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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21일 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제1독서 : 즈카 2,14-17
복 음 : 마태 12,46-50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고대 로마는 다신교였습니다.
하나의 신이 아닌 여러 신이 있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러 신 중에 부부 싸움의 수호신이 있습니다. 비리프라카 여신입니다.
부부 싸움을 하면, 비리프라카 여신을 모시는 사당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한 번에 한 사람씩 차례로 여신에게 호소해야 합니다.
어느 한쪽이 여신에게 호소하는 동안
다른 한쪽은 잠자코 듣고만 있어야 하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다 보면 상대방의 주장도 일리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풀이하면서 호소하는 동안 흥분했던 감정이 조금씩 가라앉고,
결국 여신을 찬양하면서 둘이 사이좋게 사당을 나온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누군가와 다툴 때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기보다 자기 이야기하기에 더 바빴던 것이 아닐까요?
내 말을 통해 상대의 이해를 바라기보다,
상대의 말을 통해 상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말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말을 듣는 것입니다.
서로 자기 말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말만을 통해서 어떤 화합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대신 상대의 말을 잘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하고 함께할 수 있는 여지가 늘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함께 사는 비결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나를 버리고 상대의 입장에 서는 것.’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하였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단순히 봉헌만으로 성모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께서는 봉헌을 자기 삶으로 더 거룩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율법학자들은 마귀 들린 자라고 떠들곤 했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돌게 됩니다.
그 소문을 들은 성모님과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당시에는 자기 가문에서 사회적으로 비웃음을 당하는 사람이
나온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성모님과 친척들이 서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특별한 분이시고, 하느님께 봉헌되신 분이었습니다.
이런 분이 예수님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끌고 집으로 갔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다가 찾았을 때도 마음에 간직하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내 이웃과의 관계는 어떠하십니까?
나를 버리고 상대의 입장에 서서 마음 안에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참가족
-늘 새로운 봉헌, 예수님 중심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거룩하신 어머니, 찬미받으소서.
당신은 하늘과 땅을 영원히 다스리시는 임금님을 낳으셨도다.”(입당송)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자헌에 대한 이야기는
주로 약 200년경에 쓰여진 외경 야고보 원복음서의 기록을 기초로 하는데,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요아킴과 안나는 오랫동안 자식을 낳지 못하던 자신들에게
딸을 준 하느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에서 봉헌하기로 합니다.
그리하여 그녀가 3세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께 바칩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자헌 축일은
543년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명령으로
과거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것 근처에 비자티움 양식으로 건축된
성마리아 대성당의 축성식에서 유래합니다.
서방에서는 1585년 교황 식스토 5세가 이 축일을 다시 기념하는 것을 허용하였고,
1597년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이 축일을 2등급 축일로 제정하였으며,
1969년 로마 전례력에서 그대로 남아 기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새삼 우리의 봉헌의 삶을 묵상하게 됩니다.
늘 새로운 봉헌을 통해 예수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참가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례 받아 예수님의 참가족이 된 우리들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혈연가족이 아니라 부르심에 따라 예수님 중심으로 이뤄진 예수님의 참가족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말씀은 공동체 일치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중심의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입니다.
성격이, 마음이, 취향이, 성향이 같아서 공동체의 일치가 아니라
바라보는 중심의 방향이 같기에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이런 일치는 고정불변의 완성된 공동체가 아니라
평생 완성을 향해가는 미완의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평생 공동전례 활동을 통해 늘 봉헌을 새로이 함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제1독서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은
바로 우리 예수님의 참가족을 이루는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딸 시온이 상징하는바, 내 몸 담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 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그날은 바로 오늘입니다.
바로 즈키르야의 예언은 오늘 복음을 통해서,
그리고 오늘의 우리를 통해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하는 봉헌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예수님 중심의 한가족 공동체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혈연가정공동체만으로 부족합니다.
이에 더하여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로 업그레이드되어야 온전한 공동체입니다.
이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물보다 진한 게 피이고 피보다 진하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 게 하느님 믿음이다.”
유산문제 등 돈의 마력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혈연가정공동체는 얼마나 많은지요!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견고한 믿음이 있을 때 돈의 유혹을 넘어설 수 있겠기에
경각심을 주기 위해 이런 말마디를 사용합니다.
자녀들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믿음임을 절감합니다.
오늘 복음 장면은 그대로 예수님 중심으로 한가족을 이룬 제자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과 주고받는 내용이 이를 분명히 합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그러자 곧장 예수님의 답변이 뒤따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공동체 일치의 원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예수님 중심의 삶에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수행자로서의 삶입니다.
날마다 마음 깊이 주님께 나를 봉헌함으로
늘 주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하며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삶입니다.
알렐루야 복음 환호송도 이와 일치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다.”
한결같이 주님 중심의 한몸 공동체 삶에 충실하고 항구할 때
참 행복이요 기쁘고 즐거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의 봉헌을 새롭게 하면서
주님 중심으로 공동체의 일치를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영원하신 아버지의 아들을 잉태하신 동정 마리아의 모태는 복되시나이다.”(영성체송).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불교에서는 ‘인드라망’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법이 하나하나 별개의 구슬같이
아름다운 소질을 갖고 있으면서 그 개체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결코 그 하나는 다른 것들과 떨어져 전혀 다른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것 모두와 저 구슬들처럼 그 빛을 주고받으며
뗄 래야 뗄 수 없는 하나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연기적 세계관, 연기법의 진리를 화엄경에서는 인드라망이라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드라망의 비유는 세계를 구성하는 모두가 보석같이 참으로 귀한 존재이며
그 각각은 서로가 서로에게 빛과 생명을 주는 구조 속에서 더불어 존재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직선으로 보는 서양의 인식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순환으로 보는 동양의 인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는 개념입니다.
이런 비슷한 생각을 아메리카 원주민 추장인 시애틀이
미국의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시애틀은 땅을 팔라고 하는 미국의 대통령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반짝이는 개울물과 강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피와도 같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는 우리 조상의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 형제이며 우리 목을 축여 준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 자매이고, 사슴과 말과 큰 독수리는 우리 형제이다.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팔 수 있나?
우리는 땅의 일부분이며, 땅은 우리의 일부분이다."
결국 미국의 대통령은 땅을 샀지만,
원주민 추장의 숭고한 뜻을 받아들여서 도시의 이름을 ‘시애틀’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라는 영화도 있지만
시애틀이라는 도시가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는 것도 좋습니다.
인드라망처럼 우리의 만남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경험하곤 합니다.
제가 아는 분은 미국에 와서 서로 만났고 사랑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랑과 신부의 부친이 서로 친하게 지내는 친구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랑과 신부의 할아버지들도 서로 친하게 지내는 친구였다고 합니다.
어쩌면 할아버지들과 아버지들의 우정이 두 사람을 결혼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한인 성당으로 지난봄에 사순특강을 갔습니다.
신부님은 6월에 제가 있는 뉴욕으로 잠시 여행을 왔습니다.
이렇게 서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신부님 본당의 사목위원이 저와 함께 일하는 주방 자매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신부님이 뉴욕으로 오면 주방 자매님은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제가 노스캐롤라이나엘 가면 주방 자매님의 아들이 저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옛 어른들의 말씀이 맞습니다.
“착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이라도 행하고, 악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이라도 행하지 말라.”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인연으로 만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인드라망의 세계를 알고 계셨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인 시애틀의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인드라망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리고 아메리카 원주민 시애틀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전쟁, 폭력, 증오, 분노, 원망, 불평, 불만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것들이 그대로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겸손, 나눔, 친절, 온유, 절제, 사랑, 희망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것들이 그대로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철학, 문학, 종교, 신앙은 바로 우리를 인드라망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아메리카 원주민 시애틀의 마음처럼 살라는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 나라의 가족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잘났건 못났건, 경건한 사람이건 죄인이건 상관없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입을 수 있고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예수님의 행동은 오해를 사기도 했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가족과 친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이 들리자 그를 붙잡으려 나서기도 하였습니다(마르3,21).
예수님께서 의인과 죄인,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거나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섞이고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아파하는 곳에 사랑이신 그분이 계셨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도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12,48)고 반문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대한 기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가족은,
더 이상 혈연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 기반을 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결속시키는 데 초석이 되는 것은
혈연, 학연, 지연이나 좋은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설혹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비로소 그분의 참다운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아시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내 뜻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내려놓으려면 그분의 뜻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하고, 그 신뢰가 믿음이죠.
아버지의 뜻이 나에게서 이루어지도록 내 삶을 맡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7).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성모님의 삶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지닌 복된 분으로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속하십니다.
비록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분의 가족이 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해와 달은 생겨난 뒤로 하느님을 거역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 예수님의 참된 가족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은 서로가 형제자매입니다.
믿음으로 형성되는 새 가족의 품위를 지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축일은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에 세워진 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이 날,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충만히 내리신 성령의 감도로
성모님이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당신을 바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마리아가 세 살 되던 해에 성전에 봉헌하였는데,
세 살 된 마리아가 성전으로 올라갈 때, 계단에는 성모님의 발자국마다 장미가 피어났다고 한다.
오늘 복음에서 악마는 교활하게, 예수님의 육에 따른 친척들을 등장시킨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그 친척들에게 향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47절).
이 말은 인간에게서 태어난 이가 하느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말이며,
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어떻게 하늘에서 왔다고 하느냐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시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48절) 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49절) 하신다.
그분은 말씀을 따르는 이들을 가리키신다.
말씀을 실천하는 관계로 당신과 맺어진 이들에게 가족관계에 따른 모든 명칭을 붙인다.
당신의 말씀을 실천하며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신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50절)
신앙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바로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분의 어머니가 된다. 이것은 주님을 낳아,
듣는 이들의 마음에 그분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통해 이웃의 마음에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생겨나도록 하는 사람이 어머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셨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셨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육신이시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마음속에서 진리이시며, 마리아의 태중에서 육신이시다.
그분의 어머니이신 것은 그 진리를, 말씀을 실천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말씀을 실천하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리아를 닮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동정 마리아 자헌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된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곧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했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은 세 살 때
그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에 의해 하느님께 봉헌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문전박대 하십니다.
사실 마리아는 이와 같이 아들로부터 냉대당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 잃었던 아들을 성전에서 찾았을 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했을 때도 그러했고,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을 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하였을 때도 그랬습니다.
이는 마치 옷가지와 음식을 마련하여 찾아오는 어머니를
돌로 쫓았던 성철스님 이야기를 떠올려줍니다.
이는 참으로 불효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진리를 향한 결연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마태 12,48-50)
이 말씀은 언뜻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내치신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모님에 대한
외적인, 가시적인 이해를 뛰어넘도록 해줍니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육적인 혈연으로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당신의 첫 번째 가족이셨음을 드러내줍니다.
왜냐하면 어머니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고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실 때
바로 그렇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였습니다.
그렇게 성모님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여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러니 분명 성모님께서도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분으로서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께서는 아렸을 때부터 또한 아기를 잉태하는 순간부터
자신을 봉헌하고 또한 축성 받으셨습니다.
결국 성모님도 예수님도 다 같이 아버지께 봉헌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과 함께 하루하루를 아버지께 봉헌하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면서 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제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성모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를 향하여 있는지,
그분의 뜻을 실행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 공동체
박상대 마르코 신부
여러분이나 저나 할 것 없이 사람이면 누구나 부모에 의해 세상에 태어난다.
그래서 가정이 만들어지고 그 가정에 속하게 된다. 물론 소수의 예외가 있기는 하다.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가정은 사회와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터전이며, 가정없이는 국가도 인류도 없다.
가정이 중요하고 소중한 이유는 그 가정을 이루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
즉 바로 나 자신을 포함한 가정의 구성원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소중하면 너도 소중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기에
나의 가정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가정도 소중한 것이다.
이렇게 소중한 가정이 오늘날 소홀히 여겨지고
사소한 이유로 쪼개지며, 서로 반목하고 불목하며,
경제적 파탄이나 병고나 사고로 말미암아 심적 물적 고통을 겪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뿐만 아니라, 마치 모든 가정이 오직 나의 가정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식의
이기주의가 날로 팽배하고 있으며, 거치적거리고 뻔하다거나 미래가 없다는 이유로
“가정 만들기”를 기피하는 개인주의나 독신주의가 증가일로에 있다는 현실
또한 안타까움을 더하게 한다.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거룩하고 모범적인 가정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의 성가정이 더욱 그리워지는가 보다.
사람은 주구나 어느 한 가정에 소속되어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은 모두 함께 살아간다.
일찍 부모를 잃거나 피를 나눈 형제가 없는 혈혈단신이라 할지라도,
자식이 없어 봉양을 받지 못하는 독고의 노인이라 할지라도,
이 땅 위에 홀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며,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누구나 한 가정의 아이로 태어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어 또 다른 가정을 이루어야 하며, 그 속에서 노인이 되어 간다.
우리는 주어진 공간에서 함께 일하고, 매일 같은 사람을 만나고, 낯선 사람과 친분을 쌓으며,
이럴 줄 알았던 사람의 또 다른 저런 면을 체험하기도 한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주며, 속이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사람 때문에 기뻐하고, 사람 때문에 아파한다.
그러다가 삶의 실존과 진면목을 깨달을 때면 원하든 않든 하나씩 순서 없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뜻하지 않는 불의의 사고로 선뜻 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남아 있는 사람들의 아픔은 실로 크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며, 다 똑같다.
그런데 살아있는 동안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재물이 좀 있고, 권력이 좀 있다 하여, 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종교와 이념이 다르다하여 자신의 것을 강요하며,
타인의 생명과 삶을 가볍게 여겨 무참히 짓밟고 앗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 피붙이인 가족에게도 그럴 수 있을지 묻고 싶다.
사람의 기원을 따진다면 모든 사람은 다 같은 형제요 자매이며, 한 가족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요즘은 ‘지구가족공동체’, 또는 ‘글로벌가족공동체’라는 말을 하곤 한다.
이 때문에 건전한 재벌들이 평생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시키고, 뜻있는 곳에 기부금을 내며,
재력이 없는 사람은 자원봉사를 하는 것이다.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게서도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이 이루는 가정에서 태어나
30년 동안 가족공동체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때가 되자 예수께서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자기를 키워준 가족을 떠나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어떤 여인과 결혼을 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린 것은 아니다.
그분은 더 큰 인류가족공동체를 원하셨으며, 나아가 하느님나라의 가족공동체를 계획하셨다.
예수님은 하늘나라가 우리들이 사는 이 땅 위에 도래했다는 기쁜 소식을 사방에 전하면서
그 나라의 가족이 될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모으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분은 특히 가난하고 아파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돌보셨다.
어느날 예수께서 가파나움의 집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예수의 어머니와 그 형제들이 문밖에 서서 예수를 불러달라고 청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형제’라는 단어가 히브리 문화권에서 아주 폭넓게 사용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방계혈족의 2촌만을 형제라 하지 않고
조부, 증조부, 고조부 등 아버지와 1촌의 관계를 갖는 모든 혈족을
관계상 ‘형제’간이라 하는 경우와 같다.
그렇다면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왜 예수를 찾아와 보자고 하는 것일까?
오늘 복음은 마태오, 마르코, 루카 즉 공관복음 모두가 미소한 차이로 보도하고 있는 대목이다.
(마태 12,46-50; 마르3,31-35; 루카 8,19-21)
마르코는 예수가 악령에 들려 미쳤다는 소문이 나돌아
예수를 붙잡기 위해서 왔다(마르 3,20-30)고 이유를 대고 있지만,
마태오와 루카는 그 이유를 의도적으로 삭제하였다.
찾아온 이유야 어찌 되었든 마태오와 루카는 이 대목을 두고 다른 목적을 가진 게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둘러 있던 사람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이냐?”(33절)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이다.”(34절)
무슨 날벼락 같은 말씀인가?
이 말씀이 허공을 가르며 외쳐지던 순간, 어머니와 형제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은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나마 문밖에 서 있었다는 점이다.
‘피는 물보다도 진하다.’고 했는데, 낳아준 어머니와 같은 조상을 두고 함께 자란 형제들을 무시하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두고 어머니며, 형제들이라니.
정말 예수는 정신이 나간 사람인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예수님의 本意는 그 다음 말씀에 있다.
즉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35절)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새로운 가족관계를 선포하셨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예수의 형제자매요, 어머니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혈연적이고 세속적인 가족보다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족공동체를 택하신 것이다.
이 가족공동체는 ‘예수님의 말슴’을 그저 듣고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놓은 집합이 아니라,
예수님을 포함한 ‘하느님의 뜻’을 진실로 행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예수께서는 자기 스스로도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는 점을 자주 강조하셨다.
그래서 어머니 마리아의 등장이 더 큰 의미를 가진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자신마저도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면
우리는 물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 뜻을 좇아 행하신 분이시다.
유다인들은 자기들이 하느님의 뜻을 행한다고 믿고 있었지만,
예수께서 그들이 행하고 있는 것이, 당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지적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피로 맺어지는 혈연은 한 번으로 영원하지만, 예수께서는 이 가족관계를 허물어버리시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설정하셨다.
그 소속 기준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언제나 행하는 것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