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이 쇠를 먹었다
쇠는 흙이 되었다
아니, 흙이 쇠가 되었다
옷이 살을 뚫고 들어가 몸이 되었다
흙이 된 쇠는
통일 신라 때의 철제 검劍이다
붉은 녹이 덮인
두꺼운 유리 안의 철제 검,
녹으로도 검이었음을 당당하게 말해주는
시간은
얼마나 무서운 쇠락을 견딘 것이냐
저 녹 덩어리를 누구도 검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한다
검은 사라지고 검 아닌 것이 검을 이루고 있다
ㅡ시집<<삼베옷을 입은 자화상>>(문학과지성사)
---------------------------------
'저 녹 덩어리를 누구도 검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게 할 만큼 강력하게 검을 참칭하도록 하는 그힘의 배후는 도대체 무엇인가? 한때는 검이었던, 지금은 두꺼운 유리 안에 안치된 채 붉게 녹슨 검의 미이라인가? '통일 신라 때의 철제 검'이라고 쓰여있는 박물관의 안내표지인가? 흙에 가까워진, 실은 검의 형상일 뿐인 흙도 쇠도 아닌 것에 대한 보는 자의 관념인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쇠락(衰落)을 혼신의 힘으로 견뎌온 저 검의 시간인가?
박물관에 안치된 검은 기능이라는 구체를 상실한 관념으로서의 검이다. 그 검은 스스로가 검임으로써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검으로 기능할 때의 시간을 증언하기 위해서 놓여있기 때문이며, 무엇을 베기 위한 검이 아니라 보여지기 위한 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를 부끄럼 없이 당당하게 드러내는 까닭은 쇠락을 견뎌낸 자의 녹슬지 않은 정신과 통일 신라보다 더 크고 넓은 서사(혹은 역사)를 칼 속에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흙이 가는 길이 있고, 쇠가 가는 길이 있다. 그 두 갈래의 길 사이를 시간이 왕래한다. 이 시는 흙이 가는 길은 자연이고 쇠가 가는 길은 문명이라는, 흙의 길은 생명이고 쇠의 길은 죽음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구도로 이 둘의 관계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근본주의에 입각하여 이 둘이 하나의 처음을 공유했다는 이유로 섣부른 통합을 선언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 시는 그 둘이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헤어지는가를,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의 위의를 지키며 유지하는가를 시간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풍화와 견딤이라는 스펙트럼으로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