망 받을 것이 없는가? 하면 그 어느 누구가 주님 앞에서 떳떳하게 고개를 쳐들고 다니겠는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에 확고하지 않으면 목표가 분명하지 않아 흔들리게 되며 중간에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 우리는 죄의 종이었다. 그러나 책망 받을 것이 전혀 없는 의로운 아들이 되었다. 여기서 아들로서 끝나는 부르심이라면 연합의 의미와 목적이 올바르게 반영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사야 54장 5절에 너를 지으신 이가 너희 남편이라. 예레미야 3장 14절에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의 남편임이라. 호세아 2장 19절과 20절에 너에게 장가들어 여호와를 알게 되리라고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신약에서는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된 우리를 혼인잔치에 초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
우리를 신부로서 부르신 이유와 목적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면 신분상승에 따른 기도의 자세가 달라지는 것이다.
종은 주인에게 요구하는 차원에서 비나이다식의 기도를 하게 되어 있으며 아들은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아야 만이 얻을 수 있는 차원이다. 그러나 신부는 신랑이고 남편에게 허락이나 요구하지 않아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즉 남편과 함께 함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세와 권한을 누리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신부라는 단어를 찾으면서 과연 내가 신부로서 택정함을 입었는지 신부로서 단장을 받을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는지 살핀다면 얼마나 감격과 감동의 물결이 일어날 것인지 그 많은 신부감 중에 내가 택함을 받는다는 사실에 믿기지 않을 것이다.
신부는 사랑의 영성보다는 연합의 영성이 강하다. 따라서 신부로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해당이 된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차이점을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기름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은 많은 분들이 일반적으로 성령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종으로서 우리를 부르시기도 하지만 아들로서 부르시는 것도 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신부가 되어달라는 부르심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이다.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고 있지만 어떤 음성을 듣기를 원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현 상황에서 모면하기 위한 음성만을 듣고자 한다면 너무나 철이 없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주님에게 요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 요구한다면 얼마나 응답받기 어려운지 알고 있는가? 많은 신앙인들이 기도 응답을 받으려고 안간 힘을 써보고 있지만 아주 쉽게 응답받을 수 있는 방법과 비결을 모르기 때문에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틀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간다.
거부할 수 없는 부르심에 얼마나 순종할 수 있는지 여기에 즉각 대답할 때가 왔다. 이제 우리들은 주님께서 부르심에 따른 행동에 어떻게 반응해야 되는지 결단과 맹세할 시기가 도달했다. 마태복음 25장에 등을 준비했다는 것은 지금도 흔히 불교에서 연등행사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빛이 담긴 등은 진리의 빛이 내게 임했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임한 것, 즉 주님의 임재하심에 따라 신랑 되신 남편을 영접하기 위한 행동과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그 말씀이 등 안에서 계속 타기를 원한다면 내 안에서 작용하기 위해서 말씀을 제대로 공부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모르면 다른 곳에 가서 사 와야 할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런 말씀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여러 곳에 다니면서 구해오고 있다 자기에게 맡긴 양떼들에게 먹이려고 사실은 자기가 먼저 먹고 있는 셈이다. 사 가지고 왔는데 오랫동안 보관할 수 없어 상해버리고 유통기한이 넘어서 사용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신부로서 단장하는 삶의 비밀을 알게 되면 보관과 유통기한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신부로 부르심을 받게 되면 삶을 극복해 나가는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지 저주가 해결되는 능력이 어디서 오는지 깨달았다면 주님의 부르심에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제 성경을 신부로서 신부의 입장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왜 요한계시록에서 신부가 등장하는지 그것이 미래에 대한 예언의 책이 아니라 현재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해야 되는 아주 귀중한 책이라면 요한계시록도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아니 모든 성경이 읽혀지는 안목이 달라지게 될 것이다. 신부로서 단장하며 준비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