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2일 묵상 본문 : 이사야 11장 1절 – 9절 – 주의 나라에서 누리는 참 평안과 소망을 누리며 간직하게 하소서
시작 기도
주님 주말 아침을 시작합니다.
크리스마스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크리스마스는 산타의 날이 된 것 같습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이 형식적인 멘트가 되어버린 느낌이네요.
오늘도 먼저 주님 앞에 내 죄와 허물을 고백합니다.
부정함의 모습과 세상적 즐거움을 찾으려 했던 어리석음을 고백합니다.
주의 보혈로 정결하게 씻어 주시고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얻게 하옵소서.
주와 더욱 가까이 교제하며 나아가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함께 하시고 은혜로 인도하실 주님을 기대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본문 해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본문을 통해 보여준다.
먼저 다윗이 아닌 이새의 줄기를 통해 오실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다윗이 아닌 이새를 가리킨 것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인물이 될 것을 보여주며 메시야로서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줄기의 의미는 나무의 줄기가 아닌 나무가 베어져 넘어지고 남은 나무의 밑등, 즉 그루터기를 의미한다.
생명의 기운을 찾아 볼 수 없는 비참한 형편과 완전한 파멸과 멸망의 상황을 상징한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 상황이 이런 비참함과 멸망의 상황이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한 가지가 나와서 결실할 것이며 열매를 맺을 것을 선포한다.
오실 그리스도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데 지혜와 모략과 재능과 지식, 그리고 여호와을 경외하는 모습으로 드러날 것을 보여준다.
그는 공의로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구별할 것을 예언한다.
세상은 부정과 불의로 진리를 가리지만 그리스도는 진리로 부정과 불의를 심판하신다.
그리스도의 통치로 인한 왕국의 모습은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는 모습이다.
이는 강자나 포식자과 사라지고 완전한 평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곳에서는 해함과 상함도 없고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을 선포한다.
나의 묵상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다보면 어린 시절 불렀던 찬송이 생각난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사마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면 사막이 꽃동산 되리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함께 뒹구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 평안과 소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그리스도의 등장과 그 모습에 있어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등장을 알지 못한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모습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다윗이 아닌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다는 것은 왕과 같은 임재가 아닌 베들레헴 목동의 모습과 같음을 보여준다.
또한 거목이 아닌 완전한 죽음과 같은 그루터기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본문에 나타난 가지는 원어로 “네체르”이다.
이것은 후에 나사렛이라는 단어의 기원으로 해석된다.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이 된 이유를 마태는 이새의 가지(네체르-마2:23)에서 찾아 해석했다.
이 네체르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않았던 이유를 드러내준다.
나사렛은 작은 동네였으며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것이 없는 동네였다.
메시야의 능력을 담을 만한 도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목받지 못했고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았다.
철저히 말씀의 의미 그대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세상의 길은 누구나 눈으로 확인가능하며 가는 사람들이 많아 쉽게 인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분별해야 한다. 그래서 쉽게 찾지 못한다.
하나님의 길은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주목받는 길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쉽게 발견하여 걸어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왕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으며 예수님이 오신 때가 로마의 압제 속에서 나라가 망하고 절망적인 상황이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나라는 세상에 보여 지는 나라가 아닌 하늘의 성소와 나라에게 이루어지는 모습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약 2천 년 전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고 또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에 대한 약속을 주님은 말씀하시면서 재림시의 모습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24장 37절부터 4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신다.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오늘날 성탄절을 맞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노아의 시대와 같은 모습을 발견한다.
또 진정한 성탄절의 주인인 그리스도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고 오히려 외면 받는 모습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기대와 소망은 사라지고 세상 나라의 부요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모습에서 주의 임하심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때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주의 메시지를 기억하는 것이다.
깨어 있음은 주의 음성을 듣고 주를 바라보는 눈이 감기지 않음을 의미한다.
주의 말씀을 통해 주와 교제하며 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삶의 모습을 도전한다.
그리고 주님 오심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바라보는 시선을 놓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얻는 유익은 완전한 평화이며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한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를 지금 현재 주와 교제하는 자들이 누리고 있으며 주 안에 거함으로 지속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깨어 있는 신앙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삶을 통해 주의 나라에서 누리는 평화를 맛보며 주님 오심을 준비하는 자로 설 수 있기를 기도한다.
묵상 기도
주님 오늘도 주의 은혜 가운데 주님 오심을 기대하며 소망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의 나라에서 누리는 참 평안이 주와 말씀으로 교제하는 가운데 이루어짐을 고백합니다.
그 고백이 날마다 이루어지게 하시고 더욱 주를 소망하며 주님 오심을 준비하게 하옵소서.
이미 오신 주님,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시며 깨어 있는 신앙을 촉구하고 계심을 기억하게 하시고 주님 안에서 누리는 영생의 기쁨으로 준비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님 안에 살아가게 하시고 무지가 아닌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한 은혜를 누리는 자 되게 하옵소서.
함께 하실 주님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